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6권_잡저(雜著)_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한 해설
여헌선생문집 제6권_
잡저(雜著)_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한 해설
대순(大舜)이 우(禹)임금에게 황제의 자리를 전해주며 말씀하기를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니,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진실로 중도를 잡는다’는 말은 곧 대요(大堯)가 순임금에게 주신 것인데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해줄 때에는 그 위에 세 구(句)의 열두 글자를 더한 뒤에 요임금이 주셨던 한 구의 네 글자로 마쳤으니, 이 어찌 순임금이 요임금의 말씀에 스스로 감히 더 많이 하려 함이었겠는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줄 때에는 한 구 네 글자로서 이미 다한 것이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모름지기 세 구의 열두 글자를 더하여 준 것은 바로 성인(聖人)이 때에 따라 마땅하게 한 뜻으로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회암(晦庵) 주자(朱子)의 말씀에 이르기를 “마음의 지각(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말한 것은 혹은 사사로운 형기(形氣)에서 생기고 혹은 바른 성명에서 근원하여, 지각하게 된 원인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 위태로워 편안하지 못하고, 혹 미묘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형기에서 나온 것은 인심이요, 성명에서 근원한 것은 도심인것이다.
이 때문에 후세의 학자들은 사람과 도가 구별이 있어서 마음이 과연 두 근본이 있는가라고 의심하니, 이 어찌 대순(大舜)과 주자(朱子)의 뜻을 안 것이겠는가. 사람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사람이 없으니, 사람은 도를 담은 그릇이며 도는 사람의 이치인 것이다. 사람은 바로 형기이고 도는 바로 성명이니, 형기는 곧 성명의 형기이며 성명은 곧 형기의 성명이다. 그러하니 형기의 밖에 별도로 성명이 있고, 성명의 밖에 별도로 형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형기가 있기 때문에 성명이 있고, 성명이 있기 때문에 형기가 있는 것이니, 형기가 없으면 성명이 없고 성명이 없으면 형기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둘로 볼 수 있겠는가.
능히 지각하는 것은 마음이니, 지각이 곧바로 바른 성명에서 나온 것은 도심이며, 지각이 모름지기 사사로운 형기를 따른 것은 인심이니, 형기와 성명은 모두 우리 인간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서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지각이 반드시 곧바로 성명을 따라 나온 것이 있는가하면, 또한 모름지기 형기를 따라 나온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명은 곧 형기 가운데에 있는 성명인바, 지각이 곧바로 성명을 따라 나오는 것은 반드시 형기로 인하여 발하니, 그렇다면 도심을 또한 인심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기는 곧 성명 가운데에 있는 형기인바, 지각이 모름지기 형기를 따라 나오는 것은 반드시 성명에 근본하여 발하니, 그렇다면 인심을 또한 도심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그 형기를 공경하고 삼가서 감히 스스로 자기의 형체를 형체로 여기지 않고 감히 스스로 자기의 기운을 기운으로 여기지 않고, 한결같이 오직 성명의 이치를 따른다면 이른바 인심이라는 것은 모두가 도심이 유행하는 것이어서 형기가 성명 가운데에 있는 형기가 됨을 잃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굳이 인심과 도심을 나누어 말할 것이 있겠는가.
