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오늘날 보건대 염치는
삽사리 배속에나 있네.
늘 제 밥그릇이나 긁을 뿐
부엌을 향해서는 앉지도 않네.

 

其十四
今日看廉恥금일간염치
靑狵肚裏存청방두리존
尋常櫟釜際심상력부제
不欲向廚蹲불욕향주준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삼연집(三淵集)』 권15 「갈역에서 이것저것 읊다(葛驛雜詠)」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자가 자익(子益), 호가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입니다.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청에의 굴복을 반대했던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창집(金昌集)과 조선후기 낙론(洛論)을 이끌었던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입니다. 부친과 큰형이 사화로 죽은 뒤로 일체의 출사를 포기하고 시문 창작과 성리학 연구에 일생을 보낸 분입니다. 백악시단을 이끌며 조선후기 시풍의 쇄신을 창도하였고, 문장은 물론 성리학으로도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문인입니다.

 

삼연은 59세 되던 1711년에 강원도 인제 설악산 자락에 갈역정사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갈역정사에 머물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한 사유과 상념을 많은 시편에 담아냈습니다. 「갈역잡영」은 삼연이 67세, 68세에 지은 것입니다. 시체를 달리하며 같은 제목으로 모두 392수의 연작시를 지었는데 노년의 삼연이 도달한 시적 경지를 잘 보여줍니다. 노시인은 「갈역잡영」에서 시적 소재를 비시적인 것까지 확대시킨 것은 물론,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 자연과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평 등 도저한 생각들을 일체의 꾸밈없이 간결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매우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 오늘날 염치는 삽사리 뱃속에나 있다고 합니다. 염치가 무엇입니까?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살핀다는 말로, 인간과 금수를 구분 짓게 하는 덕목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늘날엔 그 염치가 사람에게 없고 금수인 삽사리 뱃속에 있다고 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오늘날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런 과격한 말을 하는 걸까요?

 

3구와 4구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시인은 삽사리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삽사리를 보고 있자니, 밥그릇이 비었을 때도 제 밥그릇만 발로 긁을 뿐이지 음식이 있는 부엌을 향해서는 앉지도 않습니다. 곧, 삽사리는 저한테 주어진 것만 먹을 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 것 아닌 것에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삽사리의 행태를 대비적으로 그리면서 오늘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즉 염치지심은 사람이 아닌 저 삽사리 뱃속에나 남아있다고 한 것입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노시인이 이렇듯 매섭게 일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시인은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이 공명하고 정당한 사회로 변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와 인간을 대비적으로 둔 채, 제 것 외에는 욕심을 내지 않는 개를 통해, 제 것은 당연하고 남의 것도 내 것이어야 하는 인간의 탐욕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아가 인간이 탐욕을 버리려면 염치가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인간이면 마땅히 지녀야 할 염치의 회복을 말한 것입니다.

 

노시인은 이렇듯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합니다. 남 보기 우아하게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 보기 불편하지만, 불편한 그대로의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잘못되었다면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함을 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짧은 시가 지닌 깊이이자 힘입니다. 노시인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귓전에 울리는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당신이 마주한, 혹은 마주할 부조리 앞에서 공정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당당하게 마주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글쓴이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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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수풀 속 돌에 이름을 새겨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이니, 후세 사람이 과연 무슨 새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大丈夫名字 當如靑天白日 太史書諸冊 廣土銘諸口 區區入石於林莽之間 㹳狸之居 求欲不朽 邈不如飛鳥之影 後世果烏知何如鳥耶
대장부명자 당여청천백일 태사저저책 광토명저구 구구입석어림망지간 오리지거 구욕불후 막불여비조지영 후세과오지하여조야


- 조식(曺植, 1501-1572), 『남명집(南冥集)』 권2, 「유두류록(遊頭流錄)」

 

 

남명 조식은 1558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지리산 청학동을 유람하였다. 그가 찾아간 청학동은 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불일폭포 일대를 일컫는다. 4월 19일, 아침 일찍 청학동으로 오르던 남명 일행은 큰 바위에 새겨진 ‘이언경(李彦憬)‧홍연(洪淵)’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호랑이도 나온다는 이 험하고 깊숙한 골짜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려 한 것을 보고, 남명은 그때의 불편한 심기를 위와 같이 표출하였다. 실질이 아닌 허명(虛名)을 전하려는 속인들의 헛된 욕망을 냉철하게 꼬집은 것이다.

