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地雷復 上六
24.地雷復
上六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以其國 君凶 至于十年 不克征.






上六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以其國 君凶 至于十年 不克征.
上六(상육) : 상육은
迷復凶(미부흉) : 아득하게 회복함이라 흉하니,
有災 用行師(유재 용행사) : 재앙이 있어서 군사를 쓰면
終有大敗(종유대패) : 마침내 크게 패하고,
以其國君凶(이기국군흉) : 그 나라로써 하면 임금이 흉하여
至于十年不克征(지우십년부극정) : 10년에 이르도록 능히 가지 못하리라.
眚 흐릴 생. ㉠흐리다 ㉡눈에 백태 끼다 ㉢덜다 ㉣잘못 ㉤재앙(災殃) .
眚災 잘못하여 허물을 저지름, 또는 그로 인(因)하여 생긴 재앙(災殃)
迷復 : 이 爻는 復卦의 上爻로, 初九와 가장 떨어져 있기 때문임.
災眚 : 災는 天災. 眚은 자신의 과오로 빚은 재앙.
用行師 : 이 爻가 변하여 頣卦가 되어 兩軍이 대치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재앙을 받아 대패한다 한 것임.
[풀이] 상륙은 음유거극, 초강에서 가장 멀고 게다가 정응을 갖지 못한 것은 최우까지 망설이며, 선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형상이므로 흉이다. 이와같다면 자연의 재난이나 자기 턋의 재난도 있을 것이고, 이런 태도로 군대를 움직이면 마지막엔 대패를 초래하여 그 누를 군주에까지 미치므로 흉이다. 10년이 지나도 적국을 정벌하는 일은 거의 없으리라.
上六 迷復이라 凶하니 有災생하야 用行師면 終有大敗하고.
以其國이면 君이 凶하야 至于十年이 不克征하리라 象曰 迷復之凶은 反君道也일새라
회복하는데 방황해서 끝내 깨닫지 못하여 善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흉하니 군사를 일어켜서 대패를 초래할 뿐이고 재앙이 인군에 미쳐서 십년을 싸워도 이기지 못한다.이런자리는 재반사흉이다.사리사욕에 잡혀있는 사람이다.사리사욕에 사로 잡혀 선으로 돌아오지않고 끝에가서는 재액을 받아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때다.재반사 흉이다.
[상육]미혹 속에 빠져서 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흉하니 과실과 재난뿐이다. 군사를 지휘하면 대패하고, 국사를 행하면 군주의 흉이 되니, 끝내 선을 회복하지 못한다.
迷復 : 미혹되게 돌아옴이다. 迷는 사리를 옳게 분변하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는 상태(迷惑)이다. 佛家에서 어지러운 속세를 迷岸이라 하는데, 어지러운 세상사에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고 헤매며 떠도는 상태를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上六은 迷復이라. 凶하니 有災眚하야 用行師1면 終有大敗하고 以其國이면 君이 凶하야 至于十年히 不克征하리라.
【傳】以陰柔,居復之終,終迷不復者也,迷而不復,其凶,可知,有災眚,災,天災,自外來,眚,己過,由自作,旣迷不復善,在己則動皆過失,災禍,亦自外而至,蓋所招也,迷道不復,无施而可,用以行師則終有大敗,以之爲國則君之凶也,十年者,數之終,至於十年不克征,謂終不能行,旣迷於道,何時而可行也.
[정전]상육은 복괘의 끝이므로 혼미하여 선을 회복하지 못한 자이니, 그 흉을 알만하다. “有災眚”에서 災는 天災로 외부에서 닥치는 재앙이고, 眚은 人災로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사려가 혼미하여 선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動하는 바가 모두 과실이 되고,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災禍 또한 스스로가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혼미한 상태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마침내 대패하게 될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려 한다면 군주의 흉이 될 것이다. 十年이라 함은 數의 窮極을 말한다. 그러므로 ‘至于十年 不克征’은 끝끝내 선을 행 할 수 없음을 이른다. 도에 혼미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선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陰柔로 復卦의 終에 거하니 끝내 昏迷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이니, 혼미해서 돌아오지 못하면 흉함을 알 만하다. 災眚이 있다는 것은 災는 天災이니 밖으로부터 온 것이요, 眚은 자기의 허물이니 자기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이미 혼미하여 善에 돌아오지 못하니, 자신에게 있어서는 동함이 모두 과실이요, 災禍 또한 밖으로부터 이르니 이 또한 자기가 부른 것이다. 道에 혼미하여 돌아오지 못함은 어느 곳에 시행해도 가한 것이 없으니, 이로써 軍을 출동하면 끝내 大敗가 있고,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君主가 凶하다. 10년이란 數의 마직막이니, 10년에 이르도록 능히 가지 못한다는 것은 끝내 행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이미 道에 昏迷하니, 어느 때에 행할 수 있겠는가.
