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속집 제5권_

잡저(雜著)_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

 

 

 

[주C-001]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 : 우주의 중요한 진리를 포괄하여 나타낸 첩자란 뜻이다. 첫번째 회진첩(會眞帖)은 무극(無極)의 진리를 나타낸 것인바, 무극은 형체가 없으므로 그림이 없다. 두번째 일원첩(一原帖)은 태극의 진리이고, 세번째 부앙첩(俯仰帖)은 위로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피는 것이다. 네번째 중립첩(中立帖)은 인간이 하늘과 땅의 중간에 있어 삼재(三才)가 됨을 이른다. 다섯번째 전수첩(傳授帖)은 도통(道統)의 전수이고, 여섯번째 재도첩(載道帖)은 도를 기재한 경전이며, 일곱번째 경모첩(景慕帖)은 존경해야 할 인물이고, 여덟번째 방수첩(傍搜帖)은 정통 이외에 널리 참고해야 할 인물과 서적이며, 아홉번째 원취첩(遠取帖)은 멀리 외물에서 취하는 것이고, 열번째 반궁첩(反躬帖)은 자신의 몸에 요약하는 것이다.

여헌선생속집 제7권_

잡저(雜著)_

 

 

피난하여 숨어 있는 가운데에 제사를 간략히 행하는 의식

 

 

현광(顯光)은 불초함이 이를 데 없으며 죄악이 크고 지극하여 병화(兵火)의 가운데에 신주(神主)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지금 즉시 다시 신주를 만들어야 할 것이나 왜적(倭賊)이 아직도 경내(境內)에 있어서 후일에 보존함을 기필하기 어려우므로 이에 세월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그러므로 깨끗한 종이를 가지고 장방형으로 잘라 ‘모고 모관부군 신위(某考某官府君神位)’ 또는 ‘모비 모인모씨 신위(某妣某人某氏神位)’라고 쓰되 대수(代數)에 따르고 신위에 따라 각각 지방을 장만하며 깨끗한 그릇에 이것을 보관하여 두고 제사 때가 되면 꺼내어 진설한다. 그리고 고위(考位)의 기일(忌日)에는 비위(妣位)를 함께 진설하되 비위의 기일에는 단위(單位)만을 진설한다.

제물은 맛과 품수(品數)를 정하지 않고 그릇수를 제한하지 않으며, 모든 어물과 육류와 채소와 과일을 얻는 대로 사용하며 밥과 국과 술과 젓갈을 준비되는 대로 진설한다. 제물을 구비하지 못했다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보다는 단지 거친 밥과 나물 국이라도 제사하는 것이 낫다. 또 정성이 있으면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야 비록 구하지 못한다 해도 채소와 같은 물건은 오히려 장만할 수 있다. 비록 채소와 같은 물건을 사용하더라도 만일 정성을 다하고 정결함을 지극히 한다면 오히려 선조의 영혼이 강림하여 흠향하실 것이다.
그리고 혹 제물을 구비하지 않음이 없고 그릇수를 갖추지 않음이 없다 하더라도 정성이 극진하지 않고 또 정결하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영혼이 강림하여 흠향할 이치가 있겠는가. 또 혹 재력(財力)을 헤아리지 않고 반드시 장만하려고 한다면 경영하여 구하는 사이에 구차하게 남에게 요구하는 병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나의 마음에 다소라도 편안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사받는 영혼도 반드시 편안하지 않을 것이니, 효자가 어찌 이러한 짓을 하겠는가.
기일(忌日)은 특히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으며, 묘제(墓祭)는 만일 먼 곳에 도망하여 피난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때때로 성묘할 수 없으나 만약 혹 왕래할 힘이 있으면 비록 제물을 성대히 구비하지 못하더라도 다만 어포(魚脯)와 육포(肉脯), 고기와 과일 등과 찹쌀 몇 되와 누룩가루 몇 홉을 장만하여, 그 때 임시로 밥짓는 그릇에 술을 빚었다가 하룻밤을 지나 열어 보면 또한 매우 간편하게 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은 이러한 정성이 있는 것일 뿐이다.
속절(俗節 시속의 명절)에 제물을 올리는 것 또한 때에 따라 얻는 것이 있으면 올려야 한다. 중월(仲月)의 대제(大祭)는 진실로 이처럼 혼란한 때에 행할 수가 없고, 비록 행하려고 하더라도 객지에서 대번에 제물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만 그 달 안에 천신(薦新)함을 인하여 간략히 행하기를 속절의 예(禮)와 같이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우거(寓居)해 있는 동안에 행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정폐(停廢)하는 일이 드물었고, 묘사(墓祀)에는 고비(考妣)의 묘소가 인동(仁同)에 계시어 혹 때로 성묘할 수가 있었으나, 조고비(祖考妣) 이상의 묘소는 모두 성주(星州)에 계시어 난리가 난 이래로 한 번도 찾아가 성묘하지 못하였으니, 항상 마음에 애통하고 민망하다.
무릇 기제(忌祭)에는 지방(紙榜)을 모시고 향불과 모사(茅沙)가 준비되어 있으면 신위(神位)를 진설하고 채소와 과일과 술과 찬을 진설한 뒤에 지방을 신위의 자리에 진설하며, 분향하고 모사에 술을 붓고 고유하기를 “이제 모친 모관부군(某親某官府君), 또는 모인모씨(某人某氏)의 먼 휘일(諱日)이므로 엎드려 존령(尊靈)께서 신위에 강림하시기를 청하여 공손히 추모하는 정을 펴려 하옵니다.”라고 한 다음 재배한다. 지방이 없고 향불과 모사가 없을 경우에는 신위를 진설하고 채소와 과일과 술과 찬을 진설한 뒤에 다만 그 말을 고유하되 재배는 똑같이 한다.
또 참신(參神)하여 재배한 다음 찬을 올리며 삼헌(三獻)을 하여 축문(祝文)을 갖추었으면, 초헌(初獻)한 다음 축문을 읽고 재배하며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 각기 재배한다. 만일 단헌(單獻)을 하여 축문이 없으면 술잔을 올린 다음 다만 축사(祝辭)를 외워 고유하되 재배는 똑같이 한다.
유식(侑食)하고 재배하되 문이 있으면 문을 닫고 문이 없으면 부복(俯伏)한다. 잠시 후에 숭늉을 올리고 사신(辭神)하여 재배한다.
만약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게 되면 신주를 받들어 내올 때에 먼저 고유하는 말을 아뢰고 신주를 내온 다음 즉시 참신하며, 만약 속절에 천신하게 되면 각기 여러 대(代)의 신위를 모시고 제철의 음식을 진설한 뒤에 각위(各位)의 자리에 지방을 모시며 강신하여 재배하고 참신하여 재배하며 술을 따라 올리고 재배한다. 그리고 축문이 있으면 축문을 읽은 뒤에 재배하며 물러가 한동안 부복하였다가 사신하여 재배한다.
그리고 만약 외조고비(外祖考妣)와 후사가 없는 자형(姊兄)과 누님 및 누님의 아들과 누님의 딸을 함께 제사하게 되면 먼저 본종(本宗)의 신위와 본종의 부위(祔位)에 제사하고 철상(撤床)한 다음 다시 신위를 진설하여 외조고비 이하의 여러 신위에게 제사한다.
신위(神位)를 진설할 때 굳이 왕골자리를 구할 것이 없으며 음식을 진설할 때에도 굳이 제상과 소반을 구할 것이 없다. 사람들이 집에서 쓰는 자리와 상과 소반은 정결한 것이 드무니, 다만 유지(油紙)를 펴고 진설하며, 유지가 없으면 새 삼베를 가지고 폭(幅)을 연하여 펴며, 삼베가 없으면 새 띠풀이나 깨끗한 짚을 사용하여도 모두 무방하다.
그릇 역시 굳이 유기(鍮器)와 사기(沙器)를 구할 것이 없으며 다만 버들고리 상자를 사용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다. 나는 큰 대나무를 구하여 마디를 잘라 잔(盞)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 곳에는 대나무가 없어 만들지 못하였다.
제물을 줄이고 예를 줄이는 것은 진실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나 도망하여 피난하는 가운데에 구하기 어렵지 않은 물건이 없어서 비록 한 자의 종이와 한 치의 향이라도 또한 쉽게 얻을 수 없으니,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없다 하여 제사 지낼 시기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
또 물건을 이미 구비하지 못하였는데 예를 갖추고자 하면 한갓 허례(虛禮)만을 따르는 것이니, 또 어찌 경황이 없어 혼란한 때에 합당하겠는가. 문(文)과 질(質)이 적절히 배합되어 아름다운 것은 진실로 귀하게 여길 만하나 질이 있은 뒤에 문이 있는 것이다.
상고(上古) 시대에는 질만 있을 뿐이었으니, 삼황(三皇)이 어찌 문이 또한 없어서는 안 됨을 몰랐겠는가마는 오직 상고 시대에는 질만 있어도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문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도(道)가 이미 극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고(中古)에는 풍기(風氣)가 점점 열려 인심이 차츰 각박해졌으니, 반드시 문이 있은 뒤에야 이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이 처음으로 문을 갖추게 한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난리통이라서 온갖 물건이 모두 고갈되고 온갖 일이 모두 폐지되었으니, 이러한 때에는 반드시 모름지기 질을 숭상하고 문을 줄여서 한결같이 상고의 풍속을 따른 뒤에야 옳을 듯하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지고 도(道)가 있는 군자(君子)에게 우러러 질문하였으면 하는 바이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선조27) 가을에 문소(聞韶)의 우거한 집에서 초(草)하였다.