 

현실인식이 투철했던 남명은 일생 출사하지 않고 퇴처(退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결코 현실을 잊지 않고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으며, 정치의 폐단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때로는 목숨을 건 과감한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남명에게 숲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려 한 이런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로 다가왔을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촌철살인의 비판은 지역의 후인에게 전승되어, 지금도 커다란 울림이 되고 있다.

 

근년에 온 세상이 듣도 보도 못한 대혼란을 겪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불안한 상태로 삶을 견뎌내고 있다. 마치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부평초를 연상케 한다. 20-30대 젊은 세대가 더욱 흔들리고 있다. 준엄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안의 확신을 다진 ‘큰 어른’이 그리운 시절이다.

 

 

글쓴이강정화
경상국립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내 나이 쉰네 살에 오른쪽 잇몸 첫 번째 이가 아무 이유 없이 흔들리니 통증을 견딜 수 없기에 의원에게 뽑게 하였다.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쓴다.
내 나이 세 살에 네가 처음 나서 내 입의 빗장이 된 지 오십여 년이구나, 분쟁과 우호가 너에게 달려 있었고 음식의 맛을 너를 통해 알았지. 내가 한창 강건할 때는 너 역시 튼튼해서 말린 고기와 딱딱한 떡도 칼처럼 잘랐었다. 내가 항상 옥보다 더 귀중히 여겨 이불을 물어뜯지도 돌로 양치하지도 않았지.

 

[원문]

 

吾年五十四, 右車第一齒無故動搖, 痛不可忍, 令醫拔之, 感而有作.
吾生三歲, 汝始生焉, 爲我口關, 五十餘年. 興出戎好, 職汝所爲, 酸鹹甘苦, 由汝得知. 吾方強健, 汝亦堅牢, 乾肉勁餠, 截之如刀. 吾常寶愛, 不啻珙璧, 不曾嚙被, 不曾漱石.

 

- 채수(蔡壽, 1449~1515), 『나재집(懶齋集)』권1 「발치문(拔齒文)」

 

어린 시절 이를 앓았을 때의 기억이 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이를 뽑자고 하실까봐 주저하면서 통증을 참고 참다가 결국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말씀드리곤 했는데, 이가 어떤지 살펴보시고 결국 뽑자고 하셨다. 필자는 하필 치과병원이 없는 시골에 살았고 아버지는 하필 다년간 이를 뽑은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먼저 손가락을 집어넣어 이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가늠하셨다. 대체로 이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갑자기 힘을 줘서 빼려고 하셨는데 다행히 이가 충분히 흔들려서 바로 뽑히면 다소 놀라기는 해도 고통에서 해방되지만, 바로 빠지지 않을 때가 불행의 시작이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받은 기습 공격에 반은 놀라고 반은 아파하면서 울먹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임장에서도 곤란하셨을 것이다. 한참을 울다 지친 나를 다시 어르고 달래고 나면 전략은 달라진다. 이를 빼지 않으면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정공법으로서 어조도 거의 위협에 가까웠다.

손으로 뽑히지 않으면 실을 찾으셨다. 처음 당했을 때는 의아해했는데 그 의문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풀렸다. 실로 매듭을 만들어 이에 걸고 반대편 매듭은 문고리에 거셨다. 필자의 이는 그렇게 잇몸의 일부와 함께 몸에서 분리되었다. 피와 눈물이 멎으면 아버지는 지붕에 던지라고 하셨다. 까치가 헌 이를 물어가고 새 이를 나게 해준다고 하셨다. 지금도 선명한 통증과 함께 날카롭게 각인되어 있는 유년 시절 기억의 한 부분이다.

