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2_유편(類編)
향리에서의 생활
선생은 시골에 있을 때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이 있으면 반드시 평민보다 앞서서 바쳐 한번도 늦어진 일이 없었다. 마을의 아전들도 선생의 집이 고관의 집인 줄 몰랐다. 선생이 언젠가 시냇가에 나와 앉았을 때, 마을의 아전들이 와서 말하기를,
“금년 잣나무 숲 감독은 진사 댁에서 맡아야 합니다.”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잣나무 숲이 시내의 동쪽에 있어서 선생의 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 까닭이었다. -김성일-
곽황(郭趪)이 선성(宣城 예안(禮安))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의 세금이나 부역에 대해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이 선생이 온 집안사람을 거느리고 남보다 먼저 바치니, 마을의 백성들이 선생의 의리를 두려워해서 서로 앞 다투어 바치면서 혹 뒤질까 두려워하므로, 한번도 독촉하지 않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그 아들 준을 경계한 편지에 이르기를,
“사람의 자제 된 자는 마땅히 삼가고 조심해서 법을 두려워함으로써 의무를 삼을 것이다. 그 곡식이 이미 관가의 곡식이 되었는데 그때 선생의 영천(榮川) 전장(田庄)에서 난 곡식을 관가에서 사채(私債)로 봉(封)해서 구황(救荒)에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임의로 취해서 쓴다면, 이 어찌 유교 가문의 자제로서 글을 읽어 의를 아는 사람의 일이라 하겠는가. 네가 만일 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뒷날 시골에서 행세할 때에 가는 곳마다 허물을 지을 것이니, 이 어찌 걱정이 아니겠는냐.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거듭 타일러 마지않는 이유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도산정사(陶山精舍) 밑에 어량(魚梁)이 있었는데 관가에서 고기잡는 것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사사로이 잡지 못했다. 선생은 여름만 되면 반드시 계사(溪舍)에서 지냈으나 한번도 그 곳에 간 적이 없었다. 조남명(曺南冥)이 이 말을 듣고 비웃기를,
“어찌 그리 소심한가. 내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관가에서 금한다고 한들 무엇을 혐의쩍게 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조남명이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나의 불가(不可)함으로써 유하혜(柳下惠)의 가(可)할 것을 배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하였다. -김성일-
선생의 누이의 아들 신홍조(辛弘祚)가 본현(本縣)에 송사를 건 일이 있었다. 선생은 그로 하여금 왕래도 하지 말고 편지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고을의 태수에게도 또한 그러하게 하였다. -이덕홍-
울타리 밑으로는 양민의 장정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덕홍-
시냇물을 10리 밖에서 끌어오는데, 물은 적고 물 댈 곳은 넓어서, 먼 곳은 가물어도 적셔줄 수 없어 두 해 거듭 수확을 못했다. 선생은 이를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내 논이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밭이 말라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저들은 논이 적셔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하고, 곧 그 논을 밭으로 만들었다. 그가 남의 사정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이덕홍-
그 고장에서 학업에 뜻을 가진 사람 가운데 품관(品官)의 반열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선생이 이것을 보고 이르기를,
“향당(鄕黨)은 부형과 종족이 있는 곳인데, 반열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가문의 지체가 낮은 사람이 윗자리에 있으니, 실로 우후(牛後)의 부끄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향당에서 귀히 여기는 것은 나이이거늘, 비록 아랫자리에 있다 한들 예나 의리에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김부필ㆍ김부의ㆍ김부륜과 금응협(琴應夾)ㆍ응훈(應壎)이 술병을 들고 와서 선생을 뵈었다. 선생은 고을 모임에서 귀천에 따라 나누는 잘못을 논하고, 다만 나이를 따라 좌석을 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김부필이 말하기를,
“고금(古今)이 다르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고금의 일을 끌어와서 날이 저물도록 변론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돌아가는 길에 시 한 수를 지어 선생에게 올렸는데,
선생은 상고를 논하는데 / 先生上古論
제자들은 말세를 말하네 / 弟子末世言
서원의 규모가 정해 있거늘 / 書院規模定
