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홍재전서경사강의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1장

청풍선비 2010. 12. 22. 11:25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1장]

 

“시초는 둥글면서 신령스러우며 괘는 모나면서 지혜롭다.”고 한 것은 모두 덕(德)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유독 효(爻)에 대해서만 “변하면서 알려 준다.”고 하여 의(義)로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는 “마음을 씻어서 물러나 감춘다.”고 한 것을 체(體)로 보고, “미래를 알고 과거를 간직한다.”고 한 것을 용(用)으로 보았다. 그러나 만약 “신령스러움으로 미래를 알고 지혜로써 과거를 간직한다.”고 한 구절은 나누어 말한다면 과거를 간직하는 것이 체가 되고 미래를 아는 것이 용이 되는가? ‘역(易)으로 물욕의 마음을 씻는다’는 주장에 대해 선대 학자들이 비난한 것은 참으로 옳다. 《본의(本義)》에서 “티끌 하나만큼의 누(累)도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본래 누가 없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씻어 내야만 티끌만 한 누도 없게 된단 말인가. 공환(龔煥)이 ‘의도적인 생각이 없는 것’을 ‘마음을 씻는 것’으로 해석하고 ‘인위적인 행위가 없는 것’을 ‘물러나 감추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이치가 있는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였다.]
“둥글면서 신령스럽고 모나면서 지혜롭다.”고 한 것은 시초와 괘의 덕(德)을 말한 것이고, 효(爻)로서는 의심을 단정하기 때문에 “변역(變易)을 하면서 사람에게 고한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의(義)로써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체(體)와 용(用)에 대한 설은 이미 《주자어류》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미래를 알고 과거를 간직한다.”고 한 것을 두 구절의 체용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니, 예로 들면 주자가 또 “시초의 수는 7로 7×7=49가 되어 양(陽)에 속하지만 정해진 체는 없고, 괘의 수는 8로 8×8=64가 되어 음(陰)에 해당되는데 이미 정해진 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두 구절의 체용에 대해서는 주자도 이미 상세하게 말하였습니다. “마음을 씻는다.”고 한 훈고는 곧 티끌만큼의 누도 없음을 말한 것이니, 공씨(龔氏)가 해석한 의도적인 생각이나 인위적인 행위가 없다는 것도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역은 다만 음양(陰陽)일 뿐이고, 그 음양을 변화하게 하는 이치는 태극(太極)이다. 그러므로 “역에 태극이 있다.”고 한 것이니, 이른바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게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고 한 것과 그 이치가 같다. 도와 태극은 본래 두 개가 아닌데 도에는 도라는 명칭이 있고 태극에는 태극이라는 명칭이 있으니, 이치가 같은데 명칭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위 장에서는 “여섯 효(爻)의 움직임은 삼극(三極)의 도이다.”라고 하였는데, 삼극의 ‘극(極)’은 여기에서 말한 태극의 ‘극’과 극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저기에서는 ‘삼극’이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태극’이라고 한 데에는 특별히 말할 만한 차이가 있는가?

[이청(李晴)이 대답하였다.]
도(道)와 태극(太極)은 본래는 하나인데 그 명칭만 달리한 것이니, 그 음양을 변화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는 ‘태극’이라고 하고, 순환하고 운행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는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개 ‘태극’은 동정의 이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능히 동(動)하여 양(陽)이 되고 능히 정(靜)하여 음(陰)이 되는 것이니, 능한 것은 ‘기(氣)’이고 능하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기’의 힘을 이용하여 행합니다. 그러므로 ‘기’가 행하면 ‘이’ 또한 행하는 것이니, ‘이’와 ‘기’가 합해져야만 비로소 운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만을 말하고 ‘기’를 말하지 않는다면 운행의 뜻을 볼 길이 없을 것이고, ‘기’만을 말하고 ‘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운행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운행의 가운데 나아가 운행하게 하는 이유를 겸하여 가리켜서 ‘도’라고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태극’이란 이 이(理)의 지극한 곳이고 ‘도’는 바로 운행하게 하는 것으로, 이른바 같은 물(物)이면서 그 이름을 달리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 ‘삼극(三極)’과 ‘태극(太極)’은 본래 똑같은 ‘극(極)’인데, 태극은 괘효(卦爻)가 생겨나기 이전의 것으로 하나의 태극을 전체로 말한 것이고, 삼극은 괘효가 이미 동한 뒤에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의(本義)》에서는 “천(天)ㆍ지(地)ㆍ인(人) 삼재(三才)가 각각 하나의 태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말한다면 태극과 삼극은 가리키는 것은 달라도 그 본원을 궁구하면 동일한 태극이므로, 사실상 말할 만한 차이점은 없습니다.


 

이상은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1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