위 글을 쓴 채수에게도 이를 뺀 기억은 특별했던 모양이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보철 치료가 없었던 당시에 이의 부재는 현재보다 더 큰 상실감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또 작자가 뺀 이는 어금니인 만큼 음식을 씹는 데 타격이 컸을 것이다. 노년의 나이에는 이가 성해야만, 기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

허나 작자는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이의 부재를 한탄한 것이 아니다. 이의 부재를 자신의 노쇠함과 연결짓는다. 근육이 시들고 머리가 세고 눈이 어두워지는 등의 일반적인 노화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인 것이다. 장장 50여 년 동안 한 몸이었다가 떨어져 나간 이를 보며 문득 인생이 덧없다고 느낀다.

작자의 삶은 어떠했던가. 불과 21세의 나이에 문과 갑과 장원으로 입격한 후 30여 년 동안 수많은 요직을 역임했고 어려서부터 문예로 명성을 얻어왔다.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광도 누렸다. 명나라에 사신을 다녀오기도 했고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임무도 맡아왔다. 정치적으로 침체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곧 다시 기용되었다. 이 글을 지을 즈음에는 형조 참판에 오른다.

생명 현상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과 관계가 있으면서 관계가 없이 외따로 흘러간다. 한 개체로서 인간의 생로병사는 분명 삶의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이면서도 사회적인 자아와는 별개이다. 나는 사람들 속에서 이러이러한 사람이지만 그것은 오늘 아침 이를 하나 뺀 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작자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의 부재라는 현상에 착안하여 글을 짓고 그 글의 결구에 인생의 덧없음과 불사(不死)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나 싶다.

삶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또한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다. 그 누가 생로병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 있는가. 작자는 자신이 노쇠했고 이는 죽음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자각에 무력감과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하루하루 순간순간 충실하게 살았던 삶을 덧없다고 생각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생사의 굴레에 매여 있는 존재로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초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즐길 뿐이다. 작자는 위 글을 지은 지 몇 년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거문고·바둑·시·술을 즐기며 세상의 시비와 영욕을 잊었다고 했다.

헌 이를 물어간다는 까치는 상실감을 희망으로 보철해주는 역할을 한다. 작자에게는 위 글이 작으나마 상실감을 비우고 삶에 대한 자세를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글쓴이강만문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강변 물새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천상의 옥가루가 선장(仙掌)에 날린다
공중에 어지럽게 흩뿌리다 별안간 바람 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쌓여 어느새 한 길 높이가 되었네
몇 말이나 되는 술이 집집마다 가득하고
온갖 데에는 눈꽃이 촌죽(村竹)을 누르고 있구나
옷 전당 잡히고 마신 술의 취흥이 온천지에 횡행하니
백년 인간사가 한 순간이로다

 

江邊鷗鷺絶影響 강변구로절영향
天上玉屑霏仙掌 천상옥설비선장
空中散亂乍隨風 공중산란사수풍
平地彌漫忽盈丈 평지미만홀영장
十千斗酒盈比屋 십천두주영비옥
滿目瓊花壓村竹 만목경화압촌죽
典衣醉興橫八荒 전의취흥횡팔황
百年人事一瞬息 백년인사일순식

 

- 성임(成任, 1421~1484), 『新增東國輿地勝覽』 3권, 「漢城府 十詠 楊花踏雪」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의 「한성부」에는 서울의 열 곳 승경을 읊은 ‘십영(十詠)’이 기록되어 있다. ‘십영’은 장의심승(藏義尋僧, 장의사의 중을 찾아가다), 제천완월(濟川翫月, 제천정에서 달을 구경하다), 반송송객(盤松送客, 반송정에서 객을 전송하다), 양화답설(楊花踏雪, 양화에서 눈을 밟다), 목멱상화(木覓賞花, 목멱산에서 꽃을 감상하다), 전교심방(箭郊尋芳, 살곶이에서 꽃놀이하다), 마포범주(麻浦泛舟, 마포에서 배를 띄우다), 흥덕상연(興德賞蓮, 흥덕사에서 연꽃을 감상하다), 종가관등(鍾街觀燈, 종로에서 등을 구경하다),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 고기를 낚다)이다.

