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계유고(鵝溪遺稿)』, 관료학자 이산해가 지향한 조선
아계유고(鵝溪遺稿)』, 관료학자 이산해가 지향한 조선
이산해, 김신국, 이덕형, 유몽인 ……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조차도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는 하지만 그 행적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 조선사회에서 국정을 이끌어간 주요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리학자들보다 당대에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높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산해(李山海:1538~1609)는 조선중기 선조 시대에 대사헌, 대사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정부의 핵심 요직을 두로 거쳤으며, 정치적으로 북인의 영수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학파와 학맥이 중시되던 시절, 관료학자라는 이유로 역사의 무대에서는 그 이름이 소홀히 취급되었다. 이산해는 관료학자로서 정책 입안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의 극복과 향후 조선사회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이산해 상소문을 통해 그가 지향했던 조선사회의 모습을 찾아가 본다.
[臣請陳煮鹽之策。可乎。煮鹽一事。爲功不夥。而爲效最著。屯田千頃。不如鹽竈數百。故南越之沃饒。而魚鹽爲本。…… 斯固聚財之上策也。我國濱海。盡是鹽場。而昇平紅腐之餘。不復知有此利者久矣。及今板蕩之餘。錐毛射利。講無餘算。而獨於此事。寘而不擧。間或差官幹事。而所得例歸些少。臣竊惑焉。凡物雖或價高。難販則不足以爲利。惟鹽則雖積若丘山。無患不賣。…… 若於湖西海西島嶼汀麓之間。逐其斥鹵之曠沃。薪柴之茂盛。而處處曲曲。設爲鹽井鹽竈。又募其流離丐食之民。使之作屯作隊。一時趨事。則始役之日。糧在其中。疇不樂從而願赴哉。起於二月。而停於霾雨。作於八月。而止於氷凍。則五六朔之間。自可計鹽竈之多少。知得粟之優歉矣。]
이산해는 1천 이랑의 둔전이 수백 개의 염조만 못하다고 보면서, 남월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것은 어염이 근본이 되며, 이것이 진실로 재물을 모은 상책이라고 파악하였다. 어염에 대한 이산해의 관심과 이를 활용하기 위한 대책은 숙부이자 스승인 이지함의 어염과 광산 개발 등 국가 자원 활용 주장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夫板屋巨艦。橫截海面。視波若地。難撼如山。則賊之尖舸小船。不能當也。神砲飛礮。聲震雷霆。一發破船。腥血漲海。則賊之短銃片丸。不能格也。賊之所恃者刀劍。而雪鍔霜刃。無用於隨波出沒之際。我軍之所患者潰散。而一登船上。則怯夫懦卒。皆奮必死之勇。是皆利於舟楫。而不利於陣馬。所謂我國之長於水戰者。此也。]
이른바 전선(戰船)이란, 오늘날의 판옥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제도가 정교하여 더위잡고 오를 수 없을 만큼 높고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견고하며 대중을 수용할 만큼 넓고 적을 방어할 만큼 많은 인원이 탈 수가 있으니, 참으로 수전하기에는 좋은 기구입니다. 그러나 공력이 가장 많이 들어서 배 하나를 만들자면 큰 집 한 채를 만드는 것과 동등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 내에 비록 마련하기가 어려울 듯하지만, 선재(船材)와 선판(船板)을 다른 지역에서 먼 곳까지 싣고 올 것은 없습니다. 남쪽 지역 섬들에는 소나무가 무성한 곳이 대부분입니다. 비록 아침마다 베어내더라도 다 베어낼 수 없을 만큼 많으니, 허다한 선장(船匠)으로 열 사람씩 대오를 편성하여 기간을 정해 놓고 그 공역의 과제를 준다면, 신속하게 만들어내지 못할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형체가 너무 크고 격군이 너무 많기 때문에 쉽사리 충당할 수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평상시에도 액수가 많지 않았는데 더구나 난리를 겪고 나서는 배가 1백 척이 되지 않고 군사도 배에 차지 않으니, 이런 정도로 적을 방어하려 들면 서로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견해로는 좌우 양영(兩營)에서 각각 수백 척의 배를 만들어서 그것을 삼등분하여 둘은 판옥선으로 사용하고 하나는 중선(中船)으로 사용하되, 중선도 전구(戰具)를 갖추어 가지고 후원이 되어 진퇴를 신속하게 하면서 돌격을 대비하게 하는 한편, 일이 없으면 식량을 운송하는 데 이용하고 일이 있으면 전투에 협조하도록 한다면, 어찌 한 번의 거사로 두 가지를 얻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所謂戰船者。今之板屋。制度精巧。高不可攀。堅不可破。廣可容衆。衆可禦賊。誠水戰之良具也。第以功力最鉅。造一船與造一大家等。旬月之間。雖若難辦。而船材船板。不必遠輸他境。南中諸島松木之茂密者。處處皆然。雖朝朝而伐之。罔有窮極。以許多船匠。什什成伍。立其程限。課其功役。則無患其不速就矣。但其形體過大。格軍過多。未易充定。故平時亦數額不多。而況經亂之後。船不滿百。軍不滿船。以此禦賊。不亦齟齬之甚乎。臣意左右兩營。各造數百船。而三分其數。二爲板屋。一爲中船。中船亦備戰具。以爲後援。或進退如飛。以備突擊。無事則用以運糧。有事則用以助戰。豈不一擧而兩得乎。]
이산해는 이어 수전의 승리를 계속 이어가고 왜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주사가 가장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개진하였다.
[舟師。固我國之長技。而有備。乃今日之急務也。長技者。其名也。有備者。其實也。若恃其名而遺其實。未嘗造一板屋。添一水卒。選一良將。習一水戰。而荏苒歲月。坐待成敗。曰我有長技云爾。則烏在其爲長技也。況元均之初受命也。船之見數。雖曰百餘。而其中可用以制敵者。不滿六七十。元均之敗也。李舜臣收拾補綴於散亡灰燼之餘。僅得三十餘船。外此者。皆無用矣。今之舟師。可謂有其實乎。臣意統言有備之策。則別設舟師二營於湖, 嶺之間。軍兵舟楫。餽餉器械等事。令兩道分掌之。嶺南物力之不足者。以嶺東補之。湖南財用之不足者。以湖西助之。以壯關防形勢。可也。分言其目。則曰戰船也。曰水卒也。曰糧餉也。曰將士也。]
위 자료에서는 이산해가 명분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면모가 잘 드러난다. 즉 ‘명분만 믿고 그 실상을 버린 채로 일찍이 판옥선 한 척 만들지 않고, …….’ 등의 발언에서는 실용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구체적인 대책 수립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산해의 경제사상과 현실대응론은 상당히 구체적인 것으로서, 전란 직후의 민생피폐와 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서 나온 측면이 많다. 학문의 연원을 살펴보면 서경덕에게서 연원하여 이지함에게서 두드러진 실용적인 학풍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면모는 이산해를 비롯하여 김신국, 유몽인 등 조선중기 관료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관료적 기반을 지닌 학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조선사회를 보다 폭넓게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
ㆍ참고사항 |
글쓴이 / 신병주 2010. 5.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