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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을 가다가

청풍선비 2011. 12. 1. 11:09

- 스물 두 번째 이야기
2011년 12월 1일 (목)
새벽길을 가다가

수숫대에 잠자는 까치 한 마리
밝은 달 흰 이슬 논물 드는 소리
고목 아래 초가는 둥근 바위 같고
지붕 위의 박꽃은 별처럼 환하다

一鵲孤宿薥黍柄
月明露白田水鳴
樹下小屋圓如石
屋頭匏花明如星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효행(曉行)〉
《연암집(燕岩集)》

  연암 박지원은 산문에 비해 시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발상이 공교롭고 개성이 두드러진 표현이 많다. 이 시는 새벽길을 가다 본 일상적 농촌 풍경을 소재로 하여 그 진경(眞境)을 묘사한 솜씨가 아주 탁월하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아직 달도 밝고 길섶의 풀에 맺힌 새벽이슬이 발에 차인다. 길 옆 콩밭엔 드문드문 수수대궁이 서 있는데 무리를 떠난 까치 한 마리 잠들어 있다. 그것 참! 또 산골 다락 논에는 물꼬와 봇도랑으로 흘러드는 논물 소리가 음악소리처럼 재잘댄다. 저편에는 두서너 집 사는 마을이 있는데 오래 묵은 감나무 아래 보이는 작은 초가는 지붕이 낮고 낡아 시커멓게 마치 엎드린 바위처럼 보인다. 하아, 좋구나! 그 지붕위에 다문다문 핀 박꽃은 마치 저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작고 하얗기도 하지!

  이 시에는 고사가 없고 평측(平仄)도 따져보면 맞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은 배제하고 사물의 양태만 소묘해 놓고 있다. 소재도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내용도 막연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풍경을 다루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한시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참신한 표현을 얻기 위해서 율격을 맞추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막연한 감정의 발산보다는 구체적이고 차분하게 사물을 응시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삶의 실경(實境)에서 시적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기름진 음식과 화려한 연회에 물린 사람들이 소박한 된장찌개나 다소 거친 산나물에서 새로운 입맛이 돌듯이, 기려(綺麗)하거나 호방(豪放)한 작품은 실제 알맹이가 받쳐주지 않을 경우, 다소 삶과 유리되어 추상성에 빠지거나 부화(浮華)한 감정으로 작품이 들뜨는 폐단이 있다. 이런 것에 대한 자각이 당송 고문가들에 의해 나타나서 후일 한중문단에 부침해왔거니와, 시에 있어서도 당 말의 사공도(司空圖 837~908)는 자신의 시 이론을 <24시품>이라는 시(詩)로 정리하였는데 그 안에 <실경(實境)>이 포함되어 있다.

  그 시에 “아주 솔직하게 시어를 선택하고, 계획과 생각은 깊지 않다.[取語甚直, 計思匪深.]”라거나 “마음과 천성이 가는 대로 따를 뿐, 기묘함을 구태여 찾지 않는다.[情性所至, 妙不自尋.]”라고 한 것이 그 창작 방법론인 셈인데, 그렇게 해도 “홀연히 은자를 만나 도심을 본 듯하다.[忽逢幽人, 如見道心]”거나 “자연스럽게 시가 완성되니, 맑고 아름다운 자연의 음악이리. [遇之自天, 冷然希音.]”라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는 노자(老子)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 음악은 소리가 희미하다.[“大器晚成,大音希聲.]”라고 한 말과 “큰 솜씨는 졸렬한 것과 같다.[大巧若拙]”라고 한 말에 그 연원이 가 닿는다. 우리나라 서법의 대가 완당(阮堂)도 71세에 “최고 훌륭한 요리는 두부와 오이ㆍ생강ㆍ나물을 차린 것이요, 가장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ㆍ딸ㆍ손자가 모인 것이다[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상과 평범으로 환원하여 그 가치를 극대로 부각시켜 놓은 것이기도 하다.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권력 싸움에서 패해 참형을 받을 때, 아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다시 누렁이를 이끌고 같이 고향 상채(上蔡)의 동문 밖으로 나가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싶어도 할 수 있겠느냐![吾欲與若復牽黃犬, 俱出上蔡東門, 逐狡兔,豈可得乎!]’라고 탄식한 말도 있거니와,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을 살다보면 문득 일상의 소중함을 재인식할 때가 있다. 우리 선조들도 역시 당시(唐詩)나 송시(宋詩)를 따라 써보기도 하고 여러 문학적 미를 구현하다가 이런 작품에 도달하기도 한 것이니, 문득 시란 무엇인가, 다시 아득해지기도 한다.

  연암보다 조금 선배가 되는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그 문학적 역량이나 문단의 위상, 집안과 당파 등에서 연암과 아주 비교가 되는데, 다음의 시를 보면 미(美)를 보는 관점이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농가 [田家]
  아낙은 앉아 아이 머리 이를 잡고 / 婦坐搯兒頭
  가옹은 구부린 채 외양간을 친다 / 翁傴掃牛圈
  마당귀엔 우렁이 껍질 버려져 있고 / 庭堆田螺殼
  부엌에는 달래 몇 뿌리 남아 있다 / 廚遺野蒜本


  다만 앞에 소개한 연암의 시는, 정밀하게 사물을 그려내고 그것을 보고 있는 시인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아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환기할 여백을 시에 구현하고 있다면, 이 시는 소묘를 다 하지 않고 몇 가지 스케치만 듬성듬성 보여 주어 그 상황까지도 다양하게 연상해 보도록 한 시인의 의도가 읽혀진다.

  이른 봄날이다. 지나가다 보니 어느 농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집 아낙은 햇살 드는 마루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헤치며 숨은 이를 잡고 있고, 남편인 가장은 천장이 낮은 외양간에 들어가 등허리를 굽히고 소똥을 치고 있는 중이다. 마당귀와 툇마루로 오르는 토방 언저리에는 우렁이 껍질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부엌에는 먹다 남은 달래 몇 뿌리가 눈에 잡힌다.

  전라(田螺)는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우롱이’라고 되어 있는데 필자의 고향에서는 ‘골베이’라 부르는 다슬기는 먹어도 우렁이는 먹지 않아 다슬기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주변에 물어보니 다른 지역에 사는 분들은 우렁이를 어릴 때 많이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야산(野蒜)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랑이,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랑괴’라고 되어 있고 《담정유고(藫庭遺稿)》에는 ‘薘來’로 되어 있으니 오늘날의 달래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두 편의 시에서 묘사된 농민들의 실제 삶은 매우 고달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양반들의 여기(餘技)이거나 민초의 삶과는 동떨어진 구경꾼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를 통해 우리는 지나간 시대의 풍속과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인들의 미의식 또한 살펴볼 수가 있다. 관점을 다양하게 잡고 문화적 포용력을 키우는 것이 오늘의 현실에도 맞고 또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깊게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글쓴이 :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