[주D-001]중월(仲月)의 대제(大祭) : 중월은 중춘(仲春)인 2월, 중하(仲夏)인 5월, 중추(仲秋)인 8월, 중동(仲冬)인 11월을 가리키며, 대제는 큰 제사로 사시제(四時祭)를 이르는데, 옛날 제사에는 사시제를 가장 성대하게 지냈다.
[주D-002]본종의 부위(祔位) : 본종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가까운 친족을 이르며, 부위는 부식(祔食)하는 신위(神位)를 이른다. 부식은 조고(祖考)를 제사할 때에 결혼하기 전에 일찍 죽었거나 후사가 없는 분을 함께 모시는 것이다.

 

여헌선생속집 제6권_   잡저(雜著)_   구설(究說)

 

구설이란 이(理)와 기(氣)의 한 근원을 모두 꿰뚫어서 미루어 말한 것이다.


우주(宇宙)가 우주가 된 것은 항상 기운[氣]이 승강(昇降)하는 가운데에 있을 뿐인데, 합하여 말하면 한 기운이요 나누어 말하면 음(陰)과 양(陽) 두 기운이다. 똑같이 한 이치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말하면 한 기운이라고 이르는 것도 가(可)하고, 혹 음이 되고 혹 양이 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두 기운이라고 이르는 것도 가하니, 대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 이것이다.
오직 그 승강함에 크고 작음과 오래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으므로 큰 승강의 가운데에 반드시 작은 승강이 있고, 오랜 승강의 가운데에 반드시 가까운 승강이 있다. 일원(一元) 가운데의 승강은 승강 중에 큰 것이며, 원(元)이 나뉘어 회(會)가 되면 자연 회 가운데의 승강이 있고, 회가 나뉘어 운(運)이 되면또 운 가운데의 승강이 있으며, 운이 나뉘어 세(世)가 되고, 세가 나뉘어 해[歲]가 되고, 해가 나뉘어 월(月)이 되고, 월이 나뉘어 일(日)이 되고, 일이 나뉘어 신(辰 시(時))이 됨에 이르러서도 모두 스스로 그 가운데의 승강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또 작게는 신(辰) 이하 분(分)·이(釐)·호(毫)·사(絲)의 나눌 수 없는 즈음에 이르고, 또 미루어 올라가서 일원(一元) 이상의 다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또한 어찌 일찍이 그 사이에 승강함이 없겠는가. 이는 바로 기운이 승강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운에는 또 체(體)와 용(用)이 있으니, 오르고 내리고 가고 와서 한시도 정체(停滯)하거나 쉼이 없는 것은 체이니 곧 경기(經氣 일정한 기운)이며, 그 사이에 모이고 흩어지고 왕성하고 쇠하여 혹 밝기도 하고 혹 어둡기도 한 것은 용이니 곧 유기(游氣 떠돌아 다니는 기운)이다. 낮과 밤, 추위와 더위로 고금(古今)에 바뀌지 않는 것은 경기의 체(體)가 아니겠는가. 때에는 막히고 통함이 있고 물건에는 정(精)하고 거耔이 있는 것은 유기의 용(用)이 아니겠는가.
체는 일정함[常]이 있으나 용은 일정함이 없고, 체는 반드시 하나인데 용은 하나가 아니니, 이것은 또한 모두 자연의 떳떳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일정함이 없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하나가 아니라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의 가운데에 또한 일정함과 변함이 있고 유기의 가운데에 또한 일정함과 변함이 있으니, 모두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이연(所以然)은 어찌 모두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유기가 되는 것도 별도로 한 가지의 기운이 있는 것이 아니요, 이 또한 경기 가운데에 변화한 것이다. 만약 경기가 오르고 내리는 가운데에 체(體)가 되어 있지 않다면 유기가 어디로부터 나와서 변화(變化)의 용(用)이 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생각해 보니, 천지(天地)가 처음 개벽(開闢)하여 당초 사람과 물건이 없었을 때에는 자연 기화(氣化)한 사람과 물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男女)와 빈모(牝牡)를 이룬 뒤에 인하여 번식해서 천만(千萬) 가지 물종과 억조(億兆)나 되는 족류(族類)가 된 것이니, 이 어찌 하늘은 아버지의 도(道)가 되고 땅은 어머니의 도가 되며, 팔괘(八卦)의 세 양(陽)은 남(男)이 되고 세 음(陰)은 여(女)가 되어서,서로 동요시키고 서로 맺어 마침내 잉태(孕胎)하여 낳는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경위(經緯)와 체용(體用)의 기운이 실로 조화의 기틀이 아니겠는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지와 만물의 이치가 겉과 속, 정(精)한 것과 거친 것의 묘함이 실로 모두 우리 인간의 한 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다. 우주가 우주가 된 이유가 모두 이치와 기운에서 나왔는데, 이미 우주가 되었으면 또 이치와 기운을 담고 실을 수 있게 마련이다.
우주가 처음에 어찌 일찍이 우주라는 명목(名目)이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우러러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굽어 지리(地理)를 살펴서 이와 기의 자연스러움을 알고는 상하(上下) 사방(四方)과 고왕(古往) 금래(今來)의 원래의 틀을 지목하여 우주라고 명칭한 것이다. 그 사이에 은미하고 드러남과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작위(作爲)하는 것을 일[事]이라 하며, 크고 작음과 귀하고 천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형기(形氣)가 있는 것을 물(物)이라 하며, 피차(彼此)와 내외(內外)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구역이 된 것을 경(境)이라 하며, 선후(先後)와 구근(久近)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만난 것을 때[時]라 한다.
그렇다면 지극히 은미함으로부터 지극히 드러남에 이르고 지극히 큼으로부터 지극히 작음에 이르기까지 그 일이 됨을 어찌 다 계산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거대함으로부터 지극히 세세함에 이르고 지극히 귀함으로부터 지극히 천함에 이르기까지 그 물건이 됨을 어찌 다 낱낱이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무 저기[彼]에서 아무여기[此]에 이르고 아무 안[內]으로부터 아무 밖[外]에 이르기까지 그 구역[境]이 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가장 먼저[先]로부터 가장 뒤[後]에 이르고 가장 오램[久]으로부터 가장 가까움[近]에 이르기까지 그 때가 됨을 어찌 다 계산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수(數)라는 것은 본래 물건의 변화를 다하고 많고 적음을 계산하는 것이나 수 또한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일의 앞에 또 일이 있고 물건의 앞에 또 물건이 있으며 환경의 앞에 또 환경이 있고 때의 앞에 또 때가 있으니, 무릇 몇 우주가 이미 지나가서 바야흐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인가? 일의 뒤에 또 일이 있고 물건의 뒤에 또 물건이 있고 환경의 뒤에 또 환경이 있고 때의 뒤에 또 때가 있으니, 그렇다면 지금의 이 우주 뒤에 또다시 몇 우주가 장래에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른바 생생(生生)의 역(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리(道理)가 됨은 똑같은 이 도리가 하는 것이니, 어찌 이 도리가 변함에 따라 구별됨이 있겠는가.

