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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청풍선비 2014. 4. 22. 20:49

- 삼백열여섯 번째 이야기
2014년 3월 31일 (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제 곧 4월이다. 음력으로 3월. 봄이 무르익는 달이다. 봄은 만물이 새로 싹터서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계절이다. 그런데 이처럼 오로지 생명이 약동하고 재생의 기운이 넘치는 계절이어야 할 봄에 생명의 기운이 억눌리고 재생의 기운이 막히는 기막힌 역설이, 성큼 다가든 봄기운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처럼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봄이면 누군가 또는 어느 신문기사에선가 꼭 한번은 들먹여서 다들 들어본 구절, “오랑캐 땅에는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동방규(東方虬)라는 당의 시인이 읊은 ‘소군원(昭君怨)’의 앞 두 구절이다.

그리고 청춘의 열병을 앓던 시절 밤을 새워 쓰던 연애편지에 한두 번 인용했던, T. S. 엘리엇의 기념비적 장시(長詩) ‘황무지’의 유명한 도입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히려 잔인하고 겨울이 따뜻했다는 역설. 때로 현실은 문학보다 더 역설적이다.

가만히 생각합니다. 태극이 쪼개져서 음양이 나뉜 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내어서 네 계절이 생겨납니다. 해가 운행하는 황도의 위치가 다 내려가고, 달이 열두 바퀴를 다 돌아서 도수가 장차 끝나면 한 해가 또다시 시작하는데 그것을 봄이라고 합니다.
봄에 해당하는 날은 갑과 을이며, 봄을 상징하는 임금은 태호, 봄의 신은 구망입니다. 그리고 봄의 기운은 온화하게 활짝 펴져서 모락모락 아른아른 화창한 기운으로 오로지 뭇 생명을 일깨우고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것을 일삼습니다. 그런즉 그 덕을 생명성이라 합니다. 여름이 만물을 자라게 하고 가을이 성숙하게 하고 겨울이 갈무리하되 봄이 간여하지 않지만 자라고 성숙하고 갈무리 되는 것도 생겨나지 않으면 각 계절이 어떻게 이런 작용을 펼치겠습니까? 이 때문에 봄은 네 계절을 관통해서 작용하며 만물이 바탕을 삼고 시작되는 힘으로서 한 해의 머리가 됩니다.
사람이 하늘의 도를 체득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이라는 한 글자에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궁극의 한 근원의 힘이 흘러 작용하여서 때에 부여된 것이 봄이고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인입니다. 계절의 봄은 곧 사람의 인이며, 사람의 인은 곧 계절의 봄입니다. 인을 얻으면 봄에 부합하고 인을 잃으면 봄에 반합니다. 봄에 부합하면 온화한 기운이 이르러서 만물이 자라고, 봄에 반하면 사나운 기운이 감응하여 온갖 재앙이 일어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 봄은 네 계절을 관통하여 시작이 되니 이 인도 사단을 통괄하여 근본이 됩니다. 이 봄은 만고에 걸쳐 변하지 않으니 이 인도 온 세대에 걸쳐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즉 때의 봄을 알려면 당연히 나에게 있는 인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때의 봄을 체득하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을 다 발휘해야 합니다. 인으로써 도를 닦고 인으로써 정사를 펼쳐서 인을 실행하는 노력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아서 따뜻한 봄기운이 대지를 데우고 모든 만물에 두루 스며들고 녹아들듯이 되면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갑니다. 한 나라가 인에서 일어나고 인민이 조화롭고 만물이 자라나며 온 사방에 봄이 와서 모든 만물이 저마다 제 자리를 잡는 것은 굳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竊謂自太極旣判陰陽旣分之後, 寒暑相推, 四時乃生. 日窮于次, 月窮于紀, 數將幾終, 歲且更始者, 其名曰春也.
其日甲乙, 其帝太皥, 其神句芒, 而其爲氣也沖和發揚, 藹藹融融, 專以鼓動群生, 化育萬物爲事, 則其爲德曰生也. 夏之長也, 秋之成也, 冬之藏也, 有不預也, 而其所謂長也成也藏也者, 非生則何以施功. 此所以貫徹四時, 資始萬物, 而爲歲之首者也.
以人體天之道言之, 則不可以他求者也, 在乎仁之一字而已矣. 蓋一元流行, 賦於時曰春, 賦於人曰仁. 時之春卽人之仁也, 人之仁卽時之春也. 得乎仁則合乎春, 失乎仁則反乎春. 合乎春則和氣至而萬物以育, 反乎春則戾氣應而千災以興.
雖然, 是春也貫四時而爲始, 則是仁也統四端而爲本. 是春也亘萬古而不變, 則是仁也歷千世而不異. 然則欲知在時之春, 當反在我之仁. 欲體在時之春, 當盡在我之仁. 苟能修道以仁, 發政以仁, 爲仁之功, 不息而久, 至於熏蒸透徹融液周遍, 則天下歸仁. 一國興仁, 民和物育, 八區爲春, 各得其所, 何足道哉.