 

그중 ‘양화답설’을 읊은 성임(成任)의 작품을 소개해 본다. 성임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서예에 특히 뛰어났으며 아우인 성간(成侃), 성현(成俔)과 함께 문명으로 이름이 높았다. 양화는 지금 마포구 합정동 인근 양화대교가 지나는 일대로 예부터 경치가 좋아 망원정을 비롯해 여러 정자가 들어섰던 곳이다. 평소도 절경이라 이름난 곳인데, 눈 오는 풍경이 얼마나 대단하였기에 ‘십영’에 꼽혔던 것일까?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아 시를 통해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위 시 2구에 보이는 ‘선장(仙掌)’은 ‘선인장(仙人掌)’이라고도 하는데, ‘신선의 손바닥’이란 뜻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인 감로수를 받으려고 구리 기둥을 세우고 선인의 손바닥 모양의 쟁반을 설치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선장에 받은 이슬에 옥가루(玉屑)을 타서 마시면 불로장생을 한다고 전해진다. 옥가루가 선장에 날린다는 표현은 지척의 잠두봉이나 지금은 사라진 선유봉 위로 눈이 날리는 풍경을 형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풍경이 선계(仙界)의 모습인양 착각을 일으킬 만큼 대단히 신비로웠던 모양이다.

 

날리던 눈이 한 길이나 푹 쌓이고 푸른 댓잎도 하얀 눈꽃에 덮였으니, 이 풍경에 술 마시는 풍류가 제법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는 겨울이 되면 강물이 얼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던 어가(漁家)에서 술을 팔곤 했다. 성임도 근처에서 술을 사서 마셨다. 취기에 바라본 양화의 신비로운 설경은 그의 정신을 웅혼하게 하였고, 사방 천지까지 관통하는 정신으로 관조한 인간사는 백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속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 시절 양화의 설경은 초월의 신비로움과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장엄함이 그 매력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 양화에는 경기 서부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양화진(楊花津)이 있었다. 또 이곳은 한강을 통해 올라온 삼남의 곡식을 저장하던 곳이었고, 교통의 요충지여서 군사 시설인 진(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잠두봉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순교한 곳으로 현재 절두산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옛날과 너무나 달라져 그 시절 풍경도 겨울의 설경도 볼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한성부」 ‘십영’에는 성임을 비롯하여 월산대군(月山大君),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양화답설’이 함께 실려 있다. 모두 문장의 대가로 꼽히는 분들로 같은 운자(韻字)를 사용하여 저마다 양화의 설경을 묘사했다. 이 겨울이 끝나기 전, 눈이 또 온다면 그들이 남긴 시를 감상하며 양화를 거닐어 보는 것도 좋겠다.

 

 

글쓴이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고을 수령이 되는 자는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갈려서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는데 구실아치들은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변함없이 일을 맡으므로, 마음대로 부려서 늘였다 줄였다 함이 오로지 그들 손에 달려 있으니, 단지 장부를 숨기고 재물을 훔치는데 그치지 않는다. 세속에서 이른바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爲官者朝更暮遞 席不暇暖 而胥輩從少至老 任事自若 操縱伸縮 專在其手 非止絶簿書盜財物而已 俗謂江流石不轉以此
위관자조경모체 석불가난 이서배종소지로 임사자약 조종신축 전재기수 비지절부서도재물이이 속위강류석부전이차


