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포럼/퇴계선생

퇴계집_언행록3_유편(類編)_임금에게 아뢰어 경계함

청풍선비 2011. 4. 18. 08:49

퇴계집_언행록3_유편(類編)

임금에게 아뢰어 경계함

 

경자년(1540, 중종35) 12월 8일에 정언(正言)으로서 조강(朝講)에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당나라의 현종(玄宗)은 사리에 밝고 통달한 군주로, 관작(官爵)으로써 공을 상주는 것이 그른 것임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이전에 태평 세월로 지내던 때에 사치하여 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고(府庫)가 모두 텅 비어서 어찌할 수가 없이 부득이 그런 일을 하였던 것이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부고가 비었으니 소비를 절약하여, 비록 어떤 사변을 만나더라도 큰 낭패에 이르지 않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정미년(1547, 명종2) 9월 아침에 응교(應敎)로 입시하여 《논어》를 강하였다. 글을 보다가 아뢰기를,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각각 그 사람의 재질을 따르는 것은, 그 타고난 재질에 가까운 것에 의해 성취시키려 해서입니다. 만일 공자로 하여금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게 했다면, 그의 사람 쓰는 것도 또한 마땅히 그 재질을 따르고, 그 장기(長技)를 취해서 일을 맡겼을 것입니다. 임금은 군주와 스승의 책임을 겸하기 때문에, 인재를 기르는 데 있어서도 마땅히 이것을 법을 삼아야 할 것이며, 그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도 또한 이것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것에 대해 유념하소서.
전편(前篇)에 이르기를, ‘주(周)나라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제도를 보고 절충하여 따랐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겠다.’ 했고, 이편에서는 또한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배들의 것을 좇겠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선배들은 예악에 있어서 형식과 자질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그것은 곧 하나라와 은나라의 것을 보고 절충하여 따랐기 때문에 좇고자 한 것입니다. 선배들을 좇는다는 것은 또한 주나라를 좇는다는 뜻입니다. 주나라 말년에 예가 무너지고 악(樂)도 또한 무너져, 형식이 지나쳐서 자질을 멸했기 때문에, 당시의 폐단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9월 3일 석강(夕講)에서 아뢰기를,

“옛날부터 임금은 사사로운 뜻을 버리기에 힘썼사옵니다. 근래 내수사(內需寺) 이신(李紳)의 송사는 시원스럽게 공론을 좇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모의전(慕義殿)에 당번을 드는 종친이나 내관(內官)들에게 상주는 재물도 또한 사사로운 은혜에 관계되었던 것인데, 그것도 또한 간함에 따라 도로 거두어들였으니, 성상의 덕이 지극하옵니다. 만일 일이 모두 이렇게 된다면, 요순의 다스림도 얼마 멀지 않다고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다만 여기에 한 가지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석상궁(石尙宮)에 대해 논계(論啓)가 있었을 때, ‘대내(大內)에서 처리하겠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이것은 궁궐 안의 잘잘못을 외정(外庭)에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합니다. 그러나 전교하신 뜻은 온당치 못하여, 전날의 이신의 송사나 사사로운 은혜를 도로 거두어들인 일과는 아주 반대되는 것이옵니다. 옛날의 성군들은, 궁 안의 일을 외정에서 모두 참여하여 알게 하였고, 환관과 궁첩까지도 총재(冢宰)에게 영솔되지 않음이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후주(後主)에게 아뢰기를, ‘궁중과 부중(府中)은 모두 한몸이니, 착한 이를 올려주고, 악한 이를 벌주는 데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나쁜 짓을 하여 죄를 범하였거나, 충성되거나 착한 사람은,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맡겨 그 상과 벌을 의논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드러내야 하며, 편벽되거나 사사로이 안팎의 법을 다르게 해서는 옳지 않사옵니다.’ 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이옵니다. 석상궁의 일은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미루어 앞일을 생각할 때에, 비록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궁중의 일이라 핑계하여 외정에서 간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영합하여 점차 패망의 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하였다. 그러고는 써 가지고 온, 주자가 효종(孝宗)에게 올린 봉사를 소매 속에서 꺼내어 읽기를,