향회(鄕會)의 자리는 나누어 무엇하나 / 何須鄕坐分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대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만일 다른 사람에게 얽매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거든, 그 이치에 그다지 해롭지 않은 것을 살펴 따를 수는 있다. 오직 안으로 더욱 공부하여야 할 것이니, 만일 안으로 공부가 없이 갑자기 격이 높은 일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서 비방하게 될 것이다. 대개 한집안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이 사람이 처신하기 어려운 점이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일찍이 어른을 위해서 똥 오줌 받는 것은 내 부형이나 종족이라면 할 수 있겠지만, 내 부형이 아니라면 구태여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뒤에 생각해 보니, 비록 내 부형이 아니더라도 존경하는 예가 없을 수 없겠다 생각하였으니,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자네가 말한, 어른을 섬기는 예는 대체로 맞는 것이다. 무릇 군자는 내 부형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돈독히 해야 하는 것이니, 내 어버이를 높이어 남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내 어른을 공경하여 남의 어른에게까지 미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나이가 배가 되면 어버이로서 섬기고, 열 살이 위이면 형으로 섬기고, 다섯 살이면 견수(肩隨)하는 것이니, 이것을 허례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 어버이를 높이고 내 어른을 공경함으로써 그것으로 미루어 남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공경하는 예가 혹 그 사람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서명(西銘)〉의 ‘아비는 하늘이요, 어미는 땅이요, 백성은 모두 내 동포다.’라는 뜻으로 말한다면, 천하는 한집이 되고 온 나라 백성은 한사람이 되는 것이니, 무릇 천하에 나이 많은 사람은 모두 내 한집의 어른인데, 내 어찌 형을 섬기는 마음으로 미루어 그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어른을 모시고 먹을 때에, 나중에 먹으려 하면 옛날의 예에 어긋나고, 먼저 먹으려면 남이 보고 해괴하다 할까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중용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제사 음식도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하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른보다 먼저 먹으면 속인들이 매우 해괴하다 할 것이니,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요, 만일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숟가락을 들었더라도 우선 안색을 보고 먼저 먹으면 거의 중용을 얻게 될 것이다. 제사 음식에 있어서는 더욱 온당치 않은 일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김수-
선생은 항상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내면서 별로 바깥 출입이 없었지만, 만일 사문(斯文)들의 점잖은 술자리나 이사(里社 동리 사람들이 모여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는 것)에 모여 여는 잔치에는 가끔 가기도 하였다. 또 만일 친척 집에 길(吉)ㆍ흉(凶)이 있어서 경(慶)ㆍ조(弔)할 일이 생겼을 때 가까우면 반드시 몸소 가고, 멀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예를 표하되, 늙을 때까지 폐하지 아니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고장 사람이 잔치에 청하는 일이 있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갔고, 술잔이 한 번 돌면 반드시 주인에게 술잔을 돌려 답례를 하였다. 아무리 항렬이 낮은 사람이든지 젊은 사람에게라도, 부드러운 얼굴로 따뜻한 대화를 하고 그 즐거움을 다한 뒤에라야 돌아왔다. 술은 양이 없되 다만 흡족하게 마실 뿐이었다. -이덕홍-
“향교(鄕校)에서 석채례(釋菜禮)를 행한 뒤에 교생(校生)이 제사 고기를 드리면, 선생은 의관을 갖추고는 제사 고기를 당(堂)에 두고 뜰아래서 절하고 받았다. 그러고는 곧 당 위에서 제사 고기로 잔치를 베풀어, 교생이 술잔을 들고 꿇어앉으면 선생은 자리에 나와 꿇어앉아 마시고, 다 마시고는 다시 엎드려 물러났다. 혹 좌석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역시 이처럼 하게 하였는데. 선생이 잔을 잡고 꿇어앉으면 교생이 받아 마시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우성전-
[주D-001]나의 …… 것 : 노(魯)나라에 홀아비와 과부가 이웃에 살았는데, 하룻밤에 폭우가 와서 과부의 집이 무너졌으므로, 과부가 홀아비 집에 찾아가서 들어가기를 청하니, 홀아비가 거절하기를, “예(禮)에 남녀가 60이전에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 하니, 과부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하혜(柳下惠)의 일을 듣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것은, 유하혜는 노국의 현인(賢人)으로 여자를 옆에 놓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홀아비가 답하기를, “유하혜는 가(可)하나 나는 불가(不可)하니, 나는 나의 불가함으로써 유하혜의 가함을 배우겠다.” 하였다. 공자(孔子)가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이야말로 유하혜를 잘 배우는 사람이로다.” 하였다.[주D-002]우후(牛後) : 속담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궁둥이가 되지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라는 말이 있다.[주D-003]견수(肩隨) : 나이가 많은 사람과 길을 갈 때, 어깨를 나란히 해서 가되 조금 뒤로 물러서서 가는 것을 말한다.[주D-004]석채례(釋菜禮) : 봄가을에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