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4_유편(類編)
예를 논함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
묻기를,
“《가례(家禮)》에 ‘하루 전에 숙빈(宿賓 그 기일에 앞서 공경함)한다.’라는 말을 《의례(儀禮)》의 주에서는 ‘숙(宿)은 진(進)이라는 뜻이니, 나아가서 그에게 관일(冠日)이 곧 옴을 알리는 것이다.’라고 하고, 보주(補註)에는 ‘그 기일에 앞서 재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을 좇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보주가 옳다.”
하였다. -김수-
이하는 관례(冠禮)를 말한 것이다.
묻기를,
“《가례》 주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관례에 단술[醴]을 썼다.’ 했는데, 단술은 하룻밤을 지낸 전국술이고, 또 ‘요즘에는 사가(私家)에는 단술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 단술은 무슨 단술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요새 말하는 단술이 아니라, 곧 오재(五齊)의 단술이다.”
하였다. -김수-
혼인의 예가 무너지고 없어져서 세상에 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박려(朴欐 선생의 손자사위)가 올 때 비로소 옛날 예법을 본떠서 신랑ㆍ신부의 예견(禮見)하는 의식을 올렸다. 그러나 남들이 보거나 듣고서 너무 이상해할까 염려해서 옛날 예법대로 다 좇지 못하였다. 그 뒤로 몇 해가 안 되어 서울이나 시골의 사대부들이 혼인할 때에는 다만 이 예식을 쓸 뿐 아니라 가끔은 옛날 예법을 그대로 행하기도 하였는데, 그 까닭을 생각하면 모두 여기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안도-
이하는 혼례를 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내 동생이 남의 양자가 되었는데, 우리 할머니의 초상을 당하여 아직 장례도 지내기 전입니다. 혼인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때에 양부가 혼례를 주관하는 것이 의리에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게 묻지 않고 했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물었으니, 내 어찌 예 아닌 것을 가르쳐 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은 결국 혼인하지 않았다. -김부륜-
중종의 상사 때에 조정의 의논은 졸곡(卒哭) 뒤에는 검은 갓과 띠를 쓰기로 하였다. 그때 선생이 옥당에 계시면서 동료들과 헌의(獻議)하여 바로잡았다. -김성일-
이하는 상례를 논한 것이다.
명종의 상사 때에, 선생은 《오례의(五禮儀)》의 군신의 상제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주자의 군신 복제 논의를 따라 참작하여 다시 정하고자 하여 이를 예조에 알렸으나, 예조의 당상이 어려워하여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김성일-
선생이 말하기를,
“여러 학생들이 성균관에 나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태학생은 보우(普雨)를 논열하다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관(空館)하였다. 만일 관에 나아가지 않으면, 국장의 발인에 있어서 곡송(哭送)하는 예(禮)를 폐하게 될 것이니, 큰 예를 어찌 차마 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전은 의심하여,
“성안의 선비들은 모두 임금의 신하이니 모두 교외에 나와 임금의 상사를 울면서 보내야 할 것이며, 모든 학생들도 길가에서 울면서 보내면 될 텐데, 구태여 성균관에 있을 때와 같이 반열(班列)을 만들기까지 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만일 반차(班次)가 없으면 가서 울어서는 안 되니, 이것은 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분수상 감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성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상복 입는 제도는 옛날의 예법에 어그러져서 그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가벼이 여기고, 그 가볍게 여겨야 할 것은 중하게 여기니, 이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의례를 말한다면, 조정에 있는 이는 임금을 위하여 다 참최(斬衰)를 입고, 경기 안에 사는 백성은 재최(齋衰)를 입었다가 석 달 뒤에 벗고, 경기 밖에 사는 백성은 복이 없다. 그런데 요새는 조정에 있는 사람이나 경기 밖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흰 옷에 흰 갓을 써서 구별이 없으니, 만일 이같이 먼 지방에서도 혹은 흰 옷이나 흰 갓을 쓰고 사냥을 하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그 정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내 일찍이 듣건대 화담(花潭)이 중종의 상사를 만나 이 일을 글로써 논했으나, 정원에서는 인종이 상사의 일로 문제를 삼는다는 말을 얼핏이라도 들으면 필시 마음을 상하게 될 것이라 하여, 그 글을 봉해 버리고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들은 바로는 그 글에서 논한 것이 매우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지금은 나라가 상중이므로 흰 옷을 입고 검은 띠를 두르는데, 만일 개장(改葬)이 있어서 복을 바꿀 때에는, 검은 띠를 벗고 상복의 띠를 두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임금의 상과 어버이의 거상은 서로 일치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로써 본다면 검은 띠를 벗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지금의 정으로 말한다면 벗지 않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또 묻기를,
