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포럼/퇴계선생

퇴계선생문집 제41권_잡저(雜著) _소백산(小白山) 유람기

청풍선비 2011. 4. 11. 13:15

퇴계선생문집 제41권_잡저(雜著)

소백산(小白山) 유람기

 

내가 젊어서부터 영주[榮川]와 풍기(豊基) 사이를 왕래하였으니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바라보이고 발만 떼면 갈 수 있었는데도 조급하게 허둥대느라 오직 꿈에서나 그리고 마음으로만 달려간 것이 이제 40년이 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인부(印符)를 차고 풍기에 부임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주인이 되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워하며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백운동에 갔다가 그때마다 산문(山門)도 엿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4월 신유일에 며칠째 내리던 비가 막 개니 산빛이 목욕한 것 같았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유생들을 만나 보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이튿날 드디어 산에 들어갔는데, 진사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나섰다.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 속은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때로 물이 돌 위로 흐르며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걸어서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니, 초암은 원적봉(圓寂峰)의 동쪽 월명봉(月明峰)의 서쪽에 있는데, 양쪽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암자 앞을 감싸며 산문이 되었다. 암자 서쪽에는 바위가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데 그 아래로 맑고 급한 물결이 빙 돌아서 웅덩이가 되고 바위 위는 평평하여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주경유(周景遊)가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어 이 이름이 혼동되니 백(白)을 청(靑)이라 고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졌다.
산인(山人) 종수(宗粹)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묘봉암(妙峰庵)에서 이곳으로 찾아왔기에, 인하여 서경과 함께 백운대 위에서 술 두어 순배를 돌렸다. 서경은 학질을 앓아 돌아가려 하였는데, 나는 비록 허약하고 병들기는 하였지만 기어이 올라가 보고 싶었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견여(肩輿)가 아니면 안 되니, 전에 주 태수(周太守)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웃고 승낙하였더니, 잠시 후에 견여가 마련되었다고 알려왔는데, 모양이 간단하고 쓰기에 편하였다. 드디어 서경과 작별하고 말을 타고 갔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승려들이 혹은 앞에서 인도하고 혹은 뒤를 따랐다. 태봉(胎峯) 서쪽에 이르러 시내 하나를 건너 비로소 말에서 내려 걷다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면 견여를 탔으니, 번갈아 가며 그 힘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산을 나올 때까지 대체로 이 방책을 썼는데,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기구였다. 시 한 편을 지어 본 바를 기록하였다. 이날은 철암(哲庵)과 명경암(明鏡庵)을 거쳐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는데, 철암이 가장 소쇄(蕭灑)하였다. 맑은 샘물이 암자 뒤의 바위 밑에서 솟아 동서로 갈라져 흘렀는데 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며, 시야가 꽤 높게 트였다. 석륜사 북쪽에는 바위가 매우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푸드득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옛 이름이 봉두암(鳳頭岩)이다. 그 서쪽에 우뚝 선 바위가 있어서 사닥다리를 놓아야 오를 수 있는데, 경유가 광풍대(光風臺)라고 부른 것이다. 절 안에는 돌을 조각하여 불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승려들이 영험하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튿날인 계해일에 걸어서 중백운암(中白雲庵)에 올랐다. 이름은 잊었는데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짓고 그 안에서 좌선(坐禪)을 하여 선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지금은 승려가 없다 한다. 창 앞에는 묵은 우물이 완연하며, 뜰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할 뿐이었다. 중백운암을 지난 뒤로 길이 더욱 가파르게 깎아질러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수직으로 올라가, 있는 힘을 다하여 더위잡고 기어오른 뒤에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견여를 타고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 남짓 가니 석름봉(石廩峰)이 나왔다. 