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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知行)

 

《역》 문언전(文言傳)에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덕을 기르고, 업을 닦는 것이니, 충(忠)과 신(信)은 덕에 나아가는 소이인 것이고, 말을 닦아서 그 성(誠)을 세우는 것은 그 업(業)에 거(居)하기 위한 것이며, 이르는 것을 알고 이에 이르면 함께 할 것이고, 끝나는 것을 알고 이를 끝맺으면 함께 의(義)를 간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자는 이르기를, “비록 충신(忠信)의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을 닦고[修辭] 성(誠)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에 거(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르는 것을 알고 이에 이르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일인 것이고, 그칠 것을 알고서 이를 끝마치는 것은 일에 거(居)하는 일인 것이니, 종일토록 쉬지 않고 노력하고, 밤이면 다시 반성하여 조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인 것이라.”고 하였다. 정자는 이르기를[《정씨유서 11 명도선생어1》], “이르는 것을 알아서 이에 이르는 것은 지(知)를 이루는 것이니, 이른바, 조리 있게 시작한다는 것은 지자(知者)의 일인 것이요, 그칠 것을 알아서 끝마친다는 것은 행하는데 힘쓰는 것[力行]이니, 이른바 조리 있게 끝마친다는 것은 성자(聖者)의 일인 것이다.”고 하였다.

 

《대학》에 이르기를[경1장],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知)를 이루는 것이니,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에 있는 것이다. 물(物)이 이르는 뒤에야 지(知)가 이르고, 지가 이르는 뒤에야 뜻이 성실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른바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無自欺] 것이니,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 하며, 아름다운 여색(女色)을 좋아하듯 하는 것은, 이를 스스로 쾌족(快足)하게 여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하는 것이라.”[이상은 《대학》 성의장]고 하였다.

집의 공자는 이르기를[《논어》 이인편], “어진 자[仁者]는 인(仁)에 편안하고 아는 자[知者]는 인(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씨(謝氏 사상채를 말함.)는 이르기를, “어진 자[仁者]는 마음에 내외(內外)나 원근(遠近)이나 정조(精粗)의 사이가 없는 것이니, 지닌 바가 있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며, 다스리는 바가 있지 않아도 저절로 어지럽지는 않은 것이니, 이것은 마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움직이며, 발로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자(知者)는 보는 것이 있다고 이르는 것은 옳지만, 얻은 것이 있다고 이를 수 있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니, 지닌 바가 있어야만 이에 없어지지 않고 다스리는 바가 있어야만 이에 어지럽지 않다는 것은, 능히 뜻이 없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에 편안한 것은 하나인 것이고, 인(仁)을 이롭게 한 것은 둘인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에 이르기를, …… 있는 것이다. : 주자는 “致 推極也 知 猶識也 推極吾之知識 欲其所知無不盡也 格 至也 物 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所無不到也”라고 하였는데, 《대학주주》 양명은 그에 반하여, “格 正也 正其不正以歸於正也 格物無間動靜 靜亦物也 致吾心良知之天理 於事事物物 致吾心之良知者 致知也 是合心與理而爲一者也……”라고 하여, 주자의 격물설은 지리하다고 반박하였다. 《전습록》 참조.

 

하곡집

경학집록(經學集錄) 중(中)

 [덕(德)]

지능(知能)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계사 상전 1장], “건(乾)은 큰 처음을 알고, 곤(坤)은 유형(有形)의 물(物)을 이룬[作] 것이니, 건은 쉽기 때문에 알고, 곤은 간편하기 때문에 능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쉬우므로 알기도 쉽고, 간편하므로 따르기도 쉬운 것이다. 알기가 쉬우면 친근함이 있고, 따르기가 쉬우면 공이 있는 것이다. 친근함이 있으면 오래할 수 있고 공이 있으면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오래할 수 있는 것은 현인(賢人)의 덕인 것이요, 커질 수 있는 것은 현인의 업적(業績)인 것이다. 쉽고 간편한 가운데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는 것이니,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매 그중(中)에서 위(位)를 이루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계사 상전 12장], “무릇 건은 천하에서 지극히 강건(剛健)한 것이니, 그 덕행(德行)은 항상 쉬워서 이를 미루어 험난(險難)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이요, 무릇 곤은 천하에서 지극히 유순(柔順)한 것이니, 그 덕행(德行)은 항상 간이(簡易)하여서 막힌[阻]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맹자는 이르기를[《맹자》 진심편 상],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잘하는 것은 곧 그 양능(良能)인 것이요, 생각하지 않고서도 아는 것은 곧 그 양지(良知)인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제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며, 자라나서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는 것이다. 친한 이를 친하게 한 것은 인(仁)인 것이요, 어른에게 공경한 것은 의(義)인 것이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하에 달(達)한 것이다.”고 하였다.

정자는 이르기를[《정씨유서 2상 이선생어2상》], “양능(良能)과 양지(良知)는 모두가 말미암은 바가 없는 것이니, 이는 곧 하늘에서 나온 것이요, 사람에게 매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집의 맹자는 이르기를[《맹자》 만장편 상], “공자를 집대성(集大成)한 자라고 이르니, 집대성했다는 것은 쇠[金] 소리를 내어 시작하고 옥 소리를 내어 습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쇠 소리를 낸다는 것은 조리(條理)있게 시작함을 말한 것이요, 옥 소리를 낸다는 것은 조리 있게 끝맺음을 말한 것이다. 조리 있게 시작한다는 것은 지자(智者)가 하는 일이요, 조리 있게 끝맺는다는 것은 성자(聖者)가 하는 일인 것이다. 지자(智者)를 비유해서 말한다면 곧 기교(技巧)인 것이요, 성자(聖者)를 비유해서 말한다면 곧 힘[力]인 것이니, 이것은 마치 백 보(百步) 전 밖에서 활을 쏘는데 살이 표적에까지 도달한 것은 그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표적에 맞추는 것은 그 힘에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생각하지 않고서도 …… 양지(良知)인 것이다. : 양명은 양지에 대해서, “良知 無有不自知者”, “吾心之良知”, “良知自知之” 등을 말로만 했을 뿐 아니라, “良知却是獨知時 此知之外更無知 誰人不有良知在 知得良知却是誰 知得良知却是誰 自家痛癢自家知 若將痛癢從人問 痛癢何須更問爲”라는 시(詩)까지 썼던 것이다. 《양명시록 권3》


 

하곡집

경학집록(經學集錄) 중(中)

[도(道)]

성명일리(性命一理)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설괘전(說卦傳) 1장], “성인(聖人)이 역(易)을 만들 때 도덕(道德)에 화순(和順)하고 의(義)에서 다스렸으며 이(理)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함으로써 명(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르기를,[설괘전(說卦傳) 1장 주] “화순(和順)이란 것은 조용(從容)하여 거스리는 바가 없음을 통괄하여 말한 것이요, 다스린다[理]는 것은 일에 따라서 그 조리(條理)를 얻는 것을 이른 것이니, 분석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정자는 이르기를[《정씨유서 11 명도선생어1》], “도덕(道德)에서 화순(和順)하고, 의(義)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체(軆)와 용(用)이라.”고 하였다.
정자는 이르기를[《정씨유서 11 명도선생어1》],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성(性)을 극진함으로써 명(命)에 이르는 것은 한 가지의 물(物)인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정씨유서 18 이천선생어4》], “이치를 궁구하고 성(性)을 극진히 함으로써 명(命)에 이르는 것은 한가지의 일인 것이니, 겨우 이치를 궁구해야만 곧 성(性)을 다하고, 성을 극진히 해야만 곧 명에 이르는 것이니, 이(理)와 성(性)과 명(命)은 하나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정씨유서 2상 이선생어2상》], “이 세 가지의 일은 한때에 같이 끝내는 것이므로 원래 차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를 궁구함을 가지고 앎[知]의 일을 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만약 참으로 이치를 궁구한다면 바로 성명(性命)도 또한 마무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정씨유서 6 이선생어6》],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이르고, 이를 받아서 나에게 지닌 것을 성(性)이라 이르며, 하는 일[事業]에 나타난 것을 이(理)라고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정씨유서 2상 이선생어2상》], “이치는 모름지기 궁구하여야 하고, 성(性)은 모름지기 극진히 하여야 하지만, 명(命)은 궁구하거나 극진히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이 명(命)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횡거(橫渠)는 항상 비유하기를[《정몽(正蒙) 권1》 성명편(誠明篇)], 명(命)은 근원이요, 이(理)를 궁구하고 성(性)을 극진히 한다는 것은 마치 도랑[渠]을 파서 근원에 인도함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도랑과 근원은 이 두 가지의 물건인 것이다.
집의(集義) 정자는 이르기를, “다만 마음이 곧 하늘인 것이며, 이를 극진히 하는 것이 곧 성(性)을 알고, 하늘을 아는 것이니, 당처(當處)에서 곧 알아서 취할 것이며 다시는 밖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정씨유서 5 이선생어5》], “마음은 천덕(天德)을 갖춘 것이며, 마음에 극진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곧 이 천덕을 능히 극진히 하지 못할 것이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성(性)을 알고 하늘을 알게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자는 이르기를, “‘마음’이다 ‘성(性)’이다 ‘하늘’이다 하는 것은 한 가지의 이(理)인 것이다. 이(理)로부터 말한다면, 이를 하늘이라고 이르고, 품수(禀受)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성(性)이라고 이르며, 사람에게 간직한 것으로부터 말한다면 마음이라고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정씨유서 18 이천선생어4》], “하늘에 있어서는 명(命)이 되고, 의(義)에 있어서는 이(理)가 되며,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 되는 것이고, 몸에서 주장하는 것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그 실은 하나인 것이다. 마음은 본래 선(善)한 것이나 생각하는 데서[思慮] 발(發)하면 선(善)한 것도 있고 선하지 않는 것[不善]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이미 발(發)했다면 정(情)이라고 이를 수는 있어도 마음이라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이 흘러서 물결[派]이 되면 곧 흐름[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치를 궁구하고 …… 하나일 뿐이라.” : 양명은 궁리(窮理) 진성(盡性)을 분리한 주자의 견해와는 달리 “心之躰 性也, 性即理也, 故窮理, 即是盡性”이라 하여, 궁리하면 진성하게 되고 진성하면 궁리하게 된다고 하였다. 《전습록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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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집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경(經) 하(下)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으로 나누어 4절을 만들었음