- 이수광(李睟光,1563~1629), 『지봉유설(芝峯類說)』16권 「잡설(雜說)」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唐) 나라 두보(杜甫)의 시 「팔진도(八陣圖)」의 세 째 구이다. 제갈량이 군대의 진법을 연습하기 위해 여러 곳에 돌무더기를 쌓아서 팔진도를 만들었는데, 두보가 백제성(白帝城) 아래 강변에 남아있던 팔진도 유적을 보고 제갈량을 회상하며 이 시를 지었다. 이 구절은 조선시대의 아전들이 자주 애송했다고 하며 신임 사또가 부임할 때 마다 조금 있으면 떠나는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수광은 이 구절을 당시 사회문제가 된 구실아치들의 문제를 나타내는 말로 『지봉유설』에 기록하였다. 국왕이 임명하여 보낸 지방관이 지방행정을 장악하지 못하여 아전들 손아귀에 놀아나고, 중앙 부서관원들이 행정을 장악하지 못하여 헤매는 실상을 드러낸 것이다. 군주정이었던 조선왕조에서 주권자인 국왕은 과거로 선발하여 임명한 관료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세습을 통하여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던 아전 세력들은 국왕이 내려 보낸 대리인들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영역과 힘을 지킬 수 있었다. 구실아치의 문제도 선발과 세습의 차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생긴 것이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주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한다.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유권자의 선택이 가능한 영역과 그렇지 않는 영역이 긴장관계를 이루게 되는데 민주주의라면 원칙적으로 유권자의 선택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대통령을 뽑는 해이다.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뀔 것 같은데, 지나고 나면 바뀐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IMF 구제금융 이후, 대통령이 누구건 국민소득과 복지수준은 상승하였고 출생률은 하락하였다. 좋아지는 부분은 계속 좋아지고 나빠지는 부분은 계속 나빠지게 마련이다.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았던 셈이다. 올해의 선택으로 국민소득은 계속 증가하고, 미래세대에도 희망이 생겨 아이 낳아 기르고 싶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좋은 돌은 그대로 있고 나쁜 돌은 뽑혀 굴러나갔으면 좋겠다.

 

글쓴이남지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번역문]

예산현(禮山縣)의 출신(出身) 현진국(玄鎭國)은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잘 도와주었습니다. 작년 8월에 큰비가 내렸을 때 입암면(立巖面)의 들판이 온통 물에 잠겨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장차 물에 빠져 모두 죽을 염려가 있었는데 현진국이 사람들을 모으고 배를 빌려서 1000여 명을 구해내었습니다. 그러고는 물이 빠지기 전까지 5, 6일 동안 음식을 마련하여 먹이고, 물이 빠진 뒤에는 빚을 얻어 곡식을 구해다가 집집마다 나누어 주어 각기 편안히 살게 해 주었습니다. 전후로 들어간 비용이 거의 수천 금이 넘었습니다. 또 춘궁기에는 밥과 죽을 공급하고 돈과 쌀을 계속 나눠주어 원근에서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 이름난 부자가 아닌데도 이렇게 의로운 마음에서 사람의 목숨을 살려내었습니다. 이런 일이 혹시라도 묻혀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억울하게 생각할 듯합니다.

 

[원문]

禮山縣出身玄鎭國, 居家孝友, 急人困隘. 昨年八月大水, 立巖面一坪懷襄, 近處居民, 將有淪墊盡劉之患, 則鎭國募人賃船, 拯出千餘人名. 水退前五六日, 辦備供饋, 水退後則得債求穀, 逐戶分給, 使之各安厥居. 前後所費, 殆過數千金. 且當窮春, 飯粥之供, 錢米之惠, 鎭日相續, 遠近稱道. 渠以素無富饒之名, 而有此出義氣, 活人命之擧. 若或湮沒而不揚, 恐致民情之抑鬱.