봉우리 꼭대기에 초막을 지어 놓았고 그 앞에 시렁을 매놓고 매를 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 고되게 여겨졌다. 석름봉 동쪽 몇 리 되는 거리에 자개봉(紫蓋峰)이 있고, 또 그 동쪽 몇 리에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국망봉(國望峰)이다. 만일 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용문산(龍門山)으로부터 서울까지 바라볼 수가 있는데, 이날은 산 안개와 바다의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서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사이로 월악산(月嶽山)이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동쪽을 돌아보면 구름과 산이 천 겹 만 겹 첩첩으로 쌓여서 어렴풋이 상상만 되고 진면목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 태백산(太白山)ㆍ청량산(淸凉山)ㆍ문수산(文殊山)ㆍ봉황산(鳳凰山)이고, 남쪽으로 보였다 숨었다 하며 구름 속에 아스라한 것이 학가산(鶴駕山)ㆍ팔공산(八公山) 등 여러 산이며, 북쪽으로 형상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하늘 한쪽에 아득히 보이는 것이 오대산(五臺山)ㆍ치악산(雉岳山) 등 여러 산이었다. 바라보이는 물은 더욱 적어서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과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의 굽이 정도일 뿐이었다. 종수가 말하기를, “이 산에 올라 조망하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가 좋고 혹은 오랜 비가 새롭게 갠 날이 좋은데, 주 태수도 비에 닷새 동안 막혀 있다가 개자마자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가만히 그 뜻을 이해하였으니, 처음엔 답답하게 막혔던 자가 필경 쾌함을 얻는 것인데, 내가 와서는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떻게 만리의 쾌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매우 고랭(高冷)하여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나무가 자라면서 모두 동쪽으로 기울고 가지와 줄기가 굽어 있고 왜소하였다. 4월 그믐께라야 잎이 피기 시작하고 1년 동안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불과하며, 앙상하게 시달려 모두 애써 싸운 모양을 하고 있으니, 깊은 숲과 큰 골짝에서 자라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이, 식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ㆍ자개ㆍ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병풍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章)을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꽃 숲을 지나 내려와서 중백운암에 이르렀다. 내가 종수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제월대(霽月臺)에 오르지 않은 것은 다릿심이 먼저 빠질까 염려해서였는데, 지금 산에 올라 구경하고도 다행히 남은 힘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종수를 시켜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벼랑을 따라 발을 옆으로 디디면서 올라갔다. 이른바 상백운암(上白雲庵)이란 것은 불에 탄 지가 오래되어 풀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었으며, 제월대가 바로 그 앞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찔하고 떨려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려와서 이날 저녁에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갑자일에 나는 용기를 내여 상가타암(上伽陁庵)을 찾아 올라가 지팡이를 짚고 돌길을 더위잡아 환희봉(懽喜峰)에 올랐다. 환희봉 서쪽의 여러 봉우리들은 숲과 골짝이 더욱 아름다우니 모두 어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십 보를 지나서 석성(石城)의 옛터를 찾았는데, 성안에는 주춧돌과 폐기된 우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석봉(石峯)이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데도 소나무ㆍ삼나무ㆍ철쭉이 우거져 뒤덮고 있어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산중 사람들은 단지 모양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산대바위[山臺巖]라고 불렀다. 내가 사람들을 시켜 가린 것을 찍어 내도록 하고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데가 안 보이는 것이 없어서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주경유를 만나지 못하여 전날의 속된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고치지 않을 수 없어 자하대(紫霞臺)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그 성을 적성(赤城)이라 불렀으니, “적성에 노을이 일어나 이름을 붙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하대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ㆍ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색은 하얗고 달리 이름이 없어, 내가 감히 동쪽 것은 백학봉(白鶴峰)이라 이름하고 서쪽 것은 백련봉(白蓮峰)이라 이름하여, 이른바 백설봉(白雪峰)과 함께 모두 백(白)으로 일컬었다. 