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전 하(繫辭傳下) 제7장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7장]
주자는 ‘문왕이 유리(羑里)에 구금되어 있을 때’를 “역을 지은 이는 아마 우환(憂患)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시켰고, 정자(程子)도 “천하에 이미 ‘우환’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데, 성인이 어찌 우환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곡가걸(谷家杰)은 “우환은 천하를 근심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니, 길흉(吉凶)과 근심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의 뜻이 통하지 않고 많은 일들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성인이 천하를 위해 근심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에 역을 지은 것이니, 역은 모두 우환에 대처하는 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 역시 통하는가? 그러나 “역을 지은 이는 아마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의 문세(文勢)로 본다면, 곧바로 역을 지은 이가 근심했다는 것을 지칭한 듯하고 천하를 근심한다는 뜻은 볼 수 없다. 별도로 들을 만한 정론이 있는가?
우환(憂患)은 성인에게 없을 수 없는 것으로, 문왕이 유리(羑里)의 감옥에 갇힌 것은 바로 문왕의 우환이었고, 주공(周公)이 유언비어의 비방을 입은 것은 주공의 우환이었습니다. 대개 우환에 대처하는 도는 오직 자신에게 돌이켜 덕을 닦는 데 있습니다. 그 때문에 문왕이 비로소 단사(彖辭)를 만들었고 이어 주공이 효사(爻辭)를 붙였는데, 64괘 384효 중에 모두 경계하고 조심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환란에 대처하는 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한(漢) 나라 이후로 여러 학자들 중에 역을 논한 자들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모두 문왕이 유리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을 말하여 “역을 지은 이는 아마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한 뜻을 밝혔고, 정자와 주자 두 선생도 모두 이것으로 인하여 해석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그 일을 상고하여 그 뜻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곡씨(谷氏)가 말한 ‘천하를 근심한다’고 하는 것은 대개 성인(聖人)이 천하를 근심한다는 말에 의한 것으로 근리(近理)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계사(繫辭)의 문세와는 서로 통하지 않고 또 우환에 대처한다는 뜻에도 친절하지 않으니, 새로운 것에 힘쓰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열거한 아홉 괘는 바로 군자가 자신을 수양하는 요체이니, 그중 하나라도 빼서는 안 된다. 이괘(履卦)에서 손괘(巽卦)까지 덕(德)에 나아가는 순서를 상세히 말해 줄 수 있는가? 한 장 가운데에서 세 번이나 아홉 괘에 대한 설명을 하였는데, 굳이 “손(巽)으로써 권도를 행한다.”고 하는 말로 끝맺은 것은 어째서인가? 호일계(胡一桂)가 말하기를, “아홉 괘는 문왕이 유리(羑里)에 처했을 때에 괘에 따라 그것을 본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공자께서 우선 그 우환에 대처하는 도를 논하면서 그 근사한 것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성인이 역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상편(上篇)에서 자세히 말하였지만 덕을 닦는 일에 대해서는 혹 미진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홉 괘를 들어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아홉 괘가 덕(德)에 나아가는 순서라는 것에 대해서는 경문(經文)의 뜻과 《본의(本義)》의 해석에서 진실로 이미 자세하게 말하였으니, 신(臣)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군자가 자신을 수양하는 데 있어서는 천리(踐履)가 기본이고 겸퇴(謙退)가 그다음입니다. 사람들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복(復)’은 허물을 고쳐 선(善)을 회복하는 것이고, 선이 회복된 뒤에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 염려되므로 ‘항(恒)’은 이것을 지켜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악(惡)을 덜어 내고 선을 보태는 것은 또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하는 공부이니, 만약 ‘곤(困)’에 처해 보면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힘을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우물[井]’과 같다면 덕과 은택의 파급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군자의 덕이 이러한 데 이른 뒤에야 의(義)가 정밀해지고 인(仁)이 익숙해져서 사물의 사이에서 여유 있게 변화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순서가 대략 이러한 것입니다. “손(巽)으로써 권도를 행한다.”는 것을 굳이 여덟 개의 괘 아래에 둔 것에서도 성인의 대이화지(大而化之)의 권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희(伏羲)의 《역경》 한 부(部)는 모두 군자가 덕을 닦는 도로서 역(易)을 쓰는 것이 곧 덕을 닦는 것이니, 상하의 두 편을 가지고 역을 쓰는 것과 덕을 닦은 일에 나누어 배속시킨 혹자의 주장을 어찌 역을 아는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는 “위에서 우환(憂患)에 대한 한 구를 말하였는데, 성인이 이 괘에서 이러한 도리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이 아홉 괘를 설명하였으되 뜻이 절로 충분하니, 여기에 다시 한 괘를 더 첨가하더라도 무방하고 한 괘를 덜 설명하더라도 무방하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야말로 진정으로 공자가 입언(立言)한 뜻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문왕(文王)은 역에 대해 마음으로 이해하여 평상시에나 우환에 처했을 때나 대역(大易)의 도를 따르지 않음이 없는데, 어찌 유독 이 아홉 괘에서만 괘에 따라 그것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호씨(胡氏)의 주장은 주자가 말하지 않은 생각을 밝힌 것으로서 경문(經文)의 본뜻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