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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 새로운 한국사를 위한 특별한 시점

청풍선비 2012. 9. 9. 17:15

- 이백 서른 네 번째 이야기
2012년 9월 3일 (월)
제주(濟州), 새로운 한국사를 위한 특별한 시점
8년 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구한말 한 지식인의 일생 - 심재 김석익』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은 20세기 제주학(濟州學)의 거장이다. 그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바다 건너 광주(光州)에 가서 역시 제주 출신으로 이곳에서 강학하던 안병택(安秉宅, 호는 부해(浮海))에게 학문을 배웠다. 안병택은 19세기 호남 성리학의 종장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니 김석익 역시 노사학파에 속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철학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였다. 그는 『탐라기년(耽羅紀年)』, 『탐라지(耽羅誌)』,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 『탐라관풍안(耽羅觀風案)』 등 탐라에 관한 많은 저술을 완성하였는데, 한국사학사에서 이렇듯 한 유학자가 자기 고장의 지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사실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아래에 김석익이 지은 제주사 한 토막을 소개하며 한국사에서 제주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무자(戊子) 건국준비 4년 단기 4281년. ○ 이 해에 건국하니 대한(大韓)이다.

4월 3일 산군(山軍) 소동이 발발하였다. 작년 3월 1일 이후부터 경관대(警官隊)가 위복(威福)을 자행(自行)하여 조금이라도 관변(官邊)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일망타진하여 매질하고 훈도하였다. 끝내 도중에 고문을 당하다 운명하는 사람이 있자 몇 사람을 꾸며 내서 모두 병들어 죽었다고 둘러댔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침저녁도 보존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 이에 일종의 피의자(被疑者)들이 무리를 모아 이끌고 산간에 피해 들어가 몰래 공작을 행하였다. 마침 국회의원 선거를 기회로 삼아 일시에 선거 각 구역을 습격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사무소를 불사르기도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4ㆍ3 사건이다. 이로부터 경관(警官) 지회(支會), 혹은 면사무소, 혹은 민간 부락을 습격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정부에서 파견한 군대 중에 산군에 호응하여 산간에 투항해 들어간 자도 있었다.
○ 9월에 9연대장 송요찬(宋堯讚)이 촌락을 분탕질하고 크게 살육하였는데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유명하고 유서 깊은 마을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생명과 자산이 거의 몰락하였다.
○ 도청이 불탔다.
○ 12월에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이 타고 남은 마을들을 소탕하고 서북민(西北民)을 본도(本島) 안에 옮겨 놓았다. 마침 내무부 장관 신성모(申性謨)가 선무하고 훈시하여 끝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살피건대 송요찬과 함병선의 전후 소탕은 아, 참혹하도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둘 사이에 끼여 있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하였겠는가. 이미 산군의 공갈에 핍박을 받고 또 군경의 위협에 겁박 당하고 다시 서북청년(西北靑年)의 발호에 협박 받았다. 생사여탈(生死與奪)은 오직 저들의 조종을 보아야 했다. 나아가고 물러나며 삼단 베듯 사람을 죽여 길가에는 검붉은 핏빛이 가득하였다. 아아! 산중의 포로가 되지 않으면 군(軍)ㆍ경(警)ㆍ청(靑)의 총검 아래에 모두 죽고야 말았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며 죽는 것이 잘된 일인지 사는 것이 잘못된 일인지 몰라 겁을 먹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숨을 죽이며 아침에 저녁을 기약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입산(入山)은 사실 여기에 원인이 있었으니 유사(有史) 이래 없었던 참화라 하겠다. 기축년(1949) 봄 내무장관 신성모가 와서야 비로소 살육의 정치가 멈추었다. 하지만 이어서 경인년(1950)이 되자 6ㆍ25 사변이 발생하여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고 명망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소탕되어 거의 모두 죽었다. 아아, 슬프도다!

[戊子 建國準備四年 檀紀四二八一年 ○ 是歲建國大韓

四月三日 山軍騷動發生 自昨年三月一日以後 警官隊自行威福 稍有嫌疑於官邊者 一網打盡 鍛鍊醞釀 竟殞命於中途拷掠者 演出數人 而皆諉以病死 故人懷疑懼 若將不保朝夕焉 於是一種被疑者 聚黨引類 避入山間 潛行工作 適以國會議員選擧爲機會 一時襲擊選擧各區域 殺害人命 或燒燬事務所 此所謂四三事件也 自此襲擊警官支會 或面事務所 或民間部落 殆無虛日 而政府派送軍隊中 亦有呼應山軍而投入山間者
○ 九月 九聯隊長宋堯讚 焚蕩村落 大行殺戮 延至數朔 名村古里 儘爲灰燼 生命資産 幾乎沒落
○ 道廳火
○ 十二月 二聯隊長咸炳善 掃蕩餘燼 將移植西北民於本島中 適因內務長官申性謨宣撫訓示 卒未售其志
按宋堯讚咸炳善之前後掃蕩 旴其慘矣 當是之時 居於兩間者 何以則可乎 旣逼於山軍之恐喝 又劫於軍警之威脅 更迫於西北靑年之跋扈 生殺與奪 由是官邊之操縱 進退殺人如麻 朱殷載路 旴嗟乎 不作山中之俘虜 合死軍警靑鋒銃之下乃已 於是人皆重足側目 未知死者爲得乎 生者爲失乎 狼顧脅息 朝不保夕 入山之多 實由於是 可謂有史以來未有之慘禍矣 及至己丑春 內務長官申性謨之來 始停殺戮之政 然延之庚寅 六二五事變發生 稍有知識負望之人 一掃殆盡 噫嘻悲夫]