우리 인간은 만물(萬物)과 함께 하늘과 땅 둘 사이에 사는바, 의거하여 편안함으로 삼는 것은 땅의 실어 줌이요 우러러 의지함으로 삼는 것은 하늘의 덮어 줌이다. 살기 좋은 땅을 골라 거주하고 언덕과 습지(隰地)를 경작하여 옷과 밥을 장만하고, 물과 육지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취하여 온갖 씀을 구비하며, 해와 달의 빛을 힘입어 낮과 밤을 구분하고, 별의 멂을 보아 사시(四時)와 일년(一年)을 정한다.
차례에 따라 순서를 정하는 것은 친소(親疎)의 족류(族類)이고, 도덕(道德)으로 삼는 것은 부여(賦與)받은 성명(性命)이고, 사업(事業)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하는 직분(職分)이니, 이로써 집안과 마을과 고을과 나라에 이르고 이렇게 하여 낳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우리 인간이 되어서 대(代)를 이어가는 것들은 모두가 하늘과 땅 사이에 붙어 살면서 덮어 주고 실어 주는 교화(敎化)의 덕(德)을 받는 것이다.
옛날에 신성(神聖)한 분은, 그 말씀이 높음은 조화(造化)와 귀신(鬼神)의 묘함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실함은 인간의 일상 생활하는 떳떳한 일에 지나지 않았으니, 성인(聖人)의 뜻에 생각하기를 “사람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는 사이에 살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도리를 다하면 그 사업이 스스로 다하게 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반드시 보통 사람들의 사려(思慮)가 미칠 수 있는 바와 보통 사람들의 총명(聰明)이 이를 수 있는 것을 들어서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의 사려가 미칠 수 있는 바와 총명이 이를 수 있는 바를 스스로 다하여 분명히 보고 실제로 실천함이 있다면, 사려가 미치지 못하는 바와 총명이 이르지 못하는 것도 그 이치가 자연 이 당연한 떳떳한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다.
이단(異端)의 학문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고원(高遠)하고 광절(曠絶)한 의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들은 바로 이 도(道)의 밖에 한 가지의 뿌리와 맥(脈)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한 마당의 세계(世界)를 별도로 설정하여 말하니, 저들은 이치와 기운의 실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요, 곧 이 도와 이 이치의 밖에 나아가서 그 허무(虛無)하고 활원(闊遠)함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법(禮法)을 떠나고 윤리(倫理)를 버리면서 스스로 이것을 도덕(道德)이라고 이르고 스스로 이것을 세계(世界)라 이르니,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태극(太極)의 떳떳한 이치를 벗어난 것이다. 태극의 떳떳한 이치를 벗어나 과연 도와 이치가 있으며, 과연 세계가 있겠는가.

간(干)은 양(陽)에서 나왔는데 그 수(數)가 열이니 양의 수가 열이기 때문이요, 지(支)는 음(陰)에서 나왔는데 그 수가 열 둘이니 음의 수가 열 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양과 외로운 음은 모두 공(功)을 이루지 못하므로, 간(干)과 지(支)에는 음과 양이 있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간지의 납음(納音)의 오행(五行)도 또한 음양이 아울러 행해지니, 이른바 서로 맞음이 형제(兄弟)와 같고 화합함이 부부(夫婦)와 같다는 묘함이 간지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태극(太極)의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때가 없으므로 음양과 오행이 실로 태극의 큰 쓰임이 되는 것인데, 간지는 곧 음양과 오행이 유행하고 변화하는 절서(節序)의 중요한 기관(機關)이다.
알봉(閼逢)·전몽(旃蒙)·유조(柔兆)·강어(强圉)·저옹(著雍)·도유(屠維)·상장(上章)·중광(重光)·현익(玄黓)·소양(昭陽)의 열 가지는 곧 간(干)의 처음 이름이요, 곤돈(困敦)·적분약(赤奮若)·섭제격(攝提格)·단알(單閼)·집서(執徐)·대황락(大荒落)·돈장(敦牂)·협흡(協洽)·군탄(涒灘)·작악(作噩)·엄무(閹茂)·대연헌(大淵獻)의 열두 가지는 곧 지(支)의 처음 이름이니,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은 모두 이치와 기운이 변화하는 자연(自然)의 실제(實際)를 따라 명칭한 것이다.
그리고 간(干)을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로 구별하고, 지(支)를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로 다르게 말한 것은 곧 간과 지가 서로 사귀고 올라타는 간략한 조목(條目)을 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간과 지가 반드시 아울러 행하고 서로 올라타는 것은 애당초 성인(聖人)이 자신의 뜻을 가지고 억지로 만들어 배열한 것이 아니요, 다만 이치와 기운의 묘함이 변화가 없을 수 없고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없을 수 없으므로 다만 이것을 구별하여 칭호와 명목을 세웠을 뿐이다. 이는 진실로 음양과 오행이 간(干)이 되고 지(支)가 된 것이 자연 서로 문란하거나 섞이지 않고 떨어지거나 나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간(干)이 없는 지(支)가 없으니, 또 어찌 지가 없는 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게는 일(日)·신(辰)과 크게는 세(歲)·월(月)이 모두 간과 지가 아울러 행해지는데, 다만 크고 작고 멀고 가까움의 각기 다른 규칙이 있어서 윤회(輪回)함에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辰)의 간지(干支)로 말하면 5일에 한 바퀴를 다 돌기 때문에 한 달 안에 모두 여섯 번을 돌고, 일(日)의 간지는 60일에 한 바퀴를 다 돌기 때문에 두 달이면 한 바퀴를 돌며, 월(月)의 간지는 5년에 다 돌고 세(歲)의 간지는 두 대(代 60년)에 다 도니, 이는 똑같은 방식이다. 이로써 미루어 나가면 원(元)·회(會)·운(運)·세(世)의 간지도 마땅히 이 이치와 이 기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원(元)은 12회(會)가 있고 회는 30운(運)이 있고 운은 12세(世)가 있는바, 운(運)의 수는 360이고 세(世)의 수는 4320이니, 그렇다면 간(干)과 지(支)를 결합하여 아무 간과 아무 지에서 시작하여 아무 간과 아무 지에서 끝나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회(會)는 그 수가 12에 그치니, 이 원(元)의 가운데 태어나 사는 우리 인간은 이미 앞 일원(一元)의 자회(子會)가 어느 간(干)에서 시작되고 해회(亥會)가 어느 간에서 끝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원(元) 가운데의 회(會) 중에 자회가 또한 어느 간에서 시작되고 해회가 또한 어느 간에서 끝나는지를 어찌 알 것이며, 또 다음 원(元)이 자회로부터 해회에 이르기까지 가(加)하는 바의 간이 어느 간이 되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이는 반드시 아울러 행하고 서로 계승함이 있을 것이나 이 원(元)의 가운데에 사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비단 회(會)의 간지뿐만 아니라 원(元) 또한 이 이치와 이 기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그렇다면 어찌 음양과 오행의 간지가 큰 순환(循環)이 되지 않겠는가. 이 또한 이 원(元)의 가운데에 사는 우리 인간이 상고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치와 기운의 무궁함은 또한 이것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 아, 참으로 무궁하며 참으로 무궁하다.

첫번째는 알봉(閼逢)인데 알(閼)은 기운이 처음 발하여 통하지 못한 것이요 봉(逢)은 때를 잃지 않은 것이니, 이 기운이 비록 미미하나 때는 잃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두번째는 전몽(旃蒙)인데 전(旃)은 기운이 조금 드러난 것이요 몽(蒙)은 밝지 못한 것이니, 이 기운이 조금 드러났으나 아직 밝음에 미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세번째는 유조(柔兆)인데 유(柔)는 기운이 견고하게 정해지지 못한 것이요 조(兆)는 처음 징험하여 가리켜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이 기운이 비록 견고하게 정해지지는 못하나 조짐을 보아 징험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네번째는 강어(强圉)인데 강(强)은 기운이 비로소 견고하게 정해진 것이요 어(圉)는 이미 범위가 있는 것이니, 이 기운이 이미 견고하게 정해져서 바야흐로 역량(力量)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섯번째는 저옹(著雍)인데 저(著)는 기운이 근기(根基)가 있는 것이요 옹(雍)은 충후(充厚)함이니, 이 기운이 이미 완고(完固)함에 이르러 바야흐로 장차 충후해짐을 말한 것이다.
여섯번째는 도유(屠維)인데 도(屠)는 기운이 비로소 꽉 찬 것이요 유(維)는 사방(四方)의 귀퉁이이니, 기운이 바야흐로 꽉 차서 사방의 귀퉁이에 두루 가득해짐을 말한 것이다.
일곱번째는 상장(上章)인데 상(上)은 성함이 지극한 뜻이요 장(章)은 공(功)이 이루어져 밝은 것이니, 이 기운이 성하고 지극해서 공이 이루어지고 교화가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여덟번째는 중광(重光)인데 중(重)은 미루어 지극히 하는 뜻이요 광(光)은 밝음이 더욱 드러난 것이니, 이 기운이 단지 밝을 뿐만 아니라 또 더욱 발양(發揚)됨을 말한 것이다.
아홉번째는 현익(玄黓)인데 현(玄)은 기운이 십분(十分)에 이른 것이요 익(黓)은 어둠이니, 기운이 극도로 가득 차서 빛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열번째는 소양(昭陽)인데 소(昭)는 밝음이 나타나는 뜻이요 양(陽)은 자라나는 양이니, 이미 회복한 양이 이에 이르러 더욱 밝아짐을 말한 것이다.