“옛날의 성군들은 조심조심 이 마음을 보존하여 지켜서, 비록 번화롭고 어지러운 속에 있거나 그윽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에 있어도, 정성되고 한결같았으며, 사심을 이기고 이 마음을 회복하기를, 신명을 맞이한 듯, 못이나 골짜기에 다다른 듯해서, 잠깐 동안이라도 감히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고, 오직 그 은미한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게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師)나 보(保) 같은 벼슬을 두고 간관의 직책을 두었던 것입니다. 무릇 음식이나 술, 의복ㆍ기구ㆍ재물이나, 또 환관이나 궁첩의 일들이 어느 것 하나 재상의 관할에 매이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그 좌우 전후에 있는 자들의 일동일정(一動一靜)으로 하여금 유사의 법에 제어되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지극히 그윽한 곳에서나 지극히 짧은 동안에 있어서도, 털끝만 한 사사로운 숨김이 없게 하였습니다. 대개 한 사람의 임금으로서 구중(九重)의 깊은 곳에 살면서도, 종묘나 조정 위에 서 있는 듯 두려워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선왕의 다스림이 안에서 바깥까지, 작은 것에서 드러난 것에 이르기까지 정(精)하고 순수하여 조그마한 가림도 없어서, 그 업적과 영향이 아직도 후세의 법이 되는 까닭이옵니다.” 신이 《주례(周禮)》를 보니 천관(天官)ㆍ총재(冢宰) 편이 바로 주공이 성왕(成王)을 돕고 인도해서 후세에 영향을 끼친 것이온데, 그 마음 쓴 것이 가장 깊고 간절하였습니다. 만일 삼대 때의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 학문을 알고자 하신다면, 이것을 참고하오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살피옵소서. 본주(本註)이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9월 9일에 조강에 입시하여 《논어》를 강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주상의 학문이 날로 점점 고명(高明)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의 이치와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스스로 만족하시지 마시옵소서. 그저 글자의 음이나 뜻이나 구두(句讀)만 알고, 스스로 터득하는 진실이 없으면 학문에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옵니다. 공자의 말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하였는데, 이것을 해석한 사람은 ‘그 마음에서 구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되어 소득이 없고, 그 일을 익히지 않기 때문에 위태로워 안정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배움은 마음에서 체험한 다음에야 자신이 터득하여 진실 되고 잡되지 않는 것이옵니다. 모든 경학을 다 알아도 그 마음으로 터득한 진실이 없으면 혼란되어 얻는 것이 없고, 마음에 생각해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로워서 편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연평(延平) 선생이 주자에게, ‘이 도리는 오로지 날로 행하는 데서 익혀지는 것이니, 일상의 동정ㆍ어묵(語默) 사이에 드러나는 것이 모두 하늘의 이치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보존하고 스스로를 살피어 그 일에 익은 뒤라야, 그 아는 바가 진실로 얻은 것이 되는 것이오니, 이것이 비로소 진실한 학문인 것이옵니다. 성현의 격언을 다만 아침이나 낮에만 볼 것이 아니라, 한밤중에 마음이 고요해진 때 하늘의 이치를 몸소 알고, 날마다 아침과 낮에 행동한 것을 자세히 살펴서 몸소 행해지는 것이 이미 익어지면 성상의 학문이 진실될 것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큰 의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라고 했사오니, 생각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으면 의심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10월 13일에 석강(夕講)에 입시하였다.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에 있었던 일식은 큰 재변인데, 또 겨울에 우레가 생기는 변고가 있었사옵니다. 나라에서는 지난번에 사면령을 내리셨고, 또 현량과를 회복하게 하셨으니, 이것도 또한 재앙에 대한 삼가는 일로써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선왕들이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할 줄 알아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덕을 닦던 일에 비한다면, 사면령이나 현량과의 회복 같은 것은 겉치레만을 갖추었을 뿐이요, 오직 안으로 덕을 닦는 것만이 그 근본이 되는 것이옵니다. 다만 겉치레만을 갖추고 안으로 덕을 닦는 데 소홀하다면, 그 하는 일이 모두 공허한 데로 돌아가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을 것이옵니다. 항상 임금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과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늘을 섬기는 것의 이 세 가지 일에 능히 그 도리를 다해서 조금도 끊임이 없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야만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할 줄 알아서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을 닦으며, 그 지극한 정성이 올라가 하늘을 감동시켜 재변(災變)을 복상(福祥)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시경》에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에 대해 말하기를, ‘공경하고 공경하라. 하늘은 오직 밝은 것이니, 그 명령은 쉬운 것이 아니니라. 높고 높게 위에 있다고 하지 말라. 오르고 내리시며 하는 일마다 날로 감시하며 여기에 있느니라.’ 한 것이옵니다. 대개 하늘의 이치는 널리 퍼져서 없는 곳이 없고, 없는 때도 없는 것이니, 날마다 하는 일이 하늘의 이치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고 사람의 욕심으로 흘러들면, 그것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또 《시경》에 ‘하늘의 노하는 것을 공경하여, 감히 장난치고 노닥거리지 말고, 하늘의 변화를 공경하여, 감히 날뛰지 말라. 