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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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휘는 현광(顯光)이고, 자는 덕회(德晦)고, 별호는 여헌이며, 성은 장씨(張氏)이다. 고려의 상장군(上將軍) 김용(金用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시조. 본성은 장(張))이 처음으로 옥산(玉山)에 본적(本籍)을 두었다.
12세(世)에 와서 부윤(府尹)인 장안세(張安世)가 있었으며, 부윤은 좌윤(左尹) 장중양(張仲陽)을 낳았고, 좌윤은 장령(掌令) 장수(張脩)를 낳았다. 장수는 곧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선생에게는 6세조(世祖)가 되는 분이다. 증조는 증(贈) 좌승지(左承旨) 장준(張俊)이며, 조부는 증(贈) 이조 참판 장계증(張繼曾)이고, 부친은 증(贈) 이조 판서 장열(張烈)이다. 모친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 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따님이다.
선생은 명 나라 숙황제(肅皇帝 세종(世宗)) 가정(嘉靖) 33년(1554, 명종9) 정월 계해일에 출생하였는데, 선생이 8세 때에 그 부친이 돌아갔다. 17, 8세에 학문이 이미 통달하고 경술(經術)에 몰두하여 《우주요괄십도(宇宙要括十圖)》를 지었고, 23세에 재주와 학식으로 천거되었다.
허잠(許潛 호는 한천(寒泉), 자는 경량(景亮), 시호는 충정(忠貞))이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을 만나서 남중(南中)에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를 묻자, 정 선생이 말하기를,
“공자 문하에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자(顔子) 한 사람뿐입니다. 어찌 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장현광이란 사람이 배움을 구하고 도에 뜻을 두니, 후일에 우리의 스승이 될 사람입니다.”
하였다. 28세에 모친이 별세하였는데 상제수록(喪制手錄)한 것이 있다. 유 문충공(柳文忠公 문충은 유성룡(柳成龍)의 시호, 호는 서애(西厓), 자는 이현(而見))이 여러 번 상에게 추천한 일이 있었는데, 서로 상면하게 되자 아들 유진(柳袗)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만력(萬曆) 22년(1594, 선조27) 봄에 예빈 참봉(禮賓參奉)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또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1595, 선조28) 특별히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 문인 정사진(鄭四震)이 출처(出處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집에 있는 것)에 관한 의의를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배워서 학식이 넉넉하면 벼슬하고 예우로 대우하면 벼슬하고, 가세(家勢)가 구차하고 부모가 연로하면 벼슬하는 것이다. 벼슬하지 않는 것에도 두 가지 수치가 있다. 제 몸만을 깨끗이하고자 하여 대륜(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 한 가지 수치요, 짐짓 그 명성을 위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것이 두 번째의 수치이다.”
하였다. 현령이 되자 부로(父老)들과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모임을 약조하고, 각자 백성의 고통과 부실한 것들을 말하게 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효제(孝弟)를 도탑게 하고 염치(廉恥)를 권장하고 덕행을 높이고 패속(敗俗)을 일소하였으니, 모두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옮기는 큰 모범이었다. 2년 만에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돌아오니, 임의로 관직을 버렸다 하여 법으로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경연관(經筵官)이 상에게 아뢰어 곧 석방되었다. 그해 여름에 영양(永陽 영천의 옛 이름)의 입암(立嵒)의 천석(泉石)을 유람하였다.
