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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38 - 복괘

청풍선비 2010. 12. 22. 09:05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복괘(復卦)]

 

운봉 호씨(雲峯胡氏)가 “‘그 도를 반복한다.[反復其道]’라고 한 것은 음양(陰陽)이 왕래(往來)하는 이치를 종합하여 말한 것이고, ‘7일에 돌아온다.[七日來復]’라고 한 것은 일양(一陽)이 바야흐로 오는 수치를 전적으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고 한 것을 덕에 들어가는 일로 삼고 “돈독하게 돌아온다.[敦復]”고 한 것을 덕을 이루는 일로 삼았다. 호씨가 종합적으로 말하고 전적으로 말한 뜻과 덕에 들어가고 덕을 이루는 순서에 대해 다 하나하나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이청(李晴)이 대답하였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말없이 이동하고 끊임없이 운행하며 사라지고 자라나는 도(道)가 반복하여 번갈아 이르는 것은 곧 하늘과 땅의 자연적인 기능(機能)입니다. 역(易)의 의의는 양(陽)을 도와주고 음(陰)을 억제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복괘(復卦)의 괘사(卦辭)에서 “그 도를 반복한다.[反復其道]”고 하여 음양(陰陽)이 왕래하는 이치를 종합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양(一陽)이 돌아오는 것은 괘효(卦爻)로써 말한다면 곤괘(坤卦) 초효(初爻)에서 일곱 번의 효(爻)를 지나면 복괘가 되고, 달의 수로 말하면 5월의 음이 자라는 때로부터 7개월이 지나 복괘가 되며, 괘(卦)의 순서로 말하면 구괘(姤卦)의 양이 소멸되는 때로부터 일곱 괘가 변하여 복괘가 되므로 그 수치를 7로 한 것이고, 양은 일(日)에 해당하므로 “7일에 돌아온다.[七日來復]”고 한 것이니, 이를 일러 “일양(一陽)이 왕래하는 수치를 전적으로 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고 한 것과 같은 경우는 양이 되돌아오는 초기가 되니 바로 착한 마음이 처음 싹트는 것과 같으므로 덕에 들어가는 일이 되는 것이며, “돈독하게 돌아온다.[敦復]”고 한 경우는 중(中)으로서 순한 덕이 있으니 바로 착한 행위가 더욱 굳어진 것과 같으므로 덕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의의를 계사(繫辭)에서는 안자(顔子)가 허물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 것에 해당시켰으니, 이는 성인(聖人)보다 한 등급이 낮은 경지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아마도 곧바로 초학자가 덕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돈독하게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의의는 양이 돌아왔으나 아직 미약할 때를 당하여 유약한 자로서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대개 그 돈독하게 돌아오며 실수가 없게 하고자 함이니, 이는 바로 배우는 학생이 성찰(省察)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역시 곧바로 군자가 덕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사(彖辭)에서는 “7일에 돌아옴이니 가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는데 상전(象傳)에서는 “동짓날에 관문을 닫고 장사치와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게 하며 임금이 지방 순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고 한 것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주염계(周濂溪)는 ‘돌아오는 곳’을 가리켜 말하였고, 이천(伊川)은 ‘동(動)하는 곳’을 가리켜 말하였으며, 유염(兪琰)은 “천지의 생물(生物)하는 마음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성인(聖人)은 박(剝)이 돌아서서 복(復)이 되고 정(靜)이 다하여 동이 시작하는 데에서 천지의 생물하는 마음이 하루도 쉰 적이 없음을 본다는 것이지, 오직 복에서만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정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동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떤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신복이 대답하였다.]
하늘의 도(道)는 순환함을 좋아하여 비록 가는 것이 이로운 기미는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양(陽)이 처음 생겨났을 적에는 조용히 기르는 일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소 강절(邵康節)의 시에, “양 하나가 처음 움직이는 곳이고 만물이 아직 생겨나기 전이다.[一陽初動處 萬物未生時]”라고 하였고, 《주례(周禮)》에는 “동짓날에 원구(圜丘)에서 음악을 연주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곳에서 7일에 돌아오는 것과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 뜻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고 한 것과 같은 경우는 성인의 교훈이 친절하게 설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천지가 생물(生物)하는 마음은 매우 인(仁)한 것입니다. 원(元)에서 형(亨)과 이(利)를 거쳐 정(貞)으로 가고 정에서 다시 원으로 돌아가므로, 비록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온갖 풀이 말라 죽는 때라고 하더라도 생물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여 단 하루도 잠시 쉰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에서 생기고 박(剝)이 다하면 복(復)이 생겨나며 한밤중의 우렛소리가 무(無) 속에 유(有)를 내포한 상(象)을 환기시키니, 한줄기 양기(陽氣)가 갖가지 만물의 형체를 유출시키는 뜻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순곤(純坤)의 음(陰)이 쌓였을 때에도 비록 양(陽)이 없었던 적은 없으나 사람들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동짓날 한밤중이 될 무렵에 한 양이 처음 움직이게 되면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하므로, 박(剝)이 다하여 반드시 복(復)이 될 적에 천지의 생물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잘못이겠습니까.
선대 학자들의 학설도 거기에 대한 의논이 같지 않았습니다. 주염계는 돌아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니 ‘돌아오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되고, 정자(程子)는 바야흐로 동(動)하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동하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됩니다. 요컨대 도리는 같은 것이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자가 “동의 실마리가 곧 천지의 마음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주자(朱子)가 자주 일컬어 말하기를, “예로부터 모든 학자가 정(靜)의 상태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으나 오직 정자는 동의 상태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동하는 곳에서 정을 구하는 것이니 사리(事理)로써 고찰하면 정자의 말이 더 치밀합니다. 유씨(兪氏)가 “정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동으로써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한 것은 아마 동과 정을 겸하여 말한 것 같은데, 그 말에는 약간의 어폐(語弊)가 있으니 굳이 그렇게 논리를 내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복(復)의 덕은 성대한 것으로서 천지의 덕은 복(復)하는 것을 선(善)하게 여기니, 복하지 않으면 천지의 기능이 종식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정이 다하여 동이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고, 보통 사람은 악이 다하여 선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군자가 수레를 얻는다.”고 한 것은 조정(朝廷)의 복이 되는 것이고,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경우는 천지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진실로 복이 오는 상(象)을 본받아서 생물(生物)하는 공(功)을 베풀면 복의 이치를 잘 응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성왕(聖王)은 계절에 따라 그 철에 맞게 행동하였으되 동짓날에 더욱더 신경을 쓴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은 복괘(復卦)이다.


 

[주D-001]비풍(匪風)과 하천(下泉)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모두 현자(賢者)가 주(周)의 왕실(王室)이 미약해진 것을 걱정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