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지방 수령은 한 고을의 임금과 같은 존재였다. 백성들은 어떤 수령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수령으로서의 평가는 떠나간 후에 나타난다.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잊지 못해 노자를 보태주거나, 타고 갈 말을 마련해 주거나, 비석을 세우거나, 사당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후한(後漢) 때 회계 태수(會稽太守)를 지냈던 유총(劉寵)이 선정(善政)을 베풀고 떠나갈 때, 산음현(山陰縣)의 노인들이 각자 동전 100개씩을 가지고 와서 노자로 주자,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그중에서 큰 동전 하나만을 받고 나머지는 받지 않았던 고사는 유명한 일화이다.
동향(桐鄕)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던 한나라 주읍(朱邑)은 죽은 뒤에도 동향에 장사 지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그 백성들을 믿고 사랑하였는데, 그를 존경하던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는 고사도 있다.
전남 순천에 있는 팔마비(八馬碑)는 고려 때 이 고을 수령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고 떠나면서 관례적으로 받던 말 7마리와 도중에 새로 낳은 새끼 1마리까지 모두 고을로 돌려보낸 것에 감동한 고을 백성들이 세운 비석이다.
옛날 관청 건물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송덕비(頌德碑),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 영사불망비(永思不忘碑), 유애비(遺愛碑)라는 비석들도 수령의 선정과 관련된 흔적이다.
그런데 안동에는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유독 송덕비를 세워 주는 전통이 없었다. 그때까지 안동을 거쳐 간 수많은 수령들 중에 송덕비를 세울 정도의 선정을 베푼 이가 없었던 것도 아니요, 비석 하나 새길 비용을 마련 못 할 정도로 궁핍한 고을도 아니었을 텐데, 어찌 된 일일까?
그 이유를 퇴계 선생의 말을 빌려서 보면,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존장인 고을 수령의 치적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과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비석이 세워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비석의 주인공들이 모두 실제로 선정을 베푼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는 떠나가는 수령과 남아있는 토착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게다가 송덕비 건립을 위한 비용 갹출은 홍수, 가뭄 못지않게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보다 못한 영조가 세운 지 오래되지 않은 선정비와 살아 있는 전 수령을 위해 세운 생사당(生祠堂) 등을 모조리 없애라는 명을 내렸을 정도이니, 그 폐해를 알 만하다. 이런 폐해를 감안하면 아름다운 전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천 정칙의 글에서 그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옛날로 치면 지자체장이 곧 수령이다. 금전적인 가치가 우선하는 시대이다 보니, 어쩌면 그 권력은 옛날의 수령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일부 지자체장들이 무리한 사업추진으로 지역을 파탄 나게 만드는 일이 언론의 고발 프로에 심심치 않게 소개되고 있다. 현직을 떠난 후에 받아야 할 송덕비를 미리 준비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현재의 지역을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나, 지인들에게 자신을 뽐내기 위해 함부로 전횡을 일삼는다는 면에서는 가렴주구를 일삼던 옛날의 몇몇 수령과 다를 것이 없다.
세월이 지나면 닳고 깨져서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 비석이다. 설사 오래도록 남아 있은들, 산과 들의 바위마다 의미 없이 새겨져 있는 무수한 이름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정말 오래 남고 싶으면 사람들이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비(口碑)를 세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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