첫번째는 곤돈(困敦)인데 곤(困)은 궁핍한 뜻이요 돈(敦)은 소생(蘇生)함으로 향하는 기틀이니, 옛 운(運)이 이미 다하고 새 기틀이 다시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두번째는 적분약(赤奮若)인데 적(赤)은 양(陽)의 색깔이요 분약(奮若)은 떨쳐 일어남이니, 양이 동하는 기틀이 이에 이르러 더욱 분발함을 말한 것이다.
세번째는 섭제격(攝提格)인데 지지(地支)가 세번째에 이르러 형세와 지위가 이미 커져서 마땅히 십이지(十二支)의 추기(樞機)가 될 것이니, 마침내 섭제(攝提)라는 별이 북두(北斗)의 앞에 있어서 12방위(方位)의 중요함을 관장함과 같기 때문에 섭제격이라고 칭한 것이다.
네번째는 단알(單閼)인데 단(單)은 쇠하고 박(薄)한 뜻이요 알(閼)은 아직 통하지 못한 양기(陽氣)이니, 이때에 이르면 남은 음(陰)이 쇠하고 적어지므로 통하지 못하던 양(陽)이 통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집서(執徐)인데 집(執)은 견고하고 치밀한 뜻이요 서(徐)는 이끌어 통창(通暢)하게 하는 상(象)이니, 기세가 성하고 자라남을 말한 것이다.
여섯번째는 대황락(大荒落)인데 대황(大荒)은 변경(邊境)이요 낙(落)은 이름이니, 기세가 장성(壯盛)하여 교화가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일곱번째는 돈장(敦牂)인데 돈(敦)은 성대함이요 장(牂)은 해침이니, 모든 기세가 이미 성대함에 이르면 반드시 해치고 줄어드는 기미가 있는바, 이 때가 바로 그러한 때인 것이다.
여덟번째는 협흡(協洽)인데 협(協)은 화하고 고름이요 흡(洽)은 충족함이니, 노양(老陽)이 바야흐로 창성하고 작은 음이 숨어 있어서 온갖 구역이 화합하여 대화(大和)가 흡족한 시절임을 말한 것이다.
아홉번째는 군탄(涒灘)인데 군(涒)은 물이 깊고 넓은 것이요 탄(灘)은 물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십이지가 협화(協和)함에 이르고 또 금(金)으로써 이으니, 마치 물이 이미 깊고 넓은데 또다시 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열번째는 작악(作噩)인데 작(作)은 성취함이요 악(噩)은 엄하고 긴(緊)함이니, 물건이 모두 견고하고 진실해서 각각 성명(性命)을 정함을 말한 것이다.
열한번째는 엄무(閹茂)인데 엄(閹)은 거두어 닫음이요 무(茂)는 번화(繁華)함이니, 번화한 것이 탈락되어 물건의 빛이 어두워짐을 말한 것이다.
열두번째는 대연헌(大淵獻)인데 대연(大淵)은 물이 모인 것이요 헌(獻)은 받들어 올림이니, 금(金)이 반드시 물을 낳아서 한 해의 공을 마침을 말한 것이다.

첫번째는 갑(甲)이니 갑은 기운이 시작함이요, 두번째는 을(乙)이니 을은 기운이 아직 발하지 못한 것이요, 세번째는 병(丙)이니 병은 더욱 밝아짐이요, 네번째는 정(丁)이니 정은 형통하여 장성함이요, 다섯번째는 무(戊)이니 무는 깊고 후함이요, 여섯번째는 기(己)이니 기는 완전하고 진실함이요, 일곱번째는 경(庚)이니 경은 이로움을 이룬 것이요, 여덟번째는 신(辛)이니 신은 정(精)함을 지극히 한 것이요, 아홉번째는 임(壬)이니 임은 그쳐 묶음이요, 열번째는 계(癸)이니 계는 마침을 이루는 것이다.이상은 기(氣)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첫번째는 자(子)이니 자는 형체가 시작됨이요, 두번째는 축(丑)이니 축은 기름이요, 세번째는 인(寅)이니 인은 동작함이요, 네번째는 묘(卯)이니 묘는 밖으로 나오는 것이요, 다섯번째는 진(辰)이니 진은 떨쳐 일어남이요, 여섯번째는 사(巳)이니 사는 일이 성립됨이요, 일곱번째는 오(午)이니 오는 바야흐로 성함이요, 여덟번째는 미(未)이니 미는 도탑게 기름이요, 아홉번째는 신(申)이니 신은 거듭함을 지극히 함이요, 열번째는 유(酉)이니 유는 거둠이요, 열한번째는 술(戌)이니 술은 감추어 은밀하게 함이요, 열두번째는 해(亥)이니 해는 고요함이 지극한 것이다.이상은 형체(形體)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甲)은 씨앗이 터져 싹이 나옴이요, 을(乙)은 싹이 굽은 채로 아직 나오지 못한 것이요, 병(丙)은 처음 나와 드러남이요, 정(丁)은 줄기가 생겨 자람이요, 무(戊)는 가지와 잎이 빽빽함이요, 기(己)는 줄기가 견고하고 가지가 정해짐이요, 경(庚)은 물건이 견고해져 열매로 향하는 것이요, 신(辛)은 열매가 이루어져 맛이 생기는 것이요, 임(壬)은 낟알이 나누어져 씨가 생기는 것이요, 계(癸)는 물이 다하여 나무가 되는 것이다.이상은 식물의 낳고 자람에 비유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子)는 새로운 뜻이요, 축(丑)은 자양(滋養)하여 보전함이요, 인(寅)은 새벽이요, 묘(卯)는 문을 여는 것이요, 진(辰)은 변화함이요, 사(巳)는 일에 종사함이요, 오(午)는 일이 많음이요, 미(未)는 진실함을 지극히 함이요, 신(申)은 더욱 힘씀이요, 유(酉)는 문을 닫음이요, 술(戌)은 계엄(戒嚴)함이요, 해(亥)는 견고히 감추는 것이다.이상은 인가(人家)의 아침과 저녁에 비유한 것이다.

