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
전선(戰船)을 건조할 때 비용을 지급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유안(劉晏)*의 설입니다. 행차 중이시라 참고하실 만한 서책이 없을 듯하여, 유씨의 설을 베껴 올립니다.
유안(劉晏)이 건조장을 마련하여 선박을 건조하면서, 엽전 천 꿰미를 지급하였는데, 혹자가 실제 비용은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삭감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유안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대계(大計)를 논하는 자는 작은 비용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매사에 반드시 영구히 가게끔 고려를 해야 한다. 이제 처음으로 선박을 건조하는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일을 맡을 이가 많을 것이다. 마땅히 먼저 그들의 개인적인 씀씀이가 군색하지 않게 하여야 하니, 그러면 관물(官物)이 견고하고 완전해질 것이다. 만약 대뜸 그들과 잗달게 따진다면, 어떻게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겠느냐? 훗날 반드시 그것을 삭감하려고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반이 안 되게 삭감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그 이상을 삭감한다면 운용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50년이 지나자, 유사(有司)가 과연 그 반을 삭감하였다. 함통(咸通 당나라 의종(懿宗)의 연호) 연간에 이르러 유사가 실비를 계산하여 지급하고 더 이상 여분을 두지 않자, 선박이 더욱 부실해져서 조운(漕運)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전선에 지급하는 비용은, 처음에는 제법 넉넉하였으나, 여러 차례 삭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수가 아주 적어져서, 거의 실비를 계산해서 지급한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박 기술자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마을에서 빌어먹을 정도입니다. 이는 전에 제 눈으로 직접 본 상황입니다. 관청의 일을 수행하면서 마을에서 빌어먹으니, 일의 체모가 진실로 한심하거니와, 선박이 얼마나 취약해질지도 그를 통해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국가의 변방을 방비하는 도구에 대해 이처럼 소홀하니, 어찌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설사 완전히 처음 수준을 회복할 수는 없더라도, 유안이 말한 “반으로 줄이는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는 정도까지라도 물릴 수 있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초장에 넉넉하게 지급한 수준, 중간에 삭감한 수준, 오늘날 지급하는 수준은 공문을 보내서 물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유안(劉晏, 715~778) : 당(唐)나라 때의 명재상으로, 재무 회계에 특히 밝아 부국(富國)에 큰 공을 세웠다.
[원문]
戰船營造給費事。前已奉聞之矣。所可證者。劉晏說也。行中想未有書冊可考。故劉說錄呈。 劉晏置塲造船艘。給千緡。或言用不及半。請損之。晏曰。不然。論大計者。不可惜小費。凡事必爲永久之慮。今始置船塲。執事者多。當先使之私用無窘。則官物堅完矣。若遽與之屑屑較計。安能久行乎。異日必有减之者。减半以下猶可也。過此以下。不能運矣。後五十年。有司果减其半。及咸通中。有司計費而給之。無復羡餘。船益脆薄。漕軍遂廢。 戰船給費。始頗優厚。屢度裁减。今則其數至少。殆不足以爲計費之給。船工不堪飢困。乞食於村間。此則所甞目見者也。役於官事而乞食村間。事體固爲寒心。而船之脆薄。因可推知也。國家備邊之具。踈虞如此。豈非大可憂者哉。此事不可不變通。縱不能盡復其初。退依劉晏减半猶可之說。其亦可乎。初頭優厚。中間裁减。今日所給之數。行關問之則可知矣。
- 한원진(韓元震, 1682∼1751),「여한심리사 익모(與韓審理使翼謩)」,『남당집(南塘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