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포럼/장여헌(장현광)

여헌선생문집 제8권_잡저(雜著)_잡술서(雜述序)

청풍선비 2011. 3. 24. 13:49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잡술서(雜述序)

 

 

내 가만히 천지의 조화를 보니, 그 변함이 또한 많았다. 종(縱)과 횡(橫)이 서로 교착하고 경(經)과 위(緯)가 합하고 흩어지니, 그 행함이 어찌 반드시 모두 긴관(緊關 긴요한 관건)한 곳일 뿐이며 그 쓰임이 어찌 반드시 모두 중대한 것일 뿐이겠는가. 행함에는 반드시 헐후(歇後 긴요하지 않은 것을 이름)한 것을 겸하고 쓰임에는 반드시 미세한 것을 다한다.
위에 나타나 있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인데 해와 달과 오성(五星)과 28수(宿) 이외에 또 이름 없는 수많은 별이 있으며, 아래에 나타나 있는 것은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인데 오악과 사독 이외에 또 이름 없는 수많은 산과 물이 있으며, 낮과 밤과 추위와 더위는 음양(陰陽)의 큰 강령(綱領)인데 낮과 밤과 추위와 더위 이외에 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달라지는 기후(氣候)가 있으며, 깃이 달린 새와 털이 난 짐승과 비늘이 달린 물고기와 껍질이 있는 동물은 만물 중의 한 생물인데 깃이 달린 새와 털이 난 짐승과 비늘이 달린 물고기와 껍질이 있는 동물 이외에 또 풀 한 포기와 나무한 그루와 같은 미물(微物)이 있다.
이치[理]의 쓰임[用]은 지극히 넓고 도(道)의 체(體)는 지극히 크니, 그 중대한 것에만 한결같이 치중하고 미세한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면 이치의 넓음을 다할 수 없으며, 그 긴관(緊關)한 곳에만 편중하고 헐후(歇後)한 곳을 따르지 않는다면 도의 큼을 다할 수 없다. 이는 중대한 것과 미세한 것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어 천지가 그 큼을 이루는 까닭이며, 긴관한 곳과 헐후한 곳이 서로 필요하고 아울러 행해져서 조화가 무궁무진하게 되는 이유이다.
우리 인간에 있어서도 또한 이 이치이며 또한 이 도이다. 덕(德)은 안과 밖을 포함하여 갖추어지고, 도(道)는 크고 작은 것을 꿰뚫어 온전해지며, 일은 가볍고 중한 것을 겸하여 다하고, 업(業)은 근본과 지엽을 통하여 진전된다.
마음을 보전하여 성(性)을 기름은 내면에 있는 덕이고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림은 도의 큰 것이며,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어른을 공경함은 일의 중한 것이며, 경(敬)에 마음을 두고 이치를 궁구함은 업의 근본이다. 안에 있는 덕은 진실로 성실히 하지 않을 수 없고 큰 도는 진실로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중한 일은 진실로 돈독히 하지 않을 수 없고 근본인 업은 진실로 독실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리는 다함이 없으니, 어찌 한갓 안만 닦고 밖이 없으며, 한갓 큰 것만 하고 작은 것이 없으며, 한갓 중한 것만 하고 가벼운 것이 없으며, 한갓 근본만 하고 지엽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시일(時日)이 무궁무진하니 막힌 것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고 괴로운 것을 쉬지 않을 수 없고 조이는 것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고 합한 것을 흩어놓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긴관한 것에 힘쓰는 여가에 반드시 헐후한 시절이 있어야 하고, 중대한 공부를 하는 나머지에 반드시 미세한 일을 하여, 이로써 의사(意思)를 두루하고 정신(精神)을 개발하며 성정(性情)에 맞게 하고 문화(文華)를 통달하여야 한다.
이것은 마음을 보전하여 성(性)을 기름에 비하면 진실로 밖이며,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림에 비하면 진실로 작은 도이며,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경함에 비하면 참으로 가벼운 일이며, 마음을 경(敬)에 두고 이치를 궁구함에 비하면 참으로 지엽적인 업이다. 그러나 덕의 포용함이 이로 인하여 갖추어지고 도의 꿰뚫음이 이로 인하여 온전해지며 일의 겸하는 바가 이로 인하여 다하게 되고 업의 통합함이 이로 인하여 진전되니, 이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몸소 만 가지 기무(機務)를 총괄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진실로 성대(盛大)한 황제의 덕(德)이나 반드시 훈훈한 남풍(南風)을 노래로 읊는 여유가 있었으니 이는 황제라 하여 정(情)에 맞는 일이 없지 않은 것이며, 사해(四海)에 군림하여 쉼이 없는 하늘을 체행함이 진실로 지극한 왕자(王者)의 도이나 반드시 영대(靈臺)에서 구름을 관찰함이 있었으니 이는 왕이라 하여 기운을 휴양(休養)하는 때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치를 궁구하다가 알지 못하면 애를 태우고 이치를 알면 즐거워 밥을 먹는 것도 잊으며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르는 현성(玄聖)에 이르러도 동산(東山)에 오르고 태산(泰山)에 오르는 놀이가 있었으며,옛 성인(聖人)의 도를 보호하고 부정한 학설을 막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아성(亞聖)도 잊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助長)도 하지 않는 기름이 있었으니,그렇다면 도에 나아감은 진실로 한 가지 길이 아니요 덕에 들어감도 또한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이다.
