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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억지로 시늉이라도 하다 보면

청풍선비 2014. 9. 25. 16:50

- 삼백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2014년 9월 1일 (월)
억지로 시늉이라도 하다 보면


[번역문]
인간 심술의 은미한 부분은 쉽게 들여다보기 어렵지만, 한 가지 사례를 가지고 그가 각박한지 아닌지는 알아볼 수 있다.
무릇 남이 뜻밖에 요절(夭折)하거나 흔치 않은 횡액에 빠지는 등, 놀랍고 슬퍼서 가여워할 만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한탄하는 말이나 측은해 하는 기색이 없는 것은 사람의 정리가 아니니, 얼마 안 가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화를 즐기는 단계에 이르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람은 남의 패역함을 보더라도 미워할 줄 모르고, 남의 은애를 입더라도 고마워할 줄 모른다. 그저 으레 그런 것으로 여길 따름이니, 어찌 그가 효자ㆍ충신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관찰해 보면, 백에 하나도 실수가 없을 것이니, 재주가 있고 문장력이 있어서 자신을 잘 포장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실상은 소인배인 것이다.
우연히 『용촌집』을 읽다가 실로 내 마음에 드는 한 단락이 있어서 기록해 둔다.
용촌이 말했다.
“사람이 억지로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여섯째 숙부께서 어렸을 적에 남의 집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희색을 띠었는데, 내가 충고하기를, ‘숙부께서는 어째서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남의 화를 즐거워하십니까?’라고 하니, 숙부께서 수긍하셨다.
그 후에 억지로나마 한탄을 하면서, 더러 시름겹고 처량하여 차마 감내하지 못할 듯한 모습을 짓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반드시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중에 가서는 곧 익숙해져서 천성처럼 되어버렸다. 그분은 지금 복록이나 연세가 일족 중에서 으뜸인데, 만약 그 생각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복을 누릴 관상은 아니었다.”

[원문]
人之心術隱微處。雖不可易見。然有一事可驗其刻薄者。凡聞人遭意外夭折非常厄窮驚慘可怜之事。少無咨嗟之言。惻愴之色者。非人情也。幾何不爲幸災樂禍之歸哉。若斯之人。見人悖逆而不知嫉。受人恩愛而不知感。直次第事耳。安望其爲孝子忠臣也哉。以此觀人。百無一失。有才有文。雖稱自好而眞小人也。偶讀榕村集。有一段實合余心。故錄之。榕村曰。人能勉強便好。六家叔少時。聞人家有不祥事。便有喜色。某規之曰。叔父何爲幸人之災。樂人之禍。叔頷之。自後勉強爲咨嗟。或作愁苦酸悽不可忍耐之狀。其始未必卽出於實心。到後來。便習而成性。他如今福祿壽考。甲於一族。若那意不變。便非享福之相。


- 이덕무 (李德懋, 1741~1793), 「면강(勉強)」,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55권, 앙엽기(盎葉記)


공자(孔子)는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 행위를 보고[視其所以], 어떤 동기에서 그런 행위를 했는지를 살펴보고[觀其所由], 진정으로 기꺼운 마음에서 한 행위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察其所安], 사람이 어찌 자신의 속마음을 숨길 수 있겠는가?[人焉廋哉]”라고 하였다.

그러나 드러난 행위 이외에 그 동기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즐거워서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늘 남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심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죽하면 선인들이 속임을 당했을 때, “군자는 이치에 맞는 말로 속일 수 있을지언정,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속일 수는 없다.[可欺也 不可罔也]”는 『논어(論語)』의 말로 위안을 삼았겠는가. 아무리 의심이 가는 사람이라도 그 말이 사리에 맞는데, 굳이 각박하게 그 의도까지 추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가 평소에 지녔던 소인의 기준은 “군자(君子)는 차마 못 할 짓은 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아픔과 불행을 즐기고 조롱하고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쾌하게 여긴다면, 그는 틀림없이 소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성적으로 그러한 소인조차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한 용촌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용촌은 청(淸)나라의 문신이자 저명한 학자인 이광지(李光地)의 호이다. 그의 저서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는데, 아정은 특히 그를 좋아하여 자신의 저서에 자주 인용하고 있다.

세상에 얄미운 것이, 위선자가 선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 이면이 다 들여다보이는데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남의 이목을 속이기까지 하면, 얄미움을 넘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일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그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겉으로나마 남의 이목을 의식하여 악한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포장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래도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시늉이라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몸에 배어 나중에는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조건 위선자라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 자그마한 가능성을 키울 수 있게 따뜻한 격려의 눈길을 주는 노력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면에서 용촌이 소개한 숙부의 사례는 어떤 교훈적인 말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계기가 아무 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 눈치를 보고, 어려워할 만한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소인배의 작태이고 충고해 줄 사람도 없다면, 무엇을 꺼려 애써 선악을 구분하겠는가? 옛사람들이 ‘이군삭거(離群索居)’, 즉 도움이 되는 사우(師友), 동지들을 떠나 홀로 거처하는 것을 경계한 이유이다.



글쓴이 : 권경열(權敬烈)
  •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