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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金生)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

청풍선비 2011. 5. 1. 01:01

김생(金生)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34)

 

 오주연문장전산고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 인물(人物) - 한국

 

세상에서 신라의 김생을 동국(東國) 제일의 명필로 친다.《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신라 소성왕(昭聖王) 원년(800)은 곧 당 덕종(唐德宗) 정원(貞元) 16년인데, 소성왕의 휘(諱)는 준옹(俊邕)이니, 휘가 경신(敬信)인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고 그 부친은 인겸(仁謙)이다. 그가 당 덕종 정원 15년(799)에 즉위, 정원 16년에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2년째였고, 애장왕(哀莊王) 중희(重熙)가 즉위하니 소성왕의 아들이다. 또 신경준(申景濬)의《동문휘고(同文彙考)》에 “김생의 이름은 구(玖)이다.” 하였는데, 무엇을 의거해서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 김생이란 자가 있어 글씨에 능하고 불교를 좋아하면서 초야에 숨어 사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손을 떼지 아니하여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다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였다.
송 휘종(宋徽宗) 숭녕(崇寧) 연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김생의 글씨를 보고,

“우군(右軍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벼슬 이름)의 진필(眞筆)을 오늘에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였고,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의 사단(史斷)에 “송 나라 숭녕 연간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 나라에 들어가 변경(汴京)에 머물러 있을 때 한림 대조 양구와 이혁이 황제의 칙명으로 그림 족자[圖簇]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에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였는데 두 사람이 보고 웃으며 ‘천하에서 우군을 제외하고는 어찌 이 같은 묘필(妙筆)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므로 홍관이 누차 해명해 주었으나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당 예종(唐睿宗) 경운(景雲) 2년(711)에 나서 당 예종 경운 2년은 곧 신라 성덕왕(聖德王) 휘(諱) 흥광(興光) 10년이다.《당서(唐書)》에는 흥광이 지성(志誠)으로 되어 있다. 두타행(頭陀行 걸식(乞食)하면서 수행하는 것)을 닦았고 충주(忠州) 신라 시대에는 국원성(國原城)에 소경(小京)을 두었다. 북진애(北津崖)에 살았으므로 그가 살던 절[寺]의 이름을 ‘김생사’라 했다.”

하였다.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는 동경서당 집고첩(東京書堂集古帖)에 쓰기를,

“당 나라 때 신라의 중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는 자획(字劃)에 깊은 전형(典型)이 있어, 아무리 당 나라 사람의 명각(名刻)이라 해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다. 옛말에 ‘어느 지역인들 인재(人材)가 나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다.”

하였고, 이상국(李相國) 이름은 규보(奎報) 은 서결평론 서(書訣評論序)에 쓰기를,

“우리 동국의 제일인으로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는 바로 김생이다.”

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전하기를,

“한 사람이 갑자기 김생 앞에 나타나《제석경(帝釋經)》을 써 달라고 하여, 쓰기를 마치자 그 사람이 ‘나는 제석천(帝釋天)의 사자(使者)이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액자(額字)를 쓰기 시작한 지 수년 만에 그 절집이 남쪽으로 기울므로 즉시 북쪽으로 옮겨 쓰기 시작하자 절집이 도로 반듯해졌다.”

하고 또 청룡사(靑龍寺)의 액자를 썼는데, 그 주위에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 있다고 하니, 마땅히 김생을 신필(神筆)의 제일로 쳐야 하겠다.
《예성야록(蕊城野錄)》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음 에,

“김생은 5세 때부터 풍월(風月) 두 글자를 배우면서 굵직한 싸리나무로 모래밭 위에다 썼었고 6~7세 적부터는 불경(佛經) 2권을 부지런히 쓰기 시작하여 20세에 서법(書法)을 대성(大成)하였다. 그때 일본(日本)의 중 혜담(惠曇)도 글씨에 능하였는데, 신라에 와서 김생의 글씨를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면서 왕우군이 강북(江北)에 건너가 있을 때 썼던 진적(眞蹟)을 주었다. 그는 그 뒤부터서 우군의 글씨에만 전력하여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써서 명성이 이웃나라에까지 진동하였고 또 불교를 좋아하여 재소(齋素 고기와 파ㆍ마늘 따위를 먹지 않는 것)를 지켰다. 그 수족(手足)은 가늘고 작아서 부인(婦人)의 것과 같았고 나이 90이 되어서도 눈빛이 전광(電光)과 같아 붓을 손에서 떼지 않다가 나이 97에 죽었다.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2년(807), 즉 신라 애장왕 휘 중희 10년에 죽었다. 일찍이 창림사비를 썼는데, 조맹부가 그 탁본(拓本)을 보고 ‘한 획과 한 글자가 다 왕씨(王氏)의 서법에서 나왔으니, 당 나라 사람의 명각(名刻)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그 뒤부터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원 나라 사신이 왔을 적마다 으레 그 탁본을 얻어가곤 했다.”

하였다.
《지리지(地理誌)》에,
“안동(安東)의 청량산(淸涼山)은 모두 36봉(峯)으로 태백산(太白山)에서 낙맥(落脈)되어 예안강(禮安江) 위에 이르러 우뚝 솟았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토산(土山) 몇 봉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으나 강을 건너 동부(洞府)에 들어가 보면 4면(面)에 석벽(石壁)이 둘러졌는데 그 둘레가 4장(丈)쯤 되고 돌들이 기괴하고 험악하여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안에는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곧 최고운이 거기에서 바둑을 두던 곳으로 바둑판과 똑같은 돌이 있고 또 연대사(蓮臺寺)가 있는데 거기에는 신라 김생의 친필로 된 불경(佛經)이 많으며 다른 사찰(寺刹)에도 그 친필이 있다.”
하였다.
오출자(五黜子) 김백련(金百鍊)이 일찍이 용(龍)의 문(文)과 무(武)를 논하면서,
“관동(關東) 해금강(海金剛) 밑에 용이 있는데 그 용은 문한(文翰)을 숭상하였고 신라 시대에는 그 용의 아들이 김생에게 와서 서법(書法)을 배운 때문에 김생의 글씨가 그 용의 처소에 많이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비록 황당(荒唐)하기는 하나 이분의 황당한 말 가운데에는 더러 맞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찌 꼭 믿을 수야 있겠는가. 그저 수록하여 이문(異聞)에 대비할 뿐이니, 이는 마치《수신기(搜神記)》나《유양잡조(酉陽雜俎)》와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충주(忠州)의 깊은 산골짜기에 살고 있다. 이에 이 지방의 옛날 유명한 인사(人士)들을 상상해보면 신라 시대에 우륵 선인(宇勒仙人)과 임강수(任强首)가 있는데, 그 중에도 김생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또 김생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地名)으로는 김생면(金生面)이, 강명(江名)으로는 김생탄(金生灘)이 있어 세속에서 김곶(金串)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른바 김생사(金生寺)의 옛터도 아마 이 부근일 터인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