 

- 『일성록(日省錄)』 순조 33년 6월 10일

 

[해설]

조선 시대에는 매년 인구 통계를 내었다. 전국 각 도에서 올라온 가구 수와 인구를 경조(京兆) 즉 지금의 서울특별시가 총계하여 그해의 마지막 날 임금에게 보고했다. 1833년(순조33) 12월 30일 『일성록』 기사에 따르면 그해 전국의 가구 수는 157만 4699호, 인구는 남자 338만 1478명, 여자 335만 1311명으로 총 673만 2789명이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0년 6월 말 기준 대한민국의 세대 수는 2182만 5601세대, 인구는 남자 2586만 1116명, 여자 2594만 333명으로 총 5180만 1449명이라고 한다.

채 200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세대 수는 약 13.8배, 인구는 약 7.7배로 불어났다. 엄청난 확장이다. 경제 규모를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생활 전반의 확장과 변화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더 크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아예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조선의 1833년과 대한민국의 2021년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 전해, 그러니까 1832년 조선의 농사는 전국이 심한 흉작이었다.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내탕고의 재물을 내주고 세금을 줄여주며 상황이 조금 나은 지역의 곡식을 더 어려운 지역으로 옮겨주는 등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굶어 죽거나 견디다 못해 살길을 찾아 마을을 떠나는 백성이 속출했다.

2021년, 대한민국은 두 해째 계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많은 사람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 기업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그 바람에 적지 않은 사람이 직장을 잃는가 하면 간신히 가게를 꾸려오던 자영업자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폐업한다는 소식이 날마다 들려온다. 정부에서는 재정을 덜어내어 전 국민에게 몇 차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도 하고 영세 자영업자와 위기에 처한 기업을 돕기 위한 자금 지원도 하지만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세상은 참 살기 어려운 곳이고 앞날은 암울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라고 이런저런 고난이 없었던 때가 있을까? 한자 문화권의 유토피아 같은 시대, 성인이 다스린 시대라 하여 성세(聖世)라고도, 매우 번창하고 태평하던 시대라 하여 성세(盛世)라고도 하는 요순(堯舜)시대에도 굶주림은 있었고 도둑도 있었다. 가난, 질병, 전쟁 같은 고난이 없던 시대가 없었으니, 인류 역사는 고난과 극복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어려운 시기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의인(義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화재 현장에 갇힌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낯모르는 사람이 당한 곤경을 지나치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 든 강도에게 맞선 사람도 있다.

1833년 조선에서는 현진국이란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어 살리고 춘궁기에 굶주리는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재산을 내놓았다. 그 덕분에 1000명 이상의 인명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다. 현진국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사례가 전국에서 있었다는 것이 각 지역에 파견되었던 암행어사의 보고에서 나타난다. 홍수가 나서 집과 전답이 떠내려가고 흉년으로 사람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으로 이웃이 병들어 죽어 갈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 살려내곤 한다.

요즈음 대한민국에선 김달봉이란 이름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북 부안군에 2016년부터 그 이름으로 불우이웃을 도와 달라는 뜻과 함께 적지 않은 돈 봉투가 전달된다고 한다. 또 다른 곳에도 김달봉이란 이름의 기부자가 연말마다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을 보내고 있다. 김달봉은 실명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곳의 김달봉이 부안의 김달봉과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 이름만을 빌린 다른 사람인지도 확인된 바 없다. 하지만 해마다 연말이면 김달봉, 혹은 김달봉들이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다.

현진국, 김달봉의 존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이상 사회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공공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워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학에서 정치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회보(懷保)라는 말을 쓴다. 말 그대로 백성을 품어서 보호하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현대 국가의 책임ㆍ의무와 비슷한 맥락이겠다. 그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국가는 물론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언제나 빈틈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빈틈을 메워주는 그들의 존재가 국가의 거대한 품보다 더 따스하게 우리를 품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때여서인지도 모르겠다

 

글쓴이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다시 이 길을 지났으랴!
산그늘은 온통 안개 낀 듯 어둑한데
숲속 눈은 절로 꽃으로 피었구나.
괴이해라! 소나무는 바위에 서려 늙어가고
가련해라! 부처는 암자 벽화 속에 많구나.
종 울리니 절밥이 다 됐나 보다
까악까악 까마귀들 쪼아대는 걸 보니.