“중한 복(나라의 상사)을 입고 있으면서 가벼운 상사(어버이 상사)를 만나면, 그 복을 입고도 조곡(弔哭)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제 나라가 상중이면서도 어버이의 개장하는 복을 만나면, 검은 띠를 벗고 흰 띠를 두르는 것은 정이나 예에도 어긋남이 없을 듯한데, 예로서는 검은 띠를 벗지 못한다 하시고 정으로서는 안 벗기도 어렵다고 하시니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의 상사를 당해 복을 입었으면 감히 사사로운 상의 복은 입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어버이의 상을 통틀어 가리킨 것이다. ‘아직 복을 입지 못한 사람은 감히 복을 입을 수 없고, 이미 입은 사람은 감히 벗지 못한다.’라고 한 말은 옛날의 의리이다. 요즘에 이제 흰 갓과 흰 옷과 검은 띠는 임금의 상인데, 이에 부모의 개장을 위해서 검은 띠를 벗고 삼베 띠를 띠는 것은 옛날의 예가 아니기 때문에 검은 띠를 벗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요새는 나라가 상중에 있으면서도 부모의 상사를 만나면 으레 거의 상복을 입으니, 오직 어버이의 개장에만 검은 띠를 벗고 삼베를 입지 않는다면, 세상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므로 요새 세상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구(逑)가 예전에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있을 때에, 마침 나라의 상사를 만났는데, 또 문상(問喪)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기공(朞功)의 성복(成服)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른바 성복은 세속의 베띠[布帶]였다. 묻기를,
“임금의 상사가 있으면, 비록 사대부라도 감히 기공복(朞功服)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머리에는 임금의 상에 쓰는 흰 삿갓을 쓰고 허리에는 사상(私喪)의 복인 베띠를 띤다면, 한 몸으로써 공사의 복을 겸한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비로소 나라의 상사가 있으면, 감히 기공의 사사로운 복은 입지 못하는 줄을 알았다. -정구-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중형(仲兄)이 양부인 청원공(淸原公)의 상사를 만나고, 또 생모 정부인(貞夫人)의 상사를 만났다. 천리 밖의 두 상사가 한꺼번에 한 사람에게 났으니, 참최복을 입기도 전에 재최(齋衰)의 부고가 이른 것이다. 참혹한 변고가 겹쳐서 닥쳤으니 예로써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때 우성전이 편지로 선생에게 물어서 아버지 성복례(成服禮)를 마친 뒤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들어 신위를 설치하고는 또 성복을 한 뒤에 양부의 상에서 하루를 머물다가, 비로소 생모의 상사에 달려가 곡을 하였으니, 이것은 선생의 명령이었다. 정구(鄭逑)가 지은 정곤수(鄭崑壽)의 행장에서 나온다.
묻기를,
“칠성판(七星板)에 북두성 모양으로 뚫어새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남두성(南斗星)은 삶을 맡았고, 북두성(北斗星)은 죽음을 맡은 까닭이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가례》에, ‘성복(成服)할 때 요질(腰絰)은 석 자로 늘어뜨린다.’라고만 적혀 있고, 그 뒤에 어떻게 맨다는 말은 없으니, 그러면 늘어뜨린 채 3년을 마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3년 동안 늘어뜨린 채 둘 이치가 없다. 아마 그런 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예기》에 의하면, 소렴(小殮 송장을 옷과 이불로 쌈) 때에는 환질(環絰)에 산대(散帶)를 하고, 성복 때에는 요질(腰絰)에 산대를 하며, 졸곡(卒哭) 때에는 변질(弁絰)을 한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행함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절에 관한 글이 너무 번거로워 다 좇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가례》에 의하여 소렴 때에는 머리털을 묶고 성복 때에는 요질을 두르는데 늘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우성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그 아비가 죽고 조부모의 승중(承重)이 된 사람은, 그 어머니가 있으면 그 아내는 조부모를 위하여 다만 본복(本服)인 대공복(大功服)만 입을 뿐이요, 재최나 참최는 입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은 적(嫡)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서자는 적모ㆍ부모ㆍ형제ㆍ자매를 위하여 다 복이 있으니, 그것은 다 외복(畏服)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도에는 그것이 없으니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달을 바꾸는 제도[易月之制]에서는 비록 조부모나 형제의 거상이라도 정해진 달 이외에는 복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관리로 있는 사람은 모두 길관(吉冠 상을 벗은 뒤에 쓰는 갓)으로 사무를 보아 왔는데, 그 관습이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랏일에서는 진실로 이러하지만, 만일 사관(四館)이 모두 나오는 잔치 같은 것은 사사로운 모임인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시왕(時王)의 제도에 준하여 강제로 잔치에 참여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옛날 여자약(呂子約)은 그 아버지 여동래(呂東萊)의 상사를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복을 계속하려 하자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였는데 지금까지 군자들은 그것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복을 계속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하여야만 비로소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저 세상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시왕의 제도에 있어서는 어떻다고 생각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예는 둘 다 옳은 것이 없고, 일은 둘 다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벼슬에 있는 사람이 만일 꼭 자기의 뜻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일에 장애가 많을 것이니 결국 좋은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배우는 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는 상사의 기강이 허물어져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세속의 예를 들면, 초상이나 장송(葬送)이나 제삿날에 상가에서 반드시 술과 음식을 내어 조문객을 대접하는데, 술에 취하거나 밤을 새우는 무지한 조문객도 있으니,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그대들은 이런 곳에서 처신하는 길을 강구하라.”
