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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法華)ㆍ금강(金剛) 두 경(經)의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2)

청풍선비 2011. 4. 30. 23:50

법화(法華)ㆍ금강(金剛) 두 경(經)의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12)

 

오주연문장전산고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 석전잡설(釋典雜說)

 

옛부터 세상에서 불전(佛典)에 현혹된 자들을 이루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불경 중에서 더욱 특이한 것은 《법화》ㆍ《금강》 두 경이 있는데, 나는 대단히 괴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송(宋) 나라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문충은 구양수(歐陽脩)의 시호)이 영주 자사(穎州刺史)로 있을 때, 관기(官妓)중에 노미아(盧媚兒)란 여인이 있었는데 자색(姿色)이 단아하고 빼어나 입 속에서 언제나 연꽃 향내가 풍기었다. 그런데 하루는 촉(蜀) 지방의 종이 노미아를 보고 말하기를 “이 여인은 전세(前世)에서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법화경》을 20년 동안 외어 오다가, 한 생각을 잘못한 탓으로 마침내 이 세상에 태어나 관기가 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문충공은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뒷날 관기에게 “네가 과거에 《법화경》을 외었느냐?” 하고 묻자, 관기는 “속세에서 몸을 버린 처지라 욀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문충공은 《법화경》을 가져다 관기에게 보여주도록 하니, 관기는 한 번 보고서는 마치 평소에 익숙한 책처럼 외더니, 다른 불경으로 교환한즉 외지 못하므로, 문충공은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었다.
그리고 《과보문견록(果報聞見錄)》청(淸) 나라 양식전(楊式傳) 지음에는 “여요현(餘姚縣)은 지역은 넓어도 밭이 적어 간혹 목화를 심어 생활한다. 그런데 순치(順治 청 세조(淸世祖)의 연호) 갑오년 여름 목화꽃이 만발할 때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크게 발작하여 목화밭 두어 이랑에 벼락이 떨어져 목화꽃이 모두 그을리고 탔는데, 그 중앙 몇 척(尺)쯤 되는 넓이엔 목화꽃이 옛날 그대로 활짝 피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파 헤쳐 보니, 그 속에 흰 오공(蜈蚣 지네) 한 마리가 있어 길이는 한 자쯤 되는데 등에 《법화경》 한 장을 짊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오공은 사람에게 해독을 주는 것이므로 하늘이 죽이려 하였으나, 그 등에 《법화경》을 짊어져서 모면한 것인 줄 알았으니 《법화경》은 하늘도 이처럼 소중히 여긴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 오공을 잡아 때려죽였다. 살펴보건대 《법화경》은 한 질이 10권이다.” 하였다.
《몽계필담(夢溪筆談)》 송(宋) 나라 심괄(沈括)이 짓다 에는 “영주(郢州)에 사는 어부(漁夫) 한 사람이 한수(漢水)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다가 어느 깊은 곳에 이르러 그물을 들어내면서 무거움을 느꼈다. 어부는 마침내 한 석함(石函)을 얻었는데 한 자 남짓한 길이에 둥글고 곧아 마치 부러진 서까래처럼 생겼다. 어부가 그걸 세밀히 관찰해 보니, 수많은 조개들이 고기 비늘처럼 즐비하게 붙어 있어 매우 단단하였으므로 칼 따위로 그 한쪽을 도려내어 책 한 권을 입수하였는데, 바로 당(唐) 나라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연간에 만들어진 《금강경(金剛經)》으로서, 제지(題誌)도 매우 상세하고 자법(字法)도 기특하였으며, 그 끝에는 의박사 섭비양현령(醫博士攝比陽縣令) 주균(朱均)이 시주(施主)했다 하였다.
