퇴계집_언행록2_유편(類編)_가정생활 검약(儉約) 을 붙임
퇴계집_언행록2_유편(類編)
가정생활 검약(儉約) 을 붙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뜻에 순종해서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의 뜻하는 바가 높고 깨끗해서 세상과 합하지 않는 것을 살피고, 일찍이 말하기를,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궁하게 살았는데, 선생이 과거를 본 것도 사실은 그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마침 장인의 죄로 말미암아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선생은 항상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슬픔을 품고 있어서, 제자들의 이야기가 부모를 섬기는 일에 미치면 반드시 슬퍼하면서 자기를 죄인이라 일컬었다. -김성일-
벼슬이 6품에 오르면서부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요청했으나, 김안로의 방해로 마침내 한 고을도 얻지 못했으니, 평생에 원통한 일이었다. -이안도-
선생은 생일날 아침을 만날 때면 자제들이 술잔 올리는 것을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다섯째 형인 찰방공 이름은 징(澄) 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자제들과 제자들이 그것을 빙자하여 간단히 술상을 차리면, 또한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김부륜-
가법은 매우 엄하고 집안은 화목하였다.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구차한 일가들을 구원하는 데 그 힘을 다했다. -정유일-
집안사람에게는 엄숙함으로써 다스리고 사랑으로써 기르며, 하인들에게는 은혜로써 어루만지고 위엄으로써 제어하며, 안팎과 위아래의 의복과 음식은 제각기 그 분에 맞도록 하였고, 자제들과 아이ㆍ어른을 가르치고 경계함은 제각기 그 자질에 따라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김부륜-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하였다. -집안 편지-
종들을 함부로 꾸짖는 일을 보지 못했으니, 만일 그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가만히 타이르기를,
하고는, 말이나 기색을 변한 일이 없었다. -우성전-
묻기를,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김성일-
혹시 찰방공이 집으로 찾아오면 문밖까지 나가 맞아들이면서 한자리에 차례를 따라 앉으며 부드럽고 조심하는 모양이 밖으로 풍기기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기게 하였다. -김성일-
찰방공이 문에 들어올 적에는 항상 선생에게 사양하였다. 선생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굽히고 서서 말하기를,
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하였다. 선생의 다섯 형 중에서 잠(潜)ㆍ하(河)ㆍ의()ㆍ대헌공(大憲公) 해(瀣)는 세상을 떠나고, 오직 찰방공만이 있었기 때문에 형님 한 분이라고 한 것이다. -김성일-
선생의 넷째 형인 대헌공(大憲公)이 갑산(甲山)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는데, 성을 나서자 세상을 떠났다. 성전(性傳)의 생가(生家) 아버지가 금오랑(金吾郞)으로서 대헌공을 호위하고 간 일이 있었다.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 선생이 성전의 생가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하고, 곧 흐느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갓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였다. 우성전의 생가 아버지의 이름은 언겸(彥謙)이다. 경술년(1550)에 금부 도사가 되어 대헌공을 귀양지로 압송하다가, 공의 장(杖) 맞은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중도에서 멈추고 좀 쉬면서 회복하게 하였다. 아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몇 번이나 간했으나 듣지 않아서, 거의 간사한 무리들의 해를 입을 뻔하였다. 그런데 마침 대헌공이 세상을 떠나 그 화를 면했는데, 그때 우성전의 생가 아버지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이었으며, 선생의 조상의 무덤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에 성주라 일컬은 것이다. -우성전-
묻기를,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하고, 이어서 또 이르기를,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세수할 때는 도기(陶器)를 썼고, 앉는 데는 부들자리를 썼다. 베옷을 입고 실띠를 맸으며 짚신을 신고 대지팡이를 짚어서 담박하였다. 계상(溪上) 집은 겨우 십여가(十餘架)로서, 심한 추위나 더위나 비에 남들은 견딜 수 없었지만,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영천 군수 허시(許時)가 한번은 지나다가 선생을 뵙고는,
하니, 선생은 천천히 말하기를,
하였다. -김성일-
농사나 누에 치는 잔일에도 때를 놓친 적이 없으며, 수입을 따져 지출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집은 본래 가난해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고, 온 집안은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이덕홍-
이덕홍의 조부(祖父)가 살던 천사(川沙)의 집은 사랑이 한 칸이라 손님을 대접하기도 어려웠다. 지붕은 띠로 이었고, 광헌(廣軒)은 널빤지였다. 선생은 매양 이것을 볼 때마다 그 검소함에 탄복하여, 한서암(寒栖菴)과 암서헌(巖栖軒)은 모두 그것을 본받은 것이었고, 옛집도 또한 이와 같았으니, 그 순박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함이 이와 같았다. 암서헌의 추녀를 요새 와서 기와로 바꾸었지만, 이는 선생의 본의가 아니었다 한다. 이덕홍의 조부 이현우(李賢佑)는 농암(聾巖)의 아우로서 천사(川沙)에 살았다. 선생의 시에 “그윽한 천사에 이장(李丈)이 산다.”라고 하였다. -이덕홍-
완락재(玩樂齋)를 새로 짓고는, 선생이 이덕홍을 보고 이르기를,
하였다. 서재는 높이가 8척, 넓이도 8척이었다. -이덕홍-
암서헌의 양면에 서가(書架)를 만들었는데, 유독 서쪽 면만 반쪽을 막고 그 가운데를 비워두었다. 묻기를,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금난수(琴蘭秀)-
신사년(1521, 중종16)에 부인 허씨(許氏)를 맞이하였다. 부인의 집은 자못 넉넉하였다. 선생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여가에 가끔 오가고 했었는데, 항상 여윈 말을 타고 다녔다. 부인의 집에는 비록 살진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을 탄 적이 없었다. -이안도-
선생이 서울에 계실 때 초헌(軺軒)을 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시하러 대궐에 들어가는 때에는, 말이 없으면 남에게 빌어 타기는 하였으나, 초헌을 탄 적은 없었다. -우성전-
부인 허씨의 논밭이 영천군(榮川郡)에 자못 많이 있었다. 계상(溪上)에는 겨우 변변하지 못한 밭 몇 마지기가 있을 뿐이었으나, 끝내 부인의 전장(田莊)에 가서 살지는 않았다. -김성일-
[주D-002]풍수(風樹) : 공자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객지에서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끊이지 않고, 자식이 보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아니하였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하였다.
[주D-003]설가(薛家)에 …… 장가들었고 : 송나라 구양수(歐陽脩)는 첫 부인 설씨(薛氏)가 죽은 뒤에, 다시 처제(妻弟)에게 장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