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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8권 > 경사강의(經史講義) 45 ○ 총경(總經) 3 > 최종정보

청풍선비 2010. 12. 20. 23:38

홍재전서 제108권 > 경사강의(經史講義) 45 ○ 총경(總經) 3 > 최종정보

 

 

경사강의(經史講義) 45 ○ 총경(總經) 3 무오년(1798, 정조22)에 호남(湖南), 관서(關西), 관북(關北)에서 선발된 제생(諸生)에게 특별히 질문하는 조항을 내려 보내었는데, 호남에서는 전주(全州)의 이휘감(李徽鑑), 나주(羅州)의 임병원(林炳遠)ㆍ홍낙종(洪樂鍾)ㆍ박종한(朴宗漢), 광주(光州)의 기학경(奇學敬)ㆍ고정봉(高廷鳳)ㆍ박성렴(朴聖濂)ㆍ김효일(金孝一), 남원(南原)의 조영조(趙英祚)ㆍ김수민(金秀民)ㆍ이오규(李五奎), 장성(長城)의 변상찬(邊相璨), 영광(靈光)의 이광진(李廣鎭), 순창(淳昌)의 양종해(楊宗楷)ㆍ양종을(楊宗乙)ㆍ유동환(柳東煥)ㆍ노치(盧穉), 익산(益山)의 이득일(李得一)ㆍ소수성(蘇洙性), 창평(昌平)의 김이렴(金履廉)ㆍ정재면(鄭在勉), 무안(務安)의 김통해(金通海), 고창(高敞)의 유영리(柳永履), 흥덕(興德)의 황일한(黃一漢) 등이, 관서에서는 평양(平壤)의 이춘혐(李春馦), 용천(龍川)의 김덕홍(金德弘), 용강(龍岡)의 김도유(金道游) 등이, 그리고 관북에서는 경성(鏡城)의 이원배(李元培) 등이 부대(附對)하였다

 

[역경(易經)]

 

