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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 백 서른 두 번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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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남에서 피어나는 해외 한국학의 열기 |
2010. 9. 20.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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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해외 한국학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은 것 같다. 189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교 동방학부에서 한국어 강좌가 개설된 이래 꾸준히 확산된 해외 한국학의 규모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간행한 『해외한국학백서』에 따르면 2005년 현재 55개국 632개 대학으로 조사되고 있다. 대개는 실용적인 한국어를 교육하는 곳이 많지만 학문적으로 주목할만한 활동을 하는 곳도 적지 않다. 초창기 해외 한국학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비록 아카데믹한 대학은 아니지만 중국 강소성 남통(南通)에 있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이라는 출판사에서는 20세기 초반 박지원, 이건창, 신위, 황현 등 조선후기 한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시문집을 활발히 출판하였다. 이 출판사에는 조선시대 한문학 전통에 정통한 김택영(金澤榮)이라는 저명한 한국인 망명객이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디 서울에서 뛰어난 시명(詩名)이 있었던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을 예감하고 중국에 망명, ‘문장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文章報國恩]’는 심정으로 역사서의 집필과 문학 작품의 출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923년 완성된 『신고려사(新高麗史)』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는 과연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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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를 군자들이 나쁜 역사책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무릇 사람이 능히 자기 몸을 바르게 한 뒤에야 남들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법이다. 정인지는 한국(韓國) 단종의 대신인데 배반하여 세조에게 붙었고 단종을 죽이자고 맨먼저 건의하였다. 이것은 그 여사(餘事)이지만 개돼지도 먹지 않을 바가 있다. 하물며 그 역사책에 휘친(諱親)1) 한 부분 이외에도 비루하고 황탄한 잘못이 많이 있음에랴! 나는 혼잣속으로 이를 개탄한 지 사오십 년은 되었다. 어느 날 홍문관 시강(侍講) 왕성순(王性淳)2)이 편지를 보냈다. ‘『고려사』가 오랫동안 한심한 상태에 있습니다. 선생은 아무런 유감도 없는지요?’ 나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노년기의 폐락(廢落)한 몸을 잊고 『고려사』에 수정을 가했다.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글을 인증하여 소략한 부분을 개선하였고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춘추(春秋) 대의를 적용하여 휘(諱)한 부분을 통하였으며 석지(釋志), 유학전(儒學傳), 문원전(文苑傳), 은일전(隱逸傳), 유민전(遺民傳), 일본전(日本傳) 등을 추가로 넣어 빠진 부분을 채웠다. 그런 뒤에 구양수(歐陽脩)의 『신당서(新唐書)』의 고례를 취해 ('신고려사(新高麗史)'라고) 이름붙였다. 고국의 몇몇 군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옳게 여겨 논의를 왕복하며 격려하였다. 이것이 이 책이 나온 본말의 대강이다. 생각건대 고려 한 시대의 사적 중에서 백대에 빛날 것이 4가지 있다. 고려 태조는 영웅의 재주와 인의의 자질로 하늘의 부탁과 국인의 추대를 받았으니 올바르게 나라를 얻었고 삼대와 나란하다. 이것이 그 하나이다. 전시과(田柴科)는 주(周)의 정전(井田)과 당(唐)의 조용조(租庸調)를 모범으로 삼아 녹봉을 제정하였고 겸하여 병력을 두텁게 하여 굳센 적군을 꺾고 십수만의 군중을 동원하였다. 이것이 그 둘이다. 인물을 등용함에 오직 재주와 덕으로 취하고 문벌은 묻지 않아 서리(胥吏)에서 경재(卿宰)에 오른 자도 왕왕 있었다. 서한(西漢)의 관대한 정사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 이것이 그 셋이다. 동방의 문풍은 신라 말세에 시작해서 근근히 이어지다 고려가 이어받아 왕업을 닦으니 위대한 거장들이 전후로 빽빽하게 출현하였다. 중국의 송대에 있으면서도 삼당(三唐)의 성률(聲律)을 다룰 수 있었고 말기에는 한구(韓歐: 한유와 구양수)의 고문과 정주(程朱: 정호ㆍ정이와 주희)의 이학(理學)이 나왔다. 이것이 그 넷이다. 동방의 역대를 합하여 말한다면 신라, 고구려, 백제는 질(質)이 문(文)보다 승했기 때문에 용맹이 많았으니 마치 해가 처음 돋은 것과 같다. 한국은 문이 질보다 승했기 때문에 허위가 많았으니 마치 해가 저물 때가 된 것과 같다. 고려의 경우 이 모든 장점을 갖추어 문과 질이 모두 승했으니 해가 중천에 있는 것과 같다. 어찌 그리 위대한가! 고려에 동성혼(同姓婚)이 있어서 문과 질 둘다 부끄러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렇긴 하다. 하지만, 고려 왕실이 동성의 친족에게 장가든 것은 권력의 상실을 막으려는 것으로 신라의 옛 풍습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고려가 창도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요순 시절에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동성혼이 있었는데 군자는 이것으로 요순을 박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상고 시대는 후세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금 헤아려 줄 수는 없는 것일까?
