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포럼/퇴계선생

퇴계집_언행록 6_부록_실기(實記) [김성일(金誠一)]

청풍선비 2011. 4. 19. 16:42

퇴계집_언행록 6_부록

실기(實記) [김성일(金誠一)]

 

 

문인 김성일(金誠一) 지음

선생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고,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었다. 나이 겨우 10여 세에 그 숙부 송재(松齋) 우(瑀)에게 이(理) 자의 뜻을 물었다. 우가 대답하지 않자, 선생은 한동안 곰곰 생각하다가 “일이 옳은 것이 이(理)가 아니겠습니까.” 하여, 송재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나이 16, 7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한번은 계당(溪堂)을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이슬 맺힌 풀 곱고 고와 물가에 둘러 있고 / 露草夭夭繞水涯
작은 못은 맑고 맑아 티끌도 없네 / 小塘淸活淨無沙
구름 날고 새 지남이야 본래 서로 관계있지만 / 雲飛鳥過元相管
제비 가끔 수면을 차 물결 일까 두려울 뿐 / 只怕時時燕蹴波

 

하였다. 식자들은 그것을 보고 그 식견과 지취(志趣)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 생활에서는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바루어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되, 부드럽고 공손히 하였으며 한 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온종일 단정히 앉아 옷 띠는 반드시 반듯하게 하고 말이나 행동을 반드시 삼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아끼고 공경해서, 감히 거만을 떨거나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그 성질은 간결하고 담박하며 말이 적었고, 명리(名利)와 호화로운 생활에는 담담하였다.
일찍부터 과거의 업을 폐하고자 하였으나, 부형들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끝내 과거를 보아 급제에 올라, 몇 달이 못 되어 한림원의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김안로(金安老)가 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평소부터 선생을 꺼리던 터이라 언로에 있는 그의 패거리가 선생을 역적의 족속이라 하여 체직되었다. 외구(外舅) 권질(權礩)은, 곧 권진(權磌)의 형인데, 권진은 중종 때에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연좌되어 죽었다. 이 때문에 안로가 반대하였다. 안로가 퇴진하고서야 선생이 비로소 경연에 들어가 조정에 나갔으나, 명성(名聲)이나 세도를 가진 사람을 피하기 위하여, 비록 친한 사이라도 일찍이 그들과 왕래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공무를 마치고 퇴근해서는 반드시 조용히 앉아 책을 보았고, 맡은 일이 바쁘다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찍이 동호(東湖)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을 때에, 동료들은 모두 행동을 방탕하게 하며 거리낌 없이 날마다 술이나 시 짓기나 장난으로 일을 삼았으나, 선생은 단정하게 홀로 있으면서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해서, 습속에 물들지 않았다. 사람들도 모두 그 지조를 높이고 공경하며, 자기들과 다르다고 해서 시기하지는 않았다. 중종 말년에 두 윤씨(尹氏)가 서로 권세를 다투자, 선생은 이때부터 벼슬에 마음이 없었고, 계묘년(1543, 중종38)에는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갑진년(1544)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물(權勿)ㆍ정황(丁熿)의 무리와 함께 벼슬이 깎였는데, 이기(李芑)의 조카 이원록(李元祿)의 구원을 입어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에 이기가, 이원록이 자기를 속인다고 노하여 죄주려 할 때에, 그의 형 이원상(李元祥)이 그 집에 가서 애걸하였지마는 이기는 용서하지 않고, “이황은 반역의 무리들과 죄가 같거늘, 원록이 나를 속였으니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이기의 분은 그래도 풀리지 아니하여, 지평(持平) 이무강(李無彊)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으나, 대관으로서 말리는 사람이 있어서 드디어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외직을 힘써 구하여 단양ㆍ풍기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풍기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전의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건한 것이다. 