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졸재 한응인은 선조(宣祖) 연간의 문인이자 정치가입니다. 그의 이력 중에 특이한 점은 사신(使臣)으로 중국에 다섯 번이나 갔다 온 사실입니다. 한 번도 어려운 사행(使行)을 그렇게나 많이 다녀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준수한 외모, 온화한 대인관계, 뛰어난 글 솜씨, 꼼꼼한 일처리로 신망이 꽤 두터웠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는 그가 31세 때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지은 것입니다. 실록(實錄)에 의하면, 1584년 5월 3일에 출발하여 11월 1일에 귀국 보고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비행기로 세 시간 거리지만, 당시는 한양(漢陽)-의주(義州)-봉황성(鳳凰城)-요동(遼東)-심양(瀋陽)-산해관(山海關)-계주(薊州)-북경(北京)까지, 왕복 6,200여 리에 6개월이나 소요되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새벽 안개, 한낮 먼지, 저녁 바람에 맞서야 하는 행역삼고(行役三苦)와 들판에 장막을 치고 모닥불로 언 몸을 녹이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여정이었습니다. 1연에 ‘추워서 잠을 깬 뒤에 해진 갖옷을 둘렀다’는 것이 바로 그 고단함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객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보면 누구나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운 법입니다. 그래선지 새벽에 시인은 부모님을 만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진하게 나누는 꿈을 꿉니다. 사무치는 이들과 만나서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했었는데, 그게 그저 한바탕 꿈이었으니 얼마나 허망했을까요? 3연의 ‘두 고향을 이별했다’는 말은 실제 어머님의 손을 놓고 고향을 떠나올 때와 방금 꿈속에서 고향에 다녀온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침 고향 꿈을 꾼 시점이 가을 중에서도 추석 즈음이었다면 깨고 난 뒤의 쓸쓸함이 오죽했겠습니까? 실제 노정을 따져보면 이 시는 추석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눈물에 젖어 향수에 젖어 아침 누대(樓臺)에 올라보지만, 굽이굽이 돌아가야 할 길만 아득히 놓여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고향이 그리워도 쉬 못 가는 이들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명절이 오히려 서러운 실향민들, 해외 동포들, 외국에 나가 있는 근로자들,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며느리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그들입니다. 1.4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놓쳤던 어머니 손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한수군 씨도, 병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효부상을 받은 필리핀 며느리 메이 씨도, 군대 간 지 한 달도 채 안 된 제 아들과 22년 동안 한 번도 추석에 친정을 못 간 아내도 지금쯤 고향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요?
이제 곧 한가위입니다. 어린 시절, 마을마다 떡메를 치고, 돼지를 잡고(그 오줌보로 공도 차고), 술밥을 쪄서 제주(祭酒)를 빚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송편을 만들고, 마을 마당에 왁자지껄 윷놀이 판이 벌어지고, 보름달 아래 강강술래와 숨바꼭질을 하고, 아이들은 제기차기에 자치기, 딱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더랬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과는 완연히 다른 추석 풍경이 되었지만, 요즘 셰프들도 울고 갈 손맛을 지녔던 우리 할머니와 빙그레 웃을 뿐 무던히도 말이 없던 내 아버지의 산소가 있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로 팍팍했던 심신을 누일 수 있는 곳, ‘괜찮어? 많이 힘들지!'라는 단 두 마디 말로도 코끝으로 찡하게 위로가 전해지는 곳, 저녁이면 불빛 아래 정겨운 수다로 도란도란거리는, 내 살가운 가족들이 모이는 그곳으로, 이제 귀성(歸省) 행렬은 끝없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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