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전 하(繫辭傳下) 제1장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1장]
“동(動)이 그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할 때의 ‘동’과 “동하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할 때의 ‘동’에 대해 《본의(本義)》에서는 모두 ‘괘효(卦爻)의 동’으로 해석하였는데, 소준(蘇濬)은 “여기에 보이는 동과 아래 글에 보이는 동하는 데에서 생겨난다는 것과 천하의 동함이라는 세 개의 동은 다 같다. 역의 말은 본래 성인이 천하의 동하는 이치를 보고 붙인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움직임[動]을 고무시키는 것은 말속에 들어 있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동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 괘효를 움직인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뜻이 더욱 명확한 듯한데, 《본의》에서 취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 장에 보이는 세 개의 ‘동(動)’은 해석이 같지 않습니다. 주자는 대개 “동한다는 측면은 비록 같지만, 예를 들어 ‘덕(德)만이 하늘을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 움직임의 주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지금 하늘이 위엄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 움직임의 주체는 하늘에게 있는 것이므로, 한 가지 예로써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이 그 속에 있다.”고 할 때의 동 자와 “동에서 생겨난다.”고 할 때의 동 자를 괘효(卦爻)의 ‘동’에 해당시키고, 하단에 보이는 “천하의 동함이다.”라고 할 때의 ‘동’을 사물의 동함에 귀속시킨 것이니, 이는 진실로 역의 진정한 의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소씨(蘇氏)는 다만 우중상(虞仲翔 우번(虞翻))이 남긴 말만을 답습하여 마침내 세 개의 동 자의 의미가 모두 같다고 보았으니, 견해의 차이가 매우 심합니다. 옛날에 왕필(王弼)이 “천하의 동함이다.”라고 할 때의 ‘동’을 천하의 모든 일의 움직임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왕필도 오히려 이것을 알았는데 소씨가 도리어 알지 못하였으니, 《본의》에서 그의 말을 취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길(吉)하고 흉(凶)함은 후회와 인색함이 쌓여 생긴 것이다. 천하의 일은 길이 아니면 흉이고 흉이 아니면 길인데, 늘상 이 둘은 서로 이기면서 그치지 않는다. 상승(常勝)이라는 말로 ‘정승(貞勝)’을 해석하는 것이 이미 여러 사람들의 정론(定論)인데, 장자(張子)는 ‘바른 것이 이긴다’고 보았으니 그것도 취할 만한 점이 있는가? “효(爻)와 상(象)이 안에서 움직이고 길함과 흉함은 밖으로 나타난다.”고 한 것을 《본의》에서는 시초와 괘의 안과 밖으로 해석하였는데, 혹자는 “효와 상은 움직이되 형체가 없기 때문에 안이라고 한 것이고, 길함과 흉함은 드러나서 자취가 있기 때문에 밖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서로 밝혀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길함과 흉함은 상(象)에 드러나고 이기고 지는 것은 수(數)에 들어 있는데, 천하에 일정한 상은 있어도 일정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와 상은 서로 이기는 것으로서 길(吉)이 흉(凶)을 이기기도 하고 흉이 길을 이기기도 하여 그 이치는 바르면서 일정함이 있고 일정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니, 대개 그 역시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주자가 ‘상(常)’으로 ‘정(貞)’을 해석한 것은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장자(張子)의 주장은 전적으로 천하의 바른 것이 반드시 이기게 되어 그 끝을 추구하면 흉함이 길함을 이길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대개 ‘순(順)을 따르면 길하고 역(逆)을 따르면 흉한 것’이 바른 이치인데 선이 더러 흉함을 만나기도 하고 악이 도리어 길함을 얻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니, ‘바른 것이 이긴다’고 한 점은 말뜻이 매우 친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貞)’을 ‘상(常)’이라고 말하면 그 속에는 이미 ‘바르다[正]’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貞)’을 ‘바르다[正]’는 뜻으로 푼다면 ‘상(常)’의 뜻까지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이는 아래 글에서 말한 ‘정관(貞觀)’과 ‘정명(貞明)’을 보더라도 서로 연관되지 않으니, 만약 ‘정관’과 ‘정명’을 ‘정관(正觀)’과 ‘정명(正明)’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시초(蓍草)의 덕은 둥글고 괘(卦)의 덕은 네모진 속에 효(爻)와 상(象)은 먼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효와 상이 안에서 움직인다.”라고 한 것이고, 시초를 뽑아 손가락에 끼워 괘가 이루어져야 길흉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에 “길흉이 밖에 드러난다.”라고 한 것이니, 《본의》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형체가 없는 효와 상을 안에 소속시키고 자취가 있는 길흉을 밖에 소속시켰으니, 안과 밖의 구분을 말한 점은 친절한 듯 보이지만 시초와 괘를 버리고 안팎만을 말한다면 효와 상이 어느 곳에 보이고 길과 흉이 어떠한 일에서 징험되겠습니까.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아래 글에서 “변화에 나타나고, 말에 보인다.”고 한 것은 시초와 괘의 변화와 밖에 드러난 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이 주장은 아마도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