하늘은 밝아 네가 나다니는 데까지 미치고, 하늘은 밝아 네가 노니는 데까지 미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왕(幽王)을 경계한 시로서, 유왕이 하늘을 공경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이 말로써 깨우친 것이옵니다. ‘하늘은 밝아 네가 노니는 데까지 미친다.’의 조(朝) 또한 밝음을 말한 것으로서, 임금이 노니는 곳에 하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내려다 봄은 밝고 밝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시경》에 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이에 보전하리라.’ 하였고, 또 ‘신(神)의 강림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싫어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가 이와 같은 것이옵니다. 맹자께서도 말하기를,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품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마음과 성품을 보존하고 기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이 이치를 분명히 한 것은 곧 〈서명(西銘)〉이옵니다. 그 글에, 하늘과 땅은 곧 사람의 큰 부모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부모는 사람이 각각 가진 부모요, 하늘과 땅은 곧 천하 만물이 다 함께 가진 큰 부모이므로 사람은 다 내 동포요, 만물은 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니, 모두가 다 한몸이라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 의지하여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밝힌 것이 〈서명〉이옵니다. 그 글에 ‘이에 잘 보전함은 자식이 공경함이요.’ 한 것은, 곧 앞에 말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이에 보전하리라.’란 말을 인용하여,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에 비유한 것이옵니다. ‘사람이 방 안의 어두운 구석에 혼자 있으면서도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욕됨이 없다.’라는 것은, 자식이 그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에 비유한 것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기에 게으르지 아니한 데 비유한 것이옵니다. 이것은,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도리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니 배우는 자로서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임금으로서 더욱 그것을 체득하여 절실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옵니다. 이제 《소학》이 끝나 가는데, 《대학》은 이미 강했사오니, 다음에는 마땅히 이 책을 강해야 할 것이옵니다. 오늘날 당장 해야 할 공부도 여기에 있고, 후일 성인의 지위에 들어갈 도리를 닦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기사년(1569, 선조2) 3월 4일에 임금은 야대청(夜對廳)에 납시어 선생을 불러 보시고 하유하기를,

“경이 아직 70이 못 되어 치사(致仕)할 때가 아닌데, 어째서 갑자기 귀향하고자 하는가?”

하고 달래어 이르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소신이 변변치 못하여 부득이 물러나야 할 일이 아주 많사오나, 그중 대략만 들어도 대여섯 가지나 됩니다. 신의 나이는 비록 70이 못 되었사오나, 이제 벌써 69세이옵니다. 황조(皇朝)의 설선(薛瑄)은 69세에 치사하였으니, 옛일을 보아도 치사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젊어서부터 앓은 고질병이 늙을수록 더욱 깊어지고, 그중에서도 심병(心病)이 더욱 심하여 조금만 조리를 잘못하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사직하고 물러가고자 하는 것이 둘째 이유이옵니다. 가선대부 이상이 되고부터는 조정에 나와서 한번도 경력을 밟아 올라간 일이 없사온데, 물러 나 있는 동안에 헛되이 숭록대부까지 올라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아무 공이 없이 녹만 먹고 있으니, 나라를 저버리고 은혜에 부끄러운 일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이것이 하루도 염치없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셋째 이유이옵니다. 노둔하고 실무에 어두워 남보다 훨씬 뒤떨어지는데도 헛된 이름을 얻어 세상을 속였고, 위로는 임금까지 속이게 되었사옵니다. 가끔 경연에서 ‘현실에 맞지 않고 실상이 없다.’라는 말로 소신을 가리켜 아뢰는 사람이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전교에 ‘하염없이 기다린다.’거나 ‘크게 의지한다.’라고 하신 뜻은 다만 소신 개인에 있어서 천만 번이나 황송하올 뿐 아니라, 나라 체면에 있어서도 더욱 큰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욱 조정에 있을 수 없는 넷째 이유이옵니다.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데 책임과 기대가 너무 무거워서 무슨 일을 조금 해 보려고 하면, 반드시 잘못 저질러 나랏일을 그르치게 되고, 만일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피하고자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위아래에 모두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이 물러가고자 하는 다섯째 이유이옵니다. 