서원의 공사가 시작은 되었으나 미처 마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여기 오자 학문을 일으키는 데 뜻을 두어, 모든 규모가 다 법에 맞게 하였으니,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선례를 본뜬 것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명종이 특별히 명하여 편액(偏額)을 내려 글씨를 주시니, 드디어 남방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그가 군수로 있을 때에는 맑은 바람처럼 깨끗하여 한 점의 사사로움에 얽히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몇 개의 짐짝이 있을 뿐이었다. 시내 위에다 정사를 짓고 이름을 한서(寒栖)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온 뒤로는 문을 닫고 앉아 책을 읽되, 아무리 더운 한여름이라도 공부를 거두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8)에 부름을 받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교육 행정이 문란하고 풍교(風敎)가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는, 선비들의 습관을 새롭게 진작시키고자 하여, 이에 사학(四學)에 두루 알려서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 습속은 이미 무너져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병이라 일컫고 그만두었다. 그 뒤에는 비록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랫동안 산직(散職)에 있었다.
을묘년(1555, 명종10)에는 병으로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그해 3월에는 나라에서 부를 뿐 아니라, 또 음식물을 내렸으나, 자신의 실정을 아뢰는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병진년(1556)에는 부제학에 제수되고, 잇달아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무오년(1558) 가을에는 벼슬살이의 다섯 가지 마땅하지 않음을 글로써 아뢰었는데, 명종은 크게 노하여 그 명령이 자못 엄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어나 서울로 올라가니, 공조 참판을 내렸는데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기미년(1559) 봄에는 말미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 있으면서, 호소하는 글[控辭]에 더욱 힘을 들였었고, 을축년(1565)에는 와서야 비로소 명령을 받아 체직되었다.
이량(李樑)이 정권을 잡아 사림을 해치고자 할 때에, 선생을 청론(淸論)의 우두머리로 몰아 죄를 가하려고 하였으나, 그 흉측한 음모를 이루지 못한 채 패하고 말았다. 명종 말년은 권세 있는 간사한 무리들이 이미 물러가고, 착한 사람들이 비로소 쓰일 때인데, 왕은 글을 내려 여러 번 부르면서, 공조 판서ㆍ대제학 등의 벼슬로 재촉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러간다고 하여서 나아감을 얻고, 작은 벼슬은 받지 아니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병이 위중하다고 하면서 끝내 벼슬을 받지 않고 돌아왔다. 그때 모든 음모하는 무리는 비록 없어졌으나, 왕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고, 어진 이들이 출사하였는데도, 그 하는 일들이 인심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선생은 이것을 걱정하면서 “기묘의 명현[人材]들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제도의 혁신을 서서히 하지 않고 과격하게 고치어 화를 불러 왔거늘, 하물며 오늘에는 인물이 별로 없는데 망녕되어 함부로 일을 시작하였다가는 패하지 않는 일이 드물 것이다.” 하였다.
정묘년(1567, 선조1)에는 제술관으로 부르므로 비로소 나아갔는데, 마침 명종의 상사를 만나서 《오례의(五禮儀)》의 상제(喪制)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하여,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를 참작해서 다시 정하고자 하였으나, 예관이 또한 좇지 않았다. 그래서 예조 판서를 내렸지마는 받지 않고, 병을 핑계하여 그날로 돌아왔다. 그때 산릉(山陵) 일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물러감이 의가 아니라고 하여, 그때 재상들은 산새에 비유하기까지 하였고, 선비들은 말하기를, “나는 그가 학문하는 사람인가를 의심한다.” 하였다. 문인 기대승이 글을 보내어 질문하였을 때에, 선생은 수천 마디 말을 되풀이하여 답했다.
그 대강 줄거리를 보면, “인산이 참담한데 상례 두구가 다 이르고, 백관은 돌아가신 이를 추모하여 널리 애통한 정을 펴건마는, 병든 신하는 할 수 없어서 옛 절에 와서 몸을 붙이고 있었는데, 마침 보내온 편지에 옛날의 의리로써 꾸짖었으니, 부끄러워 죽은들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처신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큰 어리석음이요, 중한 병이며, 빈 이름이요, 과분한 은혜가 그것입니다. 큰 어리석음으로써 헛이름을 참답게 하려면, 그것은 곧 망녕된 행동이 될 것이요, 중한 병으로써 과분한 은혜를 받들려고 하면, 그것은 염치가 없는 짓입니다. 