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는 조선후기 지성사에서 샛별 같은 사람이다. 정조연간 청의 학문을 수용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박제가처럼 이를 북학(北學)이라 개념 규정하고 직접 정조에게 북학을 해야 한다고 상소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홍대용도 박지원도 북학을 말하지는 않았다. 정조연간 북학 담론이 실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북학사상이라는 학술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박제가의 문제작 『북학의』에 힘입은 것이다. 물론 『북학의』가 특별한 것은 북학의 창발성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명개화론, 또는 한국 박정희 시대의 조국근대화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책에는 조선의 부국(富國)을 위한 파격적인 제안들이 담겨 있다. 아니, 어쩌면 조선 후기 정조 시대가 일본의 메이지 시대나 한국의 박정희 시대와 비슷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커진다. 박제가는 조선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그것을 왜 북학이라는 개념으로 표상한 것일까? 북학이란 『맹자(孟子)』 「등문공상(縢文公上)」에서 보듯이 초(楚)의 진량(陳良)이 평소에 주공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으로 중국(中國)에 유학을 가서 중국 현지 학자를 능가하는 큰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출처를 두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의 말뜻은 조금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마 진량은 중국에 가기 전에 충분히 초(楚)에서도 중국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참다운 중국, 곧 주공과 공자의 도는 초(楚)의 바깥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중국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량이 공부한 참다운 중국은 ‘초(楚) 안의 중국’이 아니라 ‘초(楚) 밖의 중국’이었다. ‘우리 안의 중국’이 아니라 ‘우리 밖의 중국’이었다. 박제가가 자신의 작품에 북학의 제목을 부여한 것은 곧 그가 구상한 것이 ‘조선 안의 중국’을 버리고 ‘조선 밖의 중국’을 취하자는 계몽의 기획이었음을 암시한다.
사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은 유사 이래 중국과 교류하며 항상 중국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선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 안의 중국’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안의 중국’을 붙들며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었다. 바깥이 없는 사회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도대체 중국이 무엇이던가? ‘조선 안의 중국’은 조선에서 문화적으로 소비되는 중원과 강남일지 모르나 ‘조선 밖의 중국’은 중국의 현지 정세에서 조우하는 만주, 몽골, 티베트였다. 만주, 몽골, 티베트를 통해 중국을 본다는 것과 중원과 강남을 통해 중국을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말하는 ‘의무려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말하는 ‘열하’,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말하는 ‘북학’, 그것은 다같이 ‘조선 안의 중국’을 극복하고 ‘조선 밖의 중국’을 전망하는, 중국을 향한 문명사적인 새로운 시점(視點)이었다. 북학이란 북벌로부터 북학으로의 전환, 혹은 낙론으로부터 북학으로의 전환과 같이 북학에서 사태가 종료되는 ‘북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시점에서 보아야 할 미지근한 현상이 아니라 북학으로부터 개화로의 전환, 혹은 북학으로부터 애국계몽으로의 전환과 같이 북학에서 사태가 시작되는 ‘북학으로부터의 전환’이라는 시점에서 보아야 할 들끊는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북학은 단순히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 안의 중국’을 극복하고 ‘우리 밖의 중국’을 자각하여 참다운 문명을 다시 수립하자는 사상적인 차원의 문제, 학문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이 점에 유의한다면 어쩌면 박제가의 진정한 문제작은 『북학의』보다 「시학론」일지 모르겠다. 「시학론」에서는 ‘우리 안의 중국’의 일그러진 학문적 모습을 흥미롭게 엿볼 수 있다.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의 시를 전공해야 나도 시성이 될 수 있다는 기복신앙적 학문, 두시(杜詩) 이후의 시사(詩史)에 전혀 무관심한 비역사적 학문, 두시에 관한 과학적인 문헌 조사에 인색한 관념적인 학문, 내가 사는 시대를 향해 두시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근본적 물음이 결여된 취미적인 학문. 박제가는 두시(杜詩)를 말했지만 이것은 주학(朱學)의 문제일 수도 있었으며, 오늘날의 현대 학문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라면 늘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 안의 중국’을 극복하는 문제를 보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어쩌면 현대 중국 이택후(李澤厚)가 말하는 ‘서체중용(西體中用)’의 문제의식, 현대 한국 중문학계에서 말하는 ‘제3의 동양학’과도 통할 수 있는 자기 성찰인지 모르겠다.
고전을 읽어도 고전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박제가의 북학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고전은 지금도 ‘우리 안의 중국’, ‘우리 안의 서양’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진정 우리의 안을 벗어나 우리의 밖에서 고전과 만날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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