수신(修身) 1절(一節)

 

홍범경용오사장(洪範敬用五事章)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둘째는 다섯 가지 일을 공경히 쓸 것이니, 이(二) 오사(五事) 첫째는 용모[貌]요, 둘째는 말이요, 셋째는 보는 것이요, 넷째는 듣는 것이요, 다섯째는 생각하는 것이다. 용모는 공손[恭]해야 하며, 말은 옳아서 따를 만[從]해야 하며, 보기는 밝게[明] 해야 하며, 듣는 것은 귀 밝아야[聰] 하며 생각하는 것은 통해야[睿] 한다. 공손함은 엄숙함[肅]이 되고, 따를 만함은 현명함[乂]이 되고, 밝은 것은 환하게 비침이[哲] 되고, 귀 밝음은 꾀가 되고, 통함은 성(聖)이 된다. 바람ㆍ비ㆍ개임ㆍ추위ㆍ더위가 때맞추는 것[日時]은 아름다운 증험이 되며, 또 나쁜 증험이 있으니 바람ㆍ비ㆍ개임ㆍ추위ㆍ더위가 때맞추지 못하고 늘 지나친다. 임금이 광망(狂妄)한 짓을 할 때 늘 비오고 임금이 참람한 짓을 할 때 늘 개이고 임금이 안일(安逸)할 때 늘 따뜻하고 임금이 급하게 할 때 늘 춥고 임금이 어둔 짓을 할 때 늘 바람이 분다 하였다.

집의(集義) 《중용》에 공자가 이르기를, “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떳떳함[九經]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닦는 것이다. 몸을 닦으면 도가 자기에게서 이루어져 백성에게 표준이 되어 선다[立]. 재계[齋]하고 깨끗하게 예복을 입어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몸을 닦는 바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아홉 가지 떳떳함을 행하는 바는 하나이다.” 하였다. 자장(子張)이 묻기를, “정치를 하는 데는 무엇을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라 이르나이까?”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만족하고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위엄스럽고도 맹렬하지 아니한 것이다. 군자는 많은 사람 적은 사람이 없이, 작은 것 큰 것이 없이 감히 만홀히 함이 없나니, 이것이 만족하고도 교만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군자는 그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며 눈 뜨는 것을 높이 하매 엄연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나니, 이것이 위엄스럽고도 맹렬하지 않음이 아닌가?” 하였다.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가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으니, 보는 것은 밝으려고 생각하며 듣는 것은 귀 밝으려고 생각하며 안색은 온화하려고 생각하며 용모는 공손하려고 생각하며 말은 충신(忠信)하기를 생각하며 일에는 공경하기를 생각하며 의심나는 데는 묻기를 생각하며, 분노할 때는 환란이 있을 것을 생각하며 이익될 일을 보고는 의(義)를 생각할 것이다.” 하였다.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조용히 절로 도에 합하는 이 경지(境地)에 이르지 못한 이는 스스로 살피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비록 성(誠)이 있지 않은 때가 있더라도 많지 않고 적을 것이다. 이것을 성(誠)을 생각한다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곡례가 이르기를, “앉을 때는 시동[尸]과 같이 하며 설 때는 제(齊)같이 하라.” 하였다.
○ 옥조(玉藻)가 이르기를, “군자의 용모와 행동은 조용할 것이니, 존경할 사람을 보거든 공손[齊遬]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발의 용(容)은 무거우며 손의 용은 공손하며 눈의 용은 단정하며 입의 용은 그치며 음성의 용은 고요하며 머리의 용은 곧으며 기(氣)의 용은 엄숙하며 서는 용은 덕스러우며 안색의 용은 씩씩[莊]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서는 자세는 떨어뜨리거나 꺾어서[辨卑] 몸을 기울어지게 하지 말고 머리와 목[頸]은 반드시 곧게[中] 하며 산(山)처럼 요동하지 않도록 세우고 꼭 다니게 될 때에 다니되 활기에 찬 기운이 마치 양기가 만물에 발양하듯[揚休] 몸에 가득하게 하며 얼굴 빛은 옥(玉) 빛처럼 변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증자가 병이 있는데, 맹경자(孟敬子)가 문병하였더니, 증자가 말하기를, “새가 장차 죽을 제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을 제는 그 말이 착하다 한다. 군자가 도(道)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세 가지니, 용모를 움직임에는 추솔하고 오만함을 멀리할 것이며, 안색을 바로하는 데는 진실한 데 가깝게 할 것이며, 말을 내는 데는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난 것을 멀리해야 한다. 변두(籩豆)의 일은 맡은 이가 있습니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는 몸을 바르게 하고 밖에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두의 일은 맡은 이가 따로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태백(泰伯)
곡례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엄연하여 생각하는 것같이 하며 말을 안정(安定)히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오만함을 길러서는 안 되며 욕심을 따라서는 안 되며 뜻은 차서는 안 되며 즐거움은 극도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명도가 말하기를,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임금의 덕이니, 임금의 덕은 곧 하늘의 덕이다.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상제(上帝)에게 대할 수가 있다.” 하였다.
《시(詩)》 억편(抑篇)에, “부드러운 나무에는 활 줄[緡]을 매겠도다. 온화한 군자는 덕의 터전이로다.” 하였다. 대아(大雅) 횡거(橫渠)가 일찍이 말하기를, “15년 동안이나 공손하면서 편안한 것[恭而安]을 배워서 이루지 못하였다.” 하니, 명도가 말하기를, “배워도 이루지 못한 것은 다소의 병통이 있는 것임을 알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보통 서람은 편안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공손하면 편안하지 못하다.” 하였다. 외집(外集) 사(謝).
정자가 말하기를, “지금의 학자들이 공경[敬]하면서도 또 불안(不安)한 것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다만 의식적으로 하기[心生] 때문이다. 역시 너무 경(敬)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니, 이것은 공손하면서 예(禮)가 없으면 수고롭다는 것이다. 그 공손이란 것이 사사롭게 공손을 하는 공손이다. 예란 것은 체가 아닌 예이니, 이것은 자연스러운 도리이다. 다만 공손하기만 하고 자연스러운 도리가 되지 못하므로 자재(自在)하지 못한 것이니, 모름지기 공손하고 편안해야 한다. 지금 용모를 반드시 단정히 하고 말을 반드시 바르게 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홀로 착하게 하여 남들이 어떻다고 이르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천리(天理)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본시 사의(私意)가 없고 다만 이 이치를 따를 뿐이다.” 하였다. 여(呂)

