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포럼/고전명구.산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歲寒)

청풍선비 2012. 12. 8. 10:23

- 이백 마흔 일곱 번째 이야기
2012년 12월 3일 (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歲寒)
가로수들이 나신(裸身)을 드러내더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추운 겨울이 오면 세한(歲寒)이란 말과 함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떠오른다. 네 그루 솔과 집 한 채가 전부인, 단출한 풍경이 주는 감동은 수많은 말보다 울림이 크다. 김정희의 문집에도 그의 글씨, 그림처럼 고졸(古拙)한 멋을 풍기는 글들이 실려 있다. 여기 소개할 두 편의 편지는 그야말로 글로 쓴 세한도라 함직하다.

강가라서 유달리 추운데다 동짓달이라 추위가 닥쳐와 입이 덜덜 떨립니다. 요즘 추운 날씨에 벼슬살이에서 평안하심을 살펴 알았으니, 송축합니다. 다만 지난날 외진 산골에서 쓸쓸히 사실 때나 현재 요직에 올라 현달한 때나, 만난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실 뿐이겠지요. 나 같은 사람은 외진 강가에 틀어박힌 채 마음대로 찾아가 만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물고기와 새에게 비웃음을 받기에 알맞고, 또한 이내 삶이란 것이 깊은 산 속 노승(老僧)의 찰나만도 못합니다. 우스운 노릇입니다.
머잖아 한 번 찾아 주신다니, 참으로 몹시 바라던 바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번잡한 일들을 떨쳐버리고 한가한 틈을 내어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추위가 겁나서 집안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중씨(仲氏)의 행차는 평안히 돌아왔다니, 다행입니다. 써주신 연구(聯句)는 잘 받았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江寒又是一之日, 冷薄波吒, 不可禁當. 卽承審觱發, 仕體文祉, 耿誦. 第往境之窮山沈淪・現在之當路騫翥, 隨遇而銷受已耳. 但吾輩之一隅江干, 不能恣意攀追, 適足爲魚鳥笑人而已, 亦不滿深山老古錐一彈指, 且呵. 非久一存, 是固深企, 果復撥諸冗, 作漫汗耶? 戚從怯寒癡頑. 仲行穩旋是幸. 張聯領完. 姑不備.]


- 김정희(金正喜) <이석농-종우-에게 주다[與石農 鍾愚]>《완당집(阮堂集)》

추위의 여세가 곧장 세밑까지 이어진데다 썰렁한 강 기운마저 엄습하니, 동파(東坡)의 지옥(紙屋)과 죽탑(竹榻)으로는 월동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당 태위(党太尉)가 고주(羔酒)를 조금씩 따라 마셨던 풍류도 내게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추운 아침에 손을 호호 불고 이 가절(佳節)에 무료함을 더욱 느끼면서, 그저 산중에서 눈 녹인 물에 차를 우려 마시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던 차에 뜻밖에 보내주신 편지와 함께 좋은 술과 산짐승 고기를 받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내 구미(口味)에 너무 호사스러울 뿐 아니라 식욕도 가라앉았으니, 저 연한 양고기에 은합(銀榼)의 술을 마신 모산(茅山)의 도사(道士)들은 식탐이 많은 배불뚝이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추운 밤, 종묘에서 제향(祭享)을 모시느라 아직 지난 번 병세(病勢)가 곧바로 쾌차하지 못했음을 살펴 알았습니다. 푸른 암벽, 푸른 이내 낀 산 속을 유람하여 정신을 조용히 쉬어야만 공무에 찌든 속진(俗塵)을 씻어낼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쉽지 않은지요? 나 같은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신선이 되어 훌쩍 떠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앓던 해수증(咳嗽症)은 이곳의 좋은 샘물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비록 달팽이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기침이 심하지 않으니, 자못 기이합니다.
보내주신 두 서화첩(書畵帖)은, 요즘 창가에 앉아 그 토묵(吐墨)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참으로 진기한 작품입니다. 게다가 오방치(吳邦治)가 쓴 화제(畵題)는 필법이 고아(古雅)하여 좋으며, 또 홍설재(鴻雪齋)1)의 글씨는 바로 저수량(褚遂良)2) 서법(書法)의 정수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서화첩의 작자가 모두 누구인지 알 수 없단 말입니까. 천하가 지극히 넓어 이들이 두 사람 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혹 우리나라가 외진 지역이라 견문이 미치지 못했을 뿐 강소(江蘇)ㆍ절강(浙江) 지역에는 잘 알려진 사람들인 것입니까. 어찌하여 화록(畫錄)이나 서보(書譜)에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씨(李氏) 화권(畫卷)의 청록색은 그 선염(渲染)3) 이 더욱 신묘함을 알겠으니, 옛 사람이 “그림을 좋아함이 골수(骨髓)에 들었다.”고 한 것을 이런 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한번 보고난 서화(書畵)에는 마음을 머물러 둔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서화첩은 차마 손에서 선뜻 내려놓지 못하겠습니다. 잠시 여기에 두어 더 감상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종전의 묵은 벽호(癖好)가 다시 도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 눈 내릴 때 산방(山房)에서처럼 마주 앉아 이 서화첩을 함께 품평할 수 없는 것이 몹시 아쉽습니다.

