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고려국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 병서
유원고려국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 병서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118권 > 비명(碑銘)
이제현(李齊賢)
근세에 대비구(大比丘)로써 불조(佛祖 석가모니)의 도를 밝혀 뒤에 오는 배우는 자들에게 길을 열어 준 이는 보각국사(普覺國師)이다. 그의 무리가 대체로 수백 수천이나 되지만, 능히 굳은 것을 뚫고 깊은 것을 움켜서 묘계(妙契)가 줄탁(啐啄 사제간(師弟間)에 의견이 서로 부합함)한 자는 오직 보감국사(寶鑑國師) 한 사람일 뿐이다.
국사의 휘는 혼구(混丘)요, 자는 구을(丘乙)이며, 구명(舊名)은 청분(淸玢)이고, 속성은 김씨(金氏)다. 고(考)는 증첨의평리(贈僉議平理)로서 휘는 홍부(弘富)이니, 청풍군(淸風郡) 사람이다. 황려(黃驪) 민씨(閔氏)의 딸에게 장가들고 복령사(福靈寺)의 관음상에게 기도하여, 충헌왕(忠憲王) 27년 신해년 7월 27일에 국사를 낳았다. 국사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노는데, 기와 조각들과 돌을 모아다가 탑이나 사당을 만들었으며, 쉴 때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과 모습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성질이 또 자비하고 다정하였기 때문에, 친척들이 작은 아미타불이라고 하였다. 10살 때에 무위사(無爲寺)의 천경선사(天鏡禪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구산(九山)의 승과(僧科)에서 장원 급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내버리고 가서 보각국사에게 배웠다. 스스로 꾸짖기를, “깊고 먼 곳을 보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보각국사가 꿈을 꾸니 어떤 중이 와서 스스로, “오조(五祖)의 아류라.” 하였다. 이른 아침에 보감국사가 가 뵈었으나 마음 속으로만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는 그가 민첩하고도 부지런한 것에 감탄하여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꿈이 징험이 있었다.” 하였다.
보각국사의 자리를 이어 강당을 열게 되자, 여러 사람을 거느림은 규율있게 하고, 불경을 강의함은 하나로 그어 놓은 것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온화하고 한아하게 지내었다.
충렬왕이 가리법복(伽梨法服)을 내리고, 여러 번 하비(下批 삼망(三望)을 갖추지 않고 한 사람만 기록 상주하여 임명하는 것)하여 대선사에 이르렀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서는 특히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고 대사자왕법보장해국일(大師子王法寶藏海國一)이라는 호를 더하였다. 황경(皇慶) 계축년에 충선왕이 왕위를 사퇴하고 영안궁(永安宮)에 거처할 때에는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수레에서 담론하니, 이따금 해가 저물 때까지 있기도 하였다. 이에 국왕과 의논하여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서 사(師)를 오불심종해행원만감지왕사(悟佛心宗解行圓滿鑑智王師)로 책명하였다. 양대의 임금이 같이 제자의 예로써 유익한 가르침을 청한 것은 예전에는 아직 없었던 일이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물러가기를 매우 간절히 빌므로 허가하고, 이어 영원사(瑩源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선원(禪院)이었던 것을 원정(元貞) 연간에 지자종(智者宗)의 소유가 되었다가 사 때문에 비로소 복구하게 되었다.