-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대춘책(對春策)」, 『고산유고(孤山遺稿)』


4월은 청춘의 달이다. 굳이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지 않더라도 청춘은 생명의 등불이 빛나며, 설레고 벅찬 감정의 기복이 걷잡을 수 없이 들끓는 시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청춘은 늘 앓고 있으며, 아파한다. 청춘의 아픔은 위로하거나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앓고 지나가야 한다. 마치 홍역처럼. 그렇게 앓고 면역력을 얻어야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리하여 청춘은 아픈 나날을 보내면서 미래를 꿈꾼다. 온갖 일을 겪어보고 좌충우돌하면서 강고한 사회현실과 부딪혀가면서 자기를 확장하고 미래를 향해 자기를 던져간다. 그런데 오늘날의 청춘들은 꿈을 꿀 권리마저도 박탈당하였다. 미래를 기획할 수도, 꿈꿀 수도 없다. 미래를 위해 오늘, 자기를 갈고닦을 수도 없다. 주유소에서 편의점에서 커피숍에서 빵집에서 용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청춘들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미래의 자기를 만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청춘에게 4월은 청춘의 달이 아니다.

4월은 혁명의 달이다. 역사의 아픔을 아파했던 청춘들이 젊고 숭고한 의분을 불태워 불의를 정의로 바꾸었던 달이다. 그런데 현재의 자기에만 갇혀서 미궁 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의 청춘들은 아픔의 공감을 기반으로 한 아픔의 연대를 이루지 못한다. 사회가 온통 병들어 있어도 한사코 감추려고만 드는 불순한 기획에 말려들어서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남들의 아픔과 내 아픔으로 이렇게도 뼈저리게 아픈데 댁들은 “안녕들 하시냐고?” 외쳤던 그 단말마의 비명마저도 틀어 막혀 버렸다. 왜 그리되었을까? 왜 오늘날 우리의 청춘들은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가? 왜 우리의 청춘들은 이웃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아파하지 못하는가?

7, 80년대에 십 대였던 세대는 거의 대부분 부친살해의 경험을 겪었다. 적어도 내 삶은 아버지 세대의 그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십 대의 거의 모두는 아버지 세대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은 물질적 혜택을 누렸고, 자기의 삶을 더 넓게 기획하고 더 높이 도약할 수 있었다. 적어도 생존의 처절한 궁핍감을 아물지 않는 상흔처럼 지니고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넘어서 자기 삶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교활한 청춘들은 어느 누구도 아버지보다 나은 자기를 꿈꿀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특하게도.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꿈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청춘은 부조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리하여 또 그에게는 현실의 부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청춘의 아버지들도 이런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하고, 또는 예감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청춘들에게가 아니라 내 아이에게 내가 가진 것을 물려주려고, 또는 적어도 나만큼은 누리게 하려고 기를 쓰고 자기들만의 리그,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만든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대학들이 아예 대놓고 아버지의 직업으로, 사는 곳으로 신입생을 뽑는다는 사실을. 동네 빵집, 떡볶이 집, 구멍가게까지도 대기업의 아들 손자며느리들이 빨판을 들이대는 문어처럼 발을 뻗쳐서 빨아들이고 있다. 이들도 처음에는 최소한 쪽팔림은 느꼈을 것이나 지금은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하다. ‘아니꼬우면 너도 하지 왜?’ 하는 식이다. 이런 사회현실에서 어떻게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어느 사회라도 부조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어느 사회라도 부조리하지 않은 사회가 없다. 인간의 생활세계는 언제나 부조리했고, 부조리하고, 부조리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이, 숙명이 바로 부조리한 것이다. 기성세대는 권력이고 권력은 부패를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청춘의 세대는 부패한 기성의 권력이 만들어내는 생활세계의 부조리를 저항해가면서 자기들의 세대를 열어간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삼라만상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고리로 순환하는 우주와 세계의 진상이다. 모든 시대의 기성세대는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을 위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은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을 부르고 혁명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을 꿈꾸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청춘은 혁명을 통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청춘이 꿈꾸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이다. 사회의 본질이 바로 부조리한 것임을 청춘이 미리 알고서 아예 체념하는 사회는 절망스러운 사회이다. 그렇다고 청춘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꿈을 꾸라고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하더라도 꿈을 꿀 수 없다. 청춘에게 청춘을 돌려주면 청춘은 꿈을 꾸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청춘에게 청춘을 돌려주어 청춘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할 수 있겠는가?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