역(易)이 변역(變易)의 의의(意義)가 되는 것은 이수(理數)와 상점(象占)뿐이다. 천지(天地) 사이에는 한 이치가 있을 뿐인데, 성인(聖人)이 그 이치로 인하여 획(畫)을 그어서 상징(象徵)으로 삼고 그 상징으로 인하여 변화를 나타내어서 점(占)을 쳤다. 과거를 아는 것은 순수(順數)로 계산하여 고찰하고 미래를 아는 것은 역수(逆數)로 계산하여 추측(推測)하므로, “신령스러움으로 미래를 알고 지혜로 과거의 일을 저장한다.”고 한 것이다. 한대(漢代)의 학자들은 단사(彖辭)의 강유(剛柔)와 왕래(往來)로 괘변(卦變)을 중시하였고 계사(繫辭)의 잡물(雜物)과 찬덕(撰德)으로 중정(中正)을 중시하였는데, 수리(數理)로 역(易)을 말한 자는 양자운(揚子雲)뿐이었다. 송대(宋代)의 학자들은 시위(時位)와 소식(消息)으로 의리(義理)를 논(論)하고 건순(健順)과 중정(中正)으로 성명(性命)을 논하였는데, 수리로 역을 말한 자는 소요부(邵堯夫)뿐이었다.
정자(程子)는 “그 이치를 터득하면 상수(象數)는 그중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역(易)은 진실로 상수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지만 상수가 없으면 이치도 걸려 있을 데가 없는 것이니, 주자(朱子)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지으면서 선천(先天) 상수설(象數說)에 비중을 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양자(揚子)와 소자(邵子)가 수리(數理)를 일으킨 것을 보면, 3방(方)에서 시작이 되고 9주(州)의 27부(部)에서 중간이 되며 81수(首)에서 끝마친 것은 《태현경(太玄經)》이 3×3을 수리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고, 하루에는 12시가 있고 한 해에는 360일이 있고 계절에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있고 세(世)에는 황(皇)ㆍ왕(王)ㆍ제(帝)ㆍ패(霸)가 있으며 그것이 12만 9600년에 이른 것을 일원(一元)으로 삼는 것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2×2를 수리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낙서(洛書)는 3으로 수를 일으켜 곱하고 나누는 근원으로 삼고 하도(河圖)는 2로 수를 일으켜 더하고 빼는 근원으로 삼았으니, 그러면 양자는 낙서에 근본하고 소자는 하도에 근본한 것인가? 시초(蓍草)의 7×7인 49책(策)은 홀수이고 괘(卦)의 8×8인 64괘는 짝수이니, 양자는 시초를 위주로 하고 소자는 괘를 위주로 한 것인가? 양자나 소자의 수리가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인데, 주자는 소자의 역(易)에 대하여서는 지극히 추중(推重)을 하면서도 《태현경》에 대하여서는 전혀 소용이 없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역(易)의 도(道)는 음(陰)과 양(陽)뿐인데, 양자는 이를 삼분법(三分法)으로 보았고 소자는 이를 사분법(四分法)으로 보았다. 상세하게 밝힐수록 더욱 모르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유영리(柳永履)가 대답하였다.]
양자(揚子)는 기발함을 좋아하다가 수리에 국한되었고, 소자(邵子)는 변화에 통하였으나 술수(術數)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양자 이후에는 역학(易學)이 차질을 빚어서 위(魏)ㆍ진(晉) 시대의 현담(玄談)으로 흘러갔고, 소자 이후에는 역도(易道)가 밝혀져서 주자(朱子)가 《역학계몽》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주자가 양자의 학설에 대하여서는 수리(數理)를 보충하였다고 하고 소자의 학설에 대하여서는 가지런히 정비되었다고 칭찬한 것이니, 다 같이 싸잡아서 더욱 모르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자(孔子)가 계사(繫辭)에서 수(數)를 말한 것이 세 곳인데, 그것은 “천일(天一)이요 …… 지십(地十)이다.”라고 한 것과 “천지(天地)의 수는 55이다.”라고 한 것과 “삼천(參天)하고 양지(兩地)하여 그 수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이다. 대개 하늘의 수는 1에서 시작하고 땅의 수는 2에서 시작하는데, 홀수와 짝수가 성립(成立)되고서 음양(陰陽)의 이치가 밝아진다. 그러므로 하도(河圖)에서는 1ㆍ3ㆍ7ㆍ9와 2ㆍ4ㆍ6ㆍ8을 서로 안팎이 되게 한 것이니, 이는 곧 음양이 교역(交易)하고 변역(變易)하는 도(道)이다. 하늘의 수는 3으로 곱하고 땅의 수는 2로 곱하는데, 그 3과 2가 시행되면서 오행(五行)의 운행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낙서(洛書)에서는 1ㆍ3ㆍ7ㆍ9와 2ㆍ4ㆍ6ㆍ8을 서로 정위치와 모서리에 있게 한 것이니, 이는 곧 하늘과 땅의 수가 바로 전개된 것과 거꾸로 전개된 것의 위치는 다르나 그 하늘과 땅의 수가 됨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역경(易經)》의 팔괘(八卦)에서는 그로 인하여 변화의 이치를 드러내었고 홍범(洪範)의 구주(九疇)에서는 그로 인하여 참찬(參贊)의 성과를 드러내었으니, 이것이 곧 종횡(縱橫)ㆍ착종(錯綜)의 오묘함이 하늘의 태극(太極)과 사람의 황극(皇極)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대의 학자들이, “괘(卦)를 그린 것은 하도에 근본한 것이나 낙서의 위수(位數)와 부합하며, 구주를 전개시킨 것은 낙서에 근본한 것이나 하도에 부합한다. 그리고 산가지[籌]의 수를 만든 것은 대연수(大衍數)에 근본한 것이나 하도의 수에도 부합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양수(歐陽脩)와 항안세(項安世) 같은 학자들은, “지금의 하도와 낙서는 위서(緯書)에서 나온 것이므로 깊이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고, 또 관랑(關朗)이 지은 《통극경(洞極經)》에 실려 있는 하도ㆍ낙서의 학설을 가리켜 “완일(阮逸)의 위작(僞作)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과연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인가?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하도와 낙서에 어찌 선후(先後)와 피차(彼此)의 차이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그렇다면 하도ㆍ낙서는 일시(一時)에 같이 나온 것으로서 복희(伏羲)와 우(禹)의 시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가?

[이오규(李五奎)가 대답하였다.]
주자의 말은 하도ㆍ낙서가 일시에 같이 나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나온 것은 선후(先後)가 있으나 이치는 선후의 차이가 없으며, 시기는 피차(彼此)가 있어도 도(道)는 피차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니, 곧 위에서 말한 바 표리(表裏)와 체용(體用)의 의의(意義)와 같습니다.


