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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전세를 찾아라

청풍선비 2016. 3. 11. 15:39

- 사백열네 번째 이야기
2016년 2월 15일 (월)
전세를 찾아라

[번역문]

김일경(金一鏡)이 아뢰었다.
“무고죄를 저지른 죄인 최수만(崔壽萬)의 집은 예전에 유심(柳諶)에게 ‘세매(貰賣)’하였는데, 유심이 또 이홍(李弘)에게 세매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수만이 처형당한 뒤 호조에서 그 집을 몰수하자 이홍이 호조에 민원을 제기하여 ‘세전(貰錢)’ 120냥을 유심에게 받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유심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던 집을 이홍에게 주었습니다. 유심의 집에서는 공연히 세전을 잃은 데다 살 곳도 없어 연일 호조에 호소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고 또 몹시 억울한 일입니다.
필부필부가 살 곳을 잃고 호소하면 왕도정치로 구제해야 합니다. 호조로 하여금 집을 팔고 최수만이 받았던 돈을 계산하여 유심의 아내에게 돌려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원문]

金一鏡所啓: “誣告罪人崔壽萬家舍, 前已貰賣於柳諶, 諶又轉賣於李弘矣. 壽萬伏法之後, 其家舍自戶曹籍沒, 李弘呈本曹, 徵其貰錢一百二十兩於柳諶. 諶則身死, 其寡家不得已以其所居之舍, 移給李弘. 柳家則空失貰錢, 又無依居之所, 鎭日呼訴於本曹, 其情誠慼矣, 亦甚冤抑. 匹夫匹婦之呼冤失所, 王政之所宜恤, 令戶曹斥賣, 計壽萬所受價, 還給柳諶之寡妻, 何如?” 上曰: “依爲之.”


- 『승정원일기』 경종 4년(1724) 2월 30일


1910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관습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전세였다고 한다. 집값의 절반에서 7, 80%에 해당하는 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집을 빌려 살다가 나올 때 도로 받아간다는 것이다. 지금의 전세와 다름없다.

전세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고려시대의 전당 제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다만 조선시대에도 전세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윗글에 보이는 ‘세매(貰賣)’가 바로 그것이다.

‘세매’는 세를 주고 팔았다는 말이다. 세를 주면 주는 거고 팔면 파는 거지, 세를 주고 팔았다는 건 무슨 말인가? ‘세매’는 임대와 매매의 중간 형태로 지금의 전세와 같다. ‘세전’은 다름 아닌 전세금이다.

최수만은 유심에게 전세를 주고, 유심은 다시 이홍에게 전세를 주었다. 요샛말로 ‘전전세’이다. 그런데 최수만이 죄를 지어 처형당하고 호조에서 그 집을 몰수하자 문제가 생겼다. 전전세 세입자 이홍은 전세 세입자 유심에게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유심의 아내는 일단 전세금 대신 살고 있는 집을 내주었다. 유심의 아내는 집주인 최수만에게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하겠지만, 최수만은 죽은 데다 재산까지 몰수당했으니 돌려받을 길이 없다. 꼼짝없이 전세금을 떼이게 된 것이다. 다행히 조정에서 전세금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몰수한 집을 팔아 전세금을 돌려주었다. 전세가 이 당시 이미 공인된 주거형태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율곡(栗谷) 선생의 집도 전세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 율곡은 서울에서 벼슬할 때 장동(壯洞)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종손이 이 집을 전세로 내놓은 모양이다.

집을 팔지 않고 전세로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의 종손은 형편이 어려워진 나머지 살던 집마저 내놓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듯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형편이 어렵기로서니 율곡 선생이 사시던 집을 감히 팔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율곡의 종손은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서 집을 비워준 것으로 보인다. 『율곡집』에서도 이를 ‘세매’라고 하였다.

언젠가 전세금을 돌려주면 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은 위안이 되었겠지만, 살던 집까지 비워준 처지에 집을 되찾기란 난망했을 것이다. 다행히 1763년 율곡 제자의 후손들이 돈을 모아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고 내보낸 뒤 종손에게 집을 되찾아 주었다. 이로 보건대 조선시대 전세의 임차 기간은 지금처럼 2년 단위가 아니라 길게는 수십 년까지도 갔던 모양이다.

전세 말고도 임대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문헌에 따르면 1년에 한 번 집세를 내는 임대 형태가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1년 단위로 수확을 하는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월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매달 월급을 받는 이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니 월세도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주택 임대 시장은 활성화된 편이었다.

임대 시장의 활성화는 유동인구의 증가를 반영한다. 기실 조선 후기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서울은 벼슬하러 온 사람, 과거 보러 온 사람, 장사하러 온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심각한 주택난 속에서 집 없는 사람들은 집을 통째로 빌리기도 하고, 방 한 칸만 빌리기도 하고, 땅만 빌려서 거기에 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를 주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쩡한 남의 집을 빼앗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사대부가 백성의 집을 불법 점유하는 ‘탈입(奪入)’은 조선 후기의 중대한 사회문제였다. 이 역시 서울의 심각한 주택난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 가관이다. 주택 임대를 전면 금지해버린 것이다. 영조는 즉위 직후 주택의 불법 점유는 물론 임대 행위까지 모두 금지하였다. 임대를 빌미로 남의 집을 빼앗는 사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백성의 정착이 중요하다. 백성이 마음대로 주거를 옮기면 농경사회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린다. 이로 인해 임대를 전면 금지하는 극약 처방을 내려 인구 이동을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은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화라는 현실을 외면한 탁상공론이었다. 조선의 주택 정책은 농경사회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으며, 조선 후기 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심각한 주택난으로 인한 서민의 고통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조선 주택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서민 주거 안정’이 아니라 ‘체제 유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주택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서민 주거 안정’을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집값을 떨어뜨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집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부동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경제 전반에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리라. 어쨌든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바람에 ‘서민 주거 안정’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전세난이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지만 요즘은 특히 심각하다. 치솟는 전세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는 전세 난민 때문에 서울의 인구가 줄어드는 지경이다. ‘전세의 종말’은 피할 수 없으며, 사상 최악의 전세난은 계속될 것이다. 집 없는 서민들은 답답한 심정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나라의 주택 소유 가구 비율은 60%를 넘는다. 열 가구 중 여섯 가구는 자기 집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집값이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국민의 51%만 지지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라에서 국민의 60% 이상이 집값이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정부는 집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다.

옛날에는 필부필부가 살 곳을 잃고 호소하면 왕도정치로 구제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필부필부가 살 곳을 잃고 호소하면 대출을 권한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집을 사서 평생에 걸쳐 갚으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말하는 ‘서민 주거 안정’의 실체이다.



글쓴이 : 장유승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