이렇게 백(白) 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은 이유는 그 실상을 들어서 소백(小白)이란 이름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또 깊은 숲을 뚫고 높은 산을 넘어 굽어보다가 구름과 물과 바위와 골짝이 더욱 절승한 곳을 찾아냈으니, 곧 상가타암(上伽陁庵)이었다. 그 동쪽은 동가타암(東伽陁庵)이 있는데, 종수가 말하기를, “희선 장로(希善長老)가 처음으로 여기에 살았고, 그 뒤에 보조 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하여 9년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습니다. 시집(詩集)이 있는데 제가 일찍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빌려 갔습니다.” 하며, 몇 구절을 외우는데 모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오곡(五穀)이 익지 못한 탄식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서북쪽의 금강대(金剛臺)와 화엄대(華嚴臺)는 옛 이름을 그대로 두었는데, 고승(高僧)의 자취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동쪽의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석봉(石峯)을 연좌(宴坐)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고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가타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고목(古木)과 푸른 등나무가 얽혀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으며, 가끔 수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중가타(中伽陁)의 어귀에 왔는데 중가타에는 승려가 없어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을 옮기니 몇 층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그 옆에 암석들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옛날에는 고죽(苦竹)이 뭉쳐났으나 지금은 다 말라 죽었는데 아직도 뿌리와 줄기가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암폭포(竹巖瀑布)라고 이름 지었다.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이 바위에만 대가 난 것이 아니라 숲 아래 땅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나서 온 산이 모두 그러했는데, 지난 신축년에 갑자기 일제히 열매가 열리더니 그해에 다 말라 죽었습니다.”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 길을 걸어 작은 시내를 건너니 금당암(金堂庵)과 하가타암에 이르렀다. 중가타암 위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암 옆에는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 모두 승려가 앓고 있다 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하가타를 따라 내려와 시내를 건너서 곧장 관음굴(觀音窟)로 올라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인 을축일에 산에서 내려오니, 산 밑에 반석이 평평하고 맑은 물이 그 위로 쏟아져 쟁쟁히 울리며 흘러가고 양편에는 목련화가 만개하였다. 나는 그 옆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서 양치질도 하고 장난도 하여 마음이 매우 유쾌하였다. 승려 종수가 “시냇물은 옥대(玉帶) 찬 손님 비웃으리니, 홍진의 자취 씻으려 해도 씻지 못하네.[溪流應笑玉腰客 欲洗未洗紅塵蹤]”라는 시구를 읊고는,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입니까?” 하였다. 마침내 서로 쳐다보고 한 번 웃고는 시를 짓고 떠났다. 시내를 따라 몇 리를 가는데 모두 구름과 숲과 벼랑과 골짝이 절경이었다. 길이 갈리는 곳에 이르러 잠깐 쉰 뒤에, 응기와 종수와 여러 승려들은 초암동(草庵洞)으로 향하고, 나는 박달재[博逹峴]로 길을 잡아 갔다. 작은 박달재에 이르러 견여에서 내려 걸어가노라니 인마(人馬)가 그 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시내를 건너 깊은 골짝을 빠져나와 큰 박달재를 넘으니, 곧 상원봉(上元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조금 야트막한 곳이었다. 거기서 상원사까지는 겨우 몇 리밖에 안 되지만 오를 힘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내려와 비로전(毗盧殿) 옛터 밑에 이르러 한낮에 시냇가 돌 위에서 쉬었다. 얼마 후 허공 간(許公簡)과 아들 준(寯)이 고을에서 찾아왔다. 맑은 샘과 무성한 나무가 사랑스러워 한동안 앉아서 얘기하고는 그 앉았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윽고 욱금동(郁錦洞)을 거쳐 나와서 고을에 이르렀다. 대저 소백산에는 수많은 바위와 수많은 골짝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데, 사찰이 있는 곳과 인적이 통하는 곳은 대개 세 골짜기가 있다. 