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
나의 벗 황연보(黃淵父 황경원(黃景源))는 어려서부터 『상서』와 『좌전』읽기를 좋아하여 고문(古文)으로 글 짓는 것을 배웠는데 20대에 성대하게 일가를 이루어 문명(文名)이 한 시대를 압도하였다. 이어 과거에 급제해서는 벼슬길이 평탄하였고, 마침내 대제학에 올라 문단의 맹주가 되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 “계고(稽古)*의 힘 때문이다.”라고 칭송하니, 연보가 듣고 기뻐하면서 “이는 내가 추구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집에 ‘계고’라는 편액을 달고는 내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내 생각에 ‘계고’ 두 글자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시문과 높은 벼슬을 가지고 나의 일을 다 마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 한대(漢代)의 유자(儒者)들이 스스로 성취한 것이 진실로 이 두 글자의 힘 덕분이기는 하지만, 전 추밀(錢樞密)이 관로가 한창 트일 때에 용감히 물러난 것과 구 문충공(歐文忠公)이 기력이 강건할 때에 돌아가기를 청하려 했던 것**도 계고 중의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연보의 나이가 일흔이라 머리카락이 이미 듬성듬성하다. 도성 남쪽에 강한정(江漢亭)이라는 누각을 세웠으니, 문 앞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벽은 책으로 가득하다. 만약 일찌감치 조정을 떠나 정자에서 노닐면서 맑은 창에 기대어 못다 한 ‘계고’의 일을 마무리 짓는다면, 그 나아가고 물러남에 여유가 있고 명성과 절조 두 가지가 모두 온전해져서 선철(先哲)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연보는 그럴 뜻이 있는가?
나와 연보는 죽마고우다. 함께 조정에 벼슬할 때 고만고만한 나이에 엇비슷한 자리에 있었고 진퇴(進退)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서강(西江) 언덕에 나 또한 작은 집을 마련해 두었으니, 돌아가고자 했으나 돌아가지 못한 답답함은 연보보다 훨씬 심할 것이다. 조만간 그대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정말 함께 가겠다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노를 저어 가 그대를 따라 노닐면서 쓸쓸하지 않을 것이니, ‘계고’하려던 뜻을 이룰 날이 어찌 없겠는가? (하략)
* 계고(稽古)는 『상서』에 보이는 말로, 옛일을 살핀다는 뜻이다. ** 전 추밀(錢樞密)이 …… 했던 것 : 전 추밀은 송(宋)나라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전약수(錢若水)를 가리킨다. 한 도승(道僧)이 그의 관상을 보고는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평하였는데, 과연 그는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갓 40세 된 젊은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다.『문견전록(聞見前錄) 권7』 구 문충공(歐文忠公)은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 8권 「귀전사시낙춘하 2수(歸田四時樂春夏二首)」에, “농가의 이런 즐거움을 뉘라서 알겠는가? 나만 홀로 알건만 일찌감치 돌아가지 못했네. 몸이 강건할 때 사직을 청했어야 하지만 머뭇머뭇 주저하다가 그만 늙고 말았네.[田家此樂知者誰? 我獨知之歸不早. 乞身當及彊健時, 顧我蹉跎已衰老.]”라는 내용이 보인다.
[원문]
吾友黃淵父, 自幼時, 喜讀尙書、左傳, 學爲古文辭, 弱冠蔚然成章, 盛名壓一世. 旋擢第, 平步雲衢, 進而爲太學士, 登壇主盟. 人艶, 稱之以爲“稽古之力.” 淵父聞而喜曰: “是吾事也.” 遂扁其堂曰“稽古”, 屬余爲記. 余惟稽古二字, 所包其廣, 不可以詞藻之富、宦業之隆, 便謂吾事已畢. 彼漢儒之所自致者, 固二字之爲力, 而若錢樞密急流勇退, 歐文忠强健乞歸, 獨非稽古中一事乎? 淵父年七旬, 鬚髮已種種矣. 維南之紀, 有亭江漢, 烟雲在戶, 圖書滿壁. 苟能早決一去, 偃蹇乎亭之上, 晴窓棐几, 更究稽古餘業, 則其進退之有裕, 名節之兩全, 可以踵前哲而無愧, 淵父其有意否? 吾與淵父, 爲竹馬友. 迨其同升于朝, 年位行藏, 略與之先後. 而西湖之岸, 亦置一小築, 其欲歸未歸, 殆甚於淵父. 早晩惠好之行, 果不負携手之約, 則一棹從遊, 庶幾不落莫矣. 稽古之案, 豈無究竟之日乎? (下略)
- 조명정(趙明鼎, 1709~1779)이 지은 「계고당의 기문[稽古堂記]」 『병세집(幷世集)』제2권 「문(文)」에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