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전 상(繫辭傳上) 제5장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5장]
“어진 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仁)이라고 하고 지혜로운 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知)라고 한다.”고 한 것에 대해, 주자는 ‘인’을 양(陽)이라 하고 ‘지’를 음(陰)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위 장에서 말한 “‘지’는 하늘에 속하고 ‘인’은 땅에 속한다.”고 한 것과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청탁(淸濁)을 가지고 말했고 여기에서는 동정(動靜)을 가지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논어(論語)》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또한 동정(動靜)을 가지고 말하면서 지(知)를 동에 해당시키고 인(仁)을 정에 해당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 주장이 전부 공자(孔子)에게서 나왔건만 어찌하여 이토록 다른 것인가?
“도를 잇는 것은 선(善)이고 도를 이루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한 학설은 이미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ㆍ주자(朱子)를 거친 것이니, 신(臣)과 같이 고루(固陋)한 학문으로서 변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선’으로 이어질 때에는 아직 ‘성’이라고 말할 수 없고, ‘성’을 이룬다고 할 때의 ‘성’에서는 악(惡)을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개 ‘잇는다’는 말은 접속됨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이(理)가 유행하여 만물의 핵심을 파생시키는데, 그것이 곧 하늘과 사람이 접속하는 시점이지만 아직은 만물에 부여되지는 않았을 때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선’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룬다’는 것은 응집시켜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理)가 기(氣) 가운데 떨어져서 진주처럼 환하게 빛을 발하니 이것이 곧 이와 기가 오묘한 이치로 엉기는 처음의 상태이지만 아직은 청탁(淸濁)과 수박(粹駁)을 논할 수 없는 때이니, 다만 ‘성’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대 학자들은 “‘성’이 이루어진 다음에 또다시 ‘선’으로 잇는 것은 진실로 ‘성’이 부여받아 이루어진 것이 곧 ‘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의 응용도 결국은 ‘선’의 단서가 서로 이어지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 말에서 사람의 성품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유(剛柔)와 완급(緩急), 명암(明暗)과 강약(強弱)의 차이와 같은 것은 성이 이루어진 다음에 기질적인 측면에서 청탁과 수박이 같지 않은 점에 나아가 말한 것일 뿐입니다. 장자(張子)의 주장은 참으로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 ‘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오직 ‘선’만이 있는 것인데, 또 어찌 악이 섞여 있다고 한단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장자가 이 ‘성’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 이(理)가 엉겨 이루어진 측면을 가지고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인사(人事)의 성취(成就)를 가지고 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이 나왔다고 보여집니다.
공자의 세 주장이 같지 않은 것은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니, 대개 동정(動靜)은 서로 이어져 실마리가 없고 체용(體用)은 서로 필요로 하는 관계입니다. “지(知)는 하늘에 속하고 인(仁)은 땅에 속한다.”고 하는 것을 예를 들어 말하면, 하늘은 태허(太虛)이므로 미리 알 수 있는 도(道)가 비교적 허(虛)하고, 땅은 두터워 만물을 싣고 있는 것이므로 어진 사람이 이롭게 여길 것이 또한 넓습니다. 그래서 청탁을 나누어 ‘인’과 ‘지’에 배속시킨 것이니, 이것은 ‘인’과 ‘지’의 체(體)가 아니라 바로 ‘인’과 ‘지’의 용(用)에 해당합니다. “인을 양(陽)이라 하고 지를 음(陰)이라고 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 말하면, ‘양’은 발생시키는 것으로서 ‘인’에는 만물에 기운을 불어넣는 봄의 단서가 있고, ‘음’은 수렴(收斂)하는 것으로서 ‘지’에는 만물을 저장하는 곤(坤)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을 나누어 ‘인’과 ‘지’를 논한 것이니, 이것은 ‘인’과 ‘지’를 말함에 있어 한 번 동(動)하고 한 번 정(靜)하는 것을 체(體)로 삼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 말하면, 물은 활동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지’에는 두루 통하는 묘함이 있고, 산은 고요하고 듬직한 점이 있는데 ‘인’에는 편안하게 처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 동정을 가지고 ‘인’과 ‘지’로 나누어 말한 것이니, 이는 ‘인’과 ‘지’를 말함에 있어서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은 것입니다. 비록 그 청탁이 동정과 다르고 동정 간에도 서로 같지 않으나, 체용과 동정이 순환함에 있어서 실마리가 없는 데 이르러서는 혹 체를 버리고 용을 말하거나 용을 버리고 체를 말하기도 하며, 동 가운데의 정을 말하거나 정 가운데의 동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탐구하여 본다면 공자의 세 말씀은 일찍이 다른 적이 없었습니다.
“만물을 고동(鼓動)시키되 성인과 똑같이 근심을 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본의(本義)》와 정자(程子)는 모두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위 장에서는 “천리(天理)를 즐기고 천명(天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고 했고, 《논어》에서는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말한다면 마땅히 성인은 근심이 없어야 하는데, 이 장에서 유독 “근심이 없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맹자(孟子)》에서 “요(堯)는 순(舜)을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고 순은 우(禹)와 고요(皐陶)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성인의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저 하늘만이 위대한데 오직 성인께서 그것을 본받으셨으니, 하늘과 성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신묘하게 운행하는 자취를 살펴보면 무위(無爲)와 유심(有心)의 구별이 조금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늘의 도는 말하지 않아도 사계절이 이루어져서 성대하게 만물을 기르지만 어디에도 찾을 만한 소리와 냄새도 없고 구할 만한 공용(功用)도 없습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만물이 제각기 속성 그대로 생장하도록 놓아두고 묵묵히 신묘한 기틀을 운행하니, 하늘의 도는 그래서 지극한 것입니다. 성인의 경우는 비록 공자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하게 행하는 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유심(有心)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 근심이 없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근심이란 노심초사하는 근심이 아니라 상천(上天)의 무위(無爲)와 같이 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자가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으로 근심이란 말을 푼 것입니다. 위 장에서 “천리(天理)를 즐기고 천명(天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논어》에서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다만 성인의 근심 없는 측면만을 말한 것이고, 이 장에서 유독 “근심이 없을 수 없다.”고 한 것은 하늘과 성인의 차이점을 겸하여 말한 것이니, 이렇게 궁구해 보면 경(經)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