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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바람벽엔 책으로 한가득

청풍선비 2015. 9. 15. 20:21
- 삼백아흔 번째 이야기
2015년 8월 31일 (월)
바람벽엔 책으로 한가득

[번역문]

나의 벗 황연보(黃淵父 황경원(黃景源))는 어려서부터 『상서』와 『좌전』읽기를 좋아하여 고문(古文)으로 글 짓는 것을 배웠는데 20대에 성대하게 일가를 이루어 문명(文名)이 한 시대를 압도하였다. 이어 과거에 급제해서는 벼슬길이 평탄하였고, 마침내 대제학에 올라 문단의 맹주가 되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 “계고(稽古)*의 힘 때문이다.”라고 칭송하니, 연보가 듣고 기뻐하면서 “이는 내가 추구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집에 ‘계고’라는 편액을 달고는 내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내 생각에 ‘계고’ 두 글자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시문과 높은 벼슬을 가지고 나의 일을 다 마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 한대(漢代)의 유자(儒者)들이 스스로 성취한 것이 진실로 이 두 글자의 힘 덕분이기는 하지만, 전 추밀(錢樞密)이 관로가 한창 트일 때에 용감히 물러난 것과 구 문충공(歐文忠公)이 기력이 강건할 때에 돌아가기를 청하려 했던 것**도 계고 중의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연보의 나이가 일흔이라 머리카락이 이미 듬성듬성하다. 도성 남쪽에 강한정(江漢亭)이라는 누각을 세웠으니, 문 앞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벽은 책으로 가득하다. 만약 일찌감치 조정을 떠나 정자에서 노닐면서 맑은 창에 기대어 못다 한 ‘계고’의 일을 마무리 짓는다면, 그 나아가고 물러남에 여유가 있고 명성과 절조 두 가지가 모두 온전해져서 선철(先哲)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연보는 그럴 뜻이 있는가?

나와 연보는 죽마고우다. 함께 조정에 벼슬할 때 고만고만한 나이에 엇비슷한 자리에 있었고 진퇴(進退)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서강(西江) 언덕에 나 또한 작은 집을 마련해 두었으니, 돌아가고자 했으나 돌아가지 못한 답답함은 연보보다 훨씬 심할 것이다. 조만간 그대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정말 함께 가겠다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노를 저어 가 그대를 따라 노닐면서 쓸쓸하지 않을 것이니, ‘계고’하려던 뜻을 이룰 날이 어찌 없겠는가? (하략)

* 계고(稽古)는 『상서』에 보이는 말로, 옛일을 살핀다는 뜻이다.
** 전 추밀(錢樞密)이 …… 했던 것 : 전 추밀은 송(宋)나라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전약수(錢若水)를 가리킨다. 한 도승(道僧)이 그의 관상을 보고는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평하였는데, 과연 그는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갓 40세 된 젊은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다.『문견전록(聞見前錄) 권7』 구 문충공(歐文忠公)은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 8권 「귀전사시낙춘하 2수(歸田四時樂春夏二首)」에, “농가의 이런 즐거움을 뉘라서 알겠는가? 나만 홀로 알건만 일찌감치 돌아가지 못했네. 몸이 강건할 때 사직을 청했어야 하지만 머뭇머뭇 주저하다가 그만 늙고 말았네.[田家此樂知者誰? 我獨知之歸不早. 乞身當及彊健時, 顧我蹉跎已衰老.]”라는 내용이 보인다.


[원문]

吾友黃淵父, 自幼時, 喜讀尙書、左傳, 學爲古文辭, 弱冠蔚然成章, 盛名壓一世. 旋擢第, 平步雲衢, 進而爲太學士, 登壇主盟. 人艶, 稱之以爲“稽古之力.” 淵父聞而喜曰: “是吾事也.” 遂扁其堂曰“稽古”, 屬余爲記.
余惟稽古二字, 所包其廣, 不可以詞藻之富、宦業之隆, 便謂吾事已畢. 彼漢儒之所自致者, 固二字之爲力, 而若錢樞密急流勇退, 歐文忠强健乞歸, 獨非稽古中一事乎?
淵父年七旬, 鬚髮已種種矣. 維南之紀, 有亭江漢, 烟雲在戶, 圖書滿壁. 苟能早決一去, 偃蹇乎亭之上, 晴窓棐几, 更究稽古餘業, 則其進退之有裕, 名節之兩全, 可以踵前哲而無愧, 淵父其有意否?
吾與淵父, 爲竹馬友. 迨其同升于朝, 年位行藏, 略與之先後. 而西湖之岸, 亦置一小築, 其欲歸未歸, 殆甚於淵父. 早晩惠好之行, 果不負携手之約, 則一棹從遊, 庶幾不落莫矣. 稽古之案, 豈無究竟之日乎? (下略)


- 조명정(趙明鼎, 1709~1779)이 지은 「계고당의 기문[稽古堂記]」
『병세집(幷世集)』제2권 「문(文)」에 실려 있다.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하지만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써주면 도(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 공자의 가르침이다. 정답은 알아도 실천은 또 다른 문제다. 도를 행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총명함이 모자라거나 인욕에 어두워지면 기미를 살펴 결단하기도 쉽지 않다. ‘용사행장(用舍行藏)’이 늘 옛 선비들의 화두였고, 그 어느 한 가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탄식이 그치지 않았던 까닭이다.

조명정도 해답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마고우인 황경원에게 그만 벼슬에서 물러나 함께 소요하기를 청한다. 두 사람이 과연 문 앞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벽은 책으로 가득한 곳에서 함께 ‘계고(稽古)’의 여업(餘業)을 마무리 지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조명정과 황경원은 동갑내기다. 조명정이 이 글을 지을 때 황경원의 나이가 일흔이라고 했으니 조명정의 나이도 당연히 일흔이었다. 조명정은 계속 벼슬살이를 하다가 이 기문을 지을 무렵을 전후해서 홍국영(洪國榮)의 일로 고향으로 쫓겨나 이듬해에 죽었다. 그렇다면 조명정은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안타까운 심정을 그저 글로 달래고 말았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황경원은 조명정보다 8년을 더 살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벼슬이 이어졌다. 따라서 황경원 역시 ‘계고’의 여업을 완성하지 못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루지 못하기에 그 간절함은 더 크다. 우리네 인생사도 그렇지 않은가? 이상과 현실, 어느 것 하나도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시쳇말로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과 돈이 있으면 건강이 허락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희망은 품고 싶다. 마음이 맞는 벗과 함께 전원으로 돌아가 계고의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희망 말이다.

조명정은 자가 화숙(和叔), 호가 노포(老圃)다. 1740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44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그 뒤 대사성, 대사헌, 이조 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영조 사후 『영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으로 『노포집』이 있다.

 



글쓴이 : 김낙철
  •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