《역경(易經)》은 다만 점(占)을 치는 책이라고 한 것은 주자(朱子)의 독특한 견해이다. 옛 학설을 따르지 않고 남의 여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정론(定論)을 내세웠으니, 주자를 존경하는 학자로서는 어찌 다른 의견을 허용하겠는가? 그러나 공자(孔子)의 풀이로 돌이켜 보면 마음에 편치 않은 바가 있다. 공자의 말씀에 “역은 전요(典要)가 될 수 없다.”고 하였고 또 역에는 “성인(聖人)의 도가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으나, 점(占)을 숭상하는 것은 그 마지막 조항에 있다. 만약에 《역경》이 점만 치는 책이라고 한다면 이는 역이 전요가 되는 것으로서, 말을 숭상하고 변화를 숭상하고 상(象)을 숭상하는 세 가지는 문득 쓸데없는 것이 되는데, 어찌하여 하나하나 들면서 아울러 말하였겠는가? 계사(繫辭)에 이르기를 “역은 천지(天地)와 맞먹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의 변화를 본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고, 만물을 빠짐없이 다 이루게 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깊이를 다하고 기미를 연구한다. 천하의 뜻을 통하고 천하의 일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역은 점을 치는 것뿐이란 말을 한 적이 어디에 있는가? 손아귀에 찰 정도로 간략한 것을 가지고서도 천지의 조화를 다 연출해 내고 성인의 도의 체용(體用)을 다 갖추고 있어서 그 거두고 펼침과 굽히고 펴는 것은 비록 천지의 귀신이라고 하더라도 어길 수가 없으니, 육경(六經) 중에 이 같은 글은 다시 없다. 그래서 공자같이 큰 성인으로서도 “마침내 역을 배우게 되면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성인이 점치는 것만을 성취(成就)하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면, 성인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경산(瓊山)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역을 논함에 있어서는 사(辭)ㆍ변(變)ㆍ상(象)ㆍ점(占)이라는 말을 하였고, 소자(邵子)가 역을 논함에 있어서는 상(象)ㆍ수(數)ㆍ사(辭)ㆍ의(意)라는 말을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理)ㆍ수(數)ㆍ상(象)ㆍ사(辭)라는 말을 하였으니, 점이라고 한 것은 정자가 한 말이지 주자가 한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구준의 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학경(奇學敬)이 대답하였다.]
대역(大易) 중에 단사(彖辭)ㆍ상사(象辭)ㆍ괘사(卦辭)ㆍ효사(爻辭)에 어느 한 글자도 점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형(亨)ㆍ정(貞)ㆍ길(吉)ㆍ흉(凶)ㆍ회(悔)ㆍ인(吝)ㆍ이(利)ㆍ불리(不利) 같은 것들은 점사(占辭)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비록 공자(孔子)가 말한 성인(聖人)의 도 네 가지를 가지고 보더라도 점치는 것이 마지막 조항에 있지만 사실상 위의 사(辭)ㆍ상(象)ㆍ동(動) 세 가지를 통괄하고 있으니, 역(易)이 점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은 이미 공자가 밝힌 것이지 주자의 독특한 견해만이 아닙니다. 경산(瓊山)의 말은 ‘정자가 이치만을 말한 것이 아니고 점도 겸하여 말했다’는 것과 ‘주자와 소자가 점만 말한 것이 아니고 이치도 겸하여 말했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김도유(金道游)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요즈음의 학자 중에 역(易)은 본래 점을 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를 꺼리는 자는 역서(易書)가 성인(聖人)에게서 나온 줄만 알고 점법이 성인에게서 나온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후세에서 점을 친다고 하는 자들은 의리(義理)의 근본에는 전혀 어둡고 술수(術數)의 말단에만 매달리니, 이 때문에 점치는 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의리 밖에 점이 따로 없고 점 밖에 의리가 따로 없음을 몰라서 그러한 것입니다. 의리를 기준으로 길흉(吉凶)을 논하면 점을 치지 않더라도 점이 되는 것이며, 점을 통하여 출처(出處)를 정하게 되면 점도 의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길(吉)ㆍ흉(凶)ㆍ회(悔)ㆍ인(吝) 등의 말은 점으로 인하여 교훈을 담은 뜻이 아님이 없습니다.