만력 29년(1601, 선조34)에 상이 경서(經書)의 교정을 명하였는데, 선생이 부름을 받았다. 현과 도에 명하여 말을 공급하도록 하였고, 연이어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어 《주역(周易)》의 교정에 참여하였고, 형조 좌랑에 옮겨졌으나 사양하고 돌아왔다. 만력 31년(1603, 선조36)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몇 달이 못 되어 읍에 변이 생기자 스스로 죄상을 탄핵하고 돌아왔다. 만력 36년(1608, 광해군 즉위년) 광해(光海)가 새로 왕위에 오르자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제수되고, 만력 38년(1610, 광해군2)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력 43년(1615, 광해군7) 관의(冠儀)를 편수하였다. 만력 48년(1620, 광해군12)에 정 선생(한강(寒岡)을 말함)이 별세하자 선생이 여러 제자(弟子)와 상례(喪禮)를 강론하였다. 가을에 현황제(顯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승하하자 선생이 항곡(巷哭 거리에서 곡함)하고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이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 선조26)의 난리를 만나면서도 부자가 각각 도리를 다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가 황제의 힘에 의한 것이다.”
하였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3년(1623, 인조 원년) 인조대왕이 큰 난을 극복하고 제일 먼저 초야에 숨은 선비를 찾았는데, 선생이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늙었다는 것으로 사직하자 특별히 성균관 사업(司業)을 제수하였다.
국조(國朝)에 처음에는 이런 직제가 없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특별히 징사(徵士)를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다시 지평으로 제수되었으나 중도(中道)에서 병이 나서 사직하였다. 다음해(1624, 인조2) 봄에 승급되어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상이 남으로 파천했다가, 이괄이 죽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이 행재소(行在所)까지 이르지 못하고 어가(御駕)를 뒤좇아 도하(都下)에 이르니, 또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상이 불러들여 정치하는 법을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것은 전하께서 오직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 칭찬하고 예물을 후히 하사하였다. 곧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선생은 소(疏)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서 ‘공검(恭儉), 절용(節用), 돈덕(敦德), 생형(省刑)할 것’을 아뢰고 조정에 나아가 사례하니, 상이 또 불러들여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부합하기 어려움을 말하였다. 선생이 이에 아뢰기를,
“예부터 변화시키지 못할 인심은 없으며, 돌이키지 못할 세도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서로 더불어 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다시 이르기를,
“중외(中外)의 인심이 원망이 많은데 어떻게 대처해야겠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온 나라 백성이 지난날의 잔인하고 횡포한 정치(광해군의 정치를 말함)로 곤경에 빠져서 그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소생되지 못하고 있는 차에, 도성에서는 새로 큰 난을 겪었으므로 소란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서로 의심만 품고 있습니다. 상께서 이들을 가엾게 여겨 지극히 슬퍼하시는 전교를 내리시고 이들의 어려움을 성심으로 도우려는 뜻을 보이신다면 인심은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을 모시고 있는 사람 중에서,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다.”
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큰 법도 안에서 은연중에 감화되게 한다면 모반을 꾀하는 자는 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도성(都城)은 사방(四方)의 중심이 되는 곳이니, 성 백성이 안정되면 사방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높이 여겨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특히 공조 참의에 제수하고 이르기를,
“이것이 작은 관직이라 하여 사양치 말라. 마땅히 크게 등용하리라.”
하였다. 후일에 특명으로 주강(晝講)에 입시하였고 강이 파하자, 세자가 뵙기를 청하고 빈례(賓禮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예우함)로 대우하였다. 물러 나와서 상소로 돌아갈 것을 아뢰고 즉시 떠나니, 상이 잇달아 명을 내려 뒤쫓게 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떠난 뒤였으므로 기성(圻省 경기도 감영(監營))에 명하여 말을 공급하여 호송토록 하였다. 이 뒤로 이조 참의, 동부승지 등을 연이어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계운궁(啓運宮 원종비(元宗妃)의 궁호(宮號))의 상을 만났는데 마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에 들어가 사례하고 상소로 사직하였으나, 도리어 대사헌에 옮겨 제수되었다. 잇달아 상소하여 간곡히 사직하고자 하니, 세 번 고(告)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졸곡(卒哭 초상 뒤 3개월 만의 강일(剛日)에 지내는 제사)을 마치고 떠날 무렵 상소하여 건극(建極)의 근본을 아뢰고, 또 이어서 아뢰기를,
“뜻이 낮으면 도(道)도 낮은 것이요, 도가 낮으면 사업(事業)이 낮으며, 사업이 낮으면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웃 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천지(天地)ㆍ귀신(鬼神)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상이 불러 보니, 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관해서 수백 언을 올렸다. 말을 마치고 나오니, 상이 전송하면서 이르기를,
“세자를 가르치라.”