【本義】以陰柔,居復終,終迷不復之象,凶之道也,故其占,如此,以,猶及也.
陰柔로 復의 마지막에 거하니 끝내 혼미하여 돌아오지 못하는 象이니, 흉한 道이다. 그러므로 그 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以는 及(더븖)과 같다.
象曰 迷復之凶 反君道也.
象曰(상왈) : 상에 가로되
迷復之凶(미복지흉) : '미부지흉'은
反君道也(반군도야) : 임금의 도에 반함이라
상전에서 복으로 망설이는 일이 흉인 것은 군주로서의 도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上陰] :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바른길로 돌아 오는 것을 잊고 신념없이 방황하고 있다. 군주된 자의
정도에 어긋난 행동이다. 흉하리라. 天災(천재)와 사람이 저지른 재난이 겹치는 것이다. 이러한 때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니 마침내는 크게 敗北(패배)하여 나라와 임금에게 화가 미친다. 흉하다. 10년을 싸워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상왈]迷復之凶은 君子의 道에 反하기 때문이다.
象曰 迷復之凶은 反君道也새라.
【傳】復則合道,旣迷於復,與道相反也,其凶,可知,以其國君凶,謂其反君道也,人君,居上而治衆,當從天下之善,乃迷於復,反君之道也,非止人君,凡人,迷於復者,皆反道而凶也.
[정전]선을 회복하면 다시 정도에 이르는 것이다. 선을 회복함에 혼미하다는 것은 곧 정도와 상반하는 것이니 그 흉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임금이 윗자리에 있으면서 무리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마땅히 천하의 선을 따라야 하는 것인데, 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혼미한 도에 빠져있음은 군도에 반하는 것이다. 이러함은 다만 임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회복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정도에 위배되므로 흉한 것이다.
돌아오면 道에 합하는데 이미 돌아옴에 혼미하면 道와 相反되니, 그 흉함을 알 수 있다. ‘以其國君凶’은 君主의 道에 위반됨을 이른다. 人君이 위에 거하여 무리를 다스림에 마땅히 天下의 善을 따라야 하는데, 돌아옴에 혼미하니 君主의 道에 위반되는 것이다. 이는 다만 人君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요, 돌아옴에 혼미한 자는 모두 道에 위반되어 凶하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01권
[復]
[復] 雲峯胡氏曰反復其道。統言陰陽往來之理也。七日來復。專言一陽方來之數也。又以不遠復。爲入德之事。敦復爲成德之事。其所以統言專言之旨。入德成德之序。皆可指陳歟。
운봉 호씨(雲峯胡氏)가 “‘그 도를 반복한다.[反復其道]’라고 한 것은 음양(陰陽)이 왕래(往來)하는 이치를 종합하여 말한 것이고, ‘7일에 돌아온다.[七日來復]’라고 한 것은 일양(一陽)이 바야흐로 오는 수치를 전적으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고 한 것을 덕에 들어가는 일로 삼고 “돈독하게 돌아온다.[敦復]”고 한 것을 덕을 이루는 일로 삼았다. 호씨가 종합적으로 말하고 전적으로 말한 뜻과 덕에 들어가고 덕을 이루는 순서에 대해 다 하나하나 말해 줄 수 있겠는가?