간지(干支)의 조목은 어느 시대 어느 성인(聖人)에게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도(道)에 합함은 실로 묘(妙)함을 얻었다. 나누기를 더욱 세밀히 하여도 그 차례가 문란하지 않고 쌓기를 더욱 오래하여도 그 기운이 어그러지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음양과 오행의 실정이라 할 것이다. 음과 양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조화(造化)의 추기(樞機)가 될 수 없고 오행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귀신(鬼神)의 공용(功用)을 펼 수 없으니, 이는 간지의 떳떳한 경도(經道)이다.
무릇 간(干)과 지(支)가 서로 배합함은 양간(陽干)의 다섯이 양지(陽支)의 여섯과 사귀어 30이 되고, 음간(陰干)의 다섯이 음지(陰支)의 여섯과 사귀어 30이 되어서 모두 합하여 60이 된다.해[歲]에 있으면 60년에 한 번 돌고 달에 있으면 5년에 한 번 돌며, 날짜에 있는 것은 해에 있는 숫자와 같고 시[辰]에 있는 것은 달에 있는 숫자와 같다.
기후(氣候)가 유행하는 것은 무릇 해와 달과 날짜와 시에 있어서 매번 돌아감이 반드시 같으나 서로 같을 수 없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세(歲) 이상으로 세(世)·운(運)·회(會)·원(元)에 이르고, 신(辰) 이하로 각(刻)·분(分)·이(釐)·호(毫)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속한 간지가 있어서 큰 운(運)과 작은 운이 화하지 못함이 항상 많다. 그러므로 유행하는 기후가 서로 같은 경우가 반드시 적으니, 이는 간지 중에 위기(緯氣)인바, 이것을 또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음양의 두 기운과 오행이 모두 시종(始終)과 성쇠(盛衰)가 있음으로 인하여 서로 같을 수가 없고 서로 화(和)할 수가 없으니, 이는 형세의 자연함이다. 오직 서로 같을 수가 없고 서로 화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도(道)가 이에 나와서 서로 운행하고 서로 구제하여 조화의 공이 이에 이루어진다. 더구나 상생하는 것이 서로 왕성(旺盛)함에 이르지 않고 상극하는 것이 끊김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것이 바로 낳고 낳아 변화하는 묘리이다.
천지(天地)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일이다. 우리 인간은 이미 스스로 삼재(三才)에 참여한 책임이 있으니, 그렇다면 화(和)하지 못한 것을 끝내 반드시 화함에 돌아가게 하고 같지 않은 것을 끝내 반드시 같음에 합하게 하는 것이 어찌 재성(裁成)하고 보상(輔相)하는 책무가 아니겠는가. 예컨대 해와 달이 마땅히 먹혀야 할 때에 먹히지 않고, 재앙이 마땅히 일어나야 할 때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모두 성인(聖人)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윗자리에 있는 자가 어찌 스스로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虛)와 실(實)은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무릇 형질(形質)이 된 것은 곧 이른바 형이하란 것이고, 무릇 도리(道理)가 된 것은 곧 이른바 형이상이란 것이며, 무릇 기후(氣候)가 된 것은 항상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中間)에 있다. 도리의 입장에서 기후를 보면 기후는 형이하가 되고 형질의 입장에서 기후를 보면 기후는 형이상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기후는 항상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형질은 분명 실(實)이고 도리는 분명 허(虛)이며, 기후는 허와 실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한 가운데에도 실이 있고 실한 가운데에도 허가 있어서 허와 실이 일찍이 서로 떨어져서 허와 실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질이 비록 실이 됨을 주장하나 또한 자연 형질 가운데에 허와 실이 있으며, 도리가 비록 허가 됨을 주장하나 또한 자연 도리 가운데에 허와 실이 있는 것이다. 기운은 허와 실의 중간에 있으니, 또 어찌 자연 허와 실이 있지 않겠는가.
형질이 된 것은 반드시 강(剛)과 유(柔), 동(動)과 식(植), 대(大)와 소(小), 정(精)과 조(粗)의 일정함이 있으니, 이는 실(實)이다. 그러나 형(形)은 단지 형만이 아니고 질(質)은 단지 질만이 아니어서, 모두 각기 태극(太極)의 한 이치를 받아 형질의 떳떳한 법(法)이 되며 인하여 낳고 화(化)하는 떳떳한 도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형질이란 것은 바로 이치를 받아들이는 껍질이고 도(道)를 싣는 배와 수레가 되는 것이니, 이는 허(虛)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형질이 있는 것은 모두 사방(四方)과 상하(上下)의 빈 공간이 있은 뒤에야 나의 실체(實體)의 완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실이 어찌 허가 없이 스스로 설 수 있겠는가. 이는 형질의 허와 실이다.
그리고 기후(氣候)가 기(氣)가 되고 후(候)가 된 것으로 말하면, 항상 충만한 전체가 있으나 일찍이 충만함의 모상(模象)을 볼 수 없으며, 항상 운행하는 큰 쓰임이 있으나 일찍이 운행하는 종적(蹤跡)을 볼 수 없으니, 이는 허(虛)이다. 그러나 정(精)이 모이고 영(英)이 모여서 낳고 낳고 화(化)하고 화함이 다하지 않는 것이 어찌 실(實)이 아니겠는가.
이치에 이르러서는 형모(形貌)와 성색(聲色)을 볼 수 없고 방소(方所)와 한계(限界)를 찾을 수 없으니, 그 허(虛)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다만 우주 사이에 기후가 된 것은 이 이치가 없으면 근저(根柢)가 될 수 없고, 우주 사이에 형질이 있는 것은 이 이치가 없으면 틀[模範]이 될 수 없으니, 근저가 되고 틀을 내는 것으로 보자면 그 어떤 실(實)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렇다면 허(虛)와 실(實) 두 가지는 일찍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니, 허를 버리고 실을 말하는 것도 불가하며 실을 버리고 허를 말하는 것도 불가하다. 오직 허를 말하면서도 실이 허의 가운데에 있고 실을 말하면서도 허가 실의 가운데에 있게 한 뒤에야 말이 편벽되지 아니하여 도(道)가 반드시 떳떳함이 있을 것이다.
아, 오직 도를 아는 자만이 허와 실의 올바름을 알 수 있으며, 허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허하고 실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실하게 해서, 허와 실의 도리를 체행하는 자만이 자연의 묘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허와 실이 서로 쓰임이 되지 못하여, 한갓 허만 하고 허가 실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며, 한갓 실만하고 실이 허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여, 허한 자는 허만 지키고 실한 자는 실만 지킬 뿐이라면 필경 어떻게 평상(平常)한 도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허와 실 두 글자는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의 실정(實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가지고 말하면 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마음이요, 또 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도이다. 마음이 허하지 않으면 천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고 도가 실하지 않으면 천하의 사물을 다할 수 없으니, 이것이 허와 실 가운데의 큰 단서가 아니겠는가. 아, 마음의 밖에 따로 도가 없고 도의 밖에 따로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허와 실의 진경(眞境)일 것이다.

