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애장가(愛藏家)의 서벽(書癖)
애장가(愛藏家)의 서벽(書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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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인류가 만든 가장 놀랄만한 도구 중에 하나로, 기억의 확장이자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이러한 책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아서, 그 잠의 주술에서 깨어나게 하려면 독서라는 진실한 사랑이 담긴 첫 입맞춤을 통해서 가능하다. 잠에서 깬 공주 앞에서 과연 우리가 무슨 얘기를 건네게 될지, 공주가 어떤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얘기를 걸어올지 그 과정이 책 읽기라 할 수 있다. 다만, 세상에 허다한 책 읽기의 유용(有用)에 대한 경구(警句)처럼 반드시 아름다운 연애일 수만은 없다.
소식(蘇軾)은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에서 “인생이 글자를 아는 게 우환의 시초이니, 이름이나 대충 쓰면 그만이지[人生識字憂患始, 姓名麤記可以休].”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책을 읽기 시작하고 귀 밝고 눈 밝아지면서 겪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눈뜸에서 책 읽기의 역설을 누구보다 심하게 겪은 사람의 육성일 것이다. 윤기(尹愭, 1741~1826)가 네 살짜리 아들을 위해 글자 공부 책 『각몽천선(覺蒙千先)』을 만들면서 쓴 서문 역시 소식과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책 읽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식견이 생기면서 진실과 진리에 도달하기까지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느껴야 하고,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바라보면서 갖게 될 불가항력의 무력(無力)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를 읽을 수 있다. 다만, 책 읽기의 길은 ‘사람’으로 가는 길이며, 그 길을 가는 자의 방법론적 모색이 중요함을 윤기는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겠다.
전통시대에는 지위를 가진 선택 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특별한 은총이 책이었다면, 누구나 책 읽기가 손쉬워진 오늘날 세상은 훗날에는 특별한 기호를 가진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책에 대한 비관적 예언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세상에 책벌레들은 실제 책벌레만큼이나 숱하다. 책벌레라고 자처한 육용정은 책의 애호에서 오는 과실에 대해 구서(求書), 독서, 작문할 때 생기는 탐심과 불안을 말밥에 올린다. 책에 대한 애호와 책 읽기의 과잉이 가져다준 병폐를 자성(自省)하는 목소리에는 오히려 학인(學人)의 열심(熱心)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책 읽기도 쉽지는 않지만, 그보다 어려운 것이 장서이다. 청대의 장서가(藏書家) 손종첨(孫從添, 1692~1767)은 장서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종첨의 살던 시기는 책 속에서 책을 찾고, 책 속에서 증거를 찾으려 했던 고증학이 성행했다. 책이 학문을 위한 방편을 넘어 책 자체가 목적이 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름난 장서가와 장서루(藏書樓)가 흔한 것도 이런 학문적 분위기 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전통시대 책의 유통과 구입이 오늘날과 다른 방식이기에 구서와 장서의 조건이 다르다 하더라도 장서의 어려움에 대한 상황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장서를 통해 다시 책이 태어나고, 그 책들이 우리를 바꿔 놓는다.
끝으로 책과 관련된 몇 편의 글을 소개해 책에 대한 관념과 정서를 환기시켜 볼까 한다. 물리적 책이 주는 정서와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冊(책)」을, 책에 대한 평가의 역사에 대해서는 보르헤스의 『허구들』「책」을, 장서와 관리에 대해서는 조르주 페렉의 『생각하기/분류하기』「책을 정리하는 기술과 방법에 대한 간략 노트」를, 독서에 대해서는 노신의 『이이집(而已集)』「독서잡담」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리하여 혹시 ‘인류가 만든 놀라운 도구’인 책에 대해 어떤 상념을 떠올린다면, 책의 미래가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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