초암과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짝에 있고, 성혈사(聖穴寺)와 두타사(頭陀寺) 등은 동쪽 골짝에 있고, 세 가타암은 서쪽 꼴짝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것은 길이 편해서인데, 얼마 지나 피곤하고 흥이 식으면 그만 돌아오고 만다. 비록 주경유처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유람한 곳은 그중 한 골짝에 그치고 마니,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매우 자세하게 기술했지만 실상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광풍대ㆍ제월대ㆍ백설대ㆍ백운대가 모두 가운데 골짝에만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쇠약하고 병든 내가 한 번 가서 온 산의 경치를 다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결국 동쪽은 남겨 두어 다음날에 유람하기로 하고 오직 서쪽 골짝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짝에서 얻은 백학봉ㆍ백련봉ㆍ자하대ㆍ연좌봉ㆍ죽암폭포 같은 절경을 마음대로 이름 지으며 사양하지 않은 것은 역시 주경유가 가운데 골짝에서 만난 절경에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有司)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었는데, 석륜사에 와 보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나는 그 시와 글의 웅장하고 빼어남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펴서 읊으니, 마치 홍안 백발의 늙은이와 함께 서로 얘기하고 수창(酬唱)하는 것 같아서, 이 때문에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록이 없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이 또 있으니, 문사로서 주경유(周景遊)보다 먼저 와서 유람한 자로 산인(山人)들이 일컫는 바로는 오직 호음(湖陰) 정 선생(鄭先生)과 태수 임제광(林霽光)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기술한 것을 찾아보면 임 태수는 일언반구도 찾을 것이 없고, 호음의 시는 겨우 초암사에서 읊은 절구 한 수가 보일 뿐이다. 또 그 밖의 것을 찾아보면 석륜사의 승려가 황금계(黃錦溪)의 시를 가지고 있고, 명경암 벽에 황우수(黃愚叟)의 시가 있을 뿐이며, 더 이상은 보이는 것이 없다. 아, 영남은 곧 사대부에게 기북(冀北)같은 지역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에 큰학자와 선비들이 잇달아 나와서 찬란하였으니, 이 산에 와서 유람한 사람이 고금을 통하여 얼마나 많았겠으며, 기술하여 전할 만한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竹溪)의 여러 안씨(安氏)들은 이 산 밑에서 정기(精氣)를 타고 나서 이름이 중원(中原)에까지 떨쳤으니, 틀림없이 이 산에서 노닐고 이 산에서 즐기고 이 산에서 읊고 노래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에는 벼랑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들이 입으로 외는 것도 없어서, 자취가 없어 찾을 수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고아함을 좋아하지 않고, 일을 좋아하여 전술(傳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명성을 드높이 세운 여러 안씨들과 큰 산으로 유명한 이 지역의 이 산처럼 빼어난 곳에 대해서도 마침내 전할 만한 문헌이 이와 같이 없으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산 언덕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천년 동안 참다운 은자(隱者)가 없으니, 참다운 은자가 없으면 참다운 감상(鑑賞)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어귀를 거니는 우리 같은 무리야 어찌 이 산에 가치를 실어주겠는가. 우선 본 것을 차례로 펴서 지은 것을 기록하노니, 뒤에 보는 자가 이 글에 대한 느낌이 또한 나의 주경유에 대한 느낌과 같을 것인가.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叟)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

[주D-001]주경유(周景遊) : 경유는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의 자이다.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주D-002]축융(祝融) : 남방의 화신(火神)으로, 붉은 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축융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적성에 …… 붙였다 : 진(晉)나라 손흥공(孫興公)이 지은 〈천태산부(天台山賦)〉에 있는 말인데, 천태산에 적성(赤城)이 있다.
[주D-004]오곡(五穀)이 …… 탄식 : 《맹자》 〈고자 상(吿子上)〉에 “오곡은 좋은 종자이지만 익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 하였으니,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이단이나 잡기를 배워 성공함만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5]호음(湖陰) : 정사룡(鄭士龍 : 1491~1570)의 호이다.
[주D-006]황금계(黃錦溪) : 퇴계의 문인 황준량(黃俊良 : 1517~1563)으로, 호가 금계이다.
[주D-007]기북(冀北) : 옛날 중국 기주(冀州)의 북부로 지금의 하북성을 말하는데,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학자가 많이 난 곳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