그리고 그 밖에 소소한 일은 다 아뢸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이제 돌아가려고 하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소신은 평소에 학문의 역량도 없을 뿐 아니라 식견도 또한 밝지 못하온데, 무슨 아뢸 것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요즘의 전교를 보오니, 종묘에 부제(祔祭 후예(後裔)를 선조와 합제(合祭)함) 하실 때에 아직도 남은 슬픔을 잊지 못하시어 나례(儺禮 역귀(疫鬼)를 쫓는 예식)하는 노래와 산대(山臺) 같은 잡된 일을 모두 그만두게 명하셨으니, 효심으로 차마 하지 못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은 진실로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사옵니다. 소신이 변변치 못하여 이러한 훌륭한 시대를 만나서 갑자기 물러가기를 청하게 되었으므로, 정으로는 서운하여 흐르는 눈물을 가눌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옛날 사람의 말에, ‘태평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라고 하였사옵니다. 대개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태평한 세상에는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게 마련입니다.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면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며 여러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고,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으면 임금은 반드시 교만한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오니, 이것은 진실로 염려스러운 일이옵니다. 지금 세상도 태평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남쪽과 북쪽에는 분쟁의 조짐이 있고, 백성들은 살기에 쪼들리며 나라의 부고는 비어 있사오니,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되는 형편인데, 갑자기 어떤 사변이 있게 되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형세가 없지 않사오니, 걱정을 하지 않을 만한 방비가 있다고 할 수 없사옵니다. 또 성상은 자질이 고명하시어 경연 자리에서 글 뜻에 정통하기 때문에, 신하들의 재주와 지혜가 성상의 뜻을 만족시킬 수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이치를 따질 때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하들을 압도하고,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시려 하는 조짐이 없지 않사오니, 그것이 식자들이 미리 염려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소신이 전날에 그려 올린 〈건괘(乾卦)〉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라고 한 것과, 또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다.’라는 말이 있었사옵니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라는 것은, 곧 임금이 가장 높은 자리이온데 그 위에 또 한 층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높은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높은 체하여서 신하와 더불어 마음과 덕을 같이하기를 즐기지 않으면, 어진 사람이 아랫자리에서 도울 수가 없게 되오니, 이것이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다.’라는 것이옵니다. 용이란 것은 구름을 만나 그 변화를 부려 혜택을 만물에게 입히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아랫사람과 함께 마음과 덕을 같이하기를 즐기지 않으면, 그것은 용이 구름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아서, 비록 그 변화를 부려 혜택을 만물에 입히고자 하나 그것이 되겠습니까. 태평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징조가 생기는 것이옵니다. 만일 오늘날 전쟁이 없다 하여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놓아 혹시 너무 높은 체하는 생각이 있거나, 혹 사사롭고 편벽되게 총애하면, 그것은 배를 끌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만 손을 놓아 버리는 것과 같아서, 배는 문득 흘러내려 가다가 풍파를 만나 잠깐 사이에 곧 뒤집히게 될 것이오니, 어찌 큰 두려움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런데 진실로 학문 공부를 잠깐이라도 중단하지 않아야 이러한 사사로운 마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는 공부는 성현들이 남긴 글에 밝혀져 있으니, 그것은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간다.[克己復禮]’라는 가르침 따위가 그것이옵니다. 이것을 주로 하여 공부에 마음을 쓴다면 학문 공부가 날로 깊어져서, 혼자의 지혜로 세상을 어거하려는 병통이나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이나 편벽되이 친근하는 마음은, 구태여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옵니다. 소신은 요행히 경연에 들어왔사오나 말솜씨가 없어, 주장을 세울 때에 늘 상세하게 아뢰지 못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지극히 외람하고 망녕된 줄을 알면서도 감히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린 것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신의 사사로운 뜻으로 지은 것은 아니옵고, 모두 옛날 현인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오며, 그중에서 한두 가지의 그림을 신이 보충했을 뿐이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거기에 마음을 두시면, 곧 소신이 그동안 여러 해를 두고 강할 때에 아뢴 바가 모두 그 가운데 있는 것이옵니다. 