1) 휘친(諱親) : 어버이의 사적에 대해 불미스러운 일은 드러내지 않는 것 2) 왕성순(王性淳) : 1869~1923. 김택영의 문학 제자. 김택영을 존경하여 김택영이 편집한 『여한구가문초』에 김택영의 작품을 추가해 『여한십가문초』를 완성하였다. 김택영에게 고려사의 개작을 권했으나 김택영이 『신고려사』를 지었던 그 해 별세하여 결국 『신고려사』를 보지 못했다.
- 김택영(金澤榮), 〈신고려사 서문[新高麗史序]〉,《소호당집(韶濩堂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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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고려사_국립중앙도서관 소장(원문이미지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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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우리나라는 특히 조선시대에 국경을 닫고 나라를 잠갔던 전통이 오래 이어져 오다가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항구를 열면서 비로소 세계와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진실은 아니다. 동아시아가 곧 세계라고 해도 불편함이 없던 시절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의 이웃 나라들과 평화적인 외교통상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에 우리나라를 열어 놓고 있었고, 동아시아 바깥의 지구 곳곳의 문물들은 동아시아를 통하여 천천히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템포가 빨라졌다. 1899년 우리나라의 어느 신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전 지구상에 있는 세계 각국은 이제 모두 철도, 선박, 전선으로 이어져 그야말로 ‘만국일통(萬國一通)’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만국일통’의 시대가 되면서 많은 한국인이 해외에 나갔다. 중국 상해와 일본 도쿄에 가는 유학생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독립투사들, 하와이와 멕시코에 가는 노동자들. 그 중에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주인공 이미륵처럼 상해에서 기선을 타고 사이공, 싱가포르, 콜롬보, 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항구, 수에즈를 거쳐 마르세이유에 도착, 독일에 정착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김택영(1850~1927) 역시 20세기 초반에 한국에서 해외로 흘러나갔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그가 중국 강남에 정착해서 20년 이상 왕성하게 문화 활동을 펼친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김택영의 강남 체험은 당시나 송학, 그 밖의 다양한 문헌으로 중국 고전학의 교양이 풍부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감각에서 볼 때 책에서 보았던 중국을 눈으로 보는 감동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몽주와 정도전, 권근의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가능했던 강남 체험이 명의 수도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바뀌면서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단절되어 왔기에 그 감동은 특별한 것이었다. 강남을 배경으로 하는 당시를 읊조리고 회화를 감상할 수는 있어도 강남에 고향을 둔 중국인 친구를 북경에서 만나 사귈 수는 있어도 그 이상으로 직접 견문할 수는 없었던 강남, 오랜 기간 조선 사대부에게 닫혀 있었던 강남, 그렇기에 김택영의 강남 체험은 그가 추종한 박지원의 열하 체험과 더불어 조선후기 북학의 역사적인 중국 경험을 상징하는 두 지평이었다.
그러한 강남에서 김택영이 『신고려사』를 편찬한 것은 자못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중국에 망명하여 ‘한국’의 유민(遺民)을 자처하며 살았지만 실은 그 마음 한가운데 ‘고려’의 유민의식으로 가득했던 그는 그렇기 때문에 사실 중국에 오기 전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정신적인 유민이었다. 그러나, 칠순이 넘는 나이에 『고려사』를 개작하여 『신고려사』를 완성한 것은 인생의 황혼기이자 구시대의 황혼기에 다짐한 특별한 사명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개작의 동기는 그가 사랑하는 고려의 역사를 온전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국사에서 고려시대를 정오의 태양으로 인식하는 역사의식이 있었기에 그는 고려시대의 빛나는 장점으로 인재 등용에 문벌을 따지지 않았다는 주장조차 역설할 수 있었다.
김택영이 『신고려사』를 지으면서 그가 존경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송의 구양수의 『신당서』를 의식하고 자신의 책 이름을 『신고려사』라고 붙였음을 밝힌 데서 볼 수 있듯 『신고려사』에는 문인으로서 김택영의 특별한 주견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구양수가 『구당서』를 『신당서』로 개작한 것을 중국 고문운동의 시야에서 문학사적 사건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김택영 역시 구양수의 고장인 강소성에서 『고려사』를 개작하며 구양수의 문학정신을 추구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고려사』를 포함하여 김택영이 정성을 쏟은 많은 저술들과 출판물들, 초창기 해외 한국학의 그 불꽃들은 그의 사후 어떻게 되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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