하였고 세상을 떠나는 날에 유언으로 경계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처첩(妻妾)의 복에 있어서는, 자신은 최복을 입는다는 예를 따라서 별처에서 근신하면서 3년 동안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까? 졸곡까지면 좋다고 하는 이도 있고, 혹은 소상까지면 좋다고 하는 이도 있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禮)에 부인(婦人)은 부모상에 갔다가 연복(練服 소상복)을 입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국필-
그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쇠하고 병든 내 몸으로 억지로 집상(執喪)하기는 어렵지만, 소식(素食)한다고 해서 고생이 더 될 걱정은 없으니, 어찌 감히 중복(重服)을 가볍게 감하겠느냐. 옛날 사람은 오복(五服)에 모두 성복(成服)하였는데, 지금은 기공(朞功) 이하로는 요질(腰絰) 띠로만 행하고 마니, 너무 간략하고 박정한 일이다. 거기에 또 소식마저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간략한 중에서 더 간략하고 박정한 중에서 더 박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감히 가볍게 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 때문에 병이 더해진다면, 어찌 내 목숨을 꾀하지 않고 구태여 고집하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묻기를,
“초상에 상식(上食) 드릴 때, 아침저녁으로 제사드릴 때 올린 음식은 치우는 것입니까. 그대로 두어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거두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부륜-
또 말하기를,
“예(禮)에 ‘장사하기 전의 제사에는 술을 한 잔만 올린다.’라고 하였으니, 거기다가 장사하기 전에 부모의 신위(神位)를 합해서 제사하는 것은 더욱 예가 아니다.”
하였다. -김부륜-
또 말하기를,
“예에 ‘장사하기 전에는 죽을 먹는다.’라는 말은 옛날에 사(士)는 한 달 만에 장사하고, 대부는 석 달 만에 장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장사에 기일을 마치지 못하고, 때를 넘겨 장사하는 사람이 기운이 너무 지쳤다면, 구태여 예전의 예에 구애되어 병이 나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그 아들 준에게 준 편지에,
“상사는 슬픔을 주로 한다. 모든 일은 《가례》를 참고하고 동시에 세속에서 통상적으로 쓰는 관례를 물어 하되, 힘쓰고 조심해서 남의 비방을 받지 않는 것이 옳고 또 마땅한 것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모두 네 어미의 상을 입지 않았으니, 이번 상사를 곧 어미의 상사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친어머니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지한 말로서, 사람을 의리가 아닌 데로 빠뜨리는 것이니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새 서울 안의 사대부의 상례가 다 예에 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한 볼만한 점도 많다. 너희들이 만일 옛날의 예대로 행하지도 못하고, 또 요새 사람의 비방을 받는다면 어떻게 체면을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너무 기력을 써서 병이 나는 데 이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병오년(1546, 명종1)에 준이 권 부인의 상사를 만났다.
고을 사람이 황장목(黃腸木)을 베어 관을 만들어 그 어버이를 장사했다.
선생이 말하기를,
“아무리 자신의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 지내고 싶더라도, 어찌 나라에서 금하는 나무를 벨 수 있겠는가.”
