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포럼/퇴계선생

퇴계선생문집 제41권_잡저(雜著) _마음은 체(體)와 용(用)이 따로 없다는~

청풍선비 2011. 4. 11. 13:09

퇴계선생문집 제41권_잡저(雜著)

마음은 체(體)와 용(用)이 따로 없다는 변론

 

내가 학문을 한 것이 얕고 고루하여, 오직 선유(先儒)들이 정해 놓은 말씀을 그대로 지킬 줄만 알아 명백하게 곧이곧대로 공부하였는데도 아직 통투하게 알지 못하니, 이 밖의 유심(幽深)하고 현묘(玄妙)한 이론은 실상 미칠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난날에 비록 “마음은 체(體)와 용(用)이 없다.”는 한 구절을 가지고 와서 묻는 친구가 있었으나, 한 번도 이것을 깊이 생각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김이정(金而靜)이 보여 준 연로(蓮老)의 글을 보니, 오로지 이 구절을 가지고 부연하여 말을 만들어서 서로 변론하고 질정하려 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깊어서 쉽사리 엿보아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우선 내가 들은 선유의, “마음은 체와 용이 있다.”는 말씀을 가지고 밝히려 한다. 이 설들은 모두 유래가 있으니, 적(寂)과 감(感)을 체ㆍ용이라 한 것은 《주역(周易)》에 근본 하였고, 동(動)과 정(靜)을 체ㆍ용이라 한 것은 《대기(戴記)》에 근본 하였고,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체ㆍ용이라 한 것은 자사(子思)에 근본 하였고, 성(性)과 정(情)을 체ㆍ용이라 한 것은 《맹자(孟子)》에 근본 하였는데, 모두 마음의 체와 용에 대한 것이다. 대개 사람의 한 마음이 비록 천지(天地) 사방에 가득하고 고금(古今)에 뻗치며 유명(幽明)을 꿰뚫고 온갖 은미함에 투철하다 하더라도 그 요점은 체와 용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체와 용이란 이름이 비록 선진(先秦) 시대의 글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자(程子)ㆍ주자(朱子) 이래로 여러 유현들이 도리를 논하고 마음을 논함에 모두 이것으로 주장을 삼지 않은 것이 없어서, 강론하고 변석하여 밝혀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며, 진북계(陳北溪)의 심설(心說)에서 더욱 극진히 말하였으니, 언제 한 사람인들 마음에 체와 용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지금 연로(蓮老)의 말에 “마음에 실로 체와 용이 있기는 하나 그 근본을 찾아보면 체와 용이 없다.” 하였다. 나는 들으니, 정자가 말하기를 “마음은 하나뿐인데 체를 가리켜 말한 것도 있고 용을 가리켜 말한 것도 있다.” 하였으니, 이제 이미 체와 용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마음이라 하였다면 마음은 이미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하겠다. 또 어찌 따로 체와 용이 없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 마음의 앞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연로가 말하기를, “동(動)과 정(靜)이란 실제 이(理)이고, 체와 용이란 빈말이다. 도리는 본래 체와 용이 없고, 동과 정을 체와 용으로 삼는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도리에 동과 정이 있기 때문에 그 정(靜)한 것을 가리켜 체라 하고 동(動)한 것을 가리켜 용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리의 동(動)하고 정(靜)하는 실상이 곧 도리의 체ㆍ용의 실상인 것이다. 또 어찌 따로 체와 용이 없는 하나의 도리가 있어 근본이 되어서 동과 정에 앞서 있을 수 있겠는가. 연로가 또 말하기를, “체란 글자는 형상(形象)의 측면에서 나왔고 용이란 글자는 동(動)의 측면에서 나왔으니, 동하기 전에 어찌 용이 있었겠으며, 형상이 있기 전에 어찌 체가 있었겠는가.” 하고, 또 소자(卲子)의, “본래 체는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체가 없으면 용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체와 용이란 두 가지가 있다. 도리에 대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아득하여 조짐이 없으나 만상(萬象)이 빠짐없이 갖추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고, 사물에 대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배는 물에 다닐 수 있고 수레는 육지에 다닐 수 있으며 배와 수레가 물과 육지에 다닌다’는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여자약(呂子約)에게 회답하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형이상(形而上)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아득한 것이 실로 체가 되고, 사물에 발현하는 것이 용이 된다. 형이하(形而下)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사물이 또 체가 되고 그 이(理)가 발현하는 것이 용이 된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형이상을 도(道)의 체라 하고, 천하의 달도(達道)인 다섯 가지를 도의 용이라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지금 배와 수레의 형상을 체라 하고 물에 다니고 육지에 다니는 것을 용이라 하면, ‘형상이 있기 전에는 체가 없고 동하기 전에는 용이 없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득한 것을 체로 삼는다면 이 체는 형상이 있기 전의 것이 아니겠는가. 만상이 여기에 갖추어 있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면, 이 용은 동하기 이전의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연로가 말하는 ‘체는 형상에서 나오고 용은 동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만 사물의 체와 용이 아래쪽에 떨어져 있는 형이하를 말한 것일 뿐, 실상은 아득하여 조짐이 없어 체와 용이 하나의 근원인 형이상의 묘함을 내버린 것이다. 오직 그 소견이 지엽적인 형상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형상이 있기 전엔 체가 없다’ 하고 소자(邵子)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하였으나, 소자의 이른바 ‘체가 없다’는 것은 다만 형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 아득한 체가 없다고 말함이 아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체를 인식한 것이 이미 완비되지 못했다면 용을 인식한 것도 완비되지 못함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아득하여 조짐이 없는 것이, 건곤(乾坤)에 있어서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체가 되어서 만상이 이미 갖추어 있고,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체가 되어서 만 가지 용이 모두 갖추어 있으며, 사물에 있어서는 문득 발현하고 유행하는 용이 되어서 때에 따라 곳에 따라 있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여자약이 말하기를, “마땅히 행할 도리가 달도(達道)가 되고 아득하여 조짐 없는 것이 도의 본원이 된다.” 하니, 주자가 비판하기를, “다만 이 당연한 이(理)가 아득하여 조짐 없는 것이고, 이 이(理) 밖에 따로 아득하여 조짐 없는 한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님을 모름지기 보아 알아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정 선생(程先生)이 이미 체와 용이 한 근원임을 말하였고, 또 현(顯)과 미(微)는 사이가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체와 용 두 글자는 생동하여 죽은 법(法)이 아니며, 원래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묘함을 다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 헤아려 본다면 어찌 한갓 체란 글자가 형상의 측면에서 나왔다 하여 형상이 있기 전에는 체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어찌 용이란 글자가 동(動)의 측면에서 나왔다 하여 동하기 전에는 용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어찌 태극을 성인이 억지로 이름 지어 놓은 것이라 하여 체와 용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주자(朱子)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의 풀이에서 체와 용 두 글자로 반복하여 밝혔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란 그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으므로, 맹자는 다만 마음이 두루 흐르고 변화하여 신명불측(神明不測)함이 오묘하여 잃기는 쉽되 지키기는 어려움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마음의 용이 사물에 발현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만일 마음에 체와 용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용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항상 생각건대, 성현의 글은 용이하게 읽을 수 없고, 의리는 정미하여 쉽게 궁구할 수 없으며, 서로 전하는 종지(宗旨)는 경솔히 고칠 수 없고, 이론을 세워 남을 깨우치는 것도 경솔히 발할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하는 데는 높고 기이하고 현묘(玄妙)한 생각을 갖지 말고 우선 마땅히 본분(本分)의 명리(名理)에 의거하여 아주 가깝고 평범하며 명백한 공부를 하여 연구와 체험을 오래 쌓으면, 자연히 날이 갈수록 고심(高深)하고 원대하여 끝이 없는 곳을 볼 수 있을 것이니, 그리해야만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논한 것은 본래 고묘(高妙)함을 지극히 하여 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인데, 도리어 체와 용을 형기(形器)에 국한시키고 심(心)과 성(性)을 망매(茫昧)한 지경에 몰아넣었으니, 자기의 학문에만 해가 될 뿐 아니라 후생(後生)으로 하여금 서로 모방하여 빈말만 배우게 할 것이니, 사문(斯文)에 폐단을 끼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심중에 있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인데, 연로가 보고 어떻게 여길지는 모르겠다.

