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소학』의 두 얼굴
『소학』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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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왕위에 오른 지 넉 달쯤 지났을 때, 『대학』을 진강하고 있던 경연의 한 장면이다. 명성이 최고를 구가하던 노성한 학자와 이제 막 즉위한 어린 임금의 모습이 흥미롭게 대비되고 있다. 또한 『소학』이 유가 경전 가운데 차지하고 있던 위상은 물론 우리나라에 겪어온 전승의 내력이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발언의 주인공이 이황이기에 그 무게는 한층 더하다. 사실, 선조의 즉위와 이황의 복귀는 사림(士林) 정치의 시대를 열었던 16세기의 역사를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이기도 했다. 물론 『선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사초가 불타버려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선조 초년의 기록은 너무나 부실하다. 즉위한 바로 그달 7월의 기사는 달랑 두 개에 불과하다. 하나는 이황에게 명종의 행장을 수찬하도록 했다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틀 뒤에 이황을 예조 판서 겸 동지경연 춘추관사로 삼았다는 기사이다.
다음 달인 8월의 기사는 하나로 줄어드는데, “예조 판서 이황이 병으로 사면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禮曹判書李滉病免東歸]”는 내용이다. 그러자 선조는 간곡한 교서를 내려 이황을 다시 불러올렸다. 마지못해 복귀한 이황이 경연에서 『대학』을 진강하다 첫 번째로 낸 가르침이 바로 위에 인용한 『소학』에 유념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이황이 아동용 초학서로 간주되기도 하는 『소학』을 강조한 데는 까닭이 있다. 세자를 두지 못한 명종이 죽은 뒤, 왕위는 16세였던 조카 하성군(河城君)에게 돌아갔다. 쉽게 예측할 수 없었던 왕위 계승이었다. 그렇게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선조 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과 같은 외척의 권력 농단으로 얼룩진 어두운 그늘을 벗겨내는 일이었다. 존망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모셔 어린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인도하는 한편 억울하게 벌을 받고 있거나 낙향ㆍ침체되어 있던 수많은 인재를 발탁하는 게 급선무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이황ㆍ기대승을 임금의 사부로 모셔 오는 한편 유배되어 있던 노수신ㆍ유희춘 등을 방면하여 정계에 복귀시켰다. 또한, 권벌ㆍ이언적처럼 을사사화 이후 억울하게 죄를 받았던 사람의 신원도 속속 이루어졌다. 기대승이 경연에서 우리나라 도학의 계보를 정몽주-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정식화하기 시작했던 것도 선조 즉위년 바로 그즈음의 일이었다. 지난날의 폐단을 바로잡아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사림의 정치적 열망이 끓어 넘치던 장면을 선조 초년의 기사들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바로 그때, 이황은 선조에게 『소학』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임금이 즉위한 뒤, 『소학』 교육을 강조했던 것은 선조 초년의 이황만이 아니었다. 태종 때의 권근(權近), 세종 때의 탁신(卓愼)과 허조(許稠), 성종 때의 한치형(韓致亨), 연산군 때의 홍귀달(洪貴達), 중종 때의 남곤(南袞), 명종 때의 이언적(李彦迪) 등도 그러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새로 즉위한 임금과 함께 그 시대를 이끌어갈 당대 최고의 거물들이란 점에서 한결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강조했던 『소학』에 대한 공부는 어린 임금이 성군이 되는 전제이자 성군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율곡 이이(李珥)의 경우, 『소학』을 주자학의 핵심 경전인 사서(四書)와 함께 오서(五書)로 병칭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이황의 『소학』에 대한 강조는 범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묘사화를 겪은 이후 민간에서 『소학』을 읽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소학』은 지난 몇십 년 동안 금서(禁書)에 가까웠다.
유교 문명으로 들어가는 입문서 역할을 했던 『소학』이 화를 부르는 책으로 지목되어 읽는 것조차 금지되던 상황은 납득하기 어렵다. 윤근수(尹根壽)의 전언에 의하면, 명종 대의 윤원형(尹元衡) 같은 사람은 “기묘년에 『소학』을 숭상하더니 신사년에 난이 일어났고, 을사년에 다시 난역(亂逆)이 일어났으니 『소학』은 난역의 책이다.”라고 단언했다 한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세종․성종․중종과 같은 임금과 그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권력의 핵심들은 『소학』의 교화를 통해 유교문명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힘주어 외쳤지만, 실제로 『소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고자 했던 젊은 선비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낡은 공신세력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갈망하던 성종 대의 남효온ㆍ김굉필과 같은 젊은 선비들은 ‘광생(狂生)’ 또는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치부되어 평생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고, 유교적 명분에 맞는 역사로 바로 서고자 했던 연산군 대의 김일손과 같은 젊은 사관들은 능지처사(陵遲處死)에 처해졌고, 지치(至治)의 정치를 꿈꾸었던 중종 대의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도 혹독한 참변을 피해가지 못했다.
흥미로운 현상은 그처럼 젊은 선비들이 붕당(朋黨)을 맺거나 능상(凌上)을 일삼았다는 죄목으로 참화를 당할 때마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으로 항상 『소학』이 지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런 참변 이후 『소학』은 금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정말, 『소학』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유교를 국시로 삼아 세운 나라에서 유교 문명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던 『소학』을 공부하여 실천에 옮기고자 했건만, 그 대가가 죽음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어찌보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법대로 살자는 것보다 더 과격하고 더 급진적인 요구는 없다. 지켜야 할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하는 힘없는 사람보다 그 법을 만든 힘 있는 자가 자기가 만든 법을 지키며 살기가 보다 어려운 법이다. 그리하여 “법대로 하자” 또는 “원칙을 지키며 살자”고 요구하는 힘없는 자를, 세상 이치를 모른다며 조롱하거나 힘으로 윽박지르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그건 변함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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