비록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돈독히 하는 것이 우리 유자(儒者)들이 힘써 공부하는 강령(綱領)이 되나 휴양하여 창달(暢達)하고 발하여 폄을 또 폐할 수 없다. 이것이 육예(六藝)에 노는 한 조목(條目)이 바로 도(道)에 뜻하고 덕(德)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는 끝에 있는 이유이니,어찌 여섯 가지의 재주가 모두 의리에 갖추어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미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며,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면 또 반드시 육예에 논 뒤에야 안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밖에서 징험할 수 있고 밖에서 휴양한 것을 가지고 마음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안과 밖이 서로 필요하고 본(本)과 말(末)이 서로 힘입어, 덕이 이 때문에 갖추어지고 도가 이 때문에 온전해져서 학문과 사업이 자연히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깨닫지 못하여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만둘 수 없는 재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비록 도와 덕과 인이 나에게 고유(固有)한 것임을 알고 있으나 일찍이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함을 학문의 진수(進修)에 징험할 수 없으니, 어떻게 육예에 놀 수 있겠는가. 다만 몸이 난리를 당하여 어려움과 험난함을 골고루 겪어서 마음을 천 번만 움직일 뿐이 아니요 성질을 백 번만 참을 뿐이 아니었으니, 그 스스로 지킴이 굳다고 이를 만하다.
지금은 다행히 당장의 근심이 없고 바깥 일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정(情)에 맞게 하고 기운을 휴양하여 세월을 편안히 보낼 것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육예에 찾아보나 능한 것이 없고 오직 사물을 보면 생각이 나는바, 생각이 나는 대로 그때마다 기록하여 혹 문장을 짓고 혹 시구(詩句)를 짓는 것을 마음속에서 나오는 대로 하니, 이것이 혹 활쏘기와 말타기를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기록해 가는 것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선조28) 계하(季夏) 12일에 쓰다.

[주D-001]훈훈한……읊는 여유 :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으로 읊었다는 남풍가(南風歌)를 이르는바, 여기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풍성하게 하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하였다. 《孔子家語 辯樂解》
[주D-002]영대(靈臺)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만든 대(臺)로 구름 따위의 천문(天文)을 관찰하는 곳이라 한다.
[주D-003]현성(玄聖)에……있었으며 : 현성은 대성인(大聖人)이라는 뜻으로 공자(孔子)를 가리키며, 동산(東山)은 노(魯) 나라 도성의 동쪽에 있는 작은 산이고, 태산(泰山)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큰 산이다. 맹자(孟子)는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 노 나라를 작게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가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 하였으므로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孟子 盡心上》
[주D-004]아성(亞聖)도……있었으니 : 아성은 공자 다음 가는 성인이라는 뜻으로 맹자를 가리킨다. 맹자는 일찍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름을 말하면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勿忘 勿助長]”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D-005]육예(六藝)에……이유이니 : 육예는 여섯 가지 기예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이른다. 공자는 학문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기예에 놀아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論語 述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