하고, 이내 ‘휴고성부(虧姑成婦)’의 사실을 끌어와 나무랐다. 〈휴고성부〉의 사실은 《좌전(左傳)》에 있다. 처음에 제강(齊姜)의 시어미 목강(穆姜)은 사람을 시켜서 아름다운 수영나무를 골라서 자기가 죽은 뒤에 쓸 널을 만들게 하였다. 그 뒤에 제강이 죽자 계문자(季文子)는 그 관으로 제강을 장사했다. 군자가 이 말을 듣고 “그것은 예가 아니다. 시어미의 것을 헐어서 며느리를 이루어 주었으니, 이보다 더 예에 거슬리는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시어미의 것을 헐어서 그 며느리의 관을 만들었다 해서 나무란 것이다. 선생의 생각도 그 황장목은 나라에서 쓰는 널재목인데 그것을 사사로이 자신의 어버이 장사에 썼으니, 휴고성부와 같은 류라는 것이다. -김성일-
묻기를,
“무덤 경계의 사방에 빙 둘러 담을 쌓아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의 예가 아니다. 담 쌓기를 그치지 않으면 장차 방[室]도 만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여묘(廬墓)의 제도는 후세에서 시작된 것으로, 장사를 지낸 뒤에는 반혼(返魂)하는 것이 예이다. 다만 집안 안팎의 신분과 남녀의 구별을 아주 분명하게 하기 어렵다면, 상중이나 제사 때에 삼가고 엄숙하지 못하여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김취려(金就礪)가 묻기를,
“내상(內喪)에 사내종을 시켜 제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예가 아니다. 만일 여종을 시킨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 여소(廬所)에 종년을 둔다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제들로 집사(執事)를 삼아 제사 때에 음식을 상에 차려 놓는 모든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 예에 맞을 것이다. 일찍이 종묘(宗廟)의 제사를 보니, 대축(大祝)은 임금의 주독(主櫝)을 열고 내관(內官)은 소군(小君)의 독(櫝)을 열었으니 이 또한 이런 까닭에서였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요새 내상(內喪)에 조문하는 사람이 아무런 친척이 아닌데도 바로 영좌(靈座)에 절을 하는데, 이것은 예가 아니다. 살았을 때 집안끼리 드나든 친분이 없으면 내외의 예절은 분명한 것이니, 어지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그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너는 가볍지 않은 병이 있으니, 집상(執喪)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학질(瘧疾)은 본래 지라와 위장에 병이 들어서 된 것이다. 이제 마른 포(脯)를 두어 접 보내 권도(權道)로써 너의 소식(素食)을 그치게 하려는 것이니, 너는 나의 이 간절하고 염려하는 뜻을 어겨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곧 고깃국을 먹어라. 이 사이에 두자가 빠졌다. 비록 소식을 그치더라도 질(絰) 띠를 그대로 띠는 것은 무방하다. 남과 대면하여 음식을 먹지 말 것이요, 혹은 여럿이 앉았다가 음식 먹을 일이 생기거든 곧 일어나 자리를 피하라. 이것은 거짓을 꾸미고 먹는 것을 숨기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곧 자기를 낮추어서 감히 사람 축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대개 병 때문에 소식을 그쳐서 부득이하게 권도를 좇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말하기를,
“만일 네가 온다면 건(騫)도 소식을 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금군(琴君)이 또 있으니, 모두 소식할 형편이 아닌 즉, 밥 때에는 마땅히 딴 곳에서 먹고 고기 먹는 사람과 마주 앉아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무신년(1548, 명종3) 봄에 준(寯)은 심상(心喪)을 하고 있었는데 단양(丹陽)에서 벼슬살이하는 선생을 모시기 위해 오려고 한 때였다. -집안 편지-
일찍이 말하기를,
“옛날 어떤 사람이 상중에 있으면서 병을 얻어 계집종을 시켜 약 시중을 들게 하였다가, 마침내 ‘근신하지 못하였다.’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평생을 불우하게 지냈다. 혐의를 분별하는 일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합장(合葬)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라, 합장도 또한 옛날 예이다.”
하였다. 또 관을 같이 쓰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한 널도 또한 좋다.”
하였다. 또 장사의 선후를 물으니, 말하기를,
“상이 같은 때에 났으면 가벼운 상을 먼저하고, 무거운 상을 나중에 하는 것이 예이다.”
하였다. -김부륜-
장사 지낸 뒤에 돌아가신 부모를 합해서 제사하는 일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상사에 선후가 있으면, 길흉에 차이가 있으니 이미 길한 신주를 끌어와서 합하여 제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요새 세속에서는 장사 지낸 뒤에 반드시 합하여 제사를 지내니, 이런 예는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합장한 뒤의 우제(虞祭)의 축문(祝文)에 대해 물으니, 말하기를,
“무덤을 옮겨서 합장했다면 우제 때에는 반드시 두 개의 축문이 있는 것이 원래 옳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개장(改葬)한 뒤에 시마복(緦麻服)을 3개월 동안 입는 것은 옛날의 예요, 7일 동안 입는 것은 지금의 제도입니다. 요새 부모를 개장하고 복을 입는 사람은 옛날과 지금의 어느 것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지금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이국필-
유중엄(柳仲淹)이 남의 양자가 되어, 본생모의 초상을 만났다. 기년이 지난 뒤에도 차마 최복(衰服)을 벗지 못하고 굳이 복을 마치고자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선왕께서 만든 예를 초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찌 정에 쏠려 곧장 행하려 하는가. 이미 남의 양자가 되었는데 또 사친(私親)을 돌보고자 하면 그것은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기사년(1569, 선조2) 2월에 선생이, 문소전(文昭殿)의 태조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과 소(昭)ㆍ목(穆)의 위치를 바로잡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그때 인종(仁宗)ㆍ명종(明宗)을 문소전으로 옮겨서 선조(先祖)와 함께 모시려고 하였는데 문소전의 협향(祫享)하는 위치가 태조는 북에 있으면서 남을 향하고, 소(昭)와 목(穆)은 동서로 향해 있었다. 문소전은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길어서, 인종과 명종을 거기에 협향하려 하면 전(殿)이 좁아서 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전을 헐어서 남쪽을 물러 내어 더 모실 자리를 만들려고 하였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옛날의 협향의 위치는 태조가 동향, 소ㆍ목이 남ㆍ북향이었는데, 우리나라 종묘에는 협향의 의식이 없고 오직 원묘(原廟 즉 문소전)에만 협향이 있을 뿐이고, 그 위치가 옛날의 것이 아니니 이 기회를 타서 태조는 동향으로, 소ㆍ목은 남ㆍ북으로 서로 마주 보게 하면, 집을 헐어 고치는 폐단도 없을 뿐 아니라, 세속에서도 옛날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일이 있겠다.”