문왕(文王)이 단사(彖辭)를 붙일 적에는 괘(卦)의 상(象)과 덕(德)을 종합하여 괘 이름을 붙였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붙일 적에는 더욱 괘 이름이 나오게 된 효(爻)를 중시하였으니 그것이 이른바 주효(主爻)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괘(師卦)의 구이(九二)는 장자(長子)가 되는데 이 괘를 사괘라고 한 것도 그 효에 의한 것이며, 비괘(比卦)의 구오(九五)는 임금이 되는데 이 괘를 비괘라고 한 것도 그 효에 의한 것이며, 겸괘(謙卦)의 구삼(九三)은 노겸(勞謙)인데 괘 이름을 겸이라고 하였고, 예괘(豫卦) 구사(九四)는 유예(由豫)인데 괘 이름을 예라고 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64괘에 주효(主爻)가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혹 두 효가 아울러 주효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 지금 괘마다 차례로 열거하며 자세히 논할 수 있겠는가?

[기학경이 대답하였다.]
양(陽)은 반드시 음(陰)의 주장이 되지만 음은 양의 주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피차간에 도와주고 억제하는 중에도 때에 따르는 뜻이 있으니, 그때의 개념을 알면 역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단전(彖傳)에서 괘의 이름을 풀이함에 있어, 괘명(卦名)과 괘사(卦辭)를 종합하여 풀이하였지만 뜻이 사실상 분석된 것도 있으며, 비록 괘명은 이미 풀이하였으나 글 뜻이 끊어지지 않고 아래에서 괘사를 해석하는 근간(根幹)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괘명으로 괘사에 연결시켜 한 글자로 풀이한 경우도 있으며, 괘명과는 관계가 없으나 뜻이 괘 이름의 의의(意義)와 가까우면 ‘그러므로[故]’라는 글자를 사용하여 구별한 경우도 있으며, 괘명을 풀이한 뒤이거나 괘사를 풀이하기 전에 한 가지 의의를 내세워 설정한 경우도 있는데, 괘마다의 단전을 고찰하면 성인(聖人)이 발범(發凡)한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오직 팔순괘(八純卦)만이 모두 괘체(卦體)로써 괘명과 괘사를 풀지 않았는데, 이는 어찌 8괘(卦)의 괘상(卦象)과 괘덕(卦德)이 이미 설괘(說卦)에 갖추어져 있고 중괘(重卦)의 괘체와 괘상도 또 대상(大象)에 갖추어져서 다시 더 풀 것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김이렴(金履廉)이 대답하였다.]
64괘가 8괘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8괘의 체(體)는 64괘 안에 분포되어 있어서 8괘는 부모이고 64괘는 자녀입니다. 그 상(象)과 체(體)와 덕(德)과 이름은 이미 그 자녀에게 나타내어 보였으니, 아마도 굳이 팔순괘(八純卦)에서 다시 풀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김도유가 대답하였다.]
팔순괘(八純卦)를 괘체(卦體)로써 이름을 풀지 않은 것은 대개 위아래의 체(體)가 같기 때문입니다. 오직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만은 육자(六子)와는 다르며 원ㆍ형ㆍ이ㆍ정의 네 덕(德)이 갖추어졌으므로 굳이 이름을 풀지 않더라도 그 체(體)와 상(象)은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직 대상전(大象傳)에서는 ‘천행(天行)’이니 ‘지세(地勢)’니 하는 것으로 괘의 이름을 풀이하였고, 그 밖에 감괘(坎卦)의 ‘이중으로 험하다’느니, 이괘(離卦)의 ‘걸린 것’이라느니 태괘(兌卦)의 ‘기쁜 것’이라느니 한 것들이 모두 이름을 풀이한 것이니, 아마도 팔순괘에만 이름을 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산(連山)과 귀장(歸藏)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점을 보므로 그 점은 본괘(本卦)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역(周易)은 변한 것으로 점을 보므로 그 점은 반드시 두 괘에 통한다. 그래서 구(九)ㆍ육(六)으로 점을 치는 것은 예를 들면 《춘추전(春秋傳)》의 귀매(歸妹)가 규(睽)로 간 것을 만난 것을 가지고 “진(震)이 이(離)로 갔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 칠(七)ㆍ팔(八)로 점을 치는 것은 《춘추전》의 간팔(艮八)을 만나고 태팔(泰八)을 만났다고 한 것들이 그러한 것인데, 사전(史傳)을 고찰하여 보면 칠ㆍ팔을 쓴 경우가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시초를 뽑은 책수(策數)가 28이 되면 이는 비록 건(乾)이 되지만 칠이라고 일컫고, 32가 되면 비록 곤(坤)이 되지만 팔이라고 일컫는데, 주자는 구양공(歐陽公)의 학설을 따라 구ㆍ육을 쓰고 칠ㆍ팔을 쓰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8괘가 중복되어 64괘가 된 것은 문왕(文王)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인가?