정자가 말하기를, “지금 의리에 뜻을 두었으면서 마음이 안락하지 못한 것은 왜 그러한가? 이것은 바로 조장(助長)하는 것이 있는 까닭이다. 비록 마음이란 잡으면 존(存)하고 놓으면 상실되는 것이나 가지기를 너무 심히 하면 곧 반드시 일삼음이 있으면서 꼭 그리 되리라고 기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그대로 갈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다만 덕이 외로운 것이다. 덕이 외롭지 아니하면 반드시 이웃이 있는 것이니, 덕이 성(盛)한 뒤에는 절로 막힘이 없어서 왼쪽을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그 근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여록(呂錄)
정자가 말하기를, “도에 뜻 두기를 간절히 함이 진실로 성의(誠意)이나, 만약 박절(迫切)하여 이치에 맞지 아니하면 도리어 성(誠)하지 못함이 된다. 대개 실리(實理) 가운데 스스로 완(緩)하고 급(急)함이 있으니, 이와 같이 박절히 해서는 안 된다. 천지의 조화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여록(呂錄) 이천(伊川)
○ 사씨(謝氏)가 사면현장(師冕見章)을 들어서 말하기를, “대저 성인의 도는 은미(隱微)함과 현저함이 없고 안과 밖이 없어서, 물 뿌려 소제하고 응대(應對)하고 진퇴(進退)하는 것으로부터 위로 천리에 달(達)하여 본과 말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일부(一部)의 논어를 다만 이렇게 보라.” 하였다. 연(淵) 원(源)

정자가 말하기를, “내가 글자를 쓸 때에 매우 공경하노니, 글자가 좋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학(學)이다.” 하였다. 사(謝).
정자가 말하기를, “물 뿌려 소제하고 응대[灑掃應對]하는 것이 곧 형이상(形而上)이니, 이치가 큰 것 작은 것이 없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다만 혼자 있을 때 조심한다.[愼獨]” 하였다. 유(劉).
정자가 말하기를, “무릇 물(物)이 본과 말이 있으니 본과 말을 나누어 두 가지 일로 삼을 수 없다. 쇄소응대(灑掃應對)는 그러한 것[其然]이고 반드시 그렇게 하는 바[所以然]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인의 도는 다시 정(精)함과 추(粗)함이 없으니 쇄소응대로부터 정의입신(精義入神)에 들어가기까지 관통되어 다만 한 이치다. 비록 쇄소응대라도 다만, 그 소이연(所以然)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쇄소응대와 진성지명(盡性至命)이 일통(一統)의 일이다.
또 말하기를, “춤을 춤과 활을 쏘는 데 곧 사람의 성(誠)을 볼 수 있으니, 옛적에 사람 가르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이루게 하는 것 아님이 없으므로, 쇄소응대에서부터 곧 성인의 일에 도달할 수 있다.” 하였다. 유서(遺書).


변두(籩豆) : 변(籩)은 제사에 쓰는 대그릇[竹器]이요, 두(豆)는 제사에 쓰는 나무 접시이다. 그때에는 종묘(宗廟)의 제사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군자(君子)가 반드시 그것을 익히던 시대이다.
[주D-002]쇄소응대(灑掃應對)는 …… 있을 것이다. : 사물(事物)의 뒤에 있는 이치를 말한 것이니 곧 형이상(形而上)이다.

 

 

하곡집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경(經) 하(下)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으로 나누어 4절을 만들었음.

수신(修身) 1절(一節)

 

[홍범오황극장(洪範五皇極章)]

 

[홍범오황극장(洪홍범(洪範)에, “다섯째는 황극(皇極)이니, 크게 중도(中道)를 건립(建立)하여 치우치고 비뚤어짐이 없어 선왕(先王)의 의(義)를 따르며 사사로운 좋아함을 하지 말아서 선왕의 도를 따르며 사사로운 미워함을 함이 없어서 선왕의 길을 따르라. 편(偏)이 없고 당(黨)이 없어 왕도(王道)가 툭 트이고 당이 없고 편이 없어서 왕도가 다스려지고 뒤집힘[反]과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도가 바르고 곧으리라. 중도(中道)에 맞추어 행하면 천하가 중도로 돌아오리라. 대중(大中)의 도로 가르침을 베풀면 떳떳하게 되어 사람들이 임금의 훈(訓)에 따르리라.” 하였다. 주서(周書)

《대학》에, “이른바 그 집을 다스림이 그 닦는 데에 있다 함은 사람들이 그의 친하고 사랑하는 데에 가서 편벽되며 그의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 가서 편벽되며 그의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데에 가서 편벽되며 그의 애처롭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 가서 편벽되며 그의 거만스럽고 게을리 함에 가서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이에게도 그 나쁜 것을 알며 미워하는 이에게도 아름다운 점을 아는 이가 천하에 드물다. 그러므로 속담에, ‘사람들이 제 자식의 나쁜 것을 모르며 제 이삭[苗]의 굵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한 말이 있다. 이것을 두고 몸이 닦이지 아니하면 그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는 것이다.”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대인(大人)이라 하는 자가 있으니, 자기를 바르게 함에 남이 바르게 되는 사람이다.” 하였다. 《논어》에 공자가 이르기를, “당신이 바름으로써 거느리면 뉘가 감히 바르지 아니하리오.” 하였다.
집의(集義) 《주역》 무망괘(無妄卦)의 상(象)에, “천하에 우레가 행하매 만물이 다 거짓됨이 없나니[無妄] 선왕이 이것을 써서 때에 따라 만물을 무성하게 기른다.” 하였고, 육이(六二)에, “갈아서[耕] 수확하지 아니하고 치(菑 일세(一歲))하여 여(畬 2세전(二歲田))하지 아니하면 이로움이 갈[往] 바 있으리라.”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성인이 천하의 일에 해 주려고 하지 않고 다만 천리(天理)를 순하여 때를 따라 무성하게 만물을 기른다.”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성(性)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故)일 뿐이니 고(故)란 것은 이(利 순함)로써 근본을 삼는다. 지(智)에 대하여 미워하는 바는 그것이 뚫고 파는[鑿] 때문이다. 만약 지(智)란 것이 우(禹)가 물[水]을 인도하듯 ‘순하게’ 한다면 지(智)를 미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禹)가 물을 인도함은 일이 없이 순하게 하는 것이니, 만약 지(智)가 또한 일없는 방법을 한다면 지(智)가 큰 것이다. 하늘의 높음과 별[星]들의 먼 것도 그 고(故)를 구한다면 천세(千歲)의 날이 올 것도 앉아서 알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루(離婁) 하(下)
‘정자에게’ 성냄을 옮기지 않음을 물으니, 정자가 말하기를, “다만 말하기를 범연히 하면 제군(諸君)들이 문득 쉽다고 할 것이니, 모름지기 무엇으로 인하여 성냄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서 얻어야 한다. 순(舜)이 사흉(四凶)을 베일 적에 순이 무슨 관심을 하였으랴? 성인의 마음은 본시 성냄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밝은 거울과 같다. 사람이 한 사람에게 성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성내지 않는 수가 있으니, 이와 같이 참아 내면 이미 의리를 매우 아는 것이다. 성인은 물(物)을 인하여 그대로 하는 것이요, 성냄이 있지 않다. 이것이 매우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군자는 물(物)을 부리고[役] 소인은 물에 부리어지는 것이니, 이제 기뻐할 만한 일과 성낼 만한 일을 보고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거기에 따라간다면 이것은 또한 수고로운 것이다. 성인의 마음은 고요한 물[水]과 같으니라.”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만물이 모두 다만 한 개의 천리(天理)일 뿐이니 내가 무슨 상관이랴? ‘하늘이 죄 있는 자를 친다. 하늘이 덕 있는 이에게 명(命) 한다.’고 말한 것 같은 것은 모두 다만 이것이 천리가 자연히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니, 사람이 언제 관계하랴? 관계한다면 곧 이것이 사의(私意)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물(物)로써 물에 응하고 자기로써 물에 응하지 아니하면 아(我)가 없는 것이다. 대저 하늘이 물을 낼 적에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니, 군자는 그 큰 것을 얻었는지라, 어찌 작은 것으로 하여금 크게 할 수가 있으랴? 천리가 이와 같은데 어찌 거스리[逆]겠는가? 천하의 큼과 만물의 많음에 한마음으로써 처하게 되니 반드시 그 요점[要]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본즉, 옛사람의 처사하는 것이 어찌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유록(劉錄)
정자가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데는 공경함만 같음이 없으니, 능히 치지(致知)를 하는데 공경함에 있지 않는 이는 없다. 지금 사람들은 마음의 주장이 정(定)하지 못하여 마음 보기를 도적과 같이 하여 제어하지 못하니 일이 마음을 병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일에 병된 것이다. 천하에 한 물건도 없어서 될 것이 없는 것이니, 싫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생각함이 많아서 능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함은 다만 그의 마음의 주장이 정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의 주장이 정하게 되려면 오직 일[事]에 그쳐[止]야 하니,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애(仁愛)함에 그쳐야 한다[《대학》]는 등류와 같은 것이다. 순(舜)이 사흉(四凶)을 베임 같은 것은 사흉이 악한 짓을 하였으므로 순이 따라서 베인 것이지 순이 무슨 상관이랴. 사람이 일에 그치지 못하면 다만 그 일에 끌려서 능히 물을 각기 물에 붙이지 못할 것이니, 물을 각기 물에 붙이면 이것이 물을 부리는 것이다. 물의 부리는 바가 되면 이것은 물에 부리어지는 것이다. 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이니, 모름지기 일에 그쳐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배우는 자[學者]가 마음 생각이 분란(紛亂)하여 안정되지 못함을 걱정하나니, 이것은 천하에 공통된 병이다. 학자(學者)가 다만 마음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 윗머리에는 진실로 생각한 점이 있다. 관(關) 이(伊)
맹자가 말하기를,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몸에 돌이켜 보아 성(誠)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서(恕)를 힘써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데 이보다 가까울 수 없다.” 하였다. 진심(盡心) 상(上)
정자가 말하기를, “천지가 물(物)을 낼 적에 각기 부족한 이치가 없으니, 항상 천하의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에 얼마만큼의 도리대로 만족하지 못한 곳이 있는가를 생각하라.” 하였다. 단록(端錄)
공자가 이르기를, “사(賜 자공(子貢)의 이름)야! 너는 나를 많이 배워서 기억하는 자라고 생각하느냐?” 하니, 자공(子貢)이 말하되,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하니, “나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도는 한 근본인데 마음으로써 성(誠)을 포함함이 성(誠)으로써 마음을 포함함만 못한다고 이르나니, 지성(至誠)으로써천지에 참(參)하는 것 이 지성으로써 사람과 물을 체득(體得)함만 같지 못하다. 이것은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이다. 근본이 둘이 아닌 줄을 알면, 곧 돈독히 공손하매 천하가 다스려지는 도이니라.” 하였다. 유록(劉錄)
정자가 말하기를, “크도다, 성인의 도여! 유행(流行)하여 만물을 발육시켜 높고 크기가 하늘보다도 지극하도다. 충만하여 크도다! 예의(禮儀)가 3백이요 위의(威儀)가 3천이로다. 그 사람을 얻어야 행하나니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응취(凝聚)하지 않느니라 한 것이 모두 하나로 관통[一貫]한 것이다.” 하였다. 유록(劉錄)
또 말하기를, “한 물건이라도 포함되지 않으면 중(中)이 아니요, 한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요, 한 번 숨쉴 동안이라도 존(存)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편벽[偏]된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란 것은 잠시도 떠나지 못할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하였다. 이 도를 닦는 자는 그 보지 않는 데서 경계하며 삼가하고 그 듣지 않는 데서 두려워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쉬지 아니하면 하늘의 일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경지(境地)를 점점 이룰 수가 있다.” 하였다. 유록(劉錄)

