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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 졸본부여(卒本扶餘)

청풍선비 2011. 4. 19. 18:32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 졸본부여(卒本扶餘)

 

“동부여(東扶餘)가 도읍을 동쪽 바닷가로 옮겼다.” 했으니, 동쪽 바닷가는 다 옥저(沃沮)의 땅으로, 그 사이에는 발붙일 곳도 없으니, 생각건대, 그 동쪽으로 가까운 곳은 옥저와 통하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요, 꼭 옥저의 경계까지 이르러간 것은 아니다. “고주몽(高朱蒙)이 화를 피하여 서쪽 졸본(卒本)으로 들어갔다.” 했으니,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 그 아비가 이미 부여의 옛 땅에 도읍하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아비의 나라를 넘어서 다른 곳으로 달아났겠는가? 더욱이 주몽은 달아나면서 빌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했으니, 천제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의 아비를 이르는 것이며, 기필코 그의 아비를 찾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백제기에, “주몽은 화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그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었으므로 둘째 딸을 주몽의 처로 주었으며, 왕이 죽자 주몽이 계승했다.” 하였으니, 백제의 온조 역시 주몽의 아들인데, 그 설화가 또 어찌 주몽이 나라를 세운 사실과 틀리는가?
어떤 이는, “주몽이 나라를 세운 뒤에 부여왕의 딸을 맞아 아내를 삼았고, 그 뒤에 그 땅을 병합하여 그곳의 왕이 되기까지 하였는데 온조는 바로 그 나라의 외손이므로 그의 유래를 별도로 기록하였다.” 하였으니 고구려기(高句麗紀)에서 빠진 것도 이치로 보아 그럴 듯하다.
“주몽이 처음 졸본에 도읍한 것은, 교(郊)제사 지낼 돼지를 잃어버림으로써 국내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했으니 돼지를 놓친 지역이 어찌 극히 먼 지경이었겠는가?
당(唐) 나라 총장(總章) 2년에, “압록강 북쪽의 항복한 성이 이미 11개였다.”고 했는데 국내주(國內州)가 그 속에 끼었으니, 그렇다면 졸본은 역시 압록강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통고》에 마자수(馬訾水)의 한 이름은 압록강인데 근원이 말갈 백두산에서 나와 국내성의 남쪽을 지난다.” 했으니, 압록강에서 멀고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고, 《성경지》에, “옛날 부여국이라는 것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 리에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었다.” 하고, “동명(東明)의 무덤은 개평현(盖平縣) 동병산(東屛山)에 있다.” 했으니, 또한 증명할 수가 있다 하겠다.
대개 해부루가 처음 졸본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옮겨갔으므로 해모수는 실상 졸본의 옛 땅에 웅거했었으며, 주몽이 또한 성천에서 화를 피하여 졸본으로 들어와서 아비를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던 것인데, 똑같이 부여라는 국호를 썼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성천을 졸본이라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