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세대는 2천 년 문명의 황혼에 서성이며 새천년(millenium)의 새로운 여명을 기다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우리의 소명(召命)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문명의 패권을 반성하고 새천년의 신문명을 모색하는 사업이다. 이 시대의 종교철학은 이에 복무(服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부족신(部族神)이며 전쟁신(戰爭神)인 여호와[耶和華, Yahweh]를 지양하고 동방의 인류보편의 평화의 상신(上神)을 부활시키는 종교개혁이 필요하며, 또한 이를 견인해내기 위해서도 구체제를 혁파하고 신체제를 지향하는 문화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묵자의 사상은 이를 위한 영감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이러한 종교문화운동은 묵자(墨子)사상과 아울러 공맹(孔孟) 노장(老莊) 사상까지 공유한 동방의 지성들이 선도해야한다.
▲ 첫째로 우선 전쟁문화(戰爭文化)를 지양해내야 한다. 지금 중동에서는 십자군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의 전쟁은 지정학상(地政學上)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고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것이다. 묵자의 평화의 상제님과 반전사상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묵자/천지 중(天志中)〉: 하늘의 뜻은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하지 않고, 지혜 있는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고,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오만하지 않기를 바란다.
〈묵자/비공 상(非攻上)〉: 지금 어떤 사람이 검은 것을 조금 보고는 검다고 말하고, 검은 것을 많이 보고는 희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흑백을 분별할 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쓴 것을 조금 맛보고는 쓰다고 말하고 쓴 것을 많이 먹고는 달다고 말한다면, 쓴맛 단맛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군자들은 조금 나쁜 짓을 하면 그것을 알고 비난하지만, 크게 나쁜 전쟁을 하면 나쁜 줄 모르고 오히려 따르고 기리며 의롭다고 말한다. 이들이 의(義)와 불의(不義)를 분별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묵자/노문(魯問)〉: 노나라 문군이 묵자선생에게 말했다. 초(楚)나라 남쪽에 식인국이 있는데 첫 아들을 낳으면 잡아먹으면서, 이것이 다음에 태어날 동생에게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맛이 있으면, 군주에게 바치면 그 아비에게 상을 줍니다. 이 얼마나 몹쓸 풍속입니까? 묵자: 중국의 풍속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전쟁이란 아비를 죽여 자식이 상을 타는 제도인데, 자식을 잡아먹고 상을 타는 식인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비를 먹는 전쟁도 인의를 저버린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찌 자식을 먹는 식인종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중ㆍ미의 데탕트는 양국의 발전에도 긴요할 뿐더러 한반도 평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로 동북아 정세는 위태롭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만약 이에 맞서 중국도 패권주의로 대응한다면 불행하게도 냉전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두 강대국이 패권경쟁을 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대전이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는 요순(堯舜)의 진실로 중앙을 잡으라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유훈과 공맹의 패권을 반대하는 ‘반패도주의’사상과 묵자의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는 ‘이폭역폭(以暴易暴)’을 반대한 반전평화사상 등 ‘중화(中和)’를 표방한 중국인의 전통과 자부심에 기대를 걸고 있다. 중국과 한국은 반패도주의 반전평화주의를 변함없이 추구하는 것이 정도(正道)이고 승도(勝道)임을 양국의 지성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둘째로 자본과 금전과 상품과 시장이 신(神)이 되는 자본주의 문명을 지양해내야 한다. 이제 물신(物神)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의 터전인 지구까지 파괴하는 괴물이 되었다. 지금 당장 인류는 예수[耶穌, Jesus]께서 이미 갈파했듯이 금전의 왕(王, Mammon)을 공봉(供奉)하든지 상재(上帝, 하느님)를 공봉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진서(晉書)/노포전(魯褒傳)〉: * 전신론(錢神論) 원강(原康, 291-299) 년간 이후 기강이 무너지자, 노나라 褒(포)라는 사람이 탐욕스럽고 비루한 시대를 상심하여, 이름을 숨기고 〈전신론(錢神論)〉을 지어 이를 풍자했다. 서울의 부호와 고관대작들이 돈을 “가혀야家兄)”이라 부르니 모두들 따르게 되었다. 돈이 있으면 위태로운 것을 편안케 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데, 돈이 없으면 귀인도 천하게 되고 산 자도 죽게 된다. 벼슬이 높아지고 이름이 드날리는 것도 돈이면 다 된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판이니 사람이야 어찌 부리지 못하겠는가? 