비양현은 바로 당주(唐州)의 속읍(屬邑)이지만, 이 《금강경》이 어느 연대에 물 속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금강경》은 앞뒤가 조금도 물에 젖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금강경》은 영주 지방의 호족 이효원(李孝源)이 입수하였다. 이효원은 평소부터 불교를 신봉한 터라, 입수한 《금강경》을 보물처럼 여기어 조개통[蛤筩]에 간직, 다시 물 속에 넣고 공양(供養)하면서 길러, 손님이 찾아와 보려고 하면 꺼내어 보여주곤 하였다.
그 뒤 이 효원은 《금강경》을 조개가 감싸고 있던 기이한 일에 느낀 바 있어 집안 돈 만여 관(貫)을 시주하여 《금강경》 한 질을 베껴 영주 흥양사(興陽寺)에 보존시켰는데, 특별히 장엄하고 화려했다.” 하였다.
그리고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은 《금강경구이(金剛經鳩異)》란 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금강경》을 읽으면 좋은 보응(報應)을 받는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금강경》은 한 질이 한 권이다.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고월두다(古月頭陀)는 흡현(歙縣) 사람으로 성은 호씨(胡氏)요 이름은 명훈(明勳)이며 자는 반암(半菴)이다. 그는 순치(順治) 병술년에 연경(燕京) 입구에서 살았는데, 두 무릎에 갑자기 종기가 발생하여 통증이 뼛속까지 사무쳐 수일이 경과한 뒤에는 종기가 완연히 사람 얼굴처럼 형성되어, 눈썹ㆍ눈ㆍ입ㆍ코가 모두 갖추어졌다. 그래서 그는 의원 1백 30여 명을 교대하여 치료하였지만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여러 차례였다. 그러던 중 신묘년 12월 7일에는 종기가 갑자기 사람처럼 말하기를 ‘나는 양(梁) 나라 때 노소용(盧昭容)이다. 그런데 그대가 낙양궁(洛陽宮)에서 나를 살해하였기 때문에 지금 그대에게 보복하려는 것이니, 의원이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는가? 불전(佛前)에 나아가 잘못을 뉘우치면 가능할 것이다.’ 하였다. 얼마 후 호반암은 병중에서 깨어난 즉시 의원들을 돌려보내고, 전생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병이 치료되기를 기원, 불경을 쓰기 시작하여 《수참(水懺)》을 9권까지 쓰고 나니, 마침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설 수 있자 36권을 끝마쳤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서 《법화경(法華經)》ㆍ《화엄경(華嚴經)》을 각각 한 질씩 쓰고 나니, 마침내 걸어다닐 수 있었고, 또 《열반경(涅槃經)》ㆍ《금광경(金光經)》ㆍ《심지관경(心地觀經)》ㆍ《보은경(報恩經)》ㆍ《금강경(金剛經)》등 5백만 자(字)를 쓰고 나니, 무릎 종기가 마침내 완치되었다. 뒷날 호반암이 진주(眞州)에 있을 적에 귀신을 내려 점치는 자가 있었는데, 점쟁이가 노소용의 모습을 그려 놓고 호반암을 맞아 함께 한 자리에 앉혔는데, 머리를 봉계(鳳髻)로 장식하고 궁의(宮衣)를 입은 노소용의 생전 모습과 꼭같은 그림이었다. 이에 호반암에게, 낙양궁에서 본 노소용의 모습이 지금 그림과 같으냐고 물으니, 호반암은 깜짝 놀라며 두렵게 여겼다. 호반암은 천계(天啓) 연간에 중서사인(中書舍人) 벼슬을 하였는데, 일찍이 좌 충의공(左忠毅公)의 해골(骸骨)을 거두어 장사지낸 일이 있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호반암의 일이,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이 지현법사전(知玄法師傳) 뒤에 쓴 글과 아주 비슷하므로, 역시 감주의 글도 여기에 덧붙여 변증한다.