1) 홍설재(鴻雪齋) : 청(淸)나라 때 사람으로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뛰어났던 황단서(黃丹書)를 가리킨다. 그의 호가 설재(雪齋)이다.
2) 저수량(褚遂良 596~658) : 당(唐)나라 때의 명필로 그의 서법은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을 계승하고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의 장점을 두루 갖추어 힘차면서도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3) 선염(渲染) : 묵법(墨法)과 담채법(淡彩法)의 한 종류로 바림 또는 설색이라고도 한다. 먼저 화면에 물을 칠하고 마르기 전에 수묵이나 채색을 칠하여 붓 자국이 보이지 않게 축축이 번지는 점진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대개 한 쪽을 진하게 나타내고 다른 한 쪽은 갈수록 엷고 흐리게 나타낸다. 산수화에 구름이나 안개가 끼거나 비가 오는 경치, 달밤 등을 그릴 때 많이 사용된다.

[餘寒直抵臘下, 江氣又從以侵凌; 老坡之紙屋竹榻, 不足排悶, 党尉之羔酒淺斟, 亦非雅分. 朝冷呵手, 益覺佳節無▼(忄+羽/木), 但憶山中雪水試茗. 忽伏承下書, 夾之以美醞山肉, 非徒口趣太奢, 胃饞可鎭; 茆山道士脆羝銀榼, 卽一笨伯耳. 何等頂謝! 謹伏審夜寒駿奔餘, 匀體度尙有前損之未卽淸和; 必須石翠嵐漪之間, 頤神養眞, 可以大滌舃底黃塵. 此事果不容易耶? 如小人者, 實不耐米鹽凌雜, 竊欲輕擧而不能辦矣. 正喜嗽症, 實賴泉力, 雖作蝸縮, 不至鼈咳, 殊可異矣. 二帖, 間從窓影, 細閱吐墨, 儘是奇品. 且其吳邦治所題, 筆法雅古可愛; 又鴻雪齋書, 直是褚法神髓, 未知皆何等人耶! 天下至廣, 此輩皆無聞焉; 抑或偏方見聞之所未及, 而盛稱於江浙間歟! 何畵錄書譜, 不見一人也. 李卷靑綠, 愈見其渲染之神妙, 古人所云愛畵入骨髓者, 始可論於此等耳. 近於烟雲過眼處, 未甞留着此心, 今不忍遽釋, 仰蘄暫存, 是見獵之習氣耶? 恨無由對訂, 如山房雪几耳.]

- 김정희(金正喜) <권이재-돈인-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완당집》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첫 번째 편지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석농(石農) 이종우(李鍾愚 1801~?)에게 보낸 것이다. 김정희는 1849년, 64세의 노령으로 9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한강 가 용산의 집에서 살았다. 여기서 강은 바로 한강을 가리킨다.
이종우는 산수화를 잘 그렸고, 글씨는 신위(申緯)와 김정희의 필법이 조화된 독특한 서체로 필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가뜩이나 추운 동짓달, 김정희는 차가운 강바람이 냉기를 몰아오는 한강 가의 집에서 입을 덜덜 떨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 긴 유배에서 풀렸지만 아직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처지라 자유로이 나다니는 물고기와 새가 부럽다. 그래서 자기의 삶이란 것이 아무 일없이 한가로운 저 산속 노승의 찰나만도 못하다고 투덜거린다. 그렇지만 이 편지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 따위는 읽을 수 없고, 오히려 추운 겨울 한 그루 낙락장송 같은 굳고 곧은 기품이 느껴진다.