하여, 드디어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나라에 올렸다.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해 보니, 대신들은 원묘에는 옛날의 예를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이 위치를 정한 것이 벌써 140년이나 지났으니, 고칠 수가 없다 하여 선생의 의견은 행해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임금으로서 조상을 받드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종묘를 높여 중히 여기고, 원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문순(李文純 퇴계)은 지금에 와서 원묘를 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원묘에 나아가 옛날의 예를 행한다면 이 또한 변화에 대처하여 바른 것을 얻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임금이 이미 옛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신도 식견과 요량이 없어서 선비의 의견을 막아 버렸으니, 어진 이가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이-
이하는 제례(祭禮)를 말한 것이다.
임금이 일찍이 소(昭)ㆍ목(穆)의 제도를 물었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대개 종묘의 제도는, 태조는 동으로 향해 앉고 소(昭)는 북에서 남을 향하는데, 남은 그 밝음을 뜻함이며, 목(穆)은 남에서 북을 향하는데 북은 그윽하고 깊은 뜻을 취한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자리(태조)는 반드시 서에서 동을 향하고, 소ㆍ목은 좌우로 나누어 위치하여야 하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안도-
중국에서는 문묘(文廟 공자묘)를 추숭(追崇)한 호를 버리고, 선성(先聖)ㆍ선사(先師)라고 제호(題號)를 고쳤는데, 조정에서도 그 제도를 따르고자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의 덕은 봉증(封贈 벼슬이나 지위를 내려 줌)으로써 더하고 덜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호로써 높여 온 것이 여러 세대로 이미 오래되었고, 정자나 주자와 같은 큰 선비들도 아무런 이의가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깎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이 조치를 어찌 함부로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김부필이 묻기를,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정자와 주자 두 선생을 모시어 제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두 선생은 다 역학(易學)에 공이 있는 분들이다. 이미 서원 이름을 역동(易東)이라 하였으니,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우 좨주(禹祭酒 우탁(禹倬))를 배향(配享)한다면 실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서원의 모든 일이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학전(學田)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지키는 종들도 적은데, 갑자기 이렇게 중한 예(禮)를 벌였다가 결국에 태만하게 되면, 그것은 높이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홀대하는 것이니, 우 좨주만 모시어 편리한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가례》에, 공경이나 대부나 선비를 막론하고 4대조까지 제사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나라의 제도에는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하게 되어 있으니, 이런 예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라의 제도가 그러하니 감히 어기지는 못할 것이나, 효자나 자손(慈孫)이 옛날 예법을 따라 결연히 행한다면 어찌 안 될 게 있겠는가. 옛날에 소(昭)ㆍ목(穆)은 사당을 달리했기 때문에 월제(月祭)나 향상(享嘗) 때에도 제각기 그 제도가 있었으나, 뒷세상에서는 같은 집에 칸을 달리하는 제도가 되었고 고조(高祖)는 복이 있게 되었다. 만일 멀고 가까운 것으로 친하고 성긴 것을 삼아서 11월의 제사가 고조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면 사람과 신에 대한 미안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는 일찍이 그때의 재상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따위의 예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조정의 신하들이 나라에 아뢰어 소ㆍ목의 옛날 제도를 회복하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다시 무엇을 운운하겠는가.
