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地山謙 六四. 六五
六四 无不利撝謙.





六四 无不利撝謙.
六四(육사) : 육사는
無不利撝謙(무불리휘겸) :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撝 찢을 휘, 도울 위 ⓐ돕다 (위)㉠찢다, 끌어 당겨 찢다㉡가리키다㉢(높이 올려서)휘두르다㉣겸손하다(謙遜ㆍ謙巽--), 자기를 낮추다㉤손짓하다, 손짓하여 부르다
撝謙 남을 추천하여주는 謙德. 이 爻는 陰位에 있는 陰爻로서 君位에 이웃한 爻. 九三의 賢者를 추천하여 높여주는 謙德을 행함.
<六四> 자신을 낮추고 보다 현능한 자를 추천하여 謙德을 행하는 상태이다. 모든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뜻대로 안되는 일이 없으리라.
[풀이] 육사는 유순거정, 위는 육오의 군위에 가깝고, 아래는 노겸하는 군자에 접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항상 겸덕을 지니고 재하의 겸적있는 현자를 초빙하여 일에 임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좋지 않을 리가 없다.
[四陰] :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니 모든 일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 만사 순조롭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육사](위아래 어디에든지)이롭지 않음이 없는 겸덕을 발휘한다.
撝謙 : 자기를 낮추어 겸덕을 發揮하는 군자이다[撝는 자신을 낮추어 겸양함이다. 초육의 謙謙과 용법이 같다. 그러나 초육은 스스로 겸손하면서 겸손한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고, 육사의 撝謙은 스스로 겸손하면서 또한 겸손한 덕을 위아래에 모두 베푸는 것이다. 편자]
六四는无不利撝謙이니라.
【傳】四居上體,切近君位,六五之君,又以謙柔自處,九三,又有大功德,爲上所任衆所宗而己居其上,當恭畏以奉謙德之君,卑巽以讓勞謙之臣,動作施爲,无所不利於撝謙也,撝,施布之象,如人手之撝也,動息進退,必施其謙,蓋居多懼之地,又在賢臣之上故也
[정전]구사는 상체에서 군주와 이웃하고 있다. 육오는 겸손하고 유순한 덕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구삼은 공로가 있어서 군주로부터는 신임을 받고 아래 대중들로부터는 존숭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은 한편으로는 공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군주를 받들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낮추어 노겸의 신하(구삼)에게 겸양의 덕을 베풀기 때문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撝는 펼치는(施布) 상으로 마치 사람이 손바닥을 펼치는 것과 같은 뜻이다). 動靜과 진퇴에 있어서 겸손한 덕을 펼치는 것은, 두려움이 많은 지위에 있으면서 또한 노겸하는 賢臣의 윗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四는 上體에 거하여 君主의 자리와 매우 가깝고 六五의 君主가 또 謙柔로 자처하며, 九三이 또 큰 功德이 있어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데 자신이 그 위에 거하였으니, 마땅히 공손하고 두려워하여 謙德의 君主를 받들며, 낮추고 謙巽하여 勞謙의 신하에게 양보하여서, 動作과 施爲가 謙巽함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는 펴는 象이니, 사람이 손으로 펴는 것과 같다. 動息하고 進退함에 반드시 겸손함을 펴야 하니, 두려움이 많은 자리에 처하였고 또 賢臣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本義】柔而得正,上而能下,其占,无不利矣,然,居九三之上,故戒以更當發揮其謙,以示不敢自安之意也.
柔로서 正을 얻고 위에 있으면서 능히 낮추니, 그 占이 이롭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九三의 위에 거하였으므로 다시 그 謙巽함을 발휘하라고 경계하여, 감히 스스로 편안히 여겨서는 안되는 뜻을 보인 것이다.
象曰 无不利撝謙 不違則也.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無不利撝謙(무불리휘겸) :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에 이롭지 않음’은
不違則也(불위칙야) :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전에서 이롭지 않을 리가 없다. 겸을 두르다고 함은 항상 겸손하며 자기의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다.
[상왈]無不利撝謙은 도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象曰无不利撝謙은不違則也1라.
【傳】凡人之謙,有所宜施,不可過其宜也,如六五,或用侵伐,是也,唯四,以處近君之地,據勞臣之上,
故凡所動作,靡不利於撝謙,如是然後,中於法則,故曰不違則也,謂得其宜也.
靡 쓰러질 미, 갈 마 ⓐ갈다 (마) ㉠쓰러지다 ㉡쓰러뜨리다 ㉢멸하다(滅--) ㉣말다(금지) ㉤호사하다 ㉥다하다 ㉦물가
[정전]무릇 사람의 겸손은 마땅히 펼쳐야 할 바(정도)가 있으므로, 그 마땅한 바를 지나치면 안 된다. 예컨대 육오가 혹 군주의 권위로써 侵伐의 수단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육사는 군주와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또한 공로가 있는 현신의 윗자리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움직임에 겸손의 덕을 펼쳐서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연후에 도에 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칙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마땅한 바를 지킨 것이 된다.
