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金生)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
김생(金生)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34)
오주연문장전산고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 인물(人物) - 한국
세상에서 신라의 김생을 동국(東國) 제일의 명필로 친다.《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하였다.
송 휘종(宋徽宗) 숭녕(崇寧) 연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김생의 글씨를 보고,
하였고,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의 사단(史斷)에 “송 나라 숭녕 연간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 나라에 들어가 변경(汴京)에 머물러 있을 때 한림 대조 양구와 이혁이 황제의 칙명으로 그림 족자[圖簇]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에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였는데 두 사람이 보고 웃으며 ‘천하에서 우군을 제외하고는 어찌 이 같은 묘필(妙筆)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므로 홍관이 누차 해명해 주었으나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하였다.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는 동경서당 집고첩(東京書堂集古帖)에 쓰기를,
하였고, 이상국(李相國) 이름은 규보(奎報) 은 서결평론 서(書訣評論序)에 쓰기를,
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전하기를,
하고 또,
하고 또 청룡사(靑龍寺)의 액자를 썼는데, 그 주위에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 있다고 하니, 마땅히 김생을 신필(神筆)의 제일로 쳐야 하겠다.
《예성야록(蕊城野錄)》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음 에,
하였다.
《지리지(地理誌)》에,
“안동(安東)의 청량산(淸涼山)은 모두 36봉(峯)으로 태백산(太白山)에서 낙맥(落脈)되어 예안강(禮安江) 위에 이르러 우뚝 솟았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토산(土山) 몇 봉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으나 강을 건너 동부(洞府)에 들어가 보면 4면(面)에 석벽(石壁)이 둘러졌는데 그 둘레가 4장(丈)쯤 되고 돌들이 기괴하고 험악하여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안에는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곧 최고운이 거기에서 바둑을 두던 곳으로 바둑판과 똑같은 돌이 있고 또 연대사(蓮臺寺)가 있는데 거기에는 신라 김생의 친필로 된 불경(佛經)이 많으며 다른 사찰(寺刹)에도 그 친필이 있다.”
하였다.
오출자(五黜子) 김백련(金百鍊)이 일찍이 용(龍)의 문(文)과 무(武)를 논하면서,
“관동(關東) 해금강(海金剛) 밑에 용이 있는데 그 용은 문한(文翰)을 숭상하였고 신라 시대에는 그 용의 아들이 김생에게 와서 서법(書法)을 배운 때문에 김생의 글씨가 그 용의 처소에 많이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비록 황당(荒唐)하기는 하나 이분의 황당한 말 가운데에는 더러 맞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찌 꼭 믿을 수야 있겠는가. 그저 수록하여 이문(異聞)에 대비할 뿐이니, 이는 마치《수신기(搜神記)》나《유양잡조(酉陽雜俎)》와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충주(忠州)의 깊은 산골짜기에 살고 있다. 이에 이 지방의 옛날 유명한 인사(人士)들을 상상해보면 신라 시대에 우륵 선인(宇勒仙人)과 임강수(任强首)가 있는데, 그 중에도 김생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또 김생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地名)으로는 김생면(金生面)이, 강명(江名)으로는 김생탄(金生灘)이 있어 세속에서 김곶(金串)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른바 김생사(金生寺)의 옛터도 아마 이 부근일 터인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