〈소학도(小學圖)〉나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같은 것은 비록 이전에 없던 것이옵니다만, 그렇다고 소신이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옵고, 다만 주자의 《소학》제목과 〈백록동규〉를 배열하여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써, 조금도 주자의 본뜻에서 벗어나거나 보태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리고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도 또한 소신이 만든 것이지만, 그것도 선현들이 지은 잠어(箴語)를 가지고 〈경재잠도(敬齋箴圖)〉를 본떠서 만든 것이옵니다. 그 공부는 전날에 차자로 올린 사(思) 자와 학(學) 자로 주요한 뜻을 삼은 것이온데, 여기에 힘을 기울이시면 그 가운데 있는 뜻과 이치를 반드시 스스로 깨달아 얻게 될 것이고, 오래오래 힘을 쓴다면 얻는 것이 더욱 깊은 곳에 이르고, 그래서 맑고 밝은 기운이 몸에 있어서 그것이 사업에 발휘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이 바로 소신이 진실로 충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간절한 정성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열 가지 그림 가운데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가 무려 셋인데, 중도(中圖)와 하도(下圖)는 그대가 만든 것인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예. 소신이 망녕되이 지은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상도(上圖)는 정복심(程復心)이 만든 것이온데, 이(理)와 기(氣)를 갈라서 말한 곳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버리고, 맹자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논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써 중도와 하도로 갈라 만들었사옵니다. 본연의 성은 이(理)를 주로해서 말한 것이요, 기질의 성은 이(理)와 기(氣)를 겸해서 말한 것이옵니다. 정(情)으로써 말하오면 이(理)를 따라 나오는 것은 사단(四端)이 되고, 이와 기가 합해서 나오는 것은 칠정(七情)이 되는 것이옵니다. 맹자와 정자ㆍ주자는 다 갈라서 말했기 때문에, 중도는 본연지성을 써서 사단을 주로 하여 만들었고, 하도는 기질지성을 써서 칠정을 주로 해서 만든 것이옵니다. 이것은 비록 소신이 만든 것이오나 다 성현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써, 털끝만큼도 감히 소신의 망녕된 소견을 섞지 않은 것이옵니다. 만든 사람이 미미한 사람이라 해서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이것은 성현의 말씀이니 반드시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잘 돌보아 살피시고 마음을 깊이 쓰시면, 참으로 알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그 뜻과 맛이 날로 깊어져, 마치 고기반찬이 입에 맞는 것처럼 될 것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통성정(心統性情)이란 무슨 뜻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천지에 들어찬 것이 즉 나의 몸뚱이요, 천지를 거느리는 것이 즉 나의 성품이다.’ 하였사옵니다. 대개 기(氣)는 형체가 되고 이(理)는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이와 기가 합해져서 마음이 되어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옵니다. 이른바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는 이는 성(性)이요, 성에서 나와 작용하는 것은 정(情)이니, 그렇다면 이와 기가 합해서 한 몸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성과 정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대개 이 성을 담아 간직하고 있는 것도 마음이요, 나아가서 작용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성과 정을 거느린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뒷날에 선생은 경연에서 대답한 것이 미진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고쳐 말하기를, “이와 기가 합해서 마음이 되면 자연히 허(虛)하고 영(靈)하고 지각하는 미묘함이 있는 것인데, 그 고요하여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은 성이요, 이 성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며, 움직여 만사에 응하는 것은 정이요, 이 정을 널리 펴고 나아가 작용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다. 그러므로 심통성정이라 한다.” 하였다. 그래서 이 뜻을 기명언(奇明彦)에게 보내어 훗날 경연에서 다시 물으시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령(虛靈)은 위에 있고, 지각(知覺)은 아래에 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허령은 마음의 본체요, 지각은 곧 사물을 응접(應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또 할말은 없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우리 성조(聖朝)의 조종께서는 은택이 깊고 그 공덕이 높고도 높사옵니다. 다만 사림의 화가 중엽에 일어났으니, 폐조(癈朝) 때의 무오년(1498, 연산군4)과 갑자년(1504)의 일은 말할 것도 없사옵고, 중종(中宗)은 명성(明聖)하였사오나 불행히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당대의 현인과 군자들이 다 큰 죄를 입었사옵니다. 