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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328]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청풍선비 2014. 7. 6. 16:37

- 삼백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2014년 6월 23일 (월)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사람은 이름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세상 모든 물건과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으로 분류하고, 비슷한 이름을 붙인 것들끼리 모아서 더 큰 무더기의 이름을 만들어 이해한다.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것은 신화적으로는 내가 그 대상을 파악하고 장악하고 명령하고 규정하고 지배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성서』에서도 “너희들의 하느님인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천명하였다. 근래까지도 전통 한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황이나 이이와 같은 선현의 글을 읽다가 본명을 지칭하는 글자가 들어 있는 구절이 나오면, 예컨대 이황의 문집에서 이황이 스스로를 가리켜 ‘황이…’라고 한 구절에서는 ‘모가…’라고 하고 넘어가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름은 신성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사회에서는 군주나 스승, 부모 앞에서는 자기 이름을 일컫고 일상에서는 자로 서로를 불렀다.

이름은 나를 대표하며 나의 자기동일성, 또는 자기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름 외에 그 무엇이 나의 나다움을 항구히 보존하고 있는가! 어릴 때 읽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렴풋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마을에 새로 판사로 부임한 새처 씨가 교회에서 주인공 톰에게 이름을 묻는다. 그러자 톰이 평소에 부르는 이름을 말하는지 야단맞을 때 부르는 이름을 말하는지 되묻는다. 그러고 평소 이름은 톰이지만 야단맞을 때 이름은 토머스 소여라고 대답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한다. 아이를 얼리고 놀릴 때 애칭으로 부르거나 아무개야 하고 부르다가도 성을 붙여서 ‘김 아무개!’ 하고 부르면 아이는 긴장을 한다. 평소와 다르게 불리기 때문이다. 군대나 학교와 같이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무리를 이룬 집단에서 사사로운 인간관계로 이름을 부를 때와 정식 이름 또는 이른바 관등 성명으로 부를 때는 이름을 부르는 의미와 맥락이 달라진다.

나무는 오래 생장하면 반드시 바위골짜기에 우뚝 솟고, 물은 오래 흐르면 반드시 바다에 이른다. 사람의 배움도 또한 그러하다. 오래도록 배우고 그만두지 않으면 반드시 성취한다. 네 이름을 구라고 한다. 너는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감히 함부로 나대지 말며 감히 편안하게 놀지 말라. 오늘 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내일 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며, 오늘 한 가지 착한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착한 일을 하여 나날이 근신하면 인격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인격이 훼손되고 퇴보하여 반드시 소인으로 귀결될 것이다. 너는 이를 공경하고 이를 힘써라!

木之生久, 則必聳乎巖壑, 水之流久, 則必達乎溟渤. 人之學亦然. 久而不已, 則必至于有成. 名汝曰久. 汝其顧名而思義, 毋敢放肆, 毋敢逸遊. 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今日行一善, 明日行一善, 日愼一日, 則可至于成人矣. 不然, 日損日退, 必爲小人之歸矣. 汝其敬之, 汝其勉之.

- 하륜(河崙, 1347~1416), 「명자설(名子說)」, 『호정선생문집(浩亭先生文集)』


이름은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는 수많은 소리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름이 이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름으로 불리는 그 무엇(대상)이 있고, 또 그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그 무엇이 그 이름을 통해 드러내야 할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어떤 대상을 부르는 이름과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이 일치할 때 명실상부하다고 한다. 명실상부한 것은 우리가 그 무엇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명실상부하다는 말은 한마디로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름이 단순히 대상 사물을 지칭하는 것인 경우에는 그냥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 이름이 담아내야 할 내용을 더 우선으로 여길 경우에는 명분이라고도 한다. 바로 인간의 공동체, 사회는 명분의 공간이다. 사회는 명분에 의해 흘러가며, 명분에 의해 운영되며, 명분에 의해 존립한다.

그런데 문제는 명분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명분의 싸움이다. 권력투쟁을 본질로 하는 정치투쟁은 명분을 획득하는 자가 이긴다. 명분을 획득하지 못한 자가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이란 폭력일 뿐이다. 폭력에 의해 명분을 찬탈하는 것은 쿠데타이다. 쿠데타는 합법적 권력을 명분이 없는 폭력으로 뒤엎는 헌정질서의 파괴이며,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반동이다. 기존의 권력을 해체하거나 대체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폭력은 쿠데타이며 인류역사의 진보에 부응하여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는 혁명이다. 그러나 같은 양상을 두고도 쿠데타니 혁명이니 하는 규정에는 사건을 평가하는 시각과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치적 사건에 대한 후세의 평가라도 사실상 명분을 덧씌우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인간의 모든 행위가 명실상부해야 한다는 이상은 관념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더라도 최소한의 명분은 필요하다. 특히 그 행위의 결과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정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근현대사는 명분도 실리도 실상도 온통 뒤죽박죽으로 혼동되어 있었다. 사실상 정치사를 주도한 온갖 정당 활동이나 정치적 행위는 거의 모두 자기가 표방하는 이념이나 가치와 반비례하였다.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독재로 흐르고, 정의를 구가하는 권력이 불의로 점철되었다. 근년에 정치활동 단체의 이름에 ‘친X연대’라는 것이 있었다. 정치활동의 목적과 이념을 제시하는, 대외적으로 정치세력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서 ‘친시민’이나 적어도 ‘민주’니 ‘자유’니 ‘정의’니 하는 정치학의 고리타분한 이념도 아니고 그저 자연인의 한 사람인 ‘아무개와 친밀한’ 또는 ‘아무개를 친하게 대하는’ 정도의 해석밖에 불가능한 이름을 붙이다니! 사실 이 정치세력의 활동은 성공한 것으로 보이니 아이러니하게도 적어도 명실상부했다고 하겠다.

‘세월호’ 사건으로 미증유의, 전대미문의 인재(人災)를 겪은 와중에 치러진 지방자치 선거에서 선거의 중요한 의제와 정책적 지향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상당한 정도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통령을 믿고,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 어째서 지방자치 선거의 의제가 될 수 있는가? 과거 우리 정치사에서는 선거의 공약이 ‘이번이 마지막 출마입니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구호나 정책적 프로파간다는 명분을 배반하는 것이다. 지방자치 선거는 지방자치를 위한 선거이고, 대통령선거는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지도자를 뽑는 일이지 어느 한 사람의 권력의지에 대한 양심선언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런 현상이나 일들은 명분과 실제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의미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꽃이라고 이름 불러주었을 때 그것은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된다.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부르는 일은 대상을 내가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남이 붙여준 이름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고 있는 한 그것과 나는 주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엇으로 불린다면 그 이름은 곧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한 나는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을 구현해야 한다.

한 민간인 피의자를, 그가 아무리 국가적으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를 잡기 위해 군인을 동원하고 국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대책회의에 정복 차림으로 참석한다는 것은 명분과 실제가 얼마나 어긋나 있는가를 보여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통치의 행위는 하나하나가 선례가 된다. 중국 고대 상(商) 왕조를 세운 탕왕(湯王)은 이전 왕조의 학정에서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켜서 역사의 큰 흐름을 바로잡았지만 자기 행위가 개인적 권력욕을 포장하기 위한 명분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 덕에 부끄럽다[慙德]고 하였다. 나는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자기 정치적 행위의 본질은 권력의지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왜냐하면 정치행위에서는 권력쟁취가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적어도 자기 명분만은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총리는 총리로서 명분이 있고, 합참의장은 합참의장으로서 명분이 있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명분이 있다. 나는 그들이 자기 명분을 돌아보고 자기 행위를 명분에 맞추려고 하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