도리(道理)의 묘함은 진실로 무궁하다. 그러나 반드시 허관(虛寬 비고 넓음)한 여분의 수(數)가 있어야 하니, 허관의 수는 끝내 쓰지 않는 수가 되며 실수(實數)는 바로 쓰이게 되는 수이다. 그러나 실수가 쓰이게 되는 것은 모름지기 허수가 갖추어진 뒤에야 마침내 쓰이게 되는 실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 또한 도리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가만히 조화(造化)의 도(道)를 보니 징험할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하늘과 땅을 가지고 말하면, 해와 달과 별이 나오고 들어가는 한계와 낮과 밤과 추위와 더위의 구분과 바람과 우레와 비와 이슬이 때로 행하는 것은 진실로 하늘이 조화를 베푸는 구역(區域)인데, 그 나머지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의 밖이 얼마만한 지역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구주(九州)와 오복(五服)의 안에 배와 수레가 이르고 사람의 힘이 통할 수 있는 곳은 진실로 사람과 물건이 거주(居住)하고 생육(生育)하는 곳인데, 그 나머지 팔황(八荒)과 사해(四海)의 밖에 불모지(不毛地)와 물건이 없는 지역이 그 얼마만한 지역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여러 물건의 가운데에 있어서는 사람이 가장 귀중하여 도가 삼재(三才)에 참여된다. 그리하여 사(士)·농(農)·공(工)·상(商)의 각기 다른 직업이 있고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의 큰 윤리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단 하루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나머지 깃이 달린 조류(鳥類)와 털이 있는 짐승과 비늘이 있는 물고기와 껍데기가 있는 개충(介蟲) 중에는 기린(麒麟)과 봉황(鳳凰)과 거북과 용(龍)이 상서로운 물건이 되고 소와 말과 닭과 개와 양과 돼지가 육축(六畜)이 되니, 이 또한 진실로 없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리고 이 밖의 각 종류에 반드시 모두 359개가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번식하여 꽉 찬 것이 또한 어쩌면 그리도 번잡한가.
하늘에 상(象)을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는 위(緯)가 되는 해와 달과 오성(五星)이 있고 경(經)이 되는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으며,그 나머지 1520개의 이름 있는 별 이외에 수만 개의 이름 없는 별이 큰 공중(空中)에 가득히 찬란한 것은 어째서인가?
산은 오악(五嶽)과 이름 있는 산과 큰 고개가 있는 이외에 허다한 구릉(丘陵)이 높이 솟아 있음은 어째서인가? 물은 사독(四瀆)과 사해(四海)가 있는 것 이외에 그 나머지는 호수와 늪과 시내와 샘물과 도랑으로 혹 물이 담겨 있고 혹 흐르기도 하여 대지(大地)에 종횡(縱橫)으로 모여드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람은 위에 있는 자로는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로부터 크고 작은 통서(統緖)가 각기 계승함이 있어 공경(公卿)·보필(輔弼)과 내외(內外)의 수많은 관원(官員)들이 반드시 천위(天位)를 함께하는 이외에 그 나머지 칭호를 참칭(僭稱)하고 지역을 할거(割據)하여 명칭을 도둑질하고 지위를 훔쳐서 거짓된 관직과 잘못된 직책을 이루 다 셀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성인(聖人)과 현인(賢人)과 재주 있는 자와 덕(德) 있는 자와 정직한 자와 군자(君子)로서 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어서 우리 인간의 귀와 눈이 되는 자들은 하늘이 낳지 않으면 안 되니, 진실로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무너뜨리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물건을 해쳐서 별종(別種)과 특이한 종류가 되는 자들이 또한 우리 인간 가운데에 태어나서 윤리를 무너뜨려 기탄(忌憚)함이 없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가지 곡식과 채소로서 우리 인간의 낳고 기르는 도구가 되는 것들은 진실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나,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식물은 어쩌면 그리도 번성한가. 백 가지 과일과 천 가지 열매로서 세상 사이의 크고 작은 쓰임이 되는 것들은 진실로 모두 조화가 낳고 이룬 기이한 공인바 가지와 줄기와 꽃과 잎이 성하게 자라니, 이것들은 하루 아침과 하루 저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해를 마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열매를 얻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천지가 만든 물건 가운데에 이러한 종류를 다 열거할 수 없는데, 이 가운데 쓰이는 것은 많지 않고 쓰이지 않는 것이 많음은 어째서인가? 이는 모두 도리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쓰이는 실수(實數) 이외에 반드시 모름지기 허관(虛寬)한 여분의 수가 있는 이유이다. 쓰이지 않는 것들은 항상 쓰이는 것의 의뢰하는 바가 되어서 없어도 될 듯하나 끝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의 도와 주는 바가 되니, 이는 작은 지혜와 얕은 생각으로 측량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한 원(元)에는 12회(會)가 있고 한 회에는 30운(運)이 있고 한 운에는 12대[世]가 있고 한 대에는 30해[歲]가 있고 한 해에는 12달[月]이 있고 한 달에는 30일(日)이 있고 하루에는 12시[辰]가 있으니, 하나는 수에 있어 강령(綱領) 중의 강령이 된다.
하나가 나뉘어 12가 되고 12가 나뉘어 30이 되고 30이 또 나뉘어 12가 되었다. 이로부터 이후로 나뉘고 또 나뉘어서 나뉠 수 없는 수에 이르는데, 이것은 모두 12와 30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중에 가장 첫번째인 하나가 강령 중의 강령이 되어서 그 나뉨이 12가 되고, 이 12의 하나가 다음의 강령이 되어서 그 나뉨이 30이 되며, 그 아래는 점차로 강령이 되어 나뉘면 나뉠수록 더욱 작아져서 12와 30이 전전하여 서로 낳는 것이 일찍이 문란하거나 어그러진 적이 없다.
12는 음(陰)의 수이고 30은 양(陽)의 수이니, 음은 항상 양을 낳고 양은 항상 음을 낳는다. 그러므로 본수(本數)가 12이면 반드시 30을 낳고 본수가 30이면 반드시 12를 낳는 것이다. 음양이 서로 행해지기 때문에 수(數)가 다함이 없어서,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이 계속되어 우주(宇宙)의 낳고 낳는 조화가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다. 12와 30이 반드시 모두 본수 가운데의 하나가 된 뒤에야 비로소 나뉘어지는 수가 되니, 강령이 되고 조목(條目)으로 나누어지는 순서 또한 자연의 형세이다.
그렇다면 12와 30이 음양의 수(數)에 기강이 되어, 신(辰)의 아래에 있는 것이 이미 작아서 나눌 수 없음에 이른다면 한 원(元)의 위에 있는 것을 또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비록 작아서 나눌 수 없고 커서 다할 수 없더라도 그 수는 없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알더라도 쓸 데가 없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한 원(元)의 때를 만나 이 태어난 우주의 안에 살면서 오직 나의 지각(知覺)이 미쳐 알 수 있는 바를 따라 알고 나의 능력이 다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뿐이니, 어찌 알 수 없는 것에 정신을 헛되이 허비하여 생각을 다하고, 행하여 다할 수 없는 것에 헛되이 심력(心力)을 써서 효험을 바라겠는가.
오직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도리(道理)의 무궁함일 뿐이다. 만약 나의 지각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여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옳지 않으니, 이 의리는 우리 인간이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일찍이 무궁설(無窮說)을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치는 진실로 무궁한데 이치에서 나온 기운 역시 따라서 무궁하다. 구역(區域)이 된 것이 어찌 이치와 기운이 없는 지역이 있겠는가. 때가 된 것이 어찌 이치와 기운이 없는 때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비록 크나 덮어 주고 실어 주는 것은 다만 하늘과 땅 둘 사이의 만물(萬物)이 있을 뿐이며, 통하고 꿰뚫는 것은 다만 하늘과 땅 둘 사이의 고금(古今)이 있을 뿐이니, 그렇다면 하늘과 땅 역시 스스로 한 물건의 큰 것이 될 뿐이다.
이치는 진실로 무궁한데 기운 또한 따라서 무궁하니, 이치와 기운이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을 통하고 고왕(古往)과 금래(今來)에 통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상하와 사방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말하고 고왕과 금래를 하늘과 땅의 안에서 말하는 자들은 이치와 기운의 실제를 안다고 할 수 없다.
형상(形象)이 있고 체질(體質)이 있는 것은 반드시 다하는 곳이 있고 반드시 다할 때가 있으므로 모두 무궁할 수가 없으나, 이치로 말하면 형상이 없고 체질이 없으니, 어찌 다하는 곳이 있고 어찌 다할 때가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무궁함이 되는 것이다. 기운은 마침내 어둡고 밝음과 통하고 막힘이 있으니, 그렇다면 형상이 없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미 형상이 있다면 또 체질이 없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다하는 곳이 없으며 다할 때가 없겠는가. 이것은 이치와 함께 무궁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기운에는 또한 통체(統體)의 기운과 쓰이는 기운의 차이가 있다. 통체의 기운은 형상과 체질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오직 이 이치를 받들 뿐이어서 반드시 이 이치를 따르는 것을 떳떳한 분수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기운 또한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이치가 있지 않은 때가 없는데 기운 또한 있지 않은 때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통체의 기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체 가운데에 쓰이는 기운으로 말하면, 이미 구분(區分)과 피차(彼此)가 없을 수 없고 또 시종(始終)과 구속(久速)이 없을 수 없으니, 이 또한 이치의 큰 쓰임에 기준하여 구분이 되고 시종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궁한 것은 이 이치의 전체(全體)와 이 기운의 통체(統體)가 아니겠는가.
사람의 지각(知覺)과 사려(思慮)는 언제나 만나는 바의 때와 처한 바의 위치와 듣는 바의 일과 보는 바의 사물에 국한되게 마련이므로 달관(達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이 네 가지 한계를 벗어난 뒤에야 이치와 기운의 무궁함을 달관할 수 있을 것이다.