내가 벼슬을 즐기지 않고 항상 몸을 물러나려는 것에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옛날 군자로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데 명분이 밝은 사람은, 한 가지 일도 놓치거나 지나치지 않다가도, 조금이라도 자기 직분에 실수가 있으면 반드시 몸을 얼른 떠났는데, 그도 임금을 사랑하는 정으로는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이 떠나는 것은 몸을 바쳐야 할 처지에 의리상 행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반드시 몸이 물러간 뒤라야 그 의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때에 있어서는 비록 차마 하지 못하는 정이 있더라도 부득불 의(義)에 굽히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산릉의 직분을 다 끝내어 정과 의를 아울러 다하는 것이 신하로서의 지극한 소원임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 산릉 일을 마치지 못하고, 정을 굽혀 의를 따르는 것은 신하로서 불행한 처사이지마는, 또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과 어버이는 한 몸이라 그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어서, 오직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버이와 자식은 천륜(天倫)에 속한 것이라 나아가 기르는 것에 가림이 없는 것이요, 임금과 신하는 의로써 합한 것이라 나아가 기르는 것에 가림이 있는 것입니다. 가림이 없는 것 부자간 에 있어서는 은정은 항상 의를 가리는 것이니, 버려야 할 때가 없는 것이요, 가림이 있는 것 군신간 에 있어서는 의가 혹 은정을 빼앗으므로 버리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서 봉양하는 것이나 죽어서 장사 지내는 데 있어서는, 그 법은 하나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내가 만일 병을 헤아리지 않고 길이 벼슬자리에 있었더라면, 거기서 진실로 물러나야 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신하인 나는 선대왕(先代王)의 넓으신 도량과 성한 덕을 만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용납받아서, 한가히 몸을 기르려던 16, 7년 동안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선대왕이 일찍부터 산야(山野)가 먼 지방의 신하로 길러 두고서, 꼭 대궐 밑에서 죽지 않게 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정을 따르고 의를 잊어, 거취와 생사의 지경에서 스스로 그 몸을 버리고자 하나, 또한 스스로 가벼이 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어떻게 떠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나아가는 것이 의가 되고, 내게 있어서는 물러나는 것이 의가 되니, 그대의 뜻에는 이 두 가지를 두고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고자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욕된 가르침이 있기를 아끼지 말아 주시오.” 하였다.
이 글 하나만 보더라도, 그의 평생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왕은 처음부터 부르시는 명령이 끊이지 않더니, 무진년(1568, 선조1)에 이르러 선생은 비로소 명령을 받들어 나아갔다. 선생은 오랫동안 백성들의 희망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의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써 세상의 치란(治亂)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조야(朝野)에서 서로 경하해 마지않았으나 선생은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세상일에 뜻이 없는 듯하였다. 대제학이나 이조 판서, 우찬성이라는 벼슬이 내려도 모두 사양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경연에 있을 때에 여섯 조목의 소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으며, 또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에서는 태조의 위패를 동쪽으로 향하도록 바로잡고 소(昭)ㆍ목(穆)의 차례를 남북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당시 재상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에 묘당(廟堂)과 관각(館閣)이 일을 하기만 하면 서로 어긋나서, 그 오가는 마음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차차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은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위와 아래는 서로 거리가 멀어졌다. 그래서 기사년(1569, 선조2)에 글을 올려 사직을 빌었더니, 임금이 곧 허락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히 여겨 서로 다투어서 말리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러 명사들이 그를 강가에까지 전송할 때,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선생이 비록 거취를 태연히 하였으나, 실로 영지(靈芝)에서 이별하던 자리의 감회가 있었다. 그래서 강가의 절에서 이틀 밤을 새우면서, 조정을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편지를 보내 이별을 하니, 선생은 다른 말이 없고 글로써,

