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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수난

청풍선비 2010. 9. 6. 12:47

고전의 향기 - 백 서른 번째 이야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수난

2010. 9. 6. (월)

  어쩌면 학계가 주자학자 일색으로 되면서 더 이상 밖에서 이단(異端)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공격의 대상을 자기 학문 안에서 만들어 갔던 것은 아닐까.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학자들은 같은 주자학을 전공하면서도 각 학파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심지어 자기 사문(師門)의 학설과 조금이라도 다른 학설을 주장하면 자기 학파의 학자일지라도 이단으로 몰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여기 영남의 학자 한주 이진상의 수난사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편지 두 통을 소개한다.

  접때 만났을 때 말이 주상(洲上)에 미치자 내가 주위를 돌아보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칭찬이 있으면 훼방이 있는 것은 진실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나 근자에 사람들이 주상에 대해서는 취모구자(吹毛求疵)가 너무 심하니, 어찌 칭찬이 지나치기 때문에 훼방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본 바로 말한다면 주상의 바른 학술과 선유(先儒)의 학설을 밝힌 공로는 거의 근세에 없던 것이니, 비록 주자(朱子)의 충실한 계승자요 퇴계(退溪)의 적통을 이은 분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頃對時, 語及洲上事, 而愈顧瞻未及言. 大抵有譽則有毁, 常情之固然, 而近日此近物情, 於洲上, 吹覓太甚, 豈譽者之過故毁之者甚耶? 然以余論之, 洲上學術之正ㆍ發揮之功, 殆近世所未有. 雖謂之朱門之素臣ㆍ陶山之嫡傳, 可也.]

 

- 《후산집(后山集》속집(續集) 권2,〈김치수에게 보냄[與金致受]〉

 

 

  자네를 만난 뒤에 아직 만나기 전에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았네. 그 편지 속에서 나를 너무 높이고 지나치게 추켜세운 말이 많았으니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네. 아마도 나를 만나지 못했을 때 혹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여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닌데도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평정한 마음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일 테지. 그러나 이미 나를 만나본 뒤에는 이런 생각은 없어졌겠지.
  봄철에 몇 차례 나를 찾아와 주었기에 예의(禮儀)의 자리에서 함께 어울리고 학문의 이치를 물어보고서 자네의 뜻이 안정되고 행실이 차분하며 식견이 깊고 생각이 분명한 것이 일반 후배들보다 훨씬 뛰어난데도 겸허한 자세로 듣기를 즐겨하고 묻기를 좋아하며 근면하고 민첩하여 나태하지 않다는 사실에 감탄하였네. 장차 단계를 착실히 밟아 가서 날이 갈수록 크게 진보하여 그 큰 성취를 한량할 수 없을 것이니, 나의 스승이지 나의 벗이 아니네.
  나를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갖추겠다고 했는데 나는 이미 늙은 몸일세. 어찌 감히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턱대고 선배로 자처하여 우리 성권(聖權) 족하에게 어른 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말만 해도 진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려 감히 많은 말을 할 수 없군. 더구나 한주(寒洲)의 학문은 세상 사람들이 역질(疫疾)처럼 금기시하여 이에 물들면 종놈처럼 보고 개돼지처럼 욕하고 이에 반대하면 신선이 되어 구름 위에 오른 격이 되니,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영욕과 화복이 나눠지네. 우리 몇 안 되는 문도들은 바야흐로 숨을 죽이고 몸을 움츠린 채 그저 근신하며 조용히 살면서 우리 주리(主理)의 학문을 이어갈 길을 도모할 뿐일세. 그리고 행여 천행으로 마침내 잘못이 바로잡아져 그 학설이 옛 성현의 학설에 맞는지 연구되어 그 결과를 들을 수 있다면 비로소 편안히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걸세. 이 밖에는 이 세상에서 더 바라는 바가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까지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네.
  자네는 젊은 나이에 학문의 길에 올라 장도가 앞에 펼쳐져 있는 터에 어찌 이런 금고(禁錮)의 숲 속에 들어가서 스스로 모욕을 자초해서 되겠는가. 나는 이미 자네에게 사랑을 받은 터라 참으로 자네에게 화를 전가하고 싶지 않네. 그래서 이렇게 간절히 말해주는 것이니, 바라건대 부디 조심하여 안전한 길로 가서 몸을 잘 지키고 대업(大業)을 이루고, 이 오활하고 어리석으며 곤궁하고 외로워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되지 말게나. 나는 걱정하며 간절히 빌어 마지않네. 삼가 이렇게 답장을 쓰네.

