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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39 - 이괘

청풍선비 2010. 12. 22. 09:16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이괘(頤卦)]

 

“나를 보고 턱을 움직인다.[觀我朶頤]”는 것을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는 모두 초구(初九)에 해당시켰는데 항안세(項安世)는 그 “턱을 움직인다.”를 상구(上九)의 상으로 생각하였고, ‘전이불경(顚頤拂經)’을 《정전》과 《본의》에서는 모두 한 가지 일로 보았는데 황간(黃榦)은 ‘아래에게 길러 주기를 구하는 것’을 전(顚)으로, ‘위에게 길러 주기를 구하는 것’을 불(拂)로 보았으며, “길러 줌을 본다.[觀頤]”고 한 것과 “입의 내용물이다.[口實]”라고 한 것을 《정전》과 《본의》에서는 덕을 기르고 몸을 기르는 일로 나누었는데, 육전(陸銓)은 “그 선(善)하고 선하지 않음을 고찰하여 자기에게서 취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역경》의 뜻은 진실로 마땅히 《정전》과 《본의》를 위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 밖에 여러 학설도 다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역경》에서 상(象)을 취한 것 중에는 다른 효(爻)의 일까지 아울러 인용하여 본효(本爻)의 뜻을 밝힌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대축괘(大畜卦)에서 ‘불깐 돼지’라고 한 것과 중부괘(中孚卦)에서 ‘학이 운다’고 한 것은 상응(相應) 관계로 말한 것이고, 둔괘(屯卦) 육이(六二)에서 ‘강(剛)을 탄다’고 한 것과 비괘(比卦) 육사(六四)에서 ‘위를 따른다’고 한 것은 승승(承乘)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태괘(泰卦)의 세 양이 함께 나아가는 것과 소축괘(小畜卦)의 힘을 합하여 강건(剛健)함을 축지(畜止)시키는 것 같은 것은 동체(同體)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초구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의 효로 의의(意義)를 삼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초구는 이괘(頤卦)의 첫자리에 있으면서 육사와 상응이 되고 있으니, 너니 나니라고 한 것은 진실로 초구와 육사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상구(上九)의 상에 빗댄다면 이는 이미 승승의 경우도 아니고 또 동체의 의의도 없는 것이니, 너는 초구고 나는 상구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서로 미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육이의 상에 대해서라면 《정전》과 《본의》의 풀이는 모두 “거꾸로 기른다.”고 한 것과 “언덕에서 길러 줌을 구한다.”고 한 것을 위아래로 나누어 배속시켰는데, 황씨(黃氏)가 “위에게 길러 주기를 구하는 것이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해석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도 대체의 뜻은 진실로 옳게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니 글자 풀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변론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길러 줌을 본다.”고 한 것과 “입의 내용물이다.”라고 한 것에 대한 풀이는 《정전》과 《본의》의 해석이 모두 ‘그 길러 줌을 보는 것’과 또 ‘스스로 기르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반드시 정도(正道)를 얻는 것으로 길(吉)함을 삼은 것입니다. 육씨(陸氏)가 “그 선(善)하고 선하지 않음을 고찰한다.”고 말한 것도 아마 옳은 것 같습니다. 비록 같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諸家) 중에 한 가지 의의(意義)는 될 것이니, 굳이 말을 허비하면서까지 변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괘(頤卦)의 내용에는 몸을 기르는 것과 덕을 기르는 것과 남을 길러 주는 것과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 등의 뜻이 들어 있다. 여섯 효와 단사(彖辭) 및 상사(象辭)에 나아가 말한다면 어느 것이 몸을 기르는 것이며 어느 것이 덕을 기르는 것이며 어느 것이 남을 길러 주는 것이며 어느 것이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이 되는가? 신령스러운 거북처럼 밝은 지혜를 가지고도 도리어 흉한 조짐이 있고,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처럼 탐욕을 부리는데도 마침내 허물이 없음은 어째서인가?

[이곤수(李崑秀)가 대답하였다.]
이(頤)의 도(道)는 잘 기르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기르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덕을 기르는 것이고 하나는 몸을 기르는 것입니다. 덕을 기르고 몸을 기르고 나서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데까지 이르는 것인데, 만약에 기르는 것이 덕이면 마땅히 그 덕을 기르는 도를 구해야 하고 만약에 기르는 것이 몸이면 마땅히 그 몸을 기르는 도를 구해야 할 것이며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데 이르러서도 모두 마땅히 길러야 하는 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 마음을 맑히고 욕심을 적게 하여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은 덕을 올바르게 기르는 것이고, 동작을 신중히 하고 음식을 조절하면서 음악이나 여색, 음식으로 인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몸을 올바르게 기르는 것입니다. 무릇 남을 기르는 것은 양에 해당하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은 음에 해당합니다. 군자가 위에 있으면 남을 기를 수 있지만 소인이 아래에 있으면 그 형편이 남에게 부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이 올바름을 놓치면 모두 잘 기르는 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섯 효와 단사 및 상사의 내용으로써 몸을 기르고 덕을 기르는 것과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에 나누어 배속시키면, 하괘(下卦)의 세 효는 다 스스로를 기르는 것이니 덕을 기르고 몸을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상괘(上卦)의 세 효는 다 남을 기르는 것입니다. 단사와 상사에서는 스스로를 기르고 남을 기르는 도를 포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령스러운 거북도 도리어 흉한 조짐이 있고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처럼 탐욕스러운데도 마침내 허물이 없다고 한 경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개 스스로 내면을 기르는 것은 거북만 한 것이 없고 외면을 기르는 것은 호랑이만 한 것이 없는 법인데, 신령스럽더라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하고 존귀하면서도 스스로 진중하지 못하면 거북처럼 아무리 밝은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흉한 것이고, 그 위엄을 기르고 그 체모를 존중하면 비록 호랑이가 노려보듯이 탐욕을 부려도 당연히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효에서 상(象)을 취한 뜻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상은 이괘(頤卦)이다.


 

[주D-001]승승(承乘) : ‘승(承)’은 아래에 있는 효(爻)가 위에 있는 효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고, ‘승(乘)’은 위에 있는 효가 바로 밑에 있는 효를 타고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