공자가 이르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하느니라.” 하니, 증자가 “네[唯]” 하였다. 공자가 나간 뒤에 문인들이 묻기를, “무슨 말씀인가?”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하였다. 이인(里仁) 정자가 말하기를, “자기로써 남에게 미치는 것은 인(仁)이요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서(恕)이니,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아니하다는 것이 이것이다. 충서(忠恕)는 하나로 관통한 것이니, 충은 천리요 서는 인도(人道)다. 충은 거짓됨이 없는 것이요 서(恕)는 충을 행하는 바이다. 충은 체(體)요 서는 용(用)이니, ‘충은’ 대본(大本)이요 ‘서는’ 달도(達道)다. 이것이 ‘도에 가기가 멀지 않다.’는 것과 다른 것은 천(天 자연(自然))으로써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늘의 명(命)이 깊고 멀어 마지않음은 충이요,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기 성명(性命)을 바로함은 서(恕)이다.” 하였다. 유록(劉錄)
자공(子貢)이 묻기를, “만약 백성에게 넓게 베풀어 능히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떠합니까? 인(仁)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어찌 인(仁)에만 그치리요, 반드시 성(聖)일진져! 요순(堯舜)도 여기에 있어서는 그 마음에 자기가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셨느니라. 대저 인(仁)한 자는 자기가 서고자 하여 남을 세워 주며 자기가 달(達)하고자 하여 남을 달하게 하나니, 가까운 데서 미루어 나로써 남에게 비(譬)하면 인(仁)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였다. 옹야(雍也)
정자가 말하기를, “인자(仁者)는 천지 만물로써 일체(一體)를 삼으니 자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 만물이 자기가 되는 줄 알아 얻는다면 어디에 이르지 못하리오. 만약 자기에게 가지지 못하면 자기와는 상관되지 않게 되어 손발이 불인(不仁)할 때에는 기운이 벌써 관통되지 못하여 모두 자기에게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넓게 베풀어 뭇사람을 건지는 것이라야 성인의 공효(功效)인 것이다. 인은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고로 다만 자기가 서고자 하여 남을 세워 주고 자기가 달하고자 하여 남을 달하게 한다. 능히 가운데서 미루어 나로써 남에게 비하면 인(仁)의 방법이라 이를 수 있다고만 말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인을 보아 인의 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여(呂)
자로(子路)가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뜻을 듣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늙은 이를 편안하게 하며 벗이 믿어 주고 어린애는 품어 주겠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부자(夫子)에 이르러는천지의 화공(化工) 이 만물에게 각기 마땅한 대로 부쳐줄 뿐이요, 자기는 수고롭지 않음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성인의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먼저 이자(二子)의 말을 보고 뒤에 성인의 말을 보니 분명히 천지의 기상(氣象)이다.” 하였다. 공야장(公冶長)
중궁(仲弓)이 묻기를, “어찌 현재(賢才)를 알아서 발탁해 쓰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너의 아는 이를 발탁해 쓰면 너의 모르는 이를 사람들이 놓치겠느냐?”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명도가 말하기를, “사람이 각기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긴 후에야 남의 어버이도 어버이로 생각하고 제 어버이만 어버이로 하지 않는 것이니, 중궁(仲弓)과 성인의 마음 씀의 크고 작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뜻을 미루면 한마음이 나라를 일으킬 수도 있고 한마음이 나라를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니, 다만 공(公)과 사(私)의 사이일 뿐이다.” 하였다.
《논어(論語)》에, 삼자(三子)가 뜻을 말하였는데, 점(點)이 덩그렁 비파[瑟]를 놓고 일어나서 대답하되, “삼자(三子)의 말한 바와는 다릅니다.” 하였다. 공자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각기 제 뜻대로 말할 뿐이다.” 하니, 증점(曾點)이 말하기를,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이 만들어지거든 관자(冠者) 오륙(五六)인과 동자(童子) 육칠(六七)인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쐬며 읊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부자(夫子)는 탄식하며, “나는 점(點)을 좇겠노라.”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공자가 점을 허여(許與)하는 것은 대개 점이 성인의 뜻과 같아서 곧 요순(堯舜)의 기상이다. 자로(子路) 등은 본 바가 작다. 자로는 다만 나라를 예(禮)로써 다스리는 도리를 알지 못한 것이니, 만약 알았다면, 곧 이 기상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증점은 그 즐거움을 얻은 것을 말한 것이다. 공자의 뜻은 늙은이를 편안히 하며 벗이 믿게 하며 어린이를 품어 주어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 성(性)을 이루지 못함이 없게 하는 데 있는데, 중점이 그것을 알았으므로 공자가 탄식하며, ‘나는 점을 허여 하노라.’ 한 것이다.” 하였다. 선진(先進)
집의(集義) 《중용》에, 공자가 이르기를, “순(舜)은 대지(大知)이다. 묻기를 좋아하며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며 악한 것을 숨겨 주며 착한 것을 드러내어 주며 그 양단(兩端)을 잡아서 그 중(中)을 백성에게 쓰니, 그것이 순이 된 것이다.” 하였다.
○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이 깊은 산 속에 살아서 목석(木石)과 함께 살며 사슴 및 돼지와 놀 적에는 그가 깊은 산중의 야인(野人)과 다른 것이 얼마의 사이가 아니었는데, 그가 한 착한 말을 듣고, 한 착한 행실을 기억하고는 강하(江河)의 물을 터놓으매 주루루하여 능히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진심(盡心) 상(上)
○ 맹자가 말하기를, “자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말해 주면 기뻐하였으며, 우(禹)는 착한 말을 듣고 절하였으며, 순(舜)은 큼이 있으니 착함을 남과 더불어 같이하여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에게 취하여 착함을 하기를 즐겨하여 밭갈고 김을 매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음으로부터 임금이 됨에 이르기까지 남에게 취함이 아님이 없었으니, 남에게서 취하여 착함을 하는 것은 이것이 남들과 더불어 착함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남과 더불어 착함을 하는 것보다 큼이 없느니라.” 하였다. 주(註)에 “천하의 착함을 공(公)으로 하여 사(私)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 장(章)은 성현(聖賢)이 착함을 즐겨하는 성심이 처음부터 피차의 간격이 없으므로 남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넉넉하게 할 수가 있고, 나에게 있는 것이 남에게 미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전습록(傳習錄)》에,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순(舜)은 가까운 말을 살피고 꼴 베는 사람[芻蕘]에게 물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가까운 말을 마땅히 살펴야 하고 꼴 베는 사람에게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인 뒤에 이와 같이 함이 아니라, 이 지(知)의 발로되고 유행함이 광명하고 둥글고 맑아서 다시 걸리고 막힌 곳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대지(大知)라 이르는 바이다. 조금이라도 벌써 집착하고 뜻하고 기필함이 있으면 그 지(知)가 곧 작은 것이다. 강학(講學)하는 중에는 절로 버리고 취하고 분변함이 있으나, 그러나 마음에 나아가 착실히 공부를 하는데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하여야 옳은 것이다.” 하였다.