일찍이 들으니, 옛날 현인 중에도 의론이 너무 고매(高邁)한 자가 있어 역시 이런 병통을 면하지 못했다 한다. 예컨대 양구산(楊龜山) 같은 이는 도의 고묘(高妙)함을 극언(極言)하여 “인과 의로는 도를 다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장자(莊子)ㆍ열자(列子)가 인의를 부족하게 여겨 도를 아득하고[窈冥] 어둠침침하다고[昏默] 한 말과 같다. 호오봉(胡五峰)은 성(性)의 고묘함을 극언하여 “선(善)으로는 성을 말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선이 비근(卑近)하여 성에 누(累)가 될까 염려하다가 도리어 고자(告子)의, “성(性)은 여울물과 같아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흐를 수 있다.”는 말로 떨어진 것이다. 호광중(胡廣仲)은 동(動)ㆍ정(靜)의 묘함을 극언하여 “동ㆍ정 이외에 따로 동과 상대되지 않는 정과, 정과 상대되지 않는 동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 연로가 말한 “형상이 있기 전에 어찌 체가 있었겠으며, 동하기 이전에 어찌 용이 있었겠느냐.”는 설과 말은 비록 다르나 뜻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동ㆍ정을 추하고 천근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전에 상대할 것이 없는 것을 가리켜 동ㆍ정의 묘라 하고, 하나는 체와 용을 추하고 천근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전에 체ㆍ용이 없는 것을 가리켜 도의 묘라고 하고 또 마음의 묘라 한 것이다. 이는 그 소위 묘한 곳이 다만 하나의 체와 용, 한 번 동하고 정하는 사이에 있고, 이 밖에 따로 묘한 곳이 없음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훌륭하게도 주 부자(朱夫子)께서 호광중의 말을 반박하기를, “동과 상대가 되지 않으면 정이라 이름 할 수 없고, 정과 상대가 되지 않으면 동이라 이름 할 수 없다.” 하였으니, 나도 역시 “이미 정을 가리켜 체라 하였다면 다시 체가 없다고 가리켜 말할 곳이 없고, 이미 동을 가리켜 용이라 하였다면 다시 용이 없다고 가리켜 말할 곳이 없다.”고 말하겠다. 그러므로 세 선현의 설을 합하여 그 병통이 있는 곳을 보면 연로의 병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D-001]연로(蓮老) : 연방(蓮坊) 이구(李球 : ?~1573)를 가리킨다. 자는 숙옥(叔玉)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