- 김석익(金錫翼 1885~1956), 「탐라기년보유(耽羅紀年補遺)」『심재집(心齋集)』 책2



▶『탐라기년(耽羅紀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어디 산뜻한 한국사 이야기 없을까? 언제나 새 학기를 준비할 때면 일어나는 마음의 갈증이다. 언젠가 “바다로 보는 한국사”라는 주제로 수업을 한 일이 있다. 수업 후반부에는 해양수산부 발간물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해역을 <서해 해역>, <서남해 해역>, <동남해 해역>, <동해 해역>, <제주 해역>의 5개 해역으로 나누어 각 해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학생들이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기대가 컸다. 국사와는 다른 지역사, 그것도 ‘해역사(海域史)’가 아닌가! 결과는 해역마다 제각각이었다. 이야깃거리가 가장 많은 해역은 <서해 해역>이었지만 <서해 해역>의 역사는 가장 산뜻하지 않았다. 거의 국사책을 다시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백제, 고려, 조선의 수도가 이 근방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야깃거리가 가장 적은 해역은 <동해 해역>이었다. <동해 해역>은 상대적으로 역사보다는 민속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면 이야깃거리도 많으면서 산뜻한 역사 지식을 선사하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제주 해역>이었다. <제주 해역>은 탐라국의 고유한 지역적 전통이 있었고 한반도의 안과 연결된 역사와 한반도의 바깥과 조우한 역사가 중첩해 있는 이색적인 지역이었다. 근대 국민국가를 위해 만들어진 단일한 국사 이야기가 마치 낡은 녹음테이프가 반복되는 듯 느껴질 때, <제주 해역>은 참으로 풍부하고 산뜻한 역사 자원을 갖추고 있는 듯이 보였다. 지방사와 국사와 세계사가 동시에 펼쳐진 국카스텐 같은 곳? 아무튼 거꾸로 읽는 역사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쪼개서 읽는 역사도 재미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로컬하게 쪼갤수록 글로벌하게 읽힌다는 역설적인 재미 말이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제주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실 우리 역사에 제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게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시대 이후 천 년간 단일한 국가가 지배해 왔고 그랬기에 한국사의 복수성(plurality)을 역사적으로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사적 주체로서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라는 생각, 또는 우리 안에 또 다른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한국사는 중국사나 유럽사와 달리 삼한일가(三韓一家)로 표상되듯 일찍부터 일가(一家)를 만들었던 놀라운 역사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문화적으로 균질적인 한반도 중심부 위주의 생각일 수 있다. 우리나라 강역은 그러한 전형성을 넘어선다. 이와 관련하여 장지연(張志淵)은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왜 제국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증거를 제시한 일이 있다. 대한의 지역적 구성을 보면 이미 조선시대부터 남으로 탐라와 북으로 말갈을 아우르는 제국의 공간을 갖추었고 또 중국에서 명이 멸망한 후 대한이 진정한 역사적 계승자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우리 역사 안에 적어도 탐라와 말갈이 속해 있다는 사실, 비록 장지연은 이를 통해 단지 제국의 성립 요건을 추구한 것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의 복수성, 다양성, 다원성을 사유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역사 안에서 제주라는 타자를 오랜 기간 품어 왔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내부적인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단일성에 집착하는 소국의 마인드에서 벗어나 복수성을 성찰하는 대국의 마인드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 제주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남북분단과 6.25사변을 전후한 시기 이 땅의 백성들은 체제와 이념이 다른 한 민족 두 국가에 의해 처참한 고통을 당하였다. 냉전 체제에 편승한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광신(狂信) 앞에 보편적인 인도(人道)는 설 곳이 없었고 폭력적인 국가 권력으로 인해 백성들은 자신이 입은 고통을 발설조차 못한 채 영원한 침묵을 강요당하였다. 제주의 4ㆍ3 역시 그러한 비극의 하나였다. 제주도 유학자 김석익이 제주도 현대사에 해당하는 「탐라기년보유」에 기록하였듯이 당시 제주도에는 ‘살육의 정치’가 자행되고 있었고 제주도 도민은 ‘산중의 포로가 되지 않으면 군(軍)ㆍ경(警)ㆍ청(靑)의 총검 아래에 모두 죽고야 말았다.’ 그리고 반공 국가 대 빨갱이라는 인식구도하에 생존자들은 철저히 타자화되어 존재의 망각과 기억의 말살을 강요당하였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야말로 냉전 체제의 반공 국가에서 양산된 우리 안의 타자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 현대 우리 안의 타자가 어디 그 뿐인가. 멀리는 ‘순이 삼촌’에서 가까이는 탈북자와 다문화가정에 이르기까지 목하 한국 사회는 내부적인 타자가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 내부적인 타자를 모두 아우르는, 타자와 소통하는 역사학이 절실히 요청되는 지금, 제주는 그러한 역사학적 성찰의 특별한 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투철한 의식으로 제주 현대사까지 한문으로 기록한 김석익의 사학 정신에 감탄을 표한다. 20세기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선인들의 치열한 ‘근대 한문’, ‘근대 문집’ 앞에 아무런 철학 없이 글자 뜻이나 따지는 훈고학이 행세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