무궁한 태허(太虛)의 가운데에 크게 모이고 흩어짐이 있는 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닫히고 열림이다. 크게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자연 운수가 그 사이에 있으니, 예컨대 낮과 밤이 서로 교대하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교대함과 같은 것이다. 뒤 천지가 장차 모이게 되고 앞 천지가 크게 흩어짐이 이미 오래되면 옛 운수가 이미 다하고 새 운수가 마땅히 계승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쁜 운이 물러가고 통태(通泰)한 운이 장차 회복되어 원기가 쌓인 것이 이미 축적됨에 폐색(閉塞)의 큰 한계가 이미 지나간다. 이에 정(精)이 모이고 영(英)이 모여서 첫번째로 나오는 하나의 큰 물건이 되어 조화(造化)의 터전과 생물(生物)의 부고(府庫)가 되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늘의 형체는 떠 있으면서도 실(實)하고 동(動)하면서도 떳떳하고 가벼우면서도 확고(確固)하고 맑으면서도 완전하고 둥글게 돌아가면서도 회전함이 매우 신속한데, 남(南)과 북(北)이 종(縱)이 되고 동(東)과 서(西)가 위(緯)가 되니, 이는 큰 기운이 꽉 묶인 것이다. 둥글고 후한 것의 쌓임과 혼합(渾合)의 온전함이 모두 몇만 겹이 되는지 알 수 없는데, 높이 솟은 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에 상하와 사방이 또한 몇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은 억측으로 헤아리고 숫자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높고 깊음과 멀고 큼을 한결같이 이치와 기운의 자연에 맡길 뿐이니, 이치와 기운의 자연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하여 실제로 이치와 기운의 당연함을 얻었으니, 이치와 기운의 당연함이 어찌 간격이 있겠는가. 하늘이 하늘이 된 이유가 이것이다.
대기(大氣)가 돌고 그치지 아니하여 고리처럼 끝이 없다면 그 가운데가 반드시 비었을 것이니, 빈 것도 또한 떠돌아다니는 기운[游氣]이 모인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기운이 오랫동안 쌓이면 젖어서 물을 이루니, 물이 쌓여 기(氣)가 올라가서 뜨거워져 불이 되며, 물과 불이 이미 사귀어서 찌꺼기가 되어 흙을 이루면 정(精)이 가운데에 맺혀 금철(金鐵)이 되고 영(英)이 밖에 나타나 초목(草木)이 된다. 이는 바로 오행(五行)의 질(質)이 서로 구비하고 합하여 모여서 마침내 기가 쌓인 가운데에 대지(大地)가 되어서 하늘과 더불어 짝이 되는 것이다.
하늘은 상하와 사방을 싸고 있고 땅은 하늘의 가운데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 이미 이루어져 자리를 나누고 있으면, 태양(太陽)의 정(精)이 해가 되어 낮을 맡고 태음(太陰)의 정(精)이 달이 되어 밤을 맡는다. 이십팔수(二十八宿)가 구주(九州)에 나뉘어 배열되어 도수(度數)를 점치고 오성(五星)과 해와 달이 앞뒤로 번갈아 다녀서 하늘의 정사(政事)가 되며, 오악(五嶽)이 중원(中原)에 나열하여 솟아 있고 사독(四瀆)이 구주(九州)에서 경위(經緯)가 된다. 이에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아울러 행하고 서로 차례가 되어서 조화가 행해지고 만물이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늘과 땅에 참여하니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우주 사이의 사업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자이다. 삼황(三皇)이 삼황의 사업을 하고 오제(五帝)가 오제의 사업을 하고 삼왕(三王)이 삼왕의 사업을 한 것도 모두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옛 경서(經書)를 설명하고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한 것도 그 사업이 실제는 모두 이 이치와 기운의 유행함에 나아가서 그 정종(正宗)을 밝힌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상고설(上古說)을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고 시대에 문자[書契]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임금과 신하의 나옴과 국도(國都)와 연대(年代)를 어떻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겠는가. 이제 외기(外紀)에 이른바 반고씨(盤古氏)·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의 칭호가 있는데, 이 또한 반드시 모두 문자가 이미 만들어진 뒤에 전고(前古)에 서로 전하는 말을 채집하여 추후에 이름 붙인 것일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이 때에 태어난 인물은 반드시 총명(聰明)하고 예지(叡智)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성(神聖)이 많았을 것이니, 그렇다면 자연 상(象)을 근거하여 이치를 알고 색깔을 보면 마음을 알고 목소리를 들으면 뜻을 알고 물건을 대하면 성질을 알고 일을 만나면 의리(義理)를 밝혀서, 날마다 밝아지는 바가 있고 달마다 변(變)하는 바가 있고 해마다 화(化)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천황씨의 세대가 반고씨의 세대보다 밝고 지황씨의 세대가 천황씨의 세대보다 밝았을 것이요, 인황씨로부터 이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르쳐지고 법이 없어도 순종하여 각자 본성(本性)을 그대로 간직하고 도(道)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문자가 있기 이전부터 전할 만한 실제가 있어서 마침내 그 말을 근거하여 주군(主君)의 명칭을 붙였을 것이다.
혹자는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열리고[開] 땅은 축회(丑會)에서 열리고[闢] 사람은 인회(寅會)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근거하여, 천황씨를 자회의 군주라 하고 지황씨를 축회의 군주라 하고 인황씨를 인회의 군주라 한다.
그러나 이제 이치를 가지고 추구해 보면 하늘이 비록 자회에서 열렸다 하더라도 단지 하늘만 있고 땅이 없으니 어떻게 조화가 있을 것이며, 땅이 비록 축회에서 열렸다 하더라도 개벽(開闢)함이 자회와 축회, 두 회(會)의 사업이 될 뿐이니 어떻게 사람과 물건을 조화할 수 있겠는가.
황(皇)은 크다는 뜻이니, 군장(君長)이 나옴은 반드시 사람이 많고 물건이 많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형세가 만약 군주가 되어 통솔하는 자가 없으면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고 물건이 물건다운 물건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처음으로 군장이 있어서 통솔한 것이니, 이는 천지 가운데에 자연한 이치와 형세가 아니겠는가. 이미 사람과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군장이 있어서 억조(億兆)의 원수(元首)가 되어야 할 것이니, 이는 신하와 백성들이 모의(模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황(皇)이라고 명칭한 것이니, 이것이 천하에 군주 노릇한 자의 첫번째 칭호일 것이다.
천황씨라고 칭한 것은 처음 천도(天道)를 밝혀서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닷새가 후(候)가 되고 세 후가 기(氣)가 되고 여섯 기가 한 철이 되고 네 철이 한 해가 됨을 알아서, 때에 따라 사무에 응하는 도가 이로부터 섰을 것이니, 천황씨가 이 도를 밝혀 가르쳤기 때문에 천황씨라고 칭했을 것이다.
지황씨는 지리(地理)를 밝혀 법을 드리운 자일 것이다. 예컨대 동·서·남·북의 기후가 똑같지 않고 교야(郊野)와 원습(原隰)은 높고 낮은 지세(地勢)가 다르게 마련이니, 거주할 곳을 선택하는 방법과 거두어 채집하고 취하고 버리는 방식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천하를 나누어 아홉 주(州)로 만들고 온 세계를 구획하여 만 개로 만들어서 각기 거주하는 곳이 있고 모두 이익을 얻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 때문에 낳고 낳게 된 것이니, 이 때에 지황씨가 이 이치를 밝혀서 가르쳤기 때문에 지황씨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황씨의 세대로 말하면 천도(天道)와 지리(地理)가 이미 모두 밝혀졌으니,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어찌 인도(人道)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다섯 가지 떳떳한 성(性)이 있어 천하의 큰 근본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중(中)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정(情)이 천하의 달도(達道)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화(和)를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자간(父子間)의 친함과 군신간(君臣間)의 의리와 부부간(夫婦間)의 분별과 장유간(長幼間)의 차례와 붕우간(朋友間)의 신의는 곧 천하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이니, 이것을 경륜(經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황씨가 이 도를 밝혀서 가르쳤기 때문에 인황씨라고 칭했을 것이다.
삼황(三皇)의 세대에는 비록 문자(文字)의 유행과 법제(法制)의 구비함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천도(天道)를 밝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해가 나오고 들어감과 더위와 추위가 반드시 제때에 옴을 알지 못했을 것이요, 지리(地理)를 밝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거주하고 왕래함의 마땅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요, 인도(人道)를 밝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성(性)과 정(情)이 마음속에 있고 직분이 자기 몸에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삼황의 사업은 삼재(三才)의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문자를 만든 뒤에 각기 먼저 밝힌 것을 가지고 차례로 이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황은 각기 첫번째로 나온 군주가 되어서 한 세상을 통솔했던 자일 것이요, 이른바 형제(兄弟)라는 자들은 각기 보좌하는 직책이 있었는지, 아니면 각기 나누어 다스리는 임무가 있었는지 이는 모두 알 수 없다.
그 뒤에 유소씨(有巢氏)는 나무를 얽어 집을 만든 것을 가지고 칭호하였고, 수인씨(燧人氏)는 사람들에게 화식(火食)을 가르친 것을 가지고 칭호하였으니, 그렇다면 삼황의 칭호 역시 실제의 공적(功績)이 전해지는 바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아, 삼분(三墳)과 구구(九丘)의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우주 사이에 하나의 큰 흠이 아니겠는가.

무릇 허(虛)는 실(實)의 근본이니, 허가 없으면 어찌 실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허는 이 이치의 본체(本體)이니, 이 이치가 일찍이 온갖 실의 본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실이라는 것은 기(氣)와 질(質)과 형(形)이니, 만물은 모두 기가 있은 뒤에 질이 있고 질이 있은 뒤에 형이 있게 마련이다.
기는 동정(動靜)과 후박(厚薄)이 있고 질은 강유(剛柔)와 미악(美惡)이 있고 형은 대소(大小)와 귀천(貴賤)이 있으니, 만약 하나의 허(虛)함이 본체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온갖 실(實)함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는가. 허함이 이 이치의 본체가 되기 때문에 이에 기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질이 되지 않을 수 없고 형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러한 뒤에야 허함의 사업은 기·질·형의 온갖 실함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이하로 무릇 기(氣)가 되고 질(質)이 되고 형(形)이 된 것은 모두 허한 가운데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단지 실함이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되고 동함이 되고 그침이 됨을 보고는, 사람은 스스로 사람이요 물건은 스스로 물건이요 동함은 스스로 동함이요 그침은 스스로 그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되고 동함이 되고 그침이 됨이, 그 실제는 모두 하나의 허함을 따라 본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실함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는 허와 실이 한 근원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 가운데에는 자연 하늘과 땅 가운데의 태허(太虛)가 있고 사람과 물건에 이르러서도 모두 각기 그 가운데의 태허가 있으니, 사람을 가지고 말한다면, 자사(子思)의 이른바 ‘희(喜)·노(怒)·애(哀)·낙(樂)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한 것이 이 경계(境界)가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은 마땅히 이 마음의 태허가 일찍이 천지의 태허와 동일한 경계가 아닌 것이 아니며, 희·노·애·낙이 밖으로부터 이르는 것이 곧 내 마음의 태허 가운데에 왕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과연 허함을 허하게 하고 실함을 실하게 하면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허와 실의 묘리이다. 이제 내가 이 말을 하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의 태허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다. 마침 새 아침에 일이 없고 좌우에 붓을 잡을 만한 사람이 있으므로, 마침내 생각이 미치는 것을 불러 주어 쓰게 하는 바이다.