그래도 종남산(終南山)이 그리워 / 尙憐終南山
머리 돌려 맑은 위수 바라보네 / 回首淸渭濱

 

라는 10자를 써 주었다. 그가 물러나려 할 때에 임금께서 만나보시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물었다.
그때에 그가 아뢴 말은 어느 것이나 국가의 큰 계획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임금께서 용모를 바꾸시었다. 물러나서도 잇달아 글을 올려 벼슬을 그만두기를 빌었으나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의 병이 중할 때에는 의원을 보내어 진맥까지 시키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 들으시고 못내 슬퍼하시어, 사흘 동안 조회를 거두시고, 영의정으로 벼슬을 추증하시어 한 등급을 더하였다. 선생은 병이 중해지자 유언하기를, “비석은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을 세워 거기에 제하되,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라.” 하고, 또 예장을 사양하라고 경계하였으니, 이것은 그 뜻을 밝힌 것이다. 그때의 사람들은 선생에게 의지하기를 태산같이 하였으므로, 선생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자, 아는 이나 모르는 이나 모두 흐느끼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서로 더불어 위패를 만들어 곡하였다. 그 고을에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시골의 무지한 농부까지도 모두 그를 위해 소식(素食)하고, 장사 때에는 원근에서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비록 문헌의 나라라고 일컫지마는, 도학은 밝지 못하고 인심은 어리석어,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이름 난 사람이 몇 명 없었다. 그런데 기묘사화에 패한 뒤로 선생에게는 위로는 스승될 만한 이가 없었고, 곁에는 도와주는 친구도 없이 초연히 혼자서 성현의 책을 읽고 얻은 것이 있었다. 그러다가 중년 이후로부터는 학문을 강하기에 더욱 마음을 썼고, 도를 전하는 책임을 더욱 무겁게 생각하였으며, 학문하는 길은 한결같이 주자를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 책을 얻기만 하면 마음을 기울여 연구하기를 여러 해 동안 하였다. 또 읽고 생각할 때에는 잠자고 밥 먹기를 잊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환하게 깨닫고 힘차게 행했는데, 평생의 힘을 얻은 것이 대개는 이 책에 있었다.
그 학문의 대개를 한번 들어 보면, 경(敬)을 주로 하는 공부가 처음과 끝을 관찰하였고, 동과 정을 겸했으되 그윽히 혼자 있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우에는 더욱 엄하였다. 또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공부는 체와 용을 하나로 하고 근본과 말단을 두루 통해서, 참다운 지식과 진실한 얻음이 경계에까지 깊이 나아갔었다. 일상생활에 쓰는 말이나 행동 같은 예삿일에도 마음을 쓰고, 터럭같이 미미한 일까지도 자세히 살폈으며, 평이하고도 명백한 것으로써 도를 삼았어도 남이 미처 알지 못하는 묘함이 있었고,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과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을 덕으로 삼았어도 남이 넘지 못할 실속이 있었다. 그 규모는 매우 커서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의 잘함으로써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았고, 그 나아가 닦음은 매우 용맹스러워서 차라리 자기의 힘을 다하다가 미치지 못할지언정 일찍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스스로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순순히 차례가 있어서 속히 이루려고 서두르는 병통이 없었고, 잠자코 공부를 더하여 남모르게 날로 밝아지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여러 성인의 글을 널리 연구하되 언어와 문장의 말단에 그치지 않았고, 말은 지극히 간략한 속에까지 미쳐 가되 유심(幽深)하거나 현묘하지는 않았다. 도가 이미 높았으나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덕이 이미 높았으나 겸연(歉然 모자라는 모양)히 얻은 것이 없는 듯하였다. 심성(心性)을 기르는 데는 날로 더욱 순수하였고 단단했으며, 실제의 행동에 있어서는 날로 돈독함을 더하였다. 그래서 위로 향하는 공부는 끊임없이 나아가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으니, 그 믿음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소임을 중하게 여기고 먼 것을 계획하려는 뜻이 이와 같았다.
그 나타난 행실에 있어서는 자기를 다스리기에 매우 엄하여, 음탕한 음악이나 간사한 예는 마음에 붙이지 않았고, 사납고 거만하거나 간사하고 치우친 기운은 몸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본보기나 법도이었고, 말은 도덕이나 인의(仁義)였었다. 일어나 있을 때는 반드시 의관을 반듯하게 하여 남의 눈을 우러렀고, 혹 책상을 대하여 책을 보거나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해가 질 때까지 공경하고 삼가서, 한 번도 게으른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었다. 집을 다스림에는 법이 있어서, 자손들 어루만지기를 사랑으로써 하고, 그들을 인도하기를 의리에 떳떳하게 하였다.
