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홍재전서경사강의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4장

청풍선비 2010. 12. 22. 11:17

 홍재전서 제103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0 ○ 역(易) 3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4장]

 

“위로는 천문을 보고 아래로는 지리를 살핀다.[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고 할 때의 ‘관(觀)’과 ‘찰(察)’에 의의(意義)의 차이가 있는가? “정기(精氣)가 물(物)이 되고 유혼(游魂)이 변(變)이 된다.”고 한 것에 대하여, 《본의(本義)》에서는 “정기가 모여서 물을 이루는 것은 신(神)이 펴지는 것이고, 혼(魂)이 놀고 백(魄)이 내려가 흩어져 변함은 귀(鬼)가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소 강절(邵康節)은 “정기가 물이 됨은 형(形)이고, 혼이 놀아 변함은 신(神)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정기가 물이 됨은 체(體)고, 혼이 놀아 변함은 용(用)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과연 무슨 말인가?

[강세륜이 대답하였다.]
위로 보는 것을 ‘본다[觀]’고 하고 아래로 보는 것을 ‘살핀다[察]’고 하는데, 여기에는 또한 자세하고 간략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대개 ‘살핀다’는 것은 ‘보는 것’을 더 자세히 하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의 형상인데 기(氣)로 이루어진 것이고, 산이 솟고 물이 흐름은 땅의 이치인데 형(形)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형상은 양(陽)에 속하며 양은 밝은 것이고, 땅의 이치는 음(陰)에 속하며 음은 어두운 것입니다. 밝은 것은 보기가 쉬우니 보고서 알 수 있지만, 어두운 것은 알기 어려우니 자세히 살펴봐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문자(文字)로 기록할 때 마음 씀이 이와 같이 치밀했던 것입니다.
‘정기(精氣)’니 ‘유혼(游魂)’이니 하는 말들은 곧 천지 귀신의 미묘한 세계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그 이치를 밝힐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음의 정(精)과 양의 기(氣)가 모여서 물(物)이 이루어짐은 그것이 곧 신(神)이고, 혼이 놀고 백(魄)이 내려와 흩어져 변함을 이룸은 그것이 곧 귀(鬼)인데, 이는 나고 죽고 하는 공공(公共)한 이치입니다. 《본의》의 해석은 귀신의 실체를 깊이 터득한 것으로 남김없이 다 밝혔습니다. 그런데 소자(邵子)의 형(形)ㆍ신(神)ㆍ체(體)ㆍ용(用)의 말과 같은 것은 대개 물이 이루어지면 형체가 진실로 보존되지만 물이 돌아가면 혼이 반드시 올라간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신’이라는 것은 ‘귀신’이라고 할 때의 ‘신’의 뜻과는 같지 않은 듯하며, 물이 형체로 이루어진 것은 진실로 ‘체’이고 혼이 변한 것은 진실로 ‘용’이니, 그가 내세운 말은 아마 이러한 데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점을 정확하게 보지 못했으므로, 감히 함부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역(易)은 천지와 맞먹는다.”고 한 것은 《역경》이 천지와 맞먹는다는 말이고, 아래에서 “천지와 서로 비슷하다.”고 한 것은 성인(聖人)도 천지와 비슷함을 말한 것인데, 정자(程子)는 오로지 모두 《역경》으로만 해석한 것은 어째서인가?
“앎이 만물에 두루한다.”고 한 것은 ‘지(知)’에 해당하고 “도가 천하를 건진다.”고 한 것은 ‘인(仁)’에 해당한다. 다음 글에서 “하늘의 도를 즐거워하고 명(命)을 안다.”고 한 것은 곧 “앎이 만물에 두루한다.”고 하는 ‘앎’이고,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겨 인을 돈독히 한다.”고 한 것은 곧 “도가 천하를 건진다.”고 하는 ‘인’인데, 이는 서로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다. 중간에 “널리 행하여도 흐르지 않는다.”고 한 한 구절도 그 ‘지’와 ‘인’에 나누어 배속되는데, 문세(文勢)가 중첩된 것은 어째서인가?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긴다.