감주가 지현법사전 뒤에 기록하기를 “《불조통기(佛祖統紀)》에 ‘지현법사가 성도(成都)에서 올라와 희종(僖宗)을 알현하니, 희종이 융숭한 예로 대우하여 오달(悟達)이란 법호를 내려주었다. 얼마 후 지현법사가 구룡산(九隴山)으로 돌아가 참선(參禪)하는 중에, 보살(菩薩)이 나타나 이마를 어루만지며 설법을 하여 주고는 바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깐 뒤에 지현법사는 구슬 한 개가 자기의 왼쪽 다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왼쪽 다리가 불룩하게 부어오르면서 몹시 아프고 그 위에 조조(晁錯)란 성명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자 지현법사는 전생에 지은 업보(業報)로 체념하고 바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편안히 누워서 입적(入寂)했다.’ 하였다. 그리고 《신승전(神僧傳)》을 살펴보면 ‘지현법사가 우연히 중 한 사람을 만났는데, 중이 가마라질(迦摩羅疾)이 걸렸기에 지현법사가 병 간호를 지성스럽게 하여 주었다. 그 뒤 작별할 때에 이르러 그 중이 지현법사에게 말하기를 「스님이 뒷날 어려운 일이 있게 되면 서촉(西蜀) 팽주(彭州)에 있는 다룡산(茶隴山)으로 와서 소승을 찾아주시오. 그러면 소나무 두 그루가 표시되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런 뒤에 지현법사가 안국사(安國寺)에 주거하였는데, 희종(僖宗)이 예로 대우하여 침향(沈香)으로 만든 방석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지현법사의 무릎에 사람 얼굴을 닮은 종기가 갑자기 생겨 눈썹ㆍ눈ㆍ입ㆍ이가 모두 구비하여 음식을 먹이면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것이었다. 지현법사는 전일 중의 말이 기억나 다룡산으로 들어가 찾아보니, 과연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절이 엄연하게 자리잡고 있고, 전일에 만났던 중이 나와 영접하면서 매우 반가워 하였다. 마침내 지현법사가 그 절에 머물러 자면서 종기로 고생하는 것을 이야기하니, 중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다룡산에 샘이 있으니 내일 아침에 씻으면 바로 치료될 것입니다.」하였다. 날이 밝자 지현법사가 샘이 있는 곳으로 가 막 샘물을 움키려는 찰나에, 종기가 갑자기 사람처럼 말하기를 「안 되오. 당신은 《서한서(西漢書)》를 읽지 않았소?」 「읽었다.」 「당신이 《서한서》를 이미 읽었다면, 어찌 원앙(袁盎)이 조조(晁錯)를 죽였던 역사를 모르오? 당신은 바로 원앙의 후신이요, 나는 바로 조조이오. 여러 세대 동안 당신에게 보복하려고 하였지만, 당신이 10대토록 중이 되어 계율(戒律)을 엄정하게 지키기 때문에 보복할 틈을 얻지 못하였소. 그런데 지금엔 당신이 임금의 은총을 받아 지나치게 사치하여 공명과 재리에 대한 마음이 싹텄기 때문에, 당신에게 보복할 수 있었소. 그런데 가낙가존자(迦諾迦尊者)가 삼매 법수(三昧法水)로 나를 씻도록 하였으므로 나는 이만 떠날 것이니,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하였다. 그래서 지현법사는 샘물로 종기를 씻어 마침내 완치되었는데, 머리를 돌려보니 절은 흔적이 없었다. 그러자 지현법사는 그곳에 지팡이를 꽂아 놓고 《수참(水懺)》3권을 저술하였다.’ 했다.” 하였다.

 

《수참(水懺)》 : 서명(書名). 당 의종(唐懿宗) 때 오달법사(悟達法師) 지현(知玄)의 무릎 위에 사람의 얼굴같이 생긴 창병(瘡病)이 났는데, 어떤 신승(神僧)의 말에 따라 참회(懺悔)를 닦고 삼매수(三昧水)로 씻자 창병이 나았으므로, 오달법사가 《자비수참(慈悲水懺)》3권을 지었다 한다. 《神僧傳》
가마라질(迦摩羅疾) : 황달병(黃疸病)의 일종으로, 열병(熱病) 또는 대풍병(大風病)이라고 한다.
원앙(袁盎)이 …… 역사 : 한 효경제(漢孝景帝) 때 원앙과 조조(晁錯)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았는데, 끝내는 원앙의 주청(奏請)에 의해 조조가 복주(伏誅)되었다. 《漢書 卷49 袁盎晁錯傳》
삼매 법수(三昧法水) : 삼매는 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망념(妄念)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법수는 번뇌의 불을 꺼서 소멸시키는 법력(法力)을 물에 비유한 것으로, 다같이 수도(修道)하는 양상을 가리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