이로 볼 때 돈이야말로 가히 “신물(神物)”이라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대량생산으로 치닫고 인간에게 대량소비를 강요한다. 그 대량소비의 대표적인 초과소비가 전쟁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속성상 제국주의를 지향한다. 우리는 달러(dollar)를 움켜쥐고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창고에 쌓아놓고 타국을 위협하여 굴복시키고 죽일 수 있다는 폭력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반생명주의(反生命主義)이다. 그러나 일찍이 화자(華子)선생이 말 한 대로 억압된 생명은 죽음보다 못하고, 그 억압의 기제는 불의(不義)이며, 불의의 대표적인 것은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묵자/대취(大取)〉: * 노예해방 옛사람의 애인(愛人)은 지금 묵자가 말한 애인이 아니다. 노예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의 이익을 고려한 것일 뿐이다, 노예의 이로움을 고려하지 않고 노예를 사랑한 것만이 진정한 애인이다. 노예에 대한 사랑을 버려 천하가 이롭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죽여 천하가 보존된다 해도, 한 사람을 죽인 것은 천하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를 죽여 천하를 보존했다면 이는 천하를 이롭게 한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귀생(貴生)〉: * 억압된 생명 화자(華子)선생이 말했다. 온전한 생명이 최상이고, 훼손된 생명은 그 다음이고, 죽음은 그 다음이며, 억눌린 생명은 최하이다. 따라서 생명존중은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온전한 생명이란 육욕(六欲)이 모두 적합함을 얻은 것이다. 훼손된 생명이란 육욕의 일부분만 적합함을 얻은 것이며, 억압된 생명이란 육욕이 적합함을 얻지 못하고 모두 싫어하는 것만 얻는 것을 말한다. 굴복과 굴욕이 바로 이것이다. 굴욕은 불의보다 큰 것이 없다. 불의는 생명을 억압하기 때문이다.[不義迫生也] 그러므로 “억압된 생명은 죽음보다 못하다[迫生不若死]”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은 공장과 회사와 은행에서 만들어 내는 갖가지 기괴한 상품들을 반드시 소비 파괴해야 하는 ‘소비단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헛된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고 한편으로는 부푼 욕망을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더 많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갈증에 허덕이면서 물신(物神)의 피리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인형(Golem)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소비사회’의 메커니즘(mechanism)인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인간은 거미줄에 얽힌 곤충처럼 죽도록 상품을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죽도록 소비 파괴하는 데서 만족을 얻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천국을 찾고, 뷔페(buffet)에서 카페(cafe)에서 행복을 찾고, 그리고 마약과 섹스(sex)에서 위안을 찾는다. 부드럽고 가벼운 것만을 선호하고 무겁고 엄숙한 것은 기피한다. 재밋거리(entertainment)와 행복만을 추구하고 진리와 도덕은 방기(放棄)한다. 문화와 종교는 장단을 맞추고 무당굿으로 물신을 축복한다. 시인은 섹스를 노래하고 종교인은 밖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조언하며 시장주의에 기생한다. 그들은 소비사회를 위해 복무하는 물신의 종들이며 지구를 파괴하는 악마의 전사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주(自主)하는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물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돈과 상품을 물신화(物神化)시키고 인간을 사물화(事物化)시켜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의 소비문명을 지구가 파괴되기 이전에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2천5백 년 전 초과소비(超過消費)를 정치에 이용하는 낭비문화의 내막을 폭로하고, 절용문화혁명 운동을 전개한 묵자는 오늘날 인류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묵자/사과(辭過)〉: * 초과소비론 성인이 옷을 짓는 법은 신체에 쾌적하고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것으로 족하고, 이목(耳目)을 현란하게 하여 어리석은 민중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성왕이 궁실을 지은 것은 삶을 편리하게 한 것이지, 남에게 과시하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재물과 노동을 허비하여 인민의 삶에 무용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로써 부하고 귀한 자는 사치하고 고아와 과부는 얼어 죽고 굶어죽는다.
〈묵자/절장(節葬)〉: 이들은 화려한 장례와 오랜 상례라는 것도 습관을 편리하게 생각하고 풍속을 의롭다 생각한 것뿐이다. 윗사람들은 이것을 정치로 이용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습속이 되어[此上以爲政 下以爲俗] 끊임없이 행해지다 보니 이제는 붙잡고 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을 어찌 인의(仁義)의 도리라고 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