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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안동에는 송덕비가 없었다

청풍선비 2014. 8. 29. 17:28

- 삼백서른네 번째 이야기
2014년 8월 4일 (월)
안동에는 송덕비가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비석 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듯하다. 사방에서 비석이 눈에 띈다. 일만 있으면 기념비를 세운다. 옛날에는 2품 이상의 고관들 산소 앞에나 세웠을 법한 큰 비석들도 묘소마다 넘쳐난다.

그 나름대로 기념할 만한 일이 있거나 기릴 만하다고 여겨서 세우는 것이니, 괜히 트집 잡을 일은 아니다. 그 비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실행(實行)을 갖추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우리 고을 안동에는 옛날부터 비석을 세워 고을 수령의 덕을 칭송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유독 퇴계 이 선생께서는 그것을 매우 좋게 보시고 말씀하셨다.
“비석을 세우는 것은 수령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평가하는 것에 가깝다. 더구나 한때의 비난과 칭찬이 반드시 다 공정한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님에랴.”
사문(斯文) 정립(鄭岦)이 우리 고을에 부임하였는데, 혼조(昏朝)*의 탐학한 정사를 겪은 뒤라 공평한 정사에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많이들 비석을 세우고 싶어 하여 자재를 모으고 돌을 채취해 두었으나,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고을에 정공(鄭公)처럼 덕을 펴고 은혜를 베푼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만약 이 비석이 한 번 세워지고 나면 정공에게 득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8백 년 동안 유지되었던 우리 고을의 순후한 풍속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현(大賢)의 정론을 고려하지 않고, 전고에 없던 일을 처음으로 행한다면 비속하지 않으면 망령된 것이리라.

*혼조(昏朝) : 포악한 임금이 다스리는 혼탁한 조정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광해군(光海君)이 다스리던 때를 가리킨다.


吾州。自古無立碑頌邑宰德者。人皆恠之。退溪李先生獨深韙之。以爲立碑。近於評論地主贒否。况一時毁譽。未必盡出於公乎。
鄭斯文岦。來莅吾州。承昏朝叨懫之後。政平人悅。州人多欲立碑。鳩材伐石。而終未就。
自古及近。布德施惠於吾州如鄭公者。不知其幾人。若使此碑一立。非徒有損於鄭公。吾州自麗迄今。八百年淳厚之風。一朝盡矣。其不顧大贒定論。而創爲前古所無之事者。不野則妄矣


- 정칙(鄭侙, 1601∼1663), 「안동무비(安東無碑)」, 『우천집(愚川集)』 제4권, 잡저(雜著)


옛날에 지방 수령은 한 고을의 임금과 같은 존재였다. 백성들은 어떤 수령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수령으로서의 평가는 떠나간 후에 나타난다.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잊지 못해 노자를 보태주거나, 타고 갈 말을 마련해 주거나, 비석을 세우거나, 사당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후한(後漢) 때 회계 태수(會稽太守)를 지냈던 유총(劉寵)이 선정(善政)을 베풀고 떠나갈 때, 산음현(山陰縣)의 노인들이 각자 동전 100개씩을 가지고 와서 노자로 주자,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그중에서 큰 동전 하나만을 받고 나머지는 받지 않았던 고사는 유명한 일화이다.

동향(桐鄕)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던 한나라 주읍(朱邑)은 죽은 뒤에도 동향에 장사 지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그 백성들을 믿고 사랑하였는데, 그를 존경하던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는 고사도 있다.

전남 순천에 있는 팔마비(八馬碑)는 고려 때 이 고을 수령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고 떠나면서 관례적으로 받던 말 7마리와 도중에 새로 낳은 새끼 1마리까지 모두 고을로 돌려보낸 것에 감동한 고을 백성들이 세운 비석이다.

옛날 관청 건물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송덕비(頌德碑),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 영사불망비(永思不忘碑), 유애비(遺愛碑)라는 비석들도 수령의 선정과 관련된 흔적이다.

그런데 안동에는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유독 송덕비를 세워 주는 전통이 없었다. 그때까지 안동을 거쳐 간 수많은 수령들 중에 송덕비를 세울 정도의 선정을 베푼 이가 없었던 것도 아니요, 비석 하나 새길 비용을 마련 못 할 정도로 궁핍한 고을도 아니었을 텐데, 어찌 된 일일까?

그 이유를 퇴계 선생의 말을 빌려서 보면,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존장인 고을 수령의 치적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과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비석이 세워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비석의 주인공들이 모두 실제로 선정을 베푼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는 떠나가는 수령과 남아있는 토착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게다가 송덕비 건립을 위한 비용 갹출은 홍수, 가뭄 못지않게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보다 못한 영조가 세운 지 오래되지 않은 선정비와 살아 있는 전 수령을 위해 세운 생사당(生祠堂) 등을 모조리 없애라는 명을 내렸을 정도이니, 그 폐해를 알 만하다. 이런 폐해를 감안하면 아름다운 전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천 정칙의 글에서 그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옛날로 치면 지자체장이 곧 수령이다. 금전적인 가치가 우선하는 시대이다 보니, 어쩌면 그 권력은 옛날의 수령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일부 지자체장들이 무리한 사업추진으로 지역을 파탄 나게 만드는 일이 언론의 고발 프로에 심심치 않게 소개되고 있다. 현직을 떠난 후에 받아야 할 송덕비를 미리 준비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현재의 지역을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나, 지인들에게 자신을 뽐내기 위해 함부로 전횡을 일삼는다는 면에서는 가렴주구를 일삼던 옛날의 몇몇 수령과 다를 것이 없다.

세월이 지나면 닳고 깨져서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 비석이다. 설사 오래도록 남아 있은들, 산과 들의 바위마다 의미 없이 새겨져 있는 무수한 이름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정말 오래 남고 싶으면 사람들이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비(口碑)를 세울 일이다.



글쓴이 : 권경열(權敬烈)
  •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