무릇 사람의 겸손함은 마땅히 베풀 곳이 있어서 그 마땅함을 지나쳐서는 안되니, 예컨대 六五가 혹 ‘侵伐을 사용함’과 같은 것이다. 오직 四爻는 君主와 가까운 자리에 처하고 功勞가 있는 신하의 윗자리를 점거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動作하는 바가 겸손함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法則에 맞는다. 그러므로 ‘法則을 어기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그 마땅함을 얻음을 이른 것이다.
【本義】言不爲過.
過함이 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六五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六五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六五(육오) : 육오는
不富以其鄰(불부이기린) : 부귀하면서도 그 이웃을 해하지 않으니
利用侵伐(이용침벌) : 이용 침벌해도
無不利(무불리) :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不富 富裕한 체 아니하다. 교만치 않다. 陰爻이면서 君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無力함. 그래서 이웃에 자문하는 것임. 그러나 主卦의 主爻이므로 不服하는 자는 征伐하는 것임.
[풀이] 육오는 유순거존, 겸덕을 가진 군주이고 이를테면 자기의 부유함을 뽐내지않고 이웃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자처럼 그 겸덕을 갖고서 만백성의 심복을얻는 사람이다.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서도 아직 복종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하여 정벌해도 좋다. 그 밖의 일에 관해서도 좋지 않은게 있을 리가 없다.
[五陰] : 부귀한 신문이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유화한 태도로 남에게 겸손하니 많은 사람이 심복하여 주변에 모인다.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征伐(정벌)함이 좋다.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육오]무아의 겸덕으로 대업을 이루니, 거스리는 자는 침벌로 다스려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飛龍의 謙德이니 겸덕과 위엄을 모두 갖춤이다)
不富以其隣 : 富以其隣이 財富(權勢)를 기반으로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다는 의미이므로 不富以其隣은 그 부정이다. 財富와 權勢가 아니라면 상호의 굳은 믿음 즉 誠心으로써 서로 돕고 이웃함이다. 겸덕에 誠心이 더하면 무아의 겸덕(飛龍의 謙德)이다.[富는 厚하게 갖추다(備)=>계사전에서 富有之謂大業(經國大業;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이라 하였으므로 富는 大業이다. 또한 家人에서 富家大吉을 祿位가 昌盛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와 같다.편자]
六五는不富以其隣이니利用侵伐이니无不利하리라.
【傳】富者,衆之所歸,唯財,爲能聚人,五以君位之尊而執謙順,以接於下,衆所歸也,故不富而能有其隣也,
隣,近也,不富而得人之親也,爲人君而持謙順,天下所歸心也,
然君道,不可專尙謙柔,必須威武相濟然後,能懷服天下,故利用行侵伐也,威德,竝著然後,盡君道之宜而无所不利也,蓋五之謙柔,當防於過,故發此義.
[정전]財富는 대중이 귀의하는 바이다. 오직 재물만이 사람을 모이게 할 수 있다. 육오는 군주이면서도 겸손하고 유순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있으므로 민중이 모두 귀의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이웃과 가까이 지내는 바이다
(隣은 이웃과 가깝게 지낸다는 뜻이므로 재부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웃과 和諧를 이룬다는 뜻이다. 즉 군주가 되어 겸손하고 유순한 덕을 지니면 천하가 마음에서 우러나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군주의 도는 항상 겸손하고 유순한 덕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위엄과 강건한 덕을 겸한 후에야 능히 천하를 회유하고 복종시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侵伐을 씀이 이롭다”고 하였다. 위엄의 덕이 모두 드러난 뒤에야 君道의 마땅함을 다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육오의 謙柔는 겸손이 지나치는 과실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뜻을 낸 것이다.
諧 화할 해. ㉠화하다, 화합하다(和合--) ㉡어울리다 ㉢화동하다 ㉣조화되다 ㉤맞다 ㉥고르다 ㉦고르게 하다 ㉧이루다 ㉨농담하다(弄談--) ㉩농지거리 ㉪해학
富함은 사람들이 귀의하는 바이니, 오직 재물만이 사람을 모을 수 있다. 五는 君位의 높음으로 謙順함을 잡아서 아랫사람을 대하니, 사람들이 귀의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소유한 것이다. 隣은 가까움이니, 부유하지 않으면서 남의 친함을 얻는 것이다. 人君이 되어 謙順함을 잡으면 天下가 마음으로 귀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君主의 道는 오로지 謙柔만을 숭상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위엄과 굳셈으로 서로 구제한 뒤에야 天下를 회유하고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侵伐을 행함이 이로운 것이니, 위엄과 德이 모두 드러난 뒤에야 君道의 마땅함을 다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五의 謙柔는 마땅히 過함을 막아야 하므로 이러한 뜻을 발한 것이다.