○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능한 것으로써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많은 것으로써 작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며 찼으면서도 비어 있는 것같이 하며 남이 나에게 범(犯)하여도 비교하지 않는 것은 전일에 나의 벗이 일찍이 여기에 종사하였었다.” 하였다. 주(註)에, “오직 의리(義理)의 무궁함을 알고 남과 나와의 간격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이것은 넉넉한 것은 자기에게 있고 부족한 것은 남에게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며 잘한 것은 자기에게 있고 못한 것은 남에게 있다고 기필하지 않은 것이니, 아(我)가 없는 지경에 이른 이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크게 하면 능히 천하의 물(物)을 나의 체(體)로 할 수 있는 것이니, 물에 체하지 못함이 있으면 마음이 밖이 있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보고 들음의 좁은 데에 그치나 성인은 성(性)을 다하므로 보고 들음으로써 그 마음을 구속하지 아니하며 천하를 볼 때에 한 물도 내가 아님이 없다. 맹자가 이르기를, ‘마음을 다하면 성(性)을 알고 하늘을 안다.’ 한 것이 이 때문이다. 하늘은 커서 밖이 없는 것이므로, 밖이 있는 마음은 족히 하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한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소인 소장부(小丈夫)에게 대하여는 그를 작게 볼 필요가 없으니, 그는 본시 악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만물이 일체(一體)라고 말함은 다 이 이치가 있다. 다만 그 속에서 왔으므로 나면 일시에 나서 다 이치를 완전히 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만 스스로 사사로워서 자기의 형체 위에서만 생각하므로 도리를 볼 적에 다른 물을 작다고 한다. 자기의 몸을 해방하여 모두 만물의 중에 일반으로 본다면 얼마나 크게 쾌활하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능히 이 한 개의 몸을 해방하여 공공(公共)으로 천지 만물의 중에 일반으로 놓아둔다면 무슨 구애됨이 있으리오. 비록 그 몸이 만 개인들 어찌 방해되리오. 석씨(釋氏)는 도리어 이 몸을 싫어하여 근진(根塵)을 다 버려야 한다 하니, 그것이 모두 스스로 사사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여(呂)
명도 선생은 그가 스스로 책임을 맡음이 중하므로 차라리 성인의 일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착함으로써 이름을 이루지 아니하려 하며 차라리 한 물(物)이라도 자기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걱정을 삼을지언정 일시의 이익으로써 자기의 공으로 삼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여(呂)
집의(集義) 《상서(商書)》 함유일덕(咸惟一德)에, “덕은 일정[常]한 스승이 없고 선(善)을 주장함이 스승이 되며, 선은 항상 한 주장이 없고 능히 일(一)함에 합한다.” 하였다. 《상서(商書)》
○ 맹자가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말을 꼭 신실하려고 기필하지 아니하며 행실을 꼭 과감하려고 기필하지 아니하고 오직 의(義)의 있는 바대로 하느니라.” 하였다. 이루(離婁) 하(下)
《논어》에, 미자(微子)는 떠나가고, 기자(箕子)는 종이 되고, 비간(比干)은 간(諫)하다가 죽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은(殷) 나라에 세 인한 이[三仁]가 있다.” 하였다.
○ 맹자가 말하기를, “아래 위(位)에 거하여서도 자기의 어진 것으로써 위에 있는 불초(不肖)한 이를 섬기지 아니하는 이는 백이(伯夷)요,다섯 번 탕(湯)에게 나아갔다가 다섯 번 걸(桀)에게 나아간 이는 이윤(伊尹)이요 더러운 임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작은 벼슬도 사양하지 아니한 이는 유하혜(柳下惠)이다. 삼자(三子)가 도가 같지 아니하나 그 귀추(歸趣)는 하나이다. 하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仁)이다. 군자는 인(仁)일 뿐이니, 어찌 반드시 같으리오?” 하였다. 고자(告子) 하(下)
《중용》에, “군자는 그 지위에서 그대로 행하고 그밖의 것을 원하지 아니하나니, 군자는 들어가는 데마다 자득(自得)하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하였다. 계사전(繫辭傳)에, “천지의 조화[化]를 범위(範圍)하여 허물되지 아니하며 만물을 곡진(曲盡)히 이루어 빠뜨리지 아니한다. 주야(晝夜)의 도에 통하여 안다. 그러므로 신(神)은 방(方)이 없고 역(易)은 체(體)가 없다.” 하였다. 상(上) 사(四) 본의(本義)에, “이것은 성인이 명에 이르는[至命] 일이다.” 하였다. 역(易)이라는 글은 글은 멀리할 수 없으며 도는 여러 번 옮겨서 변동하여 고정되지 않아 육위(六位)에 두루 유행하여 위아래가 일정함이 없어 강유(剛柔)가 서로 바뀌어져 일정한 표준이 될 수 없고 오직 변화함이 때에 맞추나니라. 하(下) 팔(八). 또 “성인이 천하 만물의 움직임을 보아 그 합하고 변통함을 보아서 거기에 맞추어 법과 예를 행하여 괘효(卦爻)마다 글을 붙여 그 길함과 흉함을 결단하였으니, 그러므로 효(爻)라 이른다.” 하고, 또 “화(化)하여 재정(裁定)하는 것은 변함에 있고 미루어 행하는 것은 통함에 있고 신(神)하게 하여 밝히는 것은 그 사람에 있고 묵(黙)하여 이루고 말하지 아니해도 신(信)함은 덕행에 있다.” 하였다. 상(上) 십이(十二).
공자 이르기를, “군자는 천하에 가(可)하다는 것도 없으며 불가하다는 것도 없어 오직 의에 좇을 것이니라.” 하였다. 이인(里仁) 공자가 이르기를, “함께 공부할 수 있어도 함께 도에 갈 수 없으며 함께 도에 갈 수 있어도 함께 입(立)할 수 없으며, 함께 입(立)할 수 있고도 권(權)할 수 없도다.” 하였다. 자한(子罕)
우(禹)와 직(稷)은 평세(平世)를 당하여 세 번 자기 집 문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으매, 공자가 어질다 하셨으며, 안자(顔子)가 난세(亂世)를 당하여 누항(陋巷)에 거하면서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매, 공자가 어질다 하셨다. 맹자가 말하기를, “우ㆍ직(禹稷)과 안회(顔回)가 도가 같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ㆍ직과 안자가 처지를 바꾸면 다 그러하리라.” 하였다. 이루(離婁) 하(下). 또 말하기를,“증자와 자사(子思)가 도가 같다. 증자는 스승이며 부형(父兄)이요, 자사는 신하며 미천(微賤)한 이다. 증자와 자사가 처지를 바꾸면 다 그러하리라.”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자막(子莫)은 중(中)을 잡았으니, 중을 잡음이 근사하나 중을 잡아 권도[權]가 없음은 하나를 고집함과 같다. 하나를 고집하는 것을 미워함은 그것이 도를 해치는 때문이니, 하나를 들어서 백 가지를 패하는 것이다.” 하였다. 진심(盡心) 상(上)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伯夷)와 이윤(伊尹)이 도가 같지 않다.” 하고, 또 말하기를,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며 그만둘 만하면 두고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속히 할 만하면 속히 하는 이는 공자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백 리의 땅을 차지하여 임금 노릇 하면 다 능히 제후(諸侯)에서 조회를 받아[朝] 천하를 얻을 수 있으며, 한 가지 불의(不義)한 짓을 행하고 한 사람의 죄없는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는 것은 다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같은 것이다.” 하였다. 공손추(公孫丑) 상(上).
○ 또 말하기를, “백이는 성(聖)의 청(淸)한 이요, 이윤은 성(聖)의 임(任)한 이요, 유하혜(柳下惠)는 성(聖)의 화(和)한 이요, 공자는 성(聖)의 시(時)한 이다. 공자를 집대성(集大成)이라 한다.” 하였다. 만장(萬章) 하(下)
《중용》에, 중니(仲尼)가 이르기를, “군자는 중용이요, 소인은 중용에 반(反)하니,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時中)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기탄(忌憚)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공자가 이르기를, “은벽(隱僻)한 이치를 찾고 괴이함을 행하는 것을 후세에 칭도함이 있으나 나는 하지 않겠노라. 군자가 도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 패하나, 나는 그칠 수 없노라. 군자는 중용에 의(依)하여 세상을 피하여 살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뉘우치지 않나니, 오직 성자(聖者)라야 능히 한다.” 하였다.