하자, 선생이 세자에게 고하기를,
“세자께서는
옛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던 나이가 되셨습니다. 학문하는 데는 뜻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해(1627, 인조5)에 오랑캐가 침략하자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의 명을 받았다. 뒤에 오랑캐가 물러가자 상소하여 정치의 폐단에 대해 진술하고, 이어서 ‘사리 편사(私利偏邪)’에 관한 경계문을 지어 바쳤다. 8년(1628, 인조6)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환란을 잊지 않으며 기울어지는 것을 잊지 않으신 뒤에야 군도(君道)를 다할 수 있으며, 조정의 신하는 자신을 잊고 집을 잊고 사사로움을 잊은 뒤에야 신도(臣道)를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덕행이 많은 원로(元老)로 늘 그대와 함께 조정에 있고 싶은데 되지 않으니, 어찌 과인이 우둔하고 정성이 부족한 탓이 아니리요? 경을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삼아 세자를 교육하려는 것이요, 정무를 맡기려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10년(1630, 인조8)에 또 대사헌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이 장묘(章廟 원종(元宗))를 추존(追尊)하자는 논의를 하자, 선생은 추존함이 예(禮)가 아님을 상소하기를,
“손자로서 조부를 계승하는 것은 끊긴 것을 이어 주는 상도(常道)입니다.”
하였다. 12년(1632, 인조10)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5월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상(喪)을 당하자 상소하기를,
“양음(亮陰 천자(天子)가 부모상을 당해 복(服)을 입는 것) 중에는 지극한 덕을 충만히 기르고 큰 근본을 세워서
기천영명(祈天永命)하는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해(1633, 인조11) 7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자 선생이 상진(上震)ㆍ하진(下震) 16괘(卦)를 올려 스스로 반성하고 수양할 계훈(戒訓)을 진술하였다. 14년(1634, 인조12)에 특별히 자헌대부로 승급되고, 곧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양하였다. 당시에 장묘(章廟)를 부묘(祔廟)하는 일로 쟁론(爭論)한 사람들이 모두 죄를 입자, 선생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낳아 주신 부모에게 효성을 드리는 성의(誠意)는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예에 지나침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묘하는 것은 예로부터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는 것이니, 이러한 처사는 효도하려다가 효를 상하게 하고 인(仁)하려다가 인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다음해(1635, 인조13)에 우참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년(1636, 인조14)에 지중추부사에 임명하고 상의 부르심이 있었는데 예의가 지극하였다. 선생이 중로에 병으로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약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조정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폐단(弊端) 수백 언을 아뢰기를,
“우주간에 도리(道理)는 하나뿐입니다. 선악이 각각 한 유(類)가 되고 사정(邪正)이 각각 한 유가 되며, 시비(是非)가 각각 한 유가 되는 것이니, 선악ㆍ사정ㆍ시비가 병립(並立)ㆍ병작(並作)ㆍ병행(並行)하면서 이 도리와 이치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건극(建極)을 다하지 못하여 모든 신하들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해 12월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변이 일어났다. 선생은 행조(行朝)가 막히고 명이 시행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주군(州郡)의 부로에게 알려 각각 거병(擧兵)하여 임금을 뵙게 하였으며, 또한 재력을 내어서 군량을 도왔다. 17년(1637, 인조15) 2월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선생은 선인(先人)의 묘소를 하직하고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살았다. 입암은 동해(東海)에 위치하고 있는데 입암의 이름을 입탁암(立卓嵒)이라 개명하였으니, 자신의 소신을 붙여 이름한 것이다.