【本義】以柔居尊,在上而能謙者也,故爲不富而能以其隣之象,蓋從之者衆矣,猶有未服者則利以征之而於他事,亦无不利,人有是德則如其占也.
柔로서 尊位에 거하였으니, 위에 있으면서 겸손한 자이다. 그러므로 富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얻는 象이 된다. 따르는 자가 많으나 아직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征伐함이 이롭고, 다른 일에 있어서도 또한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사람이 이러한 德이 있으면 이 占卦와 같을 것이다.
象曰 利用侵伐 征不服也.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利用侵伐(이용침벌) : ‘이용 침벌이라함’은
征不服也(정불복야) :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함이다
상전에서도 이로서 침벌해도 이롭다고 함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
[상왈]利用侵伐은 복종하지 않는 者를 권위로써 징벌하는 것이다.
象曰利用侵伐은征不服也1라.
【傳】征其文德謙巽,所不能服者也,文德所不能服而不用威武,何以平天下,非人君之中道,謙之過也.
[정전]문덕과 겸손한 덕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는 것이다. 문덕에 복종하지 않는데도 위엄과 권세를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를 태평하게 통치할 수 있겠는가? 이는 군주의 中道가 아니고 겸손이 지나친 것이다.
文德과 겸손함으로 복종시킬 수 없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 文德으로 복종시킬 수 없는데도 威武를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天下를 平治할 수 있겠는가. 이는 人君의 中道가 아니니, 겸손함이 지나친 것이다.
[참고문]不富以其鄰의 和諧思想:
이웃과 함께 평안하기를 바란다면 財富를 뽐내서는 안 된다. 재부를 앞세우면 이웃 간에 서로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많은 모순을 유발하고 불안감을 조성하게 되어 건전하고 발전적인 사회의 조성이 불가하게 된다. 오늘날의 사회 환경 속에서 우리는 財富와 權勢를 相得의 조건으로 보아 財富가 있으면 권력이 따르고 權勢가 있으면 財富가 따른다는 공식 아닌 공식을 알고 있다. 財富와 權力의 연결고리는 전체사회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살피면 사회 구성원간의 비평등의 전형이다. 곧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악습인 것이며, 이와 같은 사회 환경 속에서 사회 성원간의 和諧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겸손은 사회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지만, 이러한 희생이 다시 나를 살리는 길임을 안다면 민중의 화해의 첩경은 무아의 겸덕을 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나 사회계층간의 갈등이 더욱 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살피면 그 내면의 제일의 요인은 겸덕이 없음을 들어 과오가 아닐 것이다.
곧 불부이기린으로 화해사회를 이끌어 내는 기본 이념은 無我의 謙德이다.
노자 도덕경 15장은 화해사회를 일구어 내는 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읊고 있다.
“예로부터 도에 밝은 사람은
현묘하고 신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
신비한 그 모습을 억지로 그려보면
조심스럽기는
한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듯 하고
경계하는 모습은
적에게 둘러싸여 사면이 초가인 듯 하고
삼가는 모습은
남의 집 손님과도 같고
마음을 헤쳐 내는 모습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과도 같고
돈독하고 질박한 마음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와 같고
넓고 텅 비운 마음은
심산유곡과 같고
한데 뒤섞여 어울리는 모습은
마치 탁류와도 같구나!
누가 능히 탁한 곳에서
스스로 고요하여 淸靜할 수 있으며
누가 능히 편안한 곳에서
움직여 나와
長生 할 수 있겠는가?
도를 아는 사람은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마음을 비워두면
능히 다시 쓸 수 있으니
새로이 이루지 않는 것이다.”
[古之善爲道者,微妙玄通,深不可識. 夫唯不可識,故強爲之容.
豫兮若冬涉川,猶兮若畏四隣,儼兮其若客,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曠兮其若穀,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孰能安以動之徐生.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故能蔽不新成.]
도의 경지에 들어 간 선비가 된다는 것은 그 모습이 미묘하고 깊고 깊어서
아무리 깊이 헤아려도 알 수가 없고 아무리 따져 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그 모습을 비유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추운 겨울 냇물을 건너기를 망설이는 코끼리 같구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두려워 조심하는 개 같기도 하구나!
초대받아 손님으로 간 것처럼 엄숙하구나! 앞으로 녹아 물이 될 얼음처럼 풀리는구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무 등걸처럼 꾸밈이 없구나!
텅 빈 고을처럼 비어 있구나! 탁류에 휩쓸려 있는 것 같지만 맑은 물이구나!
누가 탁류에 머물러, 가만히 있으면서도 서서히 맑게 할 것인가?
누가 편안히 영주하면서 활동해 서서히 맑음을 살아나게 할 것인가?
이러한 도를 간직한 자는 무엇을 채울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채울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는 있던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이룩하려고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