당(唐)·우(虞) 이전 상고 시대에는 세상이 질박하고 백성들이 순후(淳厚)하며 풍(風)이 돈후(敦厚)하고 속(俗)이 질박하여, 성(性)을 따르는 도(道)와 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님이 없었다. 간혹 비록 별종으로 특이하게 태어나서 본성을 잃고 천명(天命)을 어기는 물건이 있었으나 모두 질박하고 다 순후하며 아울러 돈후하고 함께 질박한 가운데에 교화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자연히 별종과 특이한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삼황(三皇)은 굳이 정사와 명령을 번거롭게 내리지 않고 애써 가르치고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교화가 저절로 행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당·우 이후로 내려와서는 세상이 순전하게 질박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순전하게 순후하지 못하며 풍이 순전하게 돈후하지 못하고 속이 순전하게 질박하지 못하여, 질박한 것이 점점 상실되고 순후한 것이 점점 흐려지며 돈후한 것이 점점 박해지고 질박한 것이 점점 흩어져서 정사를 구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가르침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舜) 임금은 요(堯)와 똑같았으니 ‘진실로 중도를 잡으라[允執厥中]’는 네 글자로 그 뜻을 다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禹)임금은 순임금에게 비하면 간격이 있었다. 순임금이 이 때문에 열두 글자를 보탰으니, 요임금의 네 글자를 전수함에 있어 그 들어가는 문과 나아갈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도(道)라 하고 인(人)이라 하였으니 그 살핌이 분명하며, 미묘하다 하고 위태롭다 하였으니 그 경계함이 깊으며,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라 하였으니, 그 권면함이 진실한 것이다. 도(道)는 바로 정(正)이고 인(人)은 바로 사(私)인데, 정(正)은 항상 미묘하고 사(私)는 항상 위태롭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름지기 살피기를 정하게 하고 지키기를 한결같이 한 뒤에야 마땅히 이 도의 중(中)을 잡아서 천하의 사업을 둘 수 있는 것이니, 이 열여섯 글자야말로 만세(萬世)토록 도학(道學)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 형기(形氣)를 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되었으니, 진실로 성명(性命)의 도리를 다 채우고 직분의 사업을 다하여서 사람이 된 형체를 실천함이 있어야 하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성명이 형기 가운데의 성명이 되고 형기가 성명 가운데의 형기가 됨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 형기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성명의 바른 이치를 상실하여 사람이 된 형체를 실천하지 못해서 끝내 도리어 천지에 죄를 얻으니, 이는 본래 지각이 없는 금수와 초목만도 못한 것이다. 어찌 가장 영특하고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스스로 사사로운 형기에 가리워져서 우리 인간이 이 형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성명의 이치로써 주장을 삼아 단 하루라도 성명이 없으면 형기가 스스로 형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私)에 가리워지고 정(正)을 잃는 근심이 심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마음이 바루어지지 못하고 몸이 닦여지지 못하며 집안이 가지런해지지 못하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하니, 천하에 인륜을 어지럽히고 떳떳한 법을 상실하는 것이 모두 이로 말미암는다. 이에 대순이 부득이 한 마음에 사(邪)와 정(正)의 기틀을 나누어 해석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는 공부를 하게 한 것이니,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천하에 가르쳐 준 것이고, 만세에 가르쳐 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형기는 성명을 담고 싣고 있어서 도의를 발용하는 것이니, 애당초 스스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이미 자기 것으로 삼으면 이에 자아(自我)가 되고 만다. 사람이 자아의 마음이 없지 못하여, 나 자신을 자아로 여기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私)가 정리(正理)를 해쳐서 바른 성명이 가리워짐을 면치 못하여 흘러가 흉함이 되고 악함이 되어 끝내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음에 이르니, 이는 실로 자기로써 자기를 해치고 사람으로써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런즉 한 근본으로써 말하면 도심 또한 인심이며 인심 또한 도심인 것이다. 사람은 도를 떠나지 않고 도는 항상 사람에게 있으니, 과연 이것을 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도를 떠나서 도가 사람에게 있지 않음에 이른 뒤에야 이것을 나누어 사(私)로 지목하여 인심이라 하고, 정리(正理)로 지목하여 도심이라 한 것이다. 인심은 사람의 인심이고, 도심은 사람의 천명(天命)이니, 곧 사(私)와 정리(正理)를 말한다. 마음이 어찌 한 방촌(方寸)에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순임금이 나누어 말씀한 것은 사와 정리를 구별하여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성학(聖學)의 대요(大要)는 모두 여기에서 나왔으니, 이른바 “하민(下民)에게 충(衷 이치)을 내려 순히 하여 떳떳한 성(性)을 가지고 있다[降哀于下民若有恒性]”는 것은 바로 이 도심이며, “백성이 욕망이 있으니 군주가 없으면 혼란해진다[生民有欲 無主乃亂]”는 것은 바로 이 인심이다. 공성(孔聖)의 무아(無我)는 곧 인심의 사사로운 뜻을 완전히 끊은 것이고, 안자(顔子)가 이긴 기(己)는바로 인심이며, 돌아온 예(禮)는 바로 도심이다. 그리고 증자(曾子)의 격물(格物)·치지(致知)는 곧 유정(惟精)이고, 성의(誠意)·정심(正心)은 곧 유일(惟一)이며,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곧 집중(執中)이다. 자사(子思)가 말씀한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이란 것은 곧 도심이며, ‘성을 따르는 도[率性之道]’와 ‘도를 닦는 가르침[修道之敎]’이란 것은 곧 중도를 잡는 것이며, ‘선을 택하고 굳게 잡는다[擇善固執]’는 것은 곧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는 법이다. 맹자(孟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사단(四端)은 곧 도심이며,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하여 항상 난(亂)의 근원을 막았던 것은 곧 인심이다. 그렇다면 학문의 요결(要訣)이 과연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