위는 도심정일(道心精一)의 용(用)이 된다.


 

황극(皇極) : 황(皇)은 크다는 뜻이요, 극(極)은 중(中)이란 뜻이다.
《논어》에 공자가 …… 아니하리오.” 하였다. : 계씨(季氏)가 정치하는 것을 물었으므로 공자가 이와 같이 답하였다.
천하에 성(性)이라고 …… 있으리라.” 하였다. : 경험으로 아는 사물의 법칙을 말한 것이다.
순(舜)이 사흉(四凶)을 베일 적에 : 순(舜)이 정치를 시작할 때에 공공(共工), 환도(驩兜), 곤(鯀), 삼묘(三苗) 네 악한 자를 베었다.
정자가 말하기를, …… 관(關) 이(伊) : 입관록(入關錄)에 기록된 이천(伊川)의 말이다.
천지에 참(參)하는 것 : 사람이 하늘과 땅에 끼어서 셋(參)이 된다는 뜻이다.
손발이 불인(不仁) : 손발이 마비되어 혈맥이 잘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자로(子路)가 말하기를, …… 원하나이다.” : 이 글 위에 공자가 먼저 안연(顔淵)천지의 화공(化工) : 만물을 만들어 내는 조물(造物)의 기술이란 뜻이다.
먼저 이자(二子)의 말을 보고 : 안연(顔淵) 계로(季路)가 먼저 공자의 물음에 대답하여 자기의 뜻을 말하였다.
중궁(仲弓)이 묻기를, …… 쓰겠습니까?” 하니 : 중궁이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매 공자는 현재(賢才)를 들어 쓰라 하였으므로 중궁이 다시 물은 것이다.
미자(微子)는 떠나가고, …… 간(諫)하다가 죽었다. : 은(殷) 나라 임금 주(紂)가 다섯 번 …… 이윤(伊尹)이요 : 하(夏) 나라 걸(桀)이 포학한 정치를 할 때에 걸의 신하되는 제후(諸侯)인 탕(湯)이 백성을 건질 생각으로 자기의 신하 이윤(伊尹)을 보내어 걸에게 가서 그를 착한 정치로 보좌하게 하였다가 걸이 고치지 않으므로 탕에게로 왔다가 다시 가기를 여러 번 하였다 한다.
육위(六位) : 《주역》 괘(卦)의 육효(六爻)를 말한 것이다.
“함께 공부할 수 …… 수 없도다.” : 때에 따라 적당히 변통하여 권도(權道)를 쓰는 것이다.
우(禹)와 직(稷)은 …… 어질다 하였다. : 우(禹)와 직(稷)은 순(舜)의 신하로서 우는 홍수(洪水)를 다스리고 직은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치노라고 바빴다 한다.
“증자와 자사(子思)가 …… 그러하리라.” 하였다. : 《맹자》의 본문에는 이 글 위에 증자가 무성(武城)에 있을 적에 월(越) 나라가 침입하였는데 혹자가 “왜 가지 않습니까?” 하니 “내 방에 사람을 넣지 말아라.” 하고는 피해 갔다가 난이 평정되자 돌아왔다. 자사(子思)는 위(衛) 나라에 있을 적에 제(齊) 나라가 침입하였는데, 혹자가, “왜 가지 않습니까?” 하니, “내가 가버리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지키리오.” 한 말이 있고 계속하여 이 글이 있다.
範五皇極章)]

하곡집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경(經)

하(下)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으로 나누어 4절을 만들었음.

성의(誠意) 1절(1節)

 

[역건구이한사존성장 (易乾九二閑邪存誠章)]

 

문언전(文言傳)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어 대인(大人)을 봄이 이롭다 함은 무엇을 이름인가?”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용의 덕으로 정중(正中)한 것이다. 떳떳한 말을 신실히 하며 떳떳한 행실을 삼가하여 사특함을 막아 그 성(誠)을 존(存)하며 세상을 착하게 하고도 자랑하지 아니하면 덕이 넓어서 교화시킨다. 《주역》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매 대인을 봄이 이롭다.’는 것은 임금의 덕이다.” 하였다. 《본의(本義)》에 이르기를, “사특함을 막아서 그 성(誠)을 존(存)한다는 것은 싫음이 없고 또한 보존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공자 이르기를, “시(詩) 3백 편을 한마디로 다할 수 있으니, ‘생각이 사특함이 없다.[思無邪]’ 한 것이다.” 하였다. 위정(爲政)
○ 정자가 말하기를, “생각이 사특함이 없는 것은 성(誠)이다.” 하였다. 소일설(少日說)
정자가 말하기를, “《주역》에 충신(忠信)은 덕에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사특함을 막으면[閑邪] 성(誠)이 저절로 존(存)하고, 성(誠)이 존하면 이에 충신(忠信)이 된다. 어떤 것이 사특함을 막는 것인가? 예(禮)가 아니거든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면 이것이 사특함을 막는 것이니라.” 하였다. 공경하여 안을 곧게 하는 데는 모름지기 임금은 임금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할 것이니, 이것인 얼마나 직절(直截)한 것이랴?” 하였다. 여(呂)
집의(集義)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은 얼마 안 되는데 서민(庶民)은 그것을 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존(存)하느니라, 순(舜)은 서물(庶物)에 밝고 인륜(人倫)에 살피나니 인의(仁義)로 말미암아서 행하는 것이요, 인의를 행하는 것은 아니리라.”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대인(大人)이란 것은 그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니라.” 하였다. 이루(離婁) 하(下)
맹자가 말하기를, “요ㆍ순(堯舜)은 성(性)대로 한 자요, 탕ㆍ무(湯武)는 성을 회복한 자이다. 용모와 행동이 예(禮)에 맞는 것은 덕의 지극함이다. 죽은 이를 곡(哭)하기를 슬피 함이 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덕을 떳떳하게 하여 굽히지 아니함이 녹(祿)을 구하는 것이 아니며 말을 반드시 신실하게 함이 억지로 행실을 바르게 하려고 함이 아니다. 군자는 법도대로 행하여 명(命)을 기다릴 뿐이니라.” 하였다. 진심(盡心) 하(下)
명도가 말하기를, “개보(介甫)가 말하되, ‘도가 이러하고 이러하다는 것을 알면 벌써 도와는 떠난 것이다. 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만 본분(本分)의 일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하였고, 맹자의 말에 ‘요순은 성(性)대로 하여 인으로 말미암아[由] 행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심상(尋常)한 것이 아니리오. 《주역》에 이르되, ‘사람의 도를 세웠으니 인이요 의다.’ 하였으니, 성자(性字)와 유자(由字)도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단백(李端伯)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다만 이 지견(知見)이 통투(通透)하지 못한 말에 잘못된 때문이다. 사람이 이미 능히 일체의 일이 모두 마땅히 할 바임을 알고 보면[知見] 반드시 착의(著意)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 착의하자마자 곧 사심(私心)이 있는 것이 이 한 점(點)의 의기(意氣)가 능히 얼마 동안이나 가랴?” 하였다. 이천이 임종(臨終)할 때 문인이 묻기를, “선생의 평일에 공부한 것이 정히 오늘에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병을 참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쓴다고 말하면 곧 틀린 것이다.” 하였다.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공자가 이르기를, ‘인자(仁者)는 인(仁)에 편안히 하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하셨다. 인자는 마음이 안과 밖, 멀고 가까운 것, 정(精)함과 추(麤)함의 간격이 없어서 존(存)하는 바가 없어도 저절로 잃어지지[亡] 아니하며 정리하는 바가 없어도 저절로 요란하지 아니하여, 눈의 봄과, 귀의 들음과, 손의 쥠과, 발의 행함과 같은 것이다. 지자(知者)는 본 바가 있다고 하면 옳지마는 얻은 바가 있다고 하면 옳지 아니하다. 존(存)하는 바가 있어야 잃어지지 아니하며 정리하는 바가 있어야 요란하지 않는 것은 능히 뜻[意]이 없지 못한 것이다. 인에 편안하면 하나요, 인을 이롭게 여기면 둘이 된 것이다.” 이인(里仁)
정자가 말하기를, “전일에 주무숙(周茂叔)에게 수학(受學)하였더니, 그는 매양 나로 하여금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거워한 곳에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가를 찾으라.” 하였다.
선우선(鮮于侁)은, 안자가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을 해설하기를, “도를 즐거워할 뿐이다.” 하였다. 이천이 말하기를, “가령 안자가 도로써 즐거움을 삼았다고 하면 안자가 아니다.” 하였다. 옹야(雍也) 묻기를, “이천이 말하기를, ‘만일 도로써 즐거움을 삼았다면 족히 안자가 될 수 없다.’ 하고는, 또 도리어, ‘안자의 즐거워한 바는 인(仁)뿐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을 즐거워함이 아니라, 오직 인(仁)한 고로 능히 즐거워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다만 지금 사람들이 도를 즐거워한다고 말한 것이 얕을 뿐이다. 실은 도를 즐거워한다고 말하여도 역시 해될 것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자의 말에, ‘사람이 능히 자기를 이기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하여 우러러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구부려서는 사람에 부끄럽지 않으니, 그 즐거움을 가히 알 수 있다. 중단함이 있으면 기운이 풀어진다 하였다.”고 하였다.
정자가 조 여림(趙汝霖)으로 더불어, “정치를 하는 데는 일에 다다라서 착심(著心)하는 것을 기(忌)한다.”고 논하다가, “이것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오직 서(恕)에는 착심하여야 한다.” 하였다. 약(籲)이 묻기를,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가 말한 것은 착심하여 힘써서 서(恕)를 행하면 옳지마는, 착심하여 서(恕)함을 구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 서(恕)는 스스로 가진 이치이니 나의 이 마음을 가지고 저 사람에게 행할 뿐이니,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의론은 서(恕)를 하는 데 마음이 있으니, 마침내 반드시 서(恕)할 것이다.” 하였다.
집의(集義) 맹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나니 그 성을 아는 자는 하늘을 안다. 그 마음을 존(存)하여 그 성을 기르는[養] 것은 하늘을 섬기는 바이며 요사[殀]함과 오래 삶에 의심하지 않아서 몸을 닦아서 기다림은 입명(立命)하는 바이니라.”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만일 존(存)하고 양(養)하지 못하면 다만 말[說話]뿐이다.” 하였다.
태갑(太甲 《서경》의 편명)에 이르기를, “이 하늘의 밝은 명[明命]을 돌아보라.” 하였다. 《대학(大學)》
○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백성 보기를 상처[傷]가 있는 것같이 하며 도를 바라보고도 보지 못한 것같이 하셨다.” 하였다. 이루(離婁) 하(下) 《논어》에 안연(顔淵)은 말하되, “우뚝이 선 것이 있는 듯하여서 비록 좇으려 하나 할 수 없다.” 하였다. 위에 보인다.
《중용》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귀신의 덕이 거룩하구나.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물(物)의 체(體)가 되어 예외가 없도다.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齋]하여 깨끗이 하고 예복(禮服)을 입게 하여 유동(流動)하여 그 위에 있는 것 같으며 그 좌우에 있는 것 같다. 시(詩)에 이르되, ‘신(神)의 이르는 것을 가히 헤아리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싫어하며 태만하랴?’ 하였다. 대저 은미(隱微)함의 나타남과 성(誠)의 가리울 수 없음이 이와 같을진져!” 하였다.
공자가 이르기를, “나는 말이 없고자 하노라.” 하니,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부자[子]께서 만일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소자(小子)들이 어찌 배우겠습니까?” 하니 공자는,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리요마는 사시(四時)가 행하며 백물(百物)이 나느니라. 하늘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하였다. 양화(陽貨)
《중용》에, “시(詩)에 이르기를, ‘나아가 신(神)에게 감동되게 하면 말이 없어도 다툴 리가 있지 아니하다.’ 하였다. 이러므로 군자는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이 권면[勉]하며 성내지 않아도 백성이 도끼보다도 무서워하느니라. 시에 이르기를, ‘깊고 그윽한 덕이 어찌 나타나지 아니하랴? 제후(諸侯)들이 법받는다.’ 하였다. 이러므로 군자는 돈독히 공경하매 천하가 다스려지느니라. 시에 이르기를, ‘내가 밝은 덕을 품었으며 소리와 빛을 크게 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공자가 이르기를,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있어서는 말단[末]이다. 시에 이르기를, 덕이 미세(微細)하기가 털과 같다 하였으니, 털도 오히려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라야 지극하니라.” 하였다.