 

睡起吾閒步 수기오한보
山深誰復過 산심수부과
峰陰渾欲霧 봉음혼욕무
林雪自開花 임설자개화
石怪盤松老 석괴반송로
菴憐畵佛多 암련화불다
鐘鳴齋飯熟 종명재반숙
啼啄有寒鴉 제탁유한아

 

- 박태관(朴泰觀, 1678~1719), 『응재유고(凝齋遺稿)』 권상 「관음사에서[觀音寺]」두 번째 수[其二]

 

 

[해설]

이 시를 쓴 분은 박태관(朴泰觀, 1678~1719)입니다. 박태관은 자(字)가 사빈(士賓)이고 호(號)는 응재(凝齋) 또는 백애자(白厓子)며, 본관은 반남(潘南)입니다. 박태관은 백악시단의 일원으로 스승 김창흡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이병연, 정선, 홍세태, 정래교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했습니다. 시선집 『응재유고(凝齋遺稿)』가 전하는데 벗이었던 이병연이 자신의 녹봉을 덜어 간행해주었습니다. 박태관은 김창흡으로부터 시가 예스럽고 질박하며 꾸밈이 없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두 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인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수를 가져왔습니다. 박태관은 관음사라는 절에 들러 스님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새벽에 홀로 산책에 나섭니다. 수련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또 이 길을 걸었으랴!” 라고 하였듯, 박태관의 산책은 아무런 흔적도 없는 새벽 첫눈을 밟는 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함련에서 보듯, 산책을 하노라니 안개가 낀 듯 어둑한 산길에는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있습니다. 시인은 좀 더 길을 걷습니다. 가다 보니 노송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노송은 하얀 눈을 인 채 차디찬 바위에 기기묘묘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암자에는 벽에 부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하얀 눈 속에 무방비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련해라!’ 라고 한 것입니다. 인적 하나 없는 순백의 세상, 그 안에 노송과 부처, 그리고 시인이 있습니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에 있습니다. 순백의 세상, 청정무구의 세계에 빠져 있던 작가에게 홀연 종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겠지요. 종소리를 따라 선문에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너무도 익숙하게 부리로 쪼아대며 울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시인은 아름다운 생각을 피웁니다.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까마귀가 알고서 모여들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시인이 본 장면은 우연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까마귀들이 종이 울리면 으레 절에 와서 아침밥을 공양받았던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빼어난 시적 상상입니다. 순백의 세상에서 스님과 까마귀가 아침 공양을 함께 하는 모습. 시인은 눈 내린 절집의 한 장면에서 나[我]와 저[彼], 사람[人]과 사물[物], 속(俗)과 선(禪) 등 일체의 차별이 무화(無化)된 진여(眞如)의 세계를 읽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만 빌린 지구

 

우리는 이 지구를, 우리가 사는 동안만 빌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깐 빌린 것을 마치 우리의 소유인 것처럼 함부로 사용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위 인용문은 고려 문인 이곡(李穀)의 <말 빌린 이야기[차마설(借馬說)]>의 일부로, 말을 빌린 자기 경험을 빌어 인간의 존재 양상을 명철하게 꿰뚫어 본 대목입니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는 관계를 통해 사회적 기능을 보증받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 하나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곡이 말한 ‘빌림’은 관계 자체를 의미합니다. 저 임금으로부터 미천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관계에 기반하여 기능을 빌린 것일 뿐인데, 그 빌린 것이 오래되면서 빌렸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본래부터 자기가 소유했던 것처럼 착각하고 맙니다. 이곡이 명철하게 보여준 이런 사유는 오늘날 우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와의 관계에도 딱 들어맞는 생각입니다.