[安土]”에 대하여 선대 학자들은 모두 “만나는 형편에 따라 편안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그런데 곽씨(郭氏)는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심정이다. 성인의 다스림은 그대로 따라 하는 것뿐이므로, 그들이 편안히 여기는 것으로 인하여 안정되게 한 다음에 인(仁)을 돈독히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도 취할 만한 것인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은 전체가 다 역(易)입니다. 길(吉)ㆍ흉(凶)ㆍ소(消)ㆍ장(長)의 도를 성인이 본받고 정(貞)ㆍ구()와 회(悔)ㆍ인(吝)의 이치를 성인이 체득하였으니, 비록 역(易)을 성인이라고 하여도 될 것입니다. 정자는 역과 성인을 합하여 말하였으므로 위아래의 두 구(句)를 합하여 모두 역서(易書)로 풀이하였고, 주자는 역과 성인을 나누어 말하였으므로 ‘천지와 맞먹는다’고 한 것은 역에 배속시키고 ‘천지와 같다’고 한 것은 성인에게 배속시켰으나, 그 실상은 같은 것입니다. ‘맞먹는다’는 것은 평등의 뜻이 있으니 이는 천지의 공(功)과 맞먹는 것은 역이란 말이고, ‘같다’는 것은 비슷하다는 뜻이 있으니 이는 천지의 공과 같은 이는 성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맞먹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은 글자의 의미로는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자는 모두 역서(易書)로만 해석하였으므로 그 “앎이 만물에 두루하고 도가 천하를 건진다.”고 한 것을 풀이하면서 “의(義)에 포함된 것이 지(知)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마침내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리(事理)로 고찰하여 보면 주자의 해석이 치밀합니다.
“하늘의 도를 즐거워하고 명을 안다.”고 한 것은 “앎이 만물에 두루한다.”고 하는 ‘앎’과 응하고,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겨 인을 돈독히 한다.”고 하는 것은 “도가 천하를 건진다.”고 하는 ‘인’과 응하는데, 이것은 두 조항을 상대적으로 말한 것으로, 각각 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널리 행하는 것’을 권도를 행하는 ‘지(知)’에 배속시키고 ‘흐르지 않음’을 정도를 지키는 ‘인’에 배속시킨다는 이 한 구는 돌연한 것으로서 연속이 되지 않으니,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널리 행하여도 흐르지 않는다’고 한 것과 ‘하늘의 도를 즐기고 명을 안다’고 한 이 두 구는 본래 다 ‘지’에 해당하는 일이나, 세분(細分)하면 ‘널리 행하는 것’은 ‘지’이고 ‘흐르지 않음’은 ‘인’이며 묶어서 말하면 ‘널리 행하여도 흐르지 않는 것’은 다 ‘지’에 해당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곽씨(郭氏)가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심정이다.”라고 한 것은 다만 그의 천착(穿鑿)한 견해를 드러냈을 뿐입니다. 공자(孔子)가 “아래로는 물과 토질의 여건에 따른다.”고 한 것이 바로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입니다. 선대 학자는 또 노(魯) 나라에 있을 때는 봉액(縫掖)의 차림을 하고 송(宋) 나라에 있을 때는 장보관(章甫冠)을 쓴 것을 가리켜 성인(聖人)이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만약에 ‘일반 사람이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으로 풀이하면 너무 구차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반 사람이 편하게 여기는 것으로 인하여 편안하게 한 뒤에 인을 돈독히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처해 있는 곳을 편안히 여겨 인을 돈독히 한다.”고 하는 한 구는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왜곡된 학설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이상은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4장이다.


 

[주D-001]노(魯) 나라에 …… 쓴 것 : 봉액(縫掖)은 노 나라 제도에서의 유학자의 옷이고, 장보(章甫)는 송 나라 제도에서의 관(冠) 이름인데, 여기서는 공자(孔子)가 처소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을 가리킨 말이다. 《禮記 儒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