나라 제도에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한다는 말은 더욱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7품 이하에 있을 때에는 비록 2대까지 제사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벼슬이 6품으로 오르면 마땅히 3대까지 제사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면 그때에는 신주를 더 추가하여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또 6품 이상은 3대까지 제사할 수 있는데 혹 죄로 말미암아 벼슬이 깎이면 증조(曾祖)의 신주까지 아울러 헐어야 한단 말인가? 한 번 만들고 한 번 헐어 버리는 것이 자손들의 벼슬이 높고 낮은 데 달리게 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 점이 특히 모를 일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세속에서는 흔히 고조의 제사를 모시지 않을 뿐 아니라 기일(忌日)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심하면 잔치놀이에까지 참여하는 일이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고조는 곧 유복친(有服親)인데, 어찌 감히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자나 주자도 이미 시행하였음은 예문을 참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왕(時王)의 제도가 이러하니, 어찌 저들이 제사하지 않는 것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다만 자기 스스로 도리를 다할 뿐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돌아가신 달이 윤달일 때는 그다음 돌아가신 윤달이 돌아와야 그 윤달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윤달은 정상적인 달이 아니다. 사람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항상 정상적인 달에 하는 것인데, 오직 그해에만 돌아가신 해의 달에 제사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하다. 제사는 보통 달에 지내야 할 것이고 돌아가신 날이 윤달이었다면 그날에는 재계하여 소식(素食)만 하고 제사는 지내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제삿날에 항상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제사 지내지만, 그것은 매우 예가 아니다. 아버지의 제사에 어머니를 제사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어머니의 제사에 아버지를 함께 제사 지낸다면 어찌 감히 높은 이를 대접하는 의리가 있다고 하겠는가. 우리 문중에서도 늘 이렇게 하고 있으나, 내가 종자(宗子)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죽은 뒤에는 이런 풍속을 따르지 말게 할 따름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제례에 있어서 《오례의(五禮儀)》를 참고해 보면 제찬(祭饌)의 그릇 수효는 공경ㆍ대부로부터 선비ㆍ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정해진 품수(品數)가 있는데, 그 품수를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제사 지내는 사람의 지위에도 분수가 있으니, 제사에도 그 지위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오례의》에는 따르기 어려운 것도 있으니, 음식에 마른고기[脯]ㆍ젓[醢]ㆍ과실은 가장 많고, 생선과 고기는 아주 적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 집에서 생선이나 고기는 얻는 데 따라 그래도 준비하기가 쉽지만, 마른고기나 젓이나 과실은 어떻게 항상 많은 양을 마련해 둘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반드시 《오례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춰서 제사해도 무방할 것이며, 다만 분수에 넘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제기의 수효에 있어서도 너무 번거롭게 할 것이 아니니, 번거로우면 모독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정결하게 할 수도 없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주자는 일찍이 소ㆍ목의 예가 오랫동안 폐지된 것을 탄식하고 《가례》를 지었는데, 도리어 그때그때 세속의 예를 따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어찌 시왕(時王)의 제도를 가벼이 고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예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행해지는 것이니, 온 세상이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빈 문자로서 만들어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답한 편지에서 옛날 예가 다시 회복되지 못하는 것을 깊이 탄식하고, 결국 끝에 가서는 ‘나라에 의견을 올려 그 하나하나의 틀린 점을 고치는 것이 가장 빠른 것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7월에 선생은 소명을 받고 서울로 왔다. 그때 이암(頤菴 송인(宋寅))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진사 성척(成惕)이 3대의 신주를 모시다가 뜻하지 않게 불이 나서 모두 태웠다. 내게 와서, ‘신주를 고쳐 쓰려면 어디서 써야 합니까?’라고 묻기에, 산소에 가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다시 생각하니 산소에 가서 써야 할 이치가 없을 듯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생에게 물어보겠다.”
하였다. 내가 이것을 선생께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산이나 들에다 장사를 치르고 제주(題主)를 마치면 즉시 혼을 모시고 돌아오는 것은, 그 신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 돌아와 편안히 계시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갑자기 불이 나서 신주가 타 버렸으니, 그 신혼(神魂)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니, 곧 전날 신주를 모셨던 곳에 빈자리를 만들어 위패를 고쳐 쓰고, 향을 피워 제사를 드려서, 그 흩어져 떠도는 신을 새 신주에 붙게 하면 된다. 전날에 이미 돌아온 혼을 어찌 다시 시체가 있는 곳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제 보니, 선생이 김이정(金而精)에게 대답한 것과 나에게 대답한 것이 같지 않다. 이정에게 대답한 것은 신유년(1561, 명종16)이요, 나에게 대답한 것은 무진년(1568, 선조1)이니, 선생의 만년의 정론(定論)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선생이 이정에게 답한 편지는 이미 문집(文集)에 보인다. 거기에는 “신주가 불에 탔을 때, 사묘(祠廟)만 타고 집은 남았다면, 집에서 위패를 써야 하고, 만일 집마저 다 타버렸으면 차라리 권도(權道)를 좇아 산소에서 위패를 쓰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이제 조진에게 답한 것과 상반되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조진(趙辰)-