위는 자기를 이기어 예를 회복함[克己復禮]을 요약한 공부가 된다.

 

 

생각이 사특함이 없다.[思無邪] : 사무사(思無邪)는 《시경》에 있는 한 구절인데, 이 말이 《시경》 전체의 뜻을 포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안자가 그 즐거움을 …… 뿐이다.” 하였다. : 《논어》에, “회(回)는 한 바구니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데 남들 같으면 그 걱정을 견디지 못할 터인데 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도다.” 하였다.

 

하곡집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경(經)

하(下)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으로 나누어 4절을 만들었음.

1절(一節)

[역계사건곤역간장(易繫辭乾坤易簡章)]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건(乾)은 크나큰 처음을 알며 곤(坤)은 물(物)을 성취시키게 한다. 건은 쉬워서 아는 것이고 곤은 간략[簡]하므로 능하나니 쉬우면 알기가 쉽고 간략하면 따르기가 쉽다. 알기가 쉬우면 친함이 있으니, 친함이 있으면 오래갈 수 있고 오래갈 수 있으면 현인(賢人)의 덕이다. 따르기가 쉬우면 공이 있고 공이 있으면 현인의 일삼는 일이다. 쉽고 간략하면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고 천하의 이치가 얻어져서 그 중에 위치를 이루느니라.” 하였다. 일장(一章)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하니, 자공(子貢)이 묻기를, “어찌하여 부자(夫子)를 아는 이가 없나이까?” 하매, 공자가 이르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아니하고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통달하나니, 나를 아는 이는 오직 하늘일진져.”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통달한다는 것은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무릇 아래에서 인사(人事)를 배우는 것이 곧 위로는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말과 같이 익히면서도 살피지 못하면 또한 능히 위로 통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헌문(憲問)
집의(集義) 《중용》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도로써 몸을 닦으며 인(仁)으로써 도를 닦는 것이니, 인(仁)이란 것은 인(人)이니 친(親)을 친(親)함이 큼이 되고 의(義)는 마땅함[宜]이니,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이 큼이 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예(禮)의 생기는 바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사람을 알지 못해서는 아니되며 하늘을 알지 못해서는 아니된다. 천하의 통달하는 도[達道]는 다섯인데 행하는 바는 셋이니, 군신(君臣)이며 부자(父子)이며 부부(夫婦)이며 형제(兄弟)며 벗과의 사귐이란 다섯 가지는 천하의 통한 도[達道]이며 지(知)ㆍ인(仁)ㆍ용(勇)의 세 가지는 천하의 통하는 덕[達德]이지만 그 행하게 하는것은 하나이니라. 혹 날 때부터 알고[生而知之] 혹 배워서 알며[學而知之] 혹 애를 써서 아나니[困而知] 그 아는 데에 미쳐서는 하나이다. 혹 편안히 행하고 혹 이롭게 여겨서 좋아하여 행하며 혹 힘써서 억지로 행하지만 그 성취함에 이르러서는 하나인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배우기를 좋아함은 지(知)에 가깝고 힘껏 행함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까운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을 줄 알고 몸을 닦을 줄 알면 사람을 다스릴 줄 알며 천하 국가를 다스릴 줄 알 것이다.
○ 또 이르기를, “아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합하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고, 윗사람에게 합하는 데는 도가 있으니 벗에게 신(信)이 있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도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벗에게 신(信)이 있는 데도 도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順)하지 못하면 벗에게도 신(信)이 있지 못한다. 어버이에게 순함에도 도가 있으니 몸에 반성하여 정성스럽지 못하면 어버이에게도 순하지 못하느니라.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도가 있으니 선(善)에 밝지 못하다면 몸에 정성스럽지 못하느니라. 성(誠)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성(誠)하게 하는 것[誠之者]은 사람의 도이다. 성(誠)이란 것은 힘쓰지 않아도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서 조용히 도에 맞는 것이니 성인(聖人)이요, 성(誠)하게 하는 것은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것이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이를 넓게 배우고 이를 살펴 물으며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며 돈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울진댄 잘 하지 못한다면 그만두지 않는 것이니, 남이 하나를 능하거든 나는 백을 능하며 남이 열을 능하거든 나는 천을 능할 것이니, 과연 이 방법을 잘한다면 비록 어리석은 이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며 비록 유약한 이라도 반드시 강(强)해지리라.”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성(誠)으로부터 명(明)하는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부터 성(誠)하는 것을 교(敎)라 이르나니, 성(誠)하면 명(明)하고 명(明)하면 성(誠)하느니라.” 하고, 또 이르기를,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함이 되고 능히 그 성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성(性)을 다하고, 능히 사람의 성을 다하면 능히 물(物)의 성을 다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그 다음은 한구석을 미루어 극도로 하는 것[致]이니 한구석을 미루어 극도로 하면 능히 성(誠)이 있게 된다.” 하였다.
명도가 말하기를, “지(知)가 지(至)하면 곧 뜻이 성(誠)해지나니 만약 지가 지함이[知至] 있어도 성(誠)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지(知)가 지(至)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악정자(樂正子)는 착한 사람이며 신(信)한 사람이다.” 하였다. “어떤 것을 착하다 하며 어떤 것을 신이라 하는가?” 하니, “착한 것은 반드시 하고자 할 만한 것이니 하고자 할 만한 것을 착함이라 하고, 그 착함을 실지로 자기에게 가진 것을 신(信)이라 하고, 그것이 충실(充實)한 것을 아름다움[美]이라 하며, 충실하여 광휘(光輝)가 있는 것을 큼[大]이라 하고, 커서 화(化)한 것을 성(聖)이라 하며, 성(聖)하여 알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이른다.” 하였다. 진심(盡心) 하(下) 정자가 말하기를, “하고자 할 만한 것을 착함이라 이른다고 한 말은 곧 원(元)이란 것은 착함의 으뜸[長]이다. 한 말과 같은 이치이다.” 하였다. 동록(東錄)
위는 도심 정일(道心精一)의 정(精)이 된다.