 

[旣見後, 得未見時書, 書中多推假失倫而相與過厚者, 皆鍾所不堪當. 盖其未見之想, 疑於或然, 而傳聞之得, 不能以眞, 愛之之急, 而不暇於稱停也. 其在旣見後, 明者當無此矣. 春間數次承眄, 周旋於禮儀之塲, 叩端於名理之奧, 艶嘆夫志定而行馴, 識沉而慮明, 有非尋常後輩所等夷, 而猶謙冲退虛, 喜聞而好問, 勤敏而不怠. 是將科盈而日大以進, 渾浩乎不可涘者也, 泰師非泰友. 床下之拜, 鍾已晩矣. 曷敢以年紀之大而肯冒處于前輩之列, 爲少長之治於吾聖權足下哉! 言猶汗悸, 不敢多詞, 况寒洲之學, 爲世厲禁. 染此者奴視而豕詬, 反此者羽化而雲昇, 榮辱休咎, 判於趨嚮. 區區二三遺徒, 方相與屛息竄伏而謹拙以自靖, 圖所以毋負我主理之傳, 而賴天之靈, 得正其終, 將歸質於先聖賢而聽其發落, 方始逌然而瞑其目矣. 其餘更無所睎冀於斯世矣, 亦不欲延累於他人矣. 賢者英年啓軔, 脩塗在前. 豈宜徑入於禁錮之林以自取濯足之來哉! 鍾旣被愛於賢者, 誠不欲載禍以相餉, 故爲此披懇以相告. 望千萬戒愼, 範其馳驅, 利用安身, 克達大施, 毋爲此迂愚枯僻蹇滯孤劣之無所於歸焉者之陋也. 鍾不勝拳拳憂禱之至. 謹此控謝.]

 

-《면우집(俛宇集)》 권93,〈하성권에게 답함[答河聖權]〉

 

 ▶ 이진상 초상화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

 

[해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퇴계학파 주리론(主理論)의 대미를 장식한 대학자로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에서 조선 육대성리학자(六大性理學者)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러나 그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이란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다 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 주류로부터 생전과 사후에 걸쳐 혹심한 비판과 탄압을 받았다.

  위 첫째 편지는 한주의 제자인 후산(后山) 허유(許愈)가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에게 보낸 것이다. 주상(洲上)은 대포(大浦)라는 시냇가에 살았던 한주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아직 한주의 문하에 들어오지 않은 물천이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후산에게 한주에 대해 물었는데 후산이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여 대답을 회피하였고 뒤에 편지를 보내어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주에 대한 얘기를 공공연히 하기 어려울 만큼 한주는 그의 생전에 이미 학계로부터 혹심한 비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편지는 한주의 수제자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자신의 문하에 들어오려 하는 하성권(河聖權)이란 젊은이에게 쓴 것이다. ‘한주(寒洲)의 학문은 세상 사람들이 역질(疫疾)처럼 금기시하여 이에 물들면 종놈처럼 보고 개돼지처럼 욕하고 이에 반대하면 신선이 되어 구름 위에 오른 격이 되니,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영욕과 화복이 나눠진다’는 말에서 당시의 정황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 때는 한주 사후(死後)인데, 한주학파에 속하면 사림으로 행세하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면우는 자신의 문하에 들어오지 말라고 만류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한주는 43세 때 장차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될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발표하였다. 심즉리설이 퇴계의 학설을 발명(發明)한 것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은 후일의 일이고, 한주는 퇴계와 다른 학설을 주장했다고 하여, 그의 생전과 사후에 걸쳐 혹독한 비판과 배척을 받아야 했다.   한주가 세상을 떠난 뒤 1895년에 그 문집 《한주집(寒洲集)》이 간행되었다. 당시의 관례에 따라 《한주집》을 도산서원에 봉정하자 도산서원에서는 책을 돌려보내면서 편지에 “이 문집은 가야산 골짜기에 깊이 감추어두었다가 우리 유도(儒道)가 망한 뒤에 세상에 내놓으라.”고 하였다 한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있는 얘기이다. 그리고 도산서원 측은 패자(牌子)를 보내고 통문을 돌려 한주의 학설을 격렬히 비판했으며,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한주집(寒洲集)》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백호(白湖) 윤휴(尹鑴)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 이래 전례가 없는 혹심한 배척이었다.

  다행히 이 때에는 한주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영남우도(嶺南右道) 최대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기에 사방에서 오는 한주 학설에 대한 공격을 막아 사문(師門)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주의 수제자인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길러져서 한주의 재전제자(再傳弟子)에 와서는 한주학파가 국내 어느 학파보다 영향력이 큰 학파로 성장하였다. 하겸진(河謙鎭), 이인재(李仁梓), 이병헌(李炳憲), 김창숙(金昌淑), 김황(金榥)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지금은 한주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누구도 한주의 학설을 이단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성리설에 관심을 보이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성리설로는 조선의 학자 누구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제 그 엄혹했던 시절의 일들은 거의 잊혀졌다. 그렇지만 지금도 지역과 학파, 보수와 진보를 판연(判然)히 나눠 놓고 시비를 맹렬히 따지는 세태를 보노라면 나의 뇌리에 문득문득 조선 주자학자의 사나운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이제 조선이 망한 책임을 주자학에 다 떠넘기는 학자는 많지 않은 듯하고, 오히려 선입견을 버리고 주자학을 좋아하여 공부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꼭 하나 주자학자의 사나운 얼굴만은 배우지 말았으면 한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