晴對。天地密移。運轉無已。消長之道。反復迭至。則是乃天地自然之機也。易之爲義。扶陽而抑陰。故必於復卦之辭。乃曰反復其道。統言陰陽往來之理。
而一陽之來復。以卦爻言之則自坤初爻歷七爻而爲復。以月數言之則自五月陰長之時。歷七月而爲復。
以卦次言之則自姤卦陽消之時。變七卦而成復。故其數爲七而陽者日也。故曰七日來復。此之謂專言一陽往來之數也。
至若不遠復。爲陽復之初。則正似善心之初萌而爲入德之事也。
敦復有中順之德則正似善行之益固而爲成德之事也。然而不遠復之義。
繫辭以顔子之不貳過當之。則是指下聖人一等處言之也。恐不可直以爲初學入德之事矣。
敦復之義則當陽復方微之時。以柔居尊。故蓋欲其敦復而勿失也。此正學者之所省察。則亦不可直以爲君子成德之事矣。
[이청(李晴)이 대답하였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말없이 이동하고 끊임없이 운행하며 사라지고 자라나는 도(道)가 반복하여 번갈아 이르는 것은 곧 하늘과 땅의 자연적인 기능(機能)입니다. 역(易)의 의의는 양(陽)을 도와주고 음(陰)을 억제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복괘(復卦)의 괘사(卦辭)에서 “그 도를 반복한다.[反復其道]”고 하여 음양(陰陽)이 왕래하는 이치를 종합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양(一陽)이 돌아오는 것은 괘효(卦爻)로써 말한다면 곤괘(坤卦) 초효(初爻)에서 일곱 번의 효(爻)를 지나면 복괘가 되고, 달의 수로 말하면 5월의 음이 자라는 때로부터 7개월이 지나 복괘가 되며,
괘(卦)의 순서로 말하면 구괘(姤卦)의 양이 소멸되는 때로부터 일곱 괘가 변하여 복괘가 되므로 그 수치를 7로 한 것이고, 양은 일(日)에 해당하므로 “7일에 돌아온다.[七日來復]”고 한 것이니, 이를 일러 “일양(一陽)이 왕래하는 수치를 전적으로 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고 한 것과 같은 경우는 양이 되돌아오는 초기가 되니 바로 착한 마음이 처음 싹트는 것과 같으므로 덕에 들어가는 일이 되는 것이며,
“돈독하게 돌아온다.[敦復]”고 한 경우는 중(中)으로서 순한 덕이 있으니 바로 착한 행위가 더욱 굳어진 것과 같으므로 덕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의의를 계사(繫辭)에서는 안자(顔子)가 허물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 것에 해당시켰으니, 이는 성인(聖人)보다 한 등급이 낮은 경지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아마도 곧바로 초학자가 덕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돈독하게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의의는 양이 돌아왔으나 아직 미약할 때를 당하여 유약한 자로서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대개 그 돈독하게 돌아오며 실수가 없게 하고자 함이니, 이는 바로 배우는 학생이 성찰(省察)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역시 곧바로 군자가 덕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彖辭曰七日來復。利有攸往。而象傳則曰至日閉關。商旅不行。后不省方者何也。至若復其見天地之心。當於何處見得耶。
濂溪就回來處說。伊川就動處說。兪氏則謂天地生物之心。無處不在。
聖人於剝反爲復。靜極動初。見天地生物之心未嘗一日息。非爲惟復卦見天地之心也。以靜爲天地之心非也。以動爲天地之心亦非也。未知當從何說。
단사(彖辭)에서는 “7일에 돌아옴이니 가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는데 상전(象傳)에서는 “동짓날에 관문을 닫고 장사치와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게 하며 임금이 지방 순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고 한 것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주염계(周濂溪)는 ‘돌아오는 곳’을 가리켜 말하였고, 이천(伊川)은 ‘동(動)하는 곳’을 가리켜 말하였으며, 유염(兪琰)은 “천지의 생물(生物)하는 마음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성인(聖人)은 박(剝)이 돌아서서 복(復)이 되고 정(靜)이 다하여 동이 시작하는 데에서 천지의 생물하는 마음이 하루도 쉰 적이 없음을 본다는 것이지, 오직 복에서만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정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동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떤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馥對。天道好還。雖有利往之幾。穉陽始生。政須靜養之功。康節詩曰一陽初動處。萬物未生時。周禮冬至
日。奏樂於圜丘。此等處正好看。七日來復。至 日閉關之意矣。
[신복이 대답하였다.]
하늘의 도(道)는 순환함을 좋아하여 비록 가는 것이 이로운 기미는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양(陽)이 처음 생겨났을 적에는 조용히 기르는 일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소 강절(邵康節)의 시에, “양 하나가 처음 움직이는 곳이고 만물이 아직 생겨나기 전이다.[一陽初動處 萬物未生時]”라고 하였고, 《주례(周禮)》에는 “동짓날에 원구(圜丘)에서 음악을 연주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곳에서 7일에 돌아오는 것과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 뜻을 잘 볼 수 있습니다.