 

잠시 빌린 것일 뿐인 지구를 본래부터 우리 것인 줄로 착각하고 마음대로 써버린 결과, 지구의 모든 존재들이 살 곳을 잃고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종족만을 위해 이기적 행보를 지속한다면, 결국 인류의 미래도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태관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 순백의 눈을 배경으로 아침밥을 나누는 스님과 까마귀의 모습은 우리가 이 지구와 어떻게 공존, 공생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글쓴이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나는 이 때문에 천하의 일은 시대의 형세가 최상이며, 행불행은 그 다음이고 시비는 최하라고 말한다.

 

余故曰, 天下之事, 所值之勢為上, 幸不幸次之, 是非為下.
여고왈, 천하지사, 소치지세위상, 행불행차지, 시비위하.


- 이익(李瀷,1681~1763), 『성호사설(星湖僿說)』권20 「사료의 성패를 읽다[讀史料成敗]」

 

[해설]

“천하의 일은 시대의 형세가 최상, 행ㆍ불행(幸不幸)은 그 다음 시비(是非)는 최하”라는 언명은 성호 이익의 역사관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곧 성호는 당대의 형세를 중시하는 역사관을 지녔다는 지적이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을 경우, 성호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에 대해서 가장 그 영향력을 낮게 보고, 그 다음으로 행불행을 살피며, 당대 형세를 가장 앞세운 것이 된다. 성호가 역사 인식에서 시비선악의 문제를 간과하고 오직 형세의 어떠함으로 역사를 평가하려 했다는 이해가 되는데 이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우선 성호의 발언 문맥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성호는 “천하의 일이 대개 10분의 8~9쯤은 천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우연에 의한 역사의 전개라는 우연사관을 견지했다. 곧 역사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도덕, 내지 춘추정의를 실현하는 필연적 법칙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추대의와 춘추필법을 당연한 것처럼 수용하여 필연사관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당대 역사관을 고려할 때 매우 파격적이다.

 

그는 냉정하게 사서(史書)를 읽으며, 사서에는 고금을 막론하고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이 그 시기의 우연에 따라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선악과 현불초의 구별까지도 그 실상에 꼭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사서를 두루 읽고 방증(旁證)하여 이리저리 참작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곧 “한 서적만 믿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주희의 스승 정이천의 사례를 인용했다. 정이천은 역사서를 읽을 때면 반쯤 이르러 문득 책을 덮고 한참 동안 생각하여 그 성패의 실상을 짐작한 다음 다시 읽었다고 한다. 또 사실이 잘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성호는 역사서에 씌여진 내용에는 그 사실이 맞지 않는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맞는 곳도 역시 모두 준신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역사서란 성패가 이미 결정된 이후에 지어진 승자의 기록이므로 그 성패에 따라 진실이 아닌 내용도 당연한 것처럼 꾸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善)에 대해서는 허물을 숨기고, 악(惡)에 대해서는 장점을 없애버리는 것이 많을 수 밖에 없으니 현불초에 대한 구분이나 선악에 대한 보복도 반드시 옳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더욱 그 진위는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성호는 “지어진 역사서에 읽으며 성패를 짐작하면 사실과 이치가 그대로 맞는 곳이 많지만 오늘날 목격한 것을 따라 헤아려보면 8~9할쯤은 합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서의 내적 논리로 보면 그럴 듯 하지만 제삼자의 비판적 안목으로 다시 보면 합치되는 않는 곳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역사에서의 시비선악은 최하로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득실의 문제에서는 다소 양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비의 문제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 적어도 한 시대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면 그렇다.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 정면을 응시했을 성호가 지난 사료를 읽으며 시비를 가장 나중에 살펴보아야 할 대목으로 미룬 것이다.

 

수많은 문헌들이 생산되는 것을 목도한다. 언젠가 이들 중 일부는 역사가 될 것이다. 사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정론직필’의 문장을 읽을 때면 성호가 역사에서 시비를 가장 나중의 문제, 최하로 여긴 것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글쓴이함영대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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