7월에 문인에게 심의(深衣)를 짓도록 명하고 9월 임신일에 선생이 만욱재(晩勖齋)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4세였다. 그 전날 저녁에 뇌우(雷雨)가 크게 몰아쳐서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범람하였다. 상이 부고(訃告)를 듣고 조회와 민간의 저자를 이틀간 파하도록 하였으며, 본도(本道)에서 상사를 돕게 하였다. 을미일에 발인(發引)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 상여를 따르는 선비가 5백여 인이 넘었으며, 상이 특히 사제(賜祭)하였다. 그해 12월 계유일에 금오산(金烏山) 아래 오산동(吳山洞 지금의 오태)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전(前) 부인인 정씨(鄭氏)는 증(贈) 참찬(參贊) 정괄(鄭适)의 따님으로 일찍 별세하였으며, 따님이 한 분 있는데, 사위는 참봉(參奉) 박진경(朴晉慶)이다. 후취한 부인 송씨(宋氏)는 충순위(忠順衛) 송정(宋淨)의 따님인데 선생이 작고하기 8년 전에 별세하였다. 아들이 없어 종제(從弟)인 장현도(張顯道)의 아들 장응일(張應一)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사위 박진경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박기(朴愭)ㆍ박황(朴愰)ㆍ박협(朴悏)ㆍ박증(朴憕)ㆍ박서(朴㥠) 등이며, 박황은 현감이다. 딸이 셋인데 사위는 임경윤(任景尹)ㆍ이현(李垷)ㆍ조하영(曺夏英)이며 이현은 교관(敎官)이다.
장응일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영(張
)ㆍ장건(張鍵)ㆍ장옥(張鈺)이며, 장영은 별좌(別坐)요, 장건은 지평(持平)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임고(臨皐)ㆍ천곡(川谷)ㆍ금오(金烏)에서 모두 제사하였다. 부지암(不知嵒)ㆍ입암(立嵒)ㆍ원당(元堂)에 모두 사당이 있다.
효종 6년(1655)에 경연관 오준(吳竣 호는 죽남(竹南), 자는 여완(汝完))이 상에게 아뢰어 좌찬성에 추작(追爵)되었다. 8년 뒤에 경연관 오정위(吳挺緯 자는 군서(軍瑞), 호는 동사(東沙))가 다시 상에게 아뢰어 영의정을 추증하고, 태상(太常)에 명하여 문강(文康)이라 시호(諡號)하였으니, ‘도덕(道德)이 높고 박문(博聞)하여 문(文)이요, 연원(淵源)에 두루 통달하여 강(康)이라.’ 한다.
선생은 깊은 학문과 혼후(渾厚)한 학덕이 쌓여 깊고 넓고 컸으나, 간직하고 숨기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학문이 넓고 덕이 닦여서 가까이는 마음씀과 인륜의 법도, 멀리는 만사 만물의 당연한 이치로부터 미루어 나가 상천(上天)의 무성무취(無聲無臭)의 극(極)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화(和)한 것으로 덕을 이루고 인(仁)으로 물(物)을 이롭게 하였으니,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외로운 사람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하고 말하기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구휼(救恤)하는 것이 천지의 대덕(大德)이요, 내 마음의 전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간의 일은 인사(人事)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 없다.”
하고, 경계하기를,
“허(虛)는 만실(萬實)의 부고(府庫)요, 정(靜)은 만화(萬化)의 기틀이며, 정(貞)은 만사(萬事)의 기둥이며, 겸(謙)은 만익(萬益)의 병(柄 손잡이)이요, 검소함은 만복(萬福)의 후함[厚]이다.”
하였다.
인조 때에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자, 상국(相國) 이 문충공(李文忠公 문충은 이정귀(李廷龜)의 시호, 호는 월사(月沙))이 선생에게 시정(時政)의 급선무를 물으니, 선생은 별다른 대답 없이 다만,
“한마디로 오늘날 나라의 큰 근심거리는 남을 의심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국이 물러 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질도다. 시국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다.”
