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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39 - 진괘

청풍선비 2010. 12. 22. 09:27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진괘(晉卦)]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에게 말[馬]을 많이 하사하고 하루에 세 번씩 만나 본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섯 효(爻)로써 고찰해 보면 어느 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의 상(象)이 되며, 어느 것이 말을 많이 주는 상이 되며, 어느 것이 하루에 세 번씩 만나 보는 상이 되는가? 혹자는 임금 가까이 있는 구사(九四)가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가 된다.”고 하였으나, 효사에서 “나아감이 다람쥐와 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는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라고 할 수가 없다. 또 “육오의 음유(陰柔)가 중(中)으로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이다.”라고도 하는데, 그 육오는 임금의 자리이니 총애를 받는 신하라고 할 수 없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말이니 하루니 한 것은 이(離)와 오(午)의 상(象)이고, 많다느니 세 번 만난다느니 한 것은 곧 곤(坤)의 대중이 되고 문채가 되는 상이다.”라고 하였으며, 호병문(胡炳文)은 말하기를, “곤에는 땅의 뜻도 있고 백성의 뜻도 있으니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의 상이 있으며, 곤은 암말도 되고 대중도 되니 말을 많이 주는 상이 있으며, 이(離)는 해도 되고 속이 빈 것도 되니 하루에 세 번 만나는 상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그 본뜻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상전에서 일컬은 “음유(陰柔)가 나아가서 위로 간다.”고 한 말로 보면, 또 육오를 가리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의 상으로 삼은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어느 의견이 더 나은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역경》에서 상(象)을 취한 것은 본래 일정한 예(例)가 없습니다. 괘(卦)에는 괘 중의 상이 있고 효(爻)에는 효 중의 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곤괘(坤卦)에는 암말의 상이 있어도 여섯 효 중에서는 말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이괘(離卦)에는 암소의 상이 있으나 여섯 효 중에서는 소를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괘는 효에 매달릴 필요가 없고 효는 괘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괘에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한다.”고 한 것과 “하루에 세 번씩 만나 본다.”고 한 상(象)에 대해서는 생각건대 이 괘 중에 원래 이러한 상이 있으므로 성인(聖人)이 이를 우연히 발견하고서 그러한 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선대 학자들이 “곤은 암말의 상이나 땅의 뜻도 있고 백성의 뜻도 있으니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의 상이 되며, 이는 하루의 상이 된다.”고 말한 것도 아마 상의 한 부분을 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어떤 효는 어떤 상에 해당하고 어떤 자리는 어떤 일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이는 천착한 견해를 가지고 억지로 꿰맞추는 문제점이 있을 뿐만이 아니고 장차 한 괘는 한 건의 일에만 해당시키고 여섯 효는 여섯 건의 일에만 해당시키게 될 것이니 그것이 어찌 역(易)을 만든 뜻이겠습니까.
또 단전(彖傳) 중에 있는 글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은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 한 장(章)은 아마도 세 절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밝은 것이 땅 위로 나온다.[明出地上]”고 한 것은 정치 교화가 밝아지는 때를 처음으로 말한 것이고, “순응하는 것으로 크게 밝은 데 걸렸다.[順而麗乎大明]”고 한 것은 제후의 법도를 성실하게 이행하여 천자가 하는 것을 순응하며 받드는 것을 말한 것이고, “유(柔)한 것이 나아가 위로 올라간다.[柔進上行]”고 한 것은 곧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을 예우하며 천자의 자리에 나아감을 말한 것이니 사실상 육오(六五)의 상이고 크게 밝은 임금입니다.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는 반드시 이러한 시대에 이러한 덕을 닦아 이러한 임금을 만나서 바야흐로 총애를 받는 사람일 것이니, 단전의 뜻도 아마 반드시 이러할 것입니다. 어찌 위의 두 부분은 잘라 버리고 아래의 한 부분만 취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제후의 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진(晉)은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효가 다 나아가는 것을 의의로 삼았으니, 초육(初六)ㆍ육이(六二)ㆍ육삼(六三)ㆍ육오(六五)는 유(柔)한 것이 나아가는 것이고 구사(九四)와 상구(上九)는 강(剛)한 것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음(陰)은 길(吉)한 것이 많고 양(陽)은 위태로움이 많은 것은 어째서인가? 혹자의 말에 의하면 “진은 유순(柔順)함을 좋아하고 강함을 싫어하는 것인데, 구사가 나아가는 것은 그 정당한 도가 아니므로 다람쥐가 되고, 상구는 이미 다 나아간 것인데도 더 나아가려고 하므로 뿔에 나아가는 것이 되며, 오직 육오만이 유순하며 현명한 자로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므로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하는데, 여기서 “진은 유순함을 좋아하고 강함을 싫어한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비록 단전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순응하는 것으로 크게 밝은 데 걸렸다.”고 말한 것과 “유한 것이 나아가 위로 올라간다.”고 말한 것은 오로지 유한 것이 나아가는 것만을 위주로 말한 것인데,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려줄 수 있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밝은 것이 땅 위로 나온 것이 진(晉)인데, 크게 밝음은 이(離)가 되고 유순(柔順)한 땅은 곤(坤)이 되니 이는 마치 곤(坤)의 유순한 신하가 이(離)의 밝은 임금을 섬기는 격입니다. 말을 많이 하사받는다는 것은 임금이 그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것이고, 하루에 세 번씩 만난다는 것은 아랫사람이 그 윗사람에게 총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도리는 유순함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비록 임금의 뜻을 반대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넘치는 성의(誠意)는 통하는 것이며, 비록 임금의 일은 따르거나 거역하는 경우가 있어도 뜻만은 어긋나지 않는 믿음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괘(晉卦)는 유순함을 좋아하고 강함을 싫어한다고 하여 신하가 임금 섬기는 도를 보여 준 것입니다. 구사의 경우는 위로 올라가려는 뜻이 있으면서 다람쥐와 같은 탐욕이 있으므로 ‘다람쥐’에 비유한 것이고, 상구는 강으로서 마지막 자리에 있으면서 뿔로 승부를 거는 뜻이 있으므로 ‘뿔에 나아가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다 빼앗지 않으면 만족해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맹자(孟子)의 훈계인데 구사가 그와 같은 것이고, 비읍(費邑)의 성(城)을 허물고 후읍(郈邑)의 성을 허물어 버린 것은 노(魯) 나라의 강성한 신하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인데 상구가 그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공자(孔子)가 《역경》에 찬사(贊辭)를 붙이면서 구사에서는 “고집되게 하면 위태롭다.[貞厲]”고 하고 상구에서는 “정도(貞道)에는 인색하다.[貞吝]”고 하여 스스로 선(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는데, 만약 오래도록 구사와 상구에 집착한다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가 아닙니다. 비록 단전(彖傳)에서 풀이한 것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괘체(卦體)와 괘덕(卦德)에 대해서만 말하다가 “유순함이 나아가 위로 올라간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한 괘 전체에 대한 단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고(千古)를 통하여 신하 된 자가 거울로 삼아야 할 바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은 진괘(晉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