지리(至理) 2년 겨울 10월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 송림사(松林寺)에 옮겨가서 유서(遺書)를 써서 봉인하여 시종에게 맡기고, 30일 뒤에 세수 목욕하고 설법으로 여러 제자들과 작별하였으니,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시 숲 가운데에 다리를 딛고 / 荊棘林中下脚
방패와 창 떨기 속에 몸을 감춘다 / 干戈叢裏藏身
오늘의 가는 길은 과연 어느 곳일까 / 今日路頭果在何處
흰구름 끊어진 곳이 청산인데 / 白雲斷處是靑山
청산 밖에 다시 길가는 사람이 있구나 / 行人更在靑山外
하였다. 그리고는 방장으로 돌아와 걸상에 의지하여 떠났다. 사는 침착 중후하고 말이 적으며 학문은 엿보지 않은 것이 없으며, 시와 문에 풍부한 실력을 가졌었다. 《어록(語錄)》 2권, 《가송잡저(歌頌雜著)》 2권,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 《중편지송사원(重編指頌事苑)》 30권의 저서가 있어서 승려사회에 사용되고 있다. 중국 오(吳) 나라의 이몽산선사(異蒙山禪師)가 일찍이 무극설(無極說)을 지어서 바다를 왕래하는 배편에 붙여 왔다. 사가 묵묵히 그 뜻을 받아들여 스스로 호를 무극노인(無極老人)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73세, 승려의 경력은 63년이었다.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였으며 보감국사(寶鑑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은 묘응(妙應)이라고 명명하였다. 인하여 신 아무개에게 명하여 그의 덕행을 비석에 쓰라고 하였다. 신은 들으니, 부처의 즐거운 말과 복된 지혜는 자기의 몸을 닦아서 물(物)이 응보하게 하는 것이다. 둘 중에서 그 하나만이라도 이지러진다면 족히 스스로 설 수 없다고 하니, 어찌 남에게 믿음을 줄 수 있겠는가. 사가 모두 7번 벼슬의 품질을 높혔으며, 6번 호를 받았다. 9번 이름 있는 절을 순례하였으며, 2번이나 내원(內院)에 머물렀다. 한 나라의 승려사회(僧侶社會)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두 임금에게 스승의 예(禮)를 받았으나 사람들은 이론이 없었으며 모두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른바 복(福)과 지(智) 두 가지가 모두 존엄하다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해 보여도 신은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뛰어난 저 심종이 / 夐彼心宗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오니 / 逾海而東
그 종파가 아홉인데 / 厥派惟九
도의 스님이 개조였네 / 道義其首
끊어지지 않고 다들 이어가며 / 繩繩仍昆
대대로 철인이 있어 / 代有哲人
바른 것을 지키고 잘못을 고치는 것은 / 守正矯失
운문의 첫째였고 / 雲門之一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함은 / 博學篤行
인각(진귀하고 희소한 것)처럼 드물게 보는 현명일러라 / 麟角之明
아름다운 감지 선사에게 / 顯允鑑智
후가 그의 적사를 이었다 / 侯其嫡嗣
그의 포부는 깊고 / 淵乎其懷
그의 재주는 우뚝히 높다 / 卓乎其才
이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그 상서(禎) 충혜왕의 휘 를 이었네 / 爰踵其 惠王諱 于禰于祖
이미 선종을 주재하여 / 旣主宗盟
모든 방법을 다 기울이고 / 諸方盡傾
곁으로 경서와 역사서를 섭렵하여 / 旁涉書史
정밀한 이치를 연구하였네 / 硏精究理
붓을 떨쳐 글을 지으면 / 奮筆爲文
가을 물이 물결치는 것 같고 봄 구름이 날아 달리는 것 같네 / 秋濤春雲
임금이 예를 다하여 경의를 표하고 / 王于體貌
총애하여 좋은 호를 내리었네 / 寵以嘉號
다만 총애할 뿐 아니라 / 匪惟寵之
북면하여 스승으로 섬기었네 / 北面以師
승려 사회에서 경하하고 의뢰하였으나 / 釋林慶頼
사는 스스로 큰 체하지 아니 하였네 / 師不自大
구름 깊은 산 속에 석장을 머루르나 / 掛鍚雲山
복은 광대한 나라 안을 덮더니 / 陰福區寰
밝은 햇볕이 갑자기 숨어 버리니 / 慧晷忽匿
임금의 마음이 이를 슬퍼하여 / 王心是惻
신으로 하여금 명을 지어 / 俾臣作銘
억만 년에 향기로움을 선양하라 하셨네 / 揚芬億齡
학이 아니면 이에 패란해지고 / 匪學斯悖
생각이 아니면 이에 혼란해진다 / 匪思斯憒
치의를 입은 중들이여 / 有緇其衣
나의 기대함에 힘쓸지어다 / 勗哉我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