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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자의 일생에서 초학과 만학은 다르다. 학문을 시작하는 시기가 초학이라면 학문을 완성하는 시기가 만학이다. 초학과 만학의 시기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아호(雅號)의 출현이 한가지 준거점이 될 수는 있다. 명종대 예안의 산중에서 비로소 ‘퇴계’로 거듭난 이황의 일생에서 그 이전 중종대의 이황은 퇴계 이전의 퇴계였다. 순조대 강진의 유배지에서 비로소 ‘다산’으로 거듭난 정약용의 일생에서 그 이전 정조대의 정약용은 다산 이전의 다산이었다. 퇴계 이전의 퇴계, 다산 이전의 다산은 만학의 전형성에 가려진 초학의 신세계이다. 여기 경상도 선산 임은 출신의 유학자 허훈(許薰 1836~1907)이 있다. 이황-정구-허목-이익-안정복-황덕길-허전의 학통을 계승하는 인물로 그 문하에서 장지연이 배출되었다. 그는 만년에 도산서원의 동주(洞主)와 병산서원의 원장(院長)을 지내며 퇴계학의 정점에 올라섰지만 기실 그가 초년에 몰입했던 학문은 조선시대 육경고학의 주창자인 허목의 고학이었다. 허훈의 경우 초학을 어떻게 형성해 나갔는지 아래에 그가 허목의 저술 『기언』에 부친 간단한 글을 읽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세상에서 문집이 유행함은 옛스럽지 않은 것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화가 더욱 번성하고, 문화가 번성할수록 원기가 더욱 분열되어 고문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된 후에 문집이 출현한 것이다. 진(晉)ㆍ당(唐) 이후 경생(經生)과 숙유(宿儒)가 각각 자립해서 자기 글을 모아 불후의 저작으로 전하기를 도모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이 옛날과 어긋나고 도를 등졌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송조(宋朝)가 되어 치교가 밝아지니 정(程)ㆍ주(朱) 노선생들이 나타나 언어를 다듬고 가르침을 세워 과거의 성현을 이어 후학을 열어 주었다. 즉, 한 글자 한 마디가 모두 경전을 돕는 것이었고 천지에 영원히 전해질 문자였다. 끊어진 학문을 다시 밝히자니 주소(注疏)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미세한 이치를 분석하자니 논변이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류의 폐단으로 마침내 지리함과 방만함의 문제점이 발생하였고 순박하고 옛스런 글은 더욱 다시 희미하게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도산(陶山) 선생(=이황)이 국조(國朝)의 전성기에 태어나 주자(朱子)가 남긴 학문을 직접 접하고 공맹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원과 소통하고 유파를 인도하여 속학의 잘못을 씻어 냈다. 한강(寒岡) 정선생(=정구)은 도산 선생의 도를 전수받아 남방에서 학문을 제창하였고, 미수(眉叟) 허선생(=허목)은 그에게 가서 종유하여 학문의 지결을 얻어 들었다. 사문(斯文)의 정맥이 이에 귀결처가 생겼다. 연원의 적실함과 도통의 계승됨이 환히 해와 별처럼 빛나게 되었으니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닌가. 선생은 소싯적에 고문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백수(白首)가 되도록 하루 같았고 공력이 깊어지자 진(秦)ㆍ한(漢) 이후의 경지를 넘어섰다. 매양 글을 지음에 단어 하나 구절 하나라도 삼대가 아니면 법으로 삼지 않았다. 수천 년 후에 태어나 수천 년 전의 법과 합하려 하였으니, 이 어찌 선생이 힘써 배운 것만으로 이룩할 수 있었으리오. 실로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삼대의 빛나는 기상을 붙잡아 선생을 빌어 발휘케 한 것이다. 대개 선생이 태어났을 때는 명나라가 국운이 다하고 오랑캐가 차츰차츰 천하의 황제가 되려는 기상이 있었다. 하늘도 중국이 멸망하는 날 삼대의 학문을 만회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기운과 질서는 순환하는 법이라 끝내 없어질 수는 없기에 필시 우리나라에서 이를 잇기 위해 선생 같은 분이 났으리라. 선생의 글은 간략하지만 갖추어져 있고 자유롭지만 엄격함이 있다. 마치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르는 것,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것, 비바람과 계절이 오고가는 것, 산천과 초목과 짐승과 오곡이 자라는 것, 사람의 도덕과 사물의 법칙, 시서와 육예의 가르침,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워하는 감정, 귀신과 요물과 괴물의 이상함, 풍기와 속요의 같지 않음, 현인과 열사와 정부(貞婦)와 간인과 역적을 경계함이 하나같이 글에 깃들어 있다. 그런데, 선생은 언젠가 손수 스스로 글을 찬정하고 ‘기언(記言)’이라 이름 붙였다. 그 차례와 표제가 근세의 문집과는 관례가 다르다. 이어서 생각해 보니 나는 늦게 태어난 후학으로 구령(九嶺)과 미강(湄江) 사이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기언』 한 질을 잡아 만의 하나라도 헤아려 몽매함을 없애려 하였으나 집에 소장한 것이 없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계해년(1863년) 겨울 유하(柳下) 정(鄭) 어른께 한 질을 빌렸다. 정 어른은 한강선생의 후손이다. 삼가 받아 모두 읽은 다음 사람을 시켜 전사(傳寫)하게 하였다. 삼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별집에 빠진 부분이 있어서 아직 완본이라 할 수는 없었다. 금년 여름 계당(溪堂) 어른(=유주목)을 뵙고 마침 말이 여기에 미치자 계당 공이 두 책을 주었다. 마침내 책을 완성하고 삼가 책 끝에 한마디 말을 붙이니 감히 함부로 논술하려는 것이 아니고 평소 공경하는 마음을 깃들이려는 것일 뿐이다.
- 허훈(許薰), 〈『기언』의 뒤에 쓰다(書記言後)〉, 《방산집(舫山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328집《방산집(舫山集)》권17, 발(跋),〈서기언후(書記言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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