두 번째 편지는 김정희가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에게 보낸 것이다. 권돈인은 서화(書畵)에 뛰어났고, 김정희와 특히 친밀하였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여모유첨(與毛維瞻)>이란 편지에 “한 해가 다 갈 즈음 비바람이 썰렁하니, 종이를 바른 창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집에 등잔불이 푸르스름하다.[歲行盡矣, 風雨凄然; 紙窓竹屋, 燈火青熒.]”고 한 것으로 보아, 지옥(紙屋), 죽탑(竹榻)은 지창(紙窓), 죽옥(竹屋)을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는 물론 김정희 자신의 집을 비유한 것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도곡(陶穀)이 당 태위(黨太尉) 집의 기녀(妓女)를 얻어서 돌아오는 길에 눈 녹인 물로 차를 우려 마시면서 “당 태위 집에서는 이러한 풍류를 몰랐겠지?”라고 하자, 그 기생이 대답하기를 “그는 거친 사람이니, 어찌 이러한 풍류가 있겠습니까. 다만 따뜻한 소금장(銷金帳) 안에서 잔에 얕게 술을 따라 마시고 가기(歌妓)의 나직한 노래를 들으며 양고주(羊羔酒)를 마실 줄 알 뿐입니다.”고 하니, 도곡이 부끄러워했다는 고사가 있다. 소금장은 금색 실을 넣어서 정교하게 짠 고급 휘장이다. 양고주는 이름난 미주(美酒)이다. 원(元)나라 송백인(宋伯仁)의 《주소사(酒小史)》에 “산서(山西)에는 양고주이다.”고 하였다.
중국 낭주(朗州)의 도사(道士) 나소미(羅少微)가 모산(茅山)의 자양관(紫陽觀)이란 도관(道觀)에 기숙할 때 정 수재(丁秀才)란 사람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추운 겨울 싸락눈이 몹시 내리는 밤에 두세 명의 도사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서 살찐 양고기와 좋은 술을 먹고 싶다고 탄식하자 정 수재가 “그걸 가져오는 게 무에 어렵겠습니까.” 하고는 곧바로 나갔다가 밤이 깊을 무렵 눈을 맞으며 돌아와 은합(銀榼), 즉 은으로 만든 술통 하나와 익힌 양 다리 하나를 가져다 놓고는 문득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북몽쇄언(北夢瑣言)》에 나오는 얘기이다.
토묵(吐墨)은 명(明)나라 원굉도(袁宏道)의 <졸효전(拙效傳)>에 “오징어는 먹물을 토하여 자신을 가린다.[烏賊魚吐墨以自蔽]”고 한 데서 온 말로, 그림에서 먹물이 번지는 것을 형용한 말인 듯하다.

세밑이라 거리는 흥성거렸으리라. 김정희는 추운 한강가 집에 틀어 막혀 있다가 친구가 보내준 산짐승 고기와 술을 마시며 과분한 호사라고 감사하고, 연한 양고기를 뜯으며 은합에 담긴 좋은 술을 마셨던 모산(茅山)의 도사들은 식탐이 많은 자들이었다고 농담한다. 한편 김정희는 작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두 서화첩(書畵帖)을 감상하고는 매우 품격이 높다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중 작자가 이씨(李氏)임을 알 수 있는 화첩 그림의 청록색 선염(渲染)이 더욱 신묘함을 느끼면서, 자신이 서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쳤다고 자조(自嘲)한다. 환로는 순탄치 못하여 오랜 유배의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하늘이 준 반대급부인가, 김정희는 좋은 서화를 감상하는 청복(淸福)을 누릴 수 있었다.

공자(孔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고 하였다. 곤궁해도 지조를 잃지 않는 선비의 삶을 비유하는 세한(歲寒)이란 말이 여기서 생겼다.

목하, 세상은 대선정국으로 시끄럽고, 겨울은 점점 더 추워만 간다. 저 푸르고 굳은 솔을 보면서 세한도를 떠올리고 세한에 세한도의 삶을 살았던 김정희를 생각하면서, 유난히 추울 것이라는 올 겨울을 맞는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