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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애장가(愛藏家)의 서벽(書癖)

청풍선비 2017. 12. 2. 09:57
애장가(愛藏家)의 서벽(書癖)

 

  
번역문

   나는 특별한 버릇이랄 것이 없으나 책에 대해서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벽이 허물이 되는 경우가 다섯 가지 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책은 반드시 내가 빌리려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첫 번째다. 책 파는 사람을 우연히 보면 기어코 구하려고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다. 책 속에서 옛사람의 뛰어난 절조나 훌륭한 행동을 보게 되면, 나 자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망연히 기운이 꺾이는 것이 세 번째다. 무릇 저술하는 것에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애써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써가다가 조금 잘 써지는 곳이 있으면 바로 의기양양하여 기뻐하고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네 번째다. 평소에 읽은 책은 늘 핵심이 되는 부분을 모아서 가만히 기억해 두는데, 어떤 일은 어떤 권에 있는지 어떤 말은 어떤 편에 있는지 간혹 헷갈리면 마음이 쓰여 불안한 것이 다섯 번째이다.

원문
余無所癖, 癖於書, 然癖之爲失, 有五焉. 見人有書必欲己借, 己有書, 則不欲人瓻, 一也. 遇有鬻書者, 期於購得, 雖苟且不避, 二也. 書中覿古人奇節偉行, 則傷己之有不逮, 惘然沮甚, 三也. 凡於所著, 必極意刻鏤, 有些振起, 則輒沾沾自喜, 喜不自勝, 四也. 於平居有涉, 每撮其肯綮, 默記之, 某事在某㢧, 某言在某篇, 有或迷妄, 則戀結不能爲安, 五也.

- 육용정(陸用鼎, 1842~1917), 『의전합고(宜田合稿)』 「의전문고(宜田文稿)」 권1, 「스스로 깨우치는 설[自警說]」

  
해설

   책은 인류가 만든 가장 놀랄만한 도구 중에 하나로, 기억의 확장이자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이러한 책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아서, 그 잠의 주술에서 깨어나게 하려면 독서라는 진실한 사랑이 담긴 첫 입맞춤을 통해서 가능하다. 잠에서 깬 공주 앞에서 과연 우리가 무슨 얘기를 건네게 될지, 공주가 어떤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얘기를 걸어올지 그 과정이 책 읽기라 할 수 있다. 다만, 세상에 허다한 책 읽기의 유용(有用)에 대한 경구(警句)처럼 반드시 아름다운 연애일 수만은 없다.

 

   소식(蘇軾)은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에서 “인생이 글자를 아는 게 우환의 시초이니, 이름이나 대충 쓰면 그만이지[人生識字憂患始, 姓名麤記可以休].”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책을 읽기 시작하고 귀 밝고 눈 밝아지면서 겪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눈뜸에서 책 읽기의 역설을 누구보다 심하게 겪은 사람의 육성일 것이다. 윤기(尹愭, 1741~1826)가 네 살짜리 아들을 위해 글자 공부 책 『각몽천선(覺蒙千先)』을 만들면서 쓴 서문 역시 소식과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의 완성과 함께 너의 우환이 시작되고, 네가 그르친 내 인생을 닮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환 속에 산다고 하여 큰 성취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총명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吾非不知此書之成, 廼爲汝憂患之始, 而以其所以自誤者願汝也. 盖生於憂患, 未必不爲玉成之資, 而人之聦明, 亦在乎所以用之如何爾. ]

 

   어쩌면 책 읽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식견이 생기면서 진실과 진리에 도달하기까지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느껴야 하고,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바라보면서 갖게 될 불가항력의 무력(無力)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를 읽을 수 있다. 다만, 책 읽기의 길은 ‘사람’으로 가는 길이며, 그 길을 가는 자의 방법론적 모색이 중요함을 윤기는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겠다.

 

   전통시대에는 지위를 가진 선택 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특별한 은총이 책이었다면, 누구나 책 읽기가 손쉬워진 오늘날 세상은 훗날에는 특별한 기호를 가진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책에 대한 비관적 예언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세상에 책벌레들은 실제 책벌레만큼이나 숱하다. 책벌레라고 자처한 육용정은 책의 애호에서 오는 과실에 대해 구서(求書), 독서, 작문할 때 생기는 탐심과 불안을 말밥에 올린다. 책에 대한 애호와 책 읽기의 과잉이 가져다준 병폐를 자성(自省)하는 목소리에는 오히려 학인(學人)의 열심(熱心)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책 읽기도 쉽지는 않지만, 그보다 어려운 것이 장서이다.

 

청대의 장서가(藏書家) 손종첨(孫從添, 1692~1767)은 장서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을 구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면서, 아름다운 일이고, 운치 있는 일이고,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구하는 책이 있는 줄 알면서도 구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다. 힘은 충분히 구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좋은 줄 알고서 구하지만 꼭 그 책의 가치가 많은지, 큰지를 따져보려다가 마침내 일시에 잃어버리게 되어 다시는 다음번에 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다. 서용(書傭 글 품팔이)에게서 찾을 수 없고, 옛집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 네 번째 어려움이다. 단지 가까운 데서만 구할 줄 알고, 먼 곳에서 구할 줄 모르는 것이 다섯 번째 어려움이다. 진위를 감별하고 권수를 점검하여 글자 적힌 종이를 변별하여 논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도 구매하니 매번 책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끝내 선본이 없게 되는 것이 여섯 번째 어려움이다. 이 여섯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애서가(愛書家)는 있어도 장서가는 드물게 되는 것이다.
[購求書籍, 是最難事, 亦最美事, 最韻事, 最樂事. 知有是書, 而無力購求, 一難也. 力足以求之矣, 而所好不在是, 二難也. 知好之而求之矣, 而必欲較其值之多寡大小焉, 遂致坐失於一時, 不能復購於異日, 三難也. 不能搜之於書傭, 不能求之於舊家, 四難也. 但知近求, 不知遠購, 五難也. 不知鑒識眞僞, 檢點卷數, 辨論字紙, 貿貿購求, 每多缺佚, 終無善本, 六難也. 有此六難, 則雖有愛書之人, 而能藏書者, 鮮矣.]  (「장서기요(藏書記要)」)

 

   손종첨의 살던 시기는 책 속에서 책을 찾고, 책 속에서 증거를 찾으려 했던 고증학이 성행했다. 책이 학문을 위한 방편을 넘어 책 자체가 목적이 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름난 장서가와 장서루(藏書樓)가 흔한 것도 이런 학문적 분위기 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전통시대 책의 유통과 구입이 오늘날과 다른 방식이기에 구서와 장서의 조건이 다르다 하더라도 장서의 어려움에 대한 상황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장서를 통해 다시 책이 태어나고, 그 책들이 우리를 바꿔 놓는다.

 

   끝으로 책과 관련된 몇 편의 글을 소개해 책에 대한 관념과 정서를 환기시켜 볼까 한다. 물리적 책이 주는 정서와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冊(책)」을, 책에 대한 평가의 역사에 대해서는 보르헤스의 『허구들』「책」을, 장서와 관리에 대해서는 조르주 페렉의 『생각하기/분류하기』「책을 정리하는 기술과 방법에 대한 간략 노트」를, 독서에 대해서는 노신의 『이이집(而已集)』「독서잡담」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리하여 혹시 ‘인류가 만든 놀라운 도구’인 책에 대해 어떤 상념을 떠올린다면, 책의 미래가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부유섭(夫裕燮)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