至若復其見天地之心。聖人之訓。可謂說得親切。夫天地生物。其心孔仁。自元而貞。貞而復元。雖在大冬嚴雪百草萎死之時。而藹然生物之心。未嘗一日而暫息。故上變而下生。剝極而復來。半夜雷聲。喚起無中含有之象。一線陽氣。帶得品物流形之意。此所以爲天地之心也。
且純坤積陰之時。雖未嘗無陽。而人不可得而見。及其子夜將半。一陽初動。則萬物化生之功。於是乎權輿。而天地生物之心。可見於剝極必復之際矣。儻所謂復見天地之心者非耶。
萎 시들 위. ㉠시들다 ㉡마르다 ㉢쇠미하다 ㉣앓다 ㉤둥굴레(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藹 우거질 애. ㉠우거지다 ㉡열매가 많이 열리다 ㉢부지런히 일하다 ㉣윤택하다(潤澤--) ㉤온화하다(溫和--) ㉥사물의 모양 . 暫 잠간 잠. 半夜 한밤중.
儻 빼어날 당. ㉠빼어나다, 뛰어나다 ㉡갑자기, 별안간 ㉢만일, 혹시, 적어도 ㉣멋대로, 마음대로 ㉤실망하는 모양 ㉥분명(分明)하지 않은 모양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고 한 것과 같은 경우는 성인의 교훈이 친절하게 설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천지가 생물(生物)하는 마음은 매우 인(仁)한 것입니다. 원(元)에서 형(亨)과 이(利)를 거쳐 정(貞)으로 가고 정에서 다시 원으로 돌아가므로, 비록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온갖 풀이 말라 죽는 때라고 하더라도 생물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여 단 하루도 잠시 쉰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에서 생기고 박(剝)이 다하면 복(復)이 생겨나며 한밤중의 우렛소리가 무(無) 속에 유(有)를 내포한 상(象)을 환기시키니, 한줄기 양기(陽氣)가 갖가지 만물의 형체를 유출시키는 뜻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순곤(純坤)의 음(陰)이 쌓였을 때에도 비록 양(陽)이 없었던 적은 없으나 사람들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동짓날 한밤중이 될 무렵에 한 양이 처음 움직이게 되면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하므로, 박(剝)이 다하여 반드시 복(復)이 될 적에 천지의 생물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잘못이겠습니까.
至於先儒之論。其說不一。濂溪自其來復者言則所以就回來處說也。程子自其方動者言則所以就動處說也。要之道理只一般。非有所異。而程子之論曰動之端。乃天地之心。朱子亟稱之曰自古儒者。皆言靜見天地之心。惟某言動而見天地之心。是於動處求靜。以事理考之。程說爲密矣。
若兪氏所謂以靜爲天地之心非也。以動爲天地之心亦非也云者。蓋兼動靜而說。而其言微帶語病。似不必如是立說也。
大抵復之爲德也盛矣。天地之德。以復爲善。不復則息矣。聖人以靜極而動爲復。常人以惡極而善爲復。君子得輿。朝廷之復也。匪風下泉。天地之復也。人君苟能體來復之象。而施生物之功。則斯可謂善用復矣。古之聖王。順月行令而於至日。尤致意焉。蓋有以也。以上復
亟 빠를 극, 자주 기
선대 학자들의 학설도 거기에 대한 의논이 같지 않았습니다. 주염계는 돌아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니 ‘돌아오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되고, 정자(程子)는 바야흐로 동(動)하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동하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됩니다. 요컨대 도리는 같은 것이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자가 “동의 실마리가 곧 천지의 마음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주자(朱子)가 자주 일컬어 말하기를, “예로부터 모든 학자가 정(靜)의 상태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으나 오직 정자는 동의 상태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동하는 곳에서 정을 구하는 것이니 사리(事理)로써 고찰하면 정자의 말이 더 치밀합니다.
유씨(兪氏)가 “정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동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한 것은 아마 동과 정을 겸하여 말한 것 같은데, 그 말에는 약간의 어폐(語弊)가 있으니 굳이 그렇게 논리를 내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복(復)의 덕은 성대한 것으로서 천지의 덕은 복(復)하는 것을 선(善)하게 여기니, 복하지 않으면 천지의 기능이 종식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정이 다하여 동이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고, 보통 사람은 악이 다하여 선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군자가 수레를 얻는다.”고 한 것은 조정(朝廷)의 복이 되는 것이고,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경우는 천지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진실로 복이 오는 상(象)을 본받아서 생물(生物)하는 공(功)을 베풀면 복의 이치를 잘 응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성왕(聖王)은 계절에 따라 그 철에 맞게 행동하였으되 동짓날에 더욱더 신경을 쓴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은 복괘(復卦)이다.
[주D-001]비풍(匪風)과 하천(下泉)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모두 현자(賢者)가 주(周)의 왕실(王室)이 미약해진 것을 걱정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