이로부터 사(邪)와 정(正)이 한데 섞이어 간악한 자들이 때를 만났으니, 이후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때는 반드시 기묘년(1519, 중종14)의 여습(餘習)이라고 일컬었사옵니다. 사림의 화가 잇달아 일어났으니, 옛날부터 이 같은 때는 있은 적이 없었사옵니다. 또 명종(明宗)이 어린 나이로 등극하시자 권세 있는 간신들이 뜻을 얻어서, 한 사람이 패하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잇달아 난리를 일으켰기 때문에, 사림의 화는 차마 이루 말할 수 없었사옵니다. 신이 이미 지나간 일을 아뢰는 것은 장래에 큰 경계를 삼고자 하는 까닭이옵니다. 옛날부터 임금이 처음으로 정치를 시작할 때에는, 어진 이를 구하고 바른말을 받아들였으므로 바른 사람이 등용되어서 임금의 허물을 간하고 잘못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임금을 정도(正道)로 이끌어 갔었사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임금의 하고자 하는 것을, 일에 따라 고집하여 다투기 때문에, 임금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몹시 꺼리거나 또는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옵니다. 이때에 간사한 사람들이 그 틈을 타서 임금의 마음에 맞추어 받들기 때문에, 임금은 이 사람을 쓰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드디어 소인과 합하게 되어 바른 사람과 군자는 손 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소인은 뜻을 얻어 그 패거리를 부르고 끌어들여서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은 처음 정치이므로 걱정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른말 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뜻을 굽혀 좇아서 큰 허물은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한때 애써서 힘쓰는 것이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간사한 신하가 틈을 타서 이간을 붙일 것이고 임금의 마음이 한 번 변하면 어떻게 지금과 같이 애쓴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게 되면 사(邪)와 정(正)이 당(黨)을 나누어서 간사한 자들이 이기게 될 것이니, 처음의 정치와 서로 반대되는 일이 많을 것이옵니다. 당나라의 현종(玄宗)으로 말하자면, 개원(開元) 때에는 요숭(姚崇)ㆍ송경(宋璟) 같은 어진 이가 조정에 가득 차서 태평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욕심이 많을 뿐 아니라, 또 여색을 탐했으므로, 군자들이 그것을 간했고, 이임보(李林甫)ㆍ양국충(楊國忠)의 무리들이 오로지 임금의 뜻에 영합하기를 일삼아 군자는 쫓아내고 소인을 써서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 안녹산의 난 을 초래하게 된 것이옵니다. 한 임금의 일이면서 마치 두 사람이 한 일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처음에는 군자와 합하고, 나중에는 소인과 합한 까닭이옵니다. 임금께서도 이것을 큰 거울로 삼아서 착한 무리를 보호하시어, 소인들이 모함하지 못하게 하오면, 이것은 종사와 백성의 복이 될 것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계한 말은 날마다 힘써 경계하겠노라. 그러면 지금 조정의 신하로서 추천할 만한 사람은 없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오늘의 삼공들은 다 깨끗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육경은 또한 간사하고 음흉함이 없사오니, 조정이 이러하기는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만일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면 혹 무슨 일을 하고자 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이전부터 있던 사람을 부족하다 하여 가벼이 바꿔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의 수상(首相)으로 말하오면, 위태한 때를 당해서도 말이나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나라의 형기를 태산같이 편안한 곳에 앉혀 놓았으니 진실로 국가의 기둥이요 주춧돌이라, 마땅히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은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말하기 어렵사옵니다. 지금 마음 가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묻기를, ‘제자들 중에서 누가 터득한 바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정자가 말하기를, ‘터득한 바가 있느냐고 말한다면 쉽게 말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유작(游酢)ㆍ양시(楊時)ㆍ사양좌(謝良佐)ㆍ장역(張繹)ㆍ이유(李籲)ㆍ윤돈(尹焞) 같은 여러 사람이 그 문하에 있었지만, 터득한 바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신이 어찌 감히 아무개가 터득한 것이 있다고 하여 하늘과 같은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그중에서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는 문자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소견이 가장 뛰어났으니, 곧 통달한 선비입니다. 다만 수렴(收斂 내성(內省)하는 뜻) 공부가 적으니, 그것이 부족한 점이옵니다. 소신도 항상 이에 특히 힘쓰라고 권면하오나, 아직도 절실하게 그런 공부에 힘쓰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만 한 선비도 쉽게 얻을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