[기학경이 대답하였다.]
연산(連山)과 귀장(歸藏)은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달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달기 전에 있었던 것인데 고찰할 만한 문사(文辭)가 없었으므로 본괘(本卦)의 상(象)만을 취하여 그 길(吉)ㆍ흉(凶)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점은 변동이 없어 본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괘사와 효사가 갖추어진 다음에 그 변동을 취하여 비로소 두 괘에 통(通)하게 된 것입니다. 8괘가 중복되어 64괘가 된 것에 대해서는 소자(邵子)가 방도(方圖)와 원도(圓圖)를 배포(排布)하면서 모두 복희(伏羲)의 역(易)이라고 하였으니, 소자가 어찌 근거 없이 한 말이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일찍이 《춘추(春秋)》의 읽기 어려운 점을 논하면서 “책 첫머리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도 《주역(周易)》의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에 대하여 그렇게 본다. 그 네 가지 덕(德)에 대한 설명은 문언(文言)에 예시(例示)한 것이고, 《춘추전(春秋傳)》에 기록된 것이며, 《정전(程傳)》에서도 따랐던 것이며, 한대(漢代) 이후로 여러 학자들이 감히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런데 주자의 《본의(本義)》에서만 “크게 형통하며 정고(貞固)함이 이롭다.”고 한 것은 여러 괘(卦)의 점사(占辭)에 구애를 받은 것이다. 지금 여러 괘의 점사를 고찰하여 보면 ‘원길(元吉)’이니 ‘광형(光亨)’이니 ‘무불리(无不利)’니 ‘안정(安貞)’이니 ‘간정(艱貞)’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네 가지 덕으로 나누지 않은 적이 없는데, 오직 곤괘(坤卦)의 괘사(卦辭)에 “빈마지정 …… 이서남득붕(牝馬之貞 …… 利西南得朋)”이라고 한 것은 마치 이(利) 자를 하문(下文)에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선대의 학자들 중에는 ‘이’에서 구두를 떼고 ‘빈마지정’에서 구두를 떼고 ‘득주리(得主利)’에서 구두를 떼고 ‘서남득붕’에서 구두를 떼는 사람이 있는데, 이 경우 문장이 자연스럽고 글자의 뜻이 잘 통하여 단사의 본뜻을 얻지 못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주자는 옛 해석을 따르지 않고 점사(占辭)로 단정 지었으니, 무슨 말인가?

[정재면(鄭在勉)이 대답하였다.]
여러 괘(卦)를 살펴보면 ‘형통하다’고 한 데에 ‘작다’는 것이 있고, ‘정(貞)하다’고 한 데에 ‘쓰지 말라’는 따위가 있으니, ‘크게 형통하며 정고(貞固)함이 이롭다’는 의례(義例)를 알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문왕(文王)이 말한 역(易) 이외의 뜻까지 유추(類推)하여 네 가지 덕으로 밝혔으니, 그것이 성인(聖人)은 종횡(縱橫)으로 해석하여도 합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상은 《역경(易經)》이다.


 

[주D-001]전요(典要) : 불변(不變)의 준칙(準則)을 뜻하는 말이다. 《周易 繫辭傳下》
[주D-002]발범(發凡) : 글의 요지(要旨)와 체례(體例)를 뜻하는 말이다.
[주D-003]팔순괘(八純卦) : 건(乾)ㆍ감(坎)ㆍ간(艮)ㆍ진(震)ㆍ손(巽)ㆍ이(離)ㆍ곤(坤)ㆍ태(兌)의 중괘(重卦)로 된 팔괘(八卦)를 가리킨 말이다.
[주D-004]육자(六子) : 《주역(周易)》의 팔괘(八卦)에서 건(乾)ㆍ곤(坤)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괘를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