집안사람을 거느림에는 너그러움으로 하되 삼가고 조심함으로써 경계하였으니, 온 집안은 모두 편하고 즐거우며 엄숙하고 화목해서, 별로 애쓰지 않아도 모든 일은 저절로 질서가 있었다. 살림은 본래 맑고 가난하여 집은 겨우 비바람을 가렸고, 거친 밥에 나물 반찬으로 사람들이 견뎌 내지 못할 정도였으나, 선생은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상을 제사하는 데는 정성과 효도를 다하고, 형을 섬기는 데는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일가들에게는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고, 외롭고 궁한 이는 모두 불쌍히 여기었다. 남을 대할 때에는 공경해서 예로 하였고, 자기에 대해서는 간략했으나 도를 다하였다. 기뻐하고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욕하고 꾸짖음을 남에게 미쳐 가지 않게 하였으며, 아무리 어쩔 줄 모를 다급한 때에 있어서도 한 번도 말을 빨리하거나 조급한 얼굴빛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의(義)와 이(利)의 구별에 엄하고, 가지거나 버리는 것을 분간함에 자세하였으며, 의심을 따지고 숨은 것을 밝혀서 털끝만 한 일이라도 그저 예사로 지나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진실로 의가 아니면 녹이 아무리 많아도 받지 않았고, 지푸라기만 한 것이 생겨도 취하지 않았다.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남의 착한 행실을 보면 몇 번이라도 칭찬하고 격려하여 그것을 반드시 성공하게 하였고, 남의 잘못된 행실을 들으면 되풀이하여 탄식하고 아껴서 반드시 그것을 고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모두 그에게서 유익함을 입어, 누구나 그를 사모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착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그에게 들릴까 두려워하였다. 자기의 후배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염증도 내지 않았고 게으르지도 않았으니, 비록 병을 앓더라도 강론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만년에는 도산 기슭에 정사를 지었는데, 온 집안이 적막했으나 오직 책만은 벽장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그 속에서 지내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이치를 찾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남모르게 수양해서 그런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었으니, 사람들은 감히 그 공부의 정도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오직 그 속에 쌓인 것이 겉으로 나타나 마음은 넓고 몸은 펴지고 얼굴은 윤택하고 등은 둥근 실상을 저절로 가릴 수 없음을 볼 뿐이었다. 가슴속은 환히 트여 가을 달이나 얼음 항아리 같았고, 기상은 따뜻하고 순박하여 순정한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 같았다. 웅장하고 무겁기는 산악과 같았고, 고요하고 깊기는 깊은 못과 같았다. 단정하고 자상하며, 한가하고 편안하며, 독실하고 두터우며, 참되고 순수하여 겉과 속이 하나와 같았고, 사물과 나와의 사이가 없었다. 바라보면 의젓하여 공경할 만큼 엄숙한 태도였고, 나아가면 따뜻하여 사모할 만큼 덕이 있어서, 비록 무지한 지아비나 미치광이라도 그 집을 바라보기만 하면 교만한 기운이 저절로 사라졌다. 그가 말년에 세상에 나온 것은 무엇을 해 보려는 징조였으니, 경연에서 강할 때나 상소나 차자로써 자세히 논할 때에는 한결같이 성현의 학문을 밝히고 왕도를 행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래서 세상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고 자루와 구멍이 서로 맞지 않았으나 끝내 도(道)를 굽혀 남들을 따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일할 만한 때를 만나게 하고 이룰 수 있을 만한 지위에 있게 하며 좋은 왕을 만나 도를 행하게 하였더라면, 그 사업이 어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선생은 일찍이, “벼슬하는 것은 도를 행하기 위한 것이지 녹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40세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였고, 다시 네 조정을 거쳤지만 그 나아가고 물러남에는 한결같이 의를 따랐다. 만일에 의에 있어서 온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몸을 받들고 물러갔으니, 이렇게 한 것이 전후로 무려 일곱 번이었다.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가기를 쉽게 한 지조는, 비록 맹분(孟賁)ㆍ하육(夏育) 같은 자라도 빼앗지 못하였을 것이다.
근세의 사대부들은, 책을 읽으면 오직 과거에 오르는 이익만을 알고 성현의 학문이 있는 줄은 모르며, 벼슬을 살면 오직 임금의 사랑이나 녹을 먹는 영화만을 알고 깨끗이 물러나는 절개가 있어야 하는 줄을 몰라서, 그저 흐리멍덩하게 염치도 의리도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 한 번 일어나자, 사대부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도리가 저기 과거의 이익이나 녹을 먹는 영화 에 있지 않고, 여기 성인의 학문이나 물러날 줄 아는 절개 에 있는 줄을 알아서, 가끔 선생의 풍도를 듣고 흥기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학문을 시험해 보지는 못했으나 그 공덕과 교화가 사람에 미친 것이 적지 않았다. 선생은 여러 유학자들의 좋은 점을 한데 모아 크게 이루어서, 위로는 끊어진 성리의 학통(學統)을 잇고 아래로는 뒤에 오는 학자들의 길을 열어서, 공ㆍ맹ㆍ정ㆍ주의 도로써 불꽃처럼 환하게 이 세상을 밝혔으니, 우리 동방에서는 기자 이후로 이 한 분이 있을 뿐이었다.
남명(南冥)은 “이 사람은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학문을 가졌다.”라고 하였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그 마음은 가을 달이나 찬물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 제자 조목(趙穆)은 “그 학문은 주자의 적통(嫡統)이다.”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모두 이를 두고 “말을 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지은 책으로는 《이학통록(理學通錄)》 《계몽전의(啓蒙傳疑)》 따위가 있어서 세상에 전해지고 있고, 학자들은 그를 높여 퇴계 선생이라 부른다.