묻기를,
“제물을 오른쪽에서부터 차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이는 까닭이다. 대개 왼쪽은 양이 되고 오른쪽은 음이 되는데, 오른쪽을 높이는 것은 신도는 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성일-
《가례》의 침묘(寢廟)와 정묘(正廟)의 뜻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침묘는 소ㆍ목이 있는 곳이요, 정묘는 합제(合祭)하는 곳이다. 이것은 《문헌통고(文獻通考)》ㆍ《주자대전》ㆍ《중용혹문》 따위의 책에 보인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제물을 올리고 술을 세 번 드린 뒤에 밥 뚜껑을 열고 삽시(扱匙)하니 겨울에는 찬이 모두 식어서 매우 미안합니다. 국수나 떡을 먼저 올리고 술을 세 번 드린 뒤에 찬을 올리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예문(禮文)에 뚜껑을 연다거나 뚜껑을 닫는다는 글이 없는데, 찬들의 기운이 가신 뒤에 비로소 뚜껑을 열게 되니 더욱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신령(神靈)은 기운에 응감하는 것이니, 삽시가 비록 술을 세 번 드린 뒤에 있지만, 그전에 뚜껑을 열어서 찬의 기운을 같이 올라가게 해도 무방하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지방(紙榜)으로 드리는 제사는, 신주로 드리는 제사와 다르니, 먼저 신을 청한[降神] 뒤에 신에게 보이는[參神]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신위(神位)를 모셔 놓고 지방이 있으면 신도 여기 계시는 것이니, 먼저 신에게 보이고 뒤에 신을 청해도 무방하다. 우리 집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세상 사람 중에 남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사람의 부모의 기일에 그 집주인의 물건을 빌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떠합니까? 또 여자가 시집에 있으면서, 친정 부모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남의 물건을 빌려 제사를 지낸다는 말을 나도 들었다. 요새 사람이 혹은 어떤 사명을 띠고 다른 고을에 가 있으면서, 부모의 기일을 당하여 이렇게 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다만 이것도 한마디로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제주(祭主)가 외지에 있는데도 집에서 직접 제사를 지내는 것은 원래 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살림이 몹시 가난해서 남에게 얹혀살고 있으나 자기밖에는 달리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다면 거기에 맞게 변통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부인이 시집에 있으면서 친정 부모의 기일에 제사 지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세속이 습관으로 되어 갑자기 금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만일 정침(正寢)을 피해서 지낸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시부모가 살아 계시다면 더욱 편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종자(宗子)가 그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 그 제사 드리는 신주도 마땅히 받들고 가야겠으나, 만일 그 문장(門長)이 조상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면 이내 본가(本家)에 머물러 두고 자기의 전택(田宅)에서 나온 소출로 제사를 받들게 하면서, 그 나머지 다른 신주만 모셔 가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친(親)이 다하지 못한 신주를 문장에게 맡겨 두고 가서는 안 될 듯하다. 그것은 종자나 문장이 모두 잘못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요새 세상에서는 기일이 되면 이틀 전부터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얼굴빛이 붉어지거나 입맛이 물리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상관없을 것이요, 그렇다고 아주 그것을 안 먹고 안 마시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예(禮)를 따라 그날만 소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세속의 예를 따라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반드시 여러 사람과 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대의 병통일세. 김이정도 이런 병통이 있는데 그래서 그대들은 남의 꺼림과 미움을 많이 받는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예제(禰祭)를 지내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제사는 나도 아직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답할 수 없다.”
하였다. -이국필-
언젠가 선생 부인의 제삿날에 내가 선생을 모시고 음복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기일에 술과 밥을 차려 놓고 이웃을 모아 대접하고 있으나, 그것은 아주 예가 아니다. 오늘은 마침 그대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불러서 같이 먹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 부인의 제삿날에 마침 감사가 찾아와 뵈었다. 선생은 제삿날이란 말을 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술과 고기로 대접하였다. 다만 안주를 내오는데 손님 것과 주인의 것이 달랐다. 감사가 기미를 알고 같이 소식을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일가의 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하려 할 때, 그 차례를 따라 제사를 모시고자 하면 여러 언덕을 오르내리기에 기운이 빠질 뿐 아니라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이 풀릴 것이요, 또 제물도 새것과 남은 것이 한데 섞이고 차고 더운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산소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고 혼을 인도해 와서 재궁(齋宮)에서 지방(紙榜)으로 합제(合祭)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무방하다.”
하였다.
“그러면 재궁이 아니라 깨끗한 곳에 단(壇)을 만들고 합제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더욱 좋다. 대개 옛날 사람은 정성이 있는 곳을 신이 임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지금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산소에 가고자 하니, 이 예는 옛날 예가 아니다. 더구나 묘제(墓祭)는, 예(禮)에 1년에 한 번 지내기로 되어 있는데, 요새 사람은 사철을 따라 꼭꼭 지내니, 이것은 후세의 풍속이다.”