하였다. 당시 공신 등이 갑자기 대권(大權)을 얻게 되자 마음속으로 두렵고 미워하여 꺼리는 사람은 모두 없애니, 사대부들이 몸을 도사리고 눈치만을 살피게 되어 인심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선생이 임금을 면대하여 말씀 올린 것도 이런 뜻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생은 저술한 것이 매우 많지만 한집안 사람이나 자제(子弟)라도 이를 알지 못한다. 《역학도설(易學圖說)》, 《도서발휘(圖書發輝)》, 《역괘총설(易卦摠說)》, 《경위설(經緯說)》, 《만학요회(晩學要會)》, 《우주설(宇宙說)》 같은 저서는 선생이 별세한 후에 곧 출간되었다. 또 《우주요괄록(宇宙要括錄)》, 《의사질(疑俟質)》, 《모계문집(耄戒文集)》 등의 저서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넓고 통달한 학문과 / 博達之學
남을 이롭게 하는 어진 마음 / 利物之仁
깊고 두터운 덕이네 / 深厚之德
그윽히 통하고 / 邃而通
화하며 돈독하고 / 和而敦
근엄하며 조심성 있도다 / 儼而翼
아 / 嗚呼
권도가 되며 / 可以權
실행이 되며 / 可以動
모범이 될 수 있도다 / 可以式
상제수록(喪制手錄) : 연보(年譜)에는 38세 때에 상제수록(喪制手錄)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邑)에 변 : 문묘(文廟) 대성전(大聖殿)의 위판(位版)이 분실되자 직접 확인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대죄(待罪)하였다.
관의(冠儀)를 편수 : 그해 정월(正月)에 아들 장응일(張應一)의 관례(冠禮)를 마치고 선생 자신이 관의(冠儀)를 수록하였다.
인조대왕이 …… 극복하고 :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말한다.
건극(建極) : 《서경》 홍범에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있는데 그 다섯 번째에 “황극(皇極)으로 세운다.[建用皇極]”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이 인륜(人倫)의 모범을 보여 백성들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이 …… 나이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신 데서 15세를 말한다.
오랑캐가 침략 :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말한다. 그해 1월에 청 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침략해 들어왔다.
기천영명(祈天永命) : 왕이 공경히 덕(德)을 베풀어 하늘에 명을 영원히 보존하도록 빌어야 한다는 뜻이다. 《書經 召誥》
상진(上震) …… 16괘(卦) : 《역(易)》의 64괘 가운데 위에 진(震)이 있는 것은 대장(大壯)ㆍ귀매(歸妹)ㆍ풍(豊)ㆍ예(豫)ㆍ소과(小過)ㆍ해(解)ㆍ항(恒)ㆍ진(震) 등의 8괘로서 상진(上震) 괘이며, 진이 아래에 있는 무망(无妄)ㆍ수(隨)ㆍ서합(噬嗑)ㆍ진(震)ㆍ익(益)ㆍ둔(屯)ㆍ이(頤)ㆍ복(復) 등의 8괘가 하진(下震) 괘인데, 이들을 합하여 상진ㆍ하진 16괘라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진괘는 상하 모두에 겹쳐서 계산되었으므로 《주역》에 있는 상하 진괘는 모두 15괘이다. 이 진괘는 우레의 형상으로 이상의 15괘 모두가 군자의 수신(修身)하고 반성(反省)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입탁암(入卓嵒) : 《사기(史記)》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 “진(秦) 나라의 세상이 되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 하였고, 또 “노중련은 제 나라 사람인데 기위(奇偉)하고 탁이(卓異)한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탁(卓)이란 글자를 덧붙인 것은 아마 이 글에서 이끌어 온 듯하다. 후에 중련은 동해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무성무취(無聲無臭) :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하였는데 이는 천도(天道)를 표현한 말이다. 《詩經 大雅 文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