[주D-001]나이 겨우 10여 세 :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나이 10세가 되면 바깥 스승을 모시고 밖에서 자며 글씨와 셈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라고 하였다.
[주D-002]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 시대에 문신(文臣) 중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선비에게 휴가를 주어 조용한 처소에서 공부를 시키고 공급을 후하게 하고 대제학(大提學)이 지도한 것을 말한다. 독서하는 장소가 용산 강상(江上)에 있었으므로, 동호(東湖)의 독서당이라 하였다.
[주D-003]두 윤씨(尹氏) : 당시의 두 외척 세력인 대윤(大尹)의 윤임(尹任)과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을 말한다.
[주D-004]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 중국 강서성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峰) 기슭에 있는 서원이다. 당나라 때부터 전해 오던 서당을 남송 때 주희(朱熹)가 크게 중건하고 학풍을 일으켰다.
[주D-005]영지(靈芝)에서 …… 감회 : 영지는 절 이름이다. 송나라 경원(慶元) 초에 주희가 한탁주(韓侘胄)에 의하여 나라를 떠나게 되었을 때 영지사(靈芝寺)에 묵었는데, 동료들이 전송을 나와 시를 읊은 일이 있다.
[주D-006]그래도 …… 바라보네 : 종남산(終南山)과 위수(渭水)는 모두 장안(長安) 부근에 있으니, 우리나라의 남산과 한강을 비유한 것이다. 이때 홍섬(洪暹)이 써 준 시는 “백구 물결이 호탕하니, 만리 멀리 떠나는 걸 누가 말리랴.[白鷗波浩蕩, 萬里誰能馴]”인데, 이 구절과 퇴계의 답시는 모두 두보(杜甫)의 〈증위좌상(贈韋左丞)〉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