하였다. -김부륜-
또 말하기를,
“산신제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제물을 마련하여 후하게 제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맏아들은 원래 처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중자(衆子 맏아들 이외의 여러 아들)로서 그 사위가 되었으면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남의 맏아들로서 남의 외동딸의 사위가 되었으면, 거기에는 큰 장애가 있어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저쪽이 이미 후사가 없는 데다가 양자도 없으면 내가 마땅히 제사해야 할 것인데, 자신은 종사(宗祠)를 받드니, 둘 다 행할 수는 없다. 요새 사람 중에는 다 같이 한 사당에서 제사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근본이 둘인 것이니, 참으로 말할 거리도 못 된다. 따로 사당을 세운다 해도 근본이 둘인 잘못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대처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처족(妻族) 중에 친분이 있는 자를 택해 노비를 나누어 주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조주(祧主 먼 조상 사당의 신주)를 제일 긴 방에다 옮겨야 하는데, 혹은 형편이 그리 되지 못할 때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 문중에도 그런 일이 있는데, 아직 때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감히 남의 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고는, 여러 번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성전-
묻기를,
“아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고, 또 그 뒤를 이을 양자도 없을 때에는 그 신주나 축문의 제사(題辭)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 신주에는 ‘옛 아내 아무 봉 아무 씨[故室某封某氏]’라고 써야 한다. 주자의 제자가 일찍이 이에 대해 물었더니, 주 선생은 ‘죽은 아내[亡室]’라고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망(亡)’ 자는 너무 박절하여 죽은 이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이므로 ‘고(故)’ 자를 쓰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축문의 고사(告辭) 또한 그와 같은데, 다만 고하는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남편의 성명을 써야 할 것이나, 부(夫) 자는 굳이 쓸 것 없다. 또 ‘감소고(敢昭告)’도 고쳐서 ‘근고(謹告)’라고 하여 ‘감소(敢昭)’ 두 자는 버리는 것이 혹은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였다. -김성일-
성전이 일찍이 말하기를,
“신주에 방제(旁題)를 쓸 때에 신주의 왼쪽에 쓰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런 줄 아느냐?”
하여,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인다 하니, 왼쪽은 곧 하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하였으나, 뒷날에 그것이 옳지 않은 줄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앙을 높은 것으로 삼는다면 방제를 쓸 때 굳이 위아래를 구별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때 김이정이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같은 집에서 다른 칸으로 하는 제도로 말한다면 신주의 왼쪽에 쓰는 것은 본래 하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ㆍ목의 위치에 있어서는 도리어 상위에 있게 되기도 하니, 상하를 따질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도 옳다.”
하였다. 성전이 자기의 설을 강하게 주장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정전서(二程全書)》나 《문공가례도(文公家禮圖)》로부터 《대명회전(大明會典)》이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이르기까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책에는 다 신주의 오른쪽에 쓴다고 했고, 오직 하씨(何氏)의 〈소학도(小學圖)〉에만 신주의 왼쪽에 쓴다고 했다. 만일 의리에 해롭다면, 비록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이라 하더라도 본래 꼭 따라야 할 것은 아니나, 조금도 의리에 해로움이 없는데도 옛날부터 전해 오는 주장을 버리고 어떤 이의 한 말만을 편협하게 주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옛날에 한문공(韓文公)이 ‘심하다, 사람들이 괴이함을 좋아함이여.’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곧 괴이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다. 성전이 다시 말하기를,
“《가례》에 ‘그 아래 왼쪽’이라 하였으니, ‘그’ 자는 곧 주신(主身)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자, 선생이 이내 《가례》를 내어 ‘입소석비(立小石碑)’ 밑의 소주에 있는 주자가 말한 조목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과 같다면 억지 주장을 세워서는 안 된다. 그대는 말해 보라. 그 왼쪽에 새겼다 했으니, 이 또한 비석의 왼쪽이냐? 만일 왼쪽이라 한다면 이것은 왼쪽에서부터 거꾸로 쓴 것이냐?”
하였다. 성전이 말하기를,
“이미 오른쪽을 상위로 삼았다면 비록 이렇게 쓰더라도 안 될 게 없지 않습니까?”
하자, 선생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가? 사람의 마음은 인판(印板) 같은데, 그대가 만일 모든 일에 자기 주장을 이같이 한다면 그것은 아주 마땅하지 못하다. 천만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주D-001]오재(五齊) : 오재는 옛날에 술을 만드는 법인데, 청탁(淸濁)을 가려서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다. 주례(周禮)에 “주정(酒正)이 오재의 이름을 분변하니 하나는 범재(泛齊)요, 둘은 예재(醴齊)요, 셋은 앙재(盎齊)요, 넷은 시재(緹齊)요, 다섯은 침재(沈齊)이다.”라고 하였다.[주D-002]참최(斬衰) : 오복(五服)의 하나인데, 굵은 베로 짓되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상복이다.[주D-003]재최(齋衰) : 오복(五服)의 하나인데, 조금 굵은 삼베로 지은 상복이다.[주D-004]기공(朞功) : 기(朞)는 1년 복, 공(功)에는 대소(大小)가 있는데, 대공(大功)은 9월 복, 소공(小功)은 3월 복이다.[주D-005]승중(承重) : 장손으로 아버지ㆍ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주D-006]외복(畏服) : 권위에 눌려서 입는 복인데, 적모(嫡母)가 입으므로 따라 입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주D-007]달을 바꾸는 제도 : 한 해 입을 복을 한 달로써 바꾸는 제도를 말한다.[주D-008]여묘(廬墓) : 부모나 어른의 거상에 그의 인덕을 사모해서 그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을 말한다.[주D-009]반혼(返魂) : 장사 뒤에 신주(神主)를 집으로 모셔 오는 것을 말한다.[주D-010]여소(廬所) : 상주가 거처하는 무덤가에 있는 초가를 말한다.[주D-011]추숭(追崇) :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에게 죽은 뒤에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