[주D-001]정자가 말하기를, …… 으뜸[長]이다. : 《주역》의 원, 형, 이, 정(元亨利貞)을 해석한 공자의 문언(文言)을 인용한 말이다.

하곡집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경(經)

 하(下)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으로 나누어 4절을 만들었음.

 

 

[역건구삼진덕수업장(易乾九三進德修業章)]

 

문언전(文言傳)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건건(乾乾)하여 저녁에 두려워하고 걱정하여 위태로울 것같이 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한 것은 어쩐 말인가?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덕에 나아가고 공업(功業)을 닦나니 충신(忠信)함은 덕에 나아가는 바이며, 문장[辭]을 닦아 그 정성[誠]을 세움은 업에 거(居)하는 바이다. 지극한 것을 알아서 이르면[至] 기미를 알 수 있으며 마지막을 알아서 마치면 의(義)를 존(存)할 수 있다. 이러므로 윗자리에 있어서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근심하지 아니하므로 건건(乾乾)하여 때에 따라 두려워하니 비록 위태하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정전(程傳)에 이르기를, “안으로 충신(忠信)을 쌓음은 덕에 나아가는 바이요, 말은 할 말만을 하고 뜻을 돈독히 함은 공업에 거(居)하는 바요.”, 지극함을 알아서 이르는 것은 앎을 이루는[致至] 것이니, 맹자의 이른바, “그 처음 소리[始條理]는 지(知)의 일이라는 것이요, 마지막을 알아서 마치는 것은 힘써 행하는 것이니, 맹자의 이른바, 마지막 조리는 성(聖)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지극함을 알아서 이르는 것은 이것이 길할 징조[吉兆]가 먼저 보인 것이므로 기미를 알 수 있다.” 하였고, “마지막에 알아서 마치면 의를 존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지극함을 알아서 이르는 것은 지(知)를 주(主)한 것이요, 마지막을 알아 마치는 것은 마지막을 주(主)한 것이다.” 하였다.
《주자 본의(朱子本義)》에 이르기를, “충신은 마음에 주(主)한 것이니, 한 생각도 정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문장을 닦음[修辭]은 밖에 나타난 것이니 한 말도 진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비록 충신한 마음이 있어도 수사(修辭)하여 성(誠)을 세우지 아니하면 거(居)할 수 없는 것이다. 지극함을 알고서 이르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일이요, 마지막을 알고서 마침은 공업에 거하는 일이니, 종일 건건하여 저녁에도 두려워함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수사하여 성(誠)을 세운다는 말을 자세히 알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니, 능히 말[辭]을 닦아 살피는 것이 곧 성을 세우기를 요(要)하는 것이다. 만약 언사(言辭)를 수식(修飾)하기로만 마음을 가진다면 다만 거짓을 위하는 것이다. 만약 그 언사를 닦는 것이 정히 자기의 성의를 세우기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이 자기가 공경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하여 밖을 모나게 하는 실지의 일에 극히 지당[體當]한 것이다. 도가 넓고 넓은데 어디에서 착수하리요. 오직 성(誠)을 세워야 겨우 근거할 곳이 있을 것이요, 근거할 곳이 있어야 업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종일토록 건건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다만 충신이 덕에 나아가는 바가 된다는 것이 실로 착수할 곳이 되고 언사를 닦아 그 정성을 세운다는 것이 실로 업을 닦는 것이 된다.
집의(集義) 《중용》에 이르기를, “진실로 지극한 도가 아니면 지극한 도가 모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問學)으로 말미암으며 넓고 큰 것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며, 높고 밝은 것을 지극히 하고 중용으로 옛것을 찾아서 새것을 알며 도탑고 두터이 하여 예를 높이니라.” 하였다.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순순(循循)히 사람을 잘 가르치어 나를 문(文)으로써 넓혀 주시며 나를 예(禮)로써 요약하여 주시었다.” 하였다. 위에 보인다.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가 문을 넓게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면 또한 도에 배치[畔]되지 않을 수 있을진저.” 하였다. 옹야(雍也)
정자가 말하기를, “학(學)은 다만 깊이 힘써서 속으로[裏] 가까이하여 자기에게 부착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 말이 충신되고 행실이 돈독히 공경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라도 행하겠지마는, 말이 충신되지 못하고 행실이 돈독히 공경하지 못하면 비록 제 마을 제 고을엔들 행하랴. 이 말이 설 적에 그것이 앞에 있는 듯 보이며 수레에 있을 적에는 말의 멍에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리니, 그런 연후에라야 행하리라.’ 하였으니, 다만 이것은 학의 바탕이 아름다운 자는 밝기를 다하여 찌꺼기가 문득 녹아져서 친지와 동체(同體)인 것이요, 그 다음은 오직 엄하고 공경하여 지키고 기르는 것이니, 그 이르는 데에 있어서는 하나이니라.” 하였다. 위령공(衛靈公) 명도(明道)
○ 또한 이르기를, “넓게 배워서 뜻을 돈독히 하고 간절히 물어서 가까이 생각하는 것을 어찌하여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학자(學者)들이 생각하여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도리이다.” 하였다. 자장(子張) 명도(明道)
정자가 말하기를, “성현의 천만 마디 말이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방심(放心)을 요약하고 반복하여 몸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니, 위로 향하여 찾아 올라가게 하는 것이므로 아래에서 배워 위로 통달하는 것이다.” 하였다. 명도(明道)
정자가 말하기를, “천리(天理)라고 하는 것은 이 한 개의 도리인데, 다시 무슨 다할 것이 있으리오. 그것이 원래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백 가지 이치가 갖추어 있으니, 이 천리를 얻은 것을 대인(大人)이라 성신(聖神)이다.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학이란 것은 먼저 모름지기 인(仁)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인이란 것은 물(物)과 더불어 동체(同體)인 것이다. 이 이치를 알게 됨으로서 정성과 공경함이 있게 될 뿐이니라.” 하였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모름지기 몸에 돌이켜 정성스러워야 할 것이다. 만약 돌이켜 보아 정성스럽지 못하면 오히려 나와 물의 두 가지가 상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정완(訂頑)에 이 체(體)를 상세히 말하였으니, “이 뜻을 가지[存]면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맹자의 말대로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으되 마음에 꼭 기필하지는 말며 털끝만한 힘도 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그것을 있[存]게 하는 도리이다. 만약 존(存)하면 곧 얻음이 있을 것이니, 대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원래 상실되지 않은 것인데, 옛날의 습심(習心)이 제거되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이 마음을 존하고 익힘이 오래되면 전날의 습성[習]을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치는 지극히 요약된 것이니, 오직 잘 지키지 못함이 걱정인 것이다. 이미 잘 체득(體得)하여 즐거워한다면 또한 잘 지키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다만 한 개의 천리(天理)를 가졌으니, 이것을 잘 간직하지 못하면 다시 무슨 사람 노릇을 하리오.” 하였다.
○ 어떤 이가 함양(涵養)하는 방법을 물으니, 말하기를, “만약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다시 무슨 함양을 말하리오.” 하였다. 따라서 맹자가 말한 그 뜻[志]을 가질 것을 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다만 이것이야말로 사의(私意)인 것이다. 그러나 학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논어》에서 말한 바 석 달 동안 인(仁)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덕이 성취되는 일은 아니다.” 하였다.

위는 넓히되 요약하여 예로 돌이키[博約復禮]는 학이 되는 것이다.

주자 본의(朱子本義) : 주역을 해석한 책으로 정자는 《역전(易傳)》을 지었고, 주자는 다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지었다.
정완(訂頑) : 정완이란 것은 완(頑)한 자를 고쳐 준다는 뜻으로 장자(張子)가 지은 것인데, 뒤에 서명(西銘)이라고 제목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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