[주D-001]일원(一元)……운(運)이 되면 :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원(元)·회(會)·운(運)·세(世)에 입각하여 말한 것으로, 일원은 하늘과 땅이 개벽하여 끝나는 기간이라 한다. 원에는 자(子)·축(丑)·인(寅)·묘(卯)의 12회가 있고, 회에는 30운이 있고 운에는 12세가 있는바, 1세는 30년이니, 1원은 12회, 360운, 4320세로 총 12만 9600년이 된다. 이는 태양이 1년에 한 번 하늘을 돈다는 설에 의하여 원을 1년에 맞추고 회를 열두 달에 맞추며, 운을 하루에 한 번 돈다는 별에 맞추고 세를 360일에 맞춘 것이다. 《皇極經世書 卷2 纂圖指要下》
[주D-002]기화(氣化) : 형화(形化)와 대칭되는 말로 천지 자연의 기운에 의하여 물건이 저절로 태어남을 이르며, 형화는 수컷과 암컷이 교접하여 생겨남을 이른다.
[주D-003]팔괘(八卦)의……되어서 : 《주역》의 팔괘 중 건(乾)은 아버지이고 곤(坤)은 어머니이며, 진(震)은 장남(長男)이고 감(坎)은 중남(中男)이고 간(艮)은 소남(少男)이며, 손(巽)은 장녀(長女)이고 이(離)는 중녀(中女)이고 태(兌)는 소녀(少女)이니, 세 양(陽)은 곧 진·감·간의 세 괘를 이르고, 세 음(陰)은 손·이·태의 세 괘를 이른다.
[주D-004]상하(上下)……원래의 틀 : 상하는 하늘과 땅이며 고왕(古往)은 지나간 옛날이고 금래(今來)는 지금 또는 미래를 이르는데, 상하와 사방을 우(宇)라 하고 고왕과 금래를 주(宙)라 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5]생생(生生)의 역(易) : 생생은 낳고 낳는 것으로 상생(相生)하여 끊이지 않는 역리(易理)를 이르는 것이니,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 하였다.
[주D-006]납음(納音)의 오행(五行) : 납음은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오음(五音)과 십이율(十二律)에 맞추는 것으로, 갑자(甲子)를 황종(黃鐘)의 상(商)이라 하고 을축(乙丑)을 대려(大呂)의 상이라 하며, 상은 금(金)에 속하므로 갑자·을축을 바닷속의 금[海中金]이라 하는 따위를 이른다.
[주D-007]금(金)이……마침 : 한 해의 공이란 봄에 낳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 수확하여 감춤을 이른다.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에 의하면 나무가 불을 낳고 불이 흙을 낳고 흙이 금을 낳고 금이 물을 낳고 물이 나무를 낳으니, 봄은 나무에 해당하고 여름은 불에 해당하고 가을은 금에 해당하고 겨울은 물에 해당하며 여름의 끝달인 6월은 흙에 해당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8]양간(陽干)의……된다 : 간(干)과 지(支)의 양(陽)과 음(陰)은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홀수는 양, 짝수는 음으로 구분하는데, 양간의 다섯이란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을 이르고, 양지(陽支)의 여섯이란 자(子)·인(寅)·진(辰)·오(午)·신(申)·술(戌)을 이르며, 음간(陰干)의 다섯이란 을(乙)·정(丁)·기(己)·신(辛)·계(癸)를 이르고, 음지(陰支)의 여섯이란 축(丑)·묘(卯)·사(巳)·미(未)·유(酉)·해(亥)를 이른다. 양간과 양지가 차례로 사귀고 음간과 음지가 차례로 사귀어 육십갑자가 되었다.
[주D-009]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도(道) : 상생은 서로 낳는 것으로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고 흙은 금을 낳고 금은 물을 낳고 물은 나무를 낳는 것[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이며, 상극(相剋)은 서로 이기는 것으로 금은 나무를 이기고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을 이기고 물은 불을 이기고 불은 금을 이기는 것[金剋木 木剋土 土剋水 水剋火 火剋金]을 이른다.
[주D-010]재성(裁成)하고……책무 : 《주역(周易)》 태괘(泰卦) 상전(象傳)에 “하늘과 땅이 사귐이 태(泰)이니, 군주가 이것을 보고서 하늘과 땅의 도를 재성하고 하늘과 땅의 마땅함을 보상하여 백성을 도와 준다.” 하였다. 재성은 재성(財成)으로 쓰기도 하는데, 지나친 것을 억제함을 이르고, 보상은 부족한 것을 보태 줌을 이른다.
[주D-011]구주(九州)와 오복(五服) : 구주는 옛날 중국의 아홉 주(州)로 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靑州)·서주(徐州)·양주(揚州)·형주(荊州)·예주(豫州)·양주(梁州)·옹주(雍州)를 가리키며, 오복은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으로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기내(畿內)를 전복이라 하고, 500리씩 점점 멀어져 황복에 이르면 2500리가 되는바, 구주와 오복은 중국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12]팔황(八荒)과 사해(四海) : 팔황은 팔방(八方)의 먼 곳이며, 사해는 동해(東海)·서해(西海)·남해(南海)·북해(北海)로 온 세계를 의미한다.
[주D-013]위(緯)가……있으며 : 오성(五星)은 금성(金星) 목성(木星) 수성(水星) 화성(火星) 토성(土星)의 다섯 별인데 이들 별은 한곳에 붙어 있지 않고 떠돌아다닌다. 이십팔수(二十八宿)는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두(斗)·우(牛)·여(女)·허(虛)·위(危)·실(室)·벽(壁)·규(奎)·누(婁)·위(胃)·묘(昴)·필(畢)·자(觜)·삼(參)·정(井)·귀(鬼)·유(柳)·성(星)·장(張)·익(翼)·진(軫)의 스물여덟 별인데 이들 별은 한곳에 붙어 있어 일정하다. 경(經)은 날줄이고 위(緯)는 씨줄이니, 경은 변치 않는 것을 이르고 위는 변함을 이른다. 그리하여 돌아다니는 해와 달과 오성을 위라 하고, 붙박이로 한곳에 붙어 있는 이십팔수를 경이라 한 것이다.
[주D-014]오악(五嶽) : 오악은 중국의 다섯 개의 큰 산으로 동악(東嶽)인 태산(泰山), 서악(西嶽)인 화산(華山), 남악(南嶽)인 곽산(霍山), 북악(北嶽)인 항산(恒山), 중악(中嶽)인 숭산(崇山)을 이른다.
[주D-015]사독(四瀆) : 사독은 네 개의 큰 물로 양자강(揚子江)·황하(黃河)·회수(淮水) 제수(濟水)를 이른다.
[주D-016]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성(神聖) : 생이지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의 도리를 아는 것이며 신성은 성인(聖人)의 교화가 신묘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중용》에 “혹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혹 배워서 알고 혹 쉽게 알지 못하여 애를 태운 뒤에 알기도 하나 그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也 一也]” 하였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은 성인만이 가능하다 한다.
[주D-017]하늘은……태어났다 :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운회설(運會說)에 입각한 것이다. 1원(元)은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하여 끝나는 기간으로 12회(會)가 있으며, 1회는 1만 800년이어서 총 12만 9600년이 되는바,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열리고 땅은 축회(丑會)에서 열리고 사람은 인회(寅會)에서 태어났다 한다. 즉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고 먼지로 덮여 있다가 1만 800년이 지난 뒤에 하늘이 생기고, 다시 1만 800년이 지난 뒤에 땅이 생기고, 그 후 또다시 1만 800년이 지난 뒤에 사람과 물건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주D-018]삼황(三皇) : 일반적으로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천황씨(天皇氏)와 지황씨(地皇氏)와 인황씨(人皇氏)를 가리킨다.
[주D-019]이른바 형제(兄弟)라는 자들 :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첫번째인 태고(太古)에 “천황씨는 목덕(木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니,……형제 12명이 각각 1만 8000년을 하였으며, 지황씨는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니 형제 11명이 또한 각각 1만 8000년을 하였으며, 인황씨는 형제 9명이 나누어 구주(九州)를 다스렸으니 무릇 150세(世)로 도합 4만 5600년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20]삼분(三墳)과 구구(九丘) : 모두 상고 시대의 서적으로 삼분은 삼황(三皇)의 일을 기록한 책이고, 구구는 중국 구주(九州)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라 한다.

 

 

 

여헌선생속집 제6권_   잡저(雜著)_   평설(平說)

 

평설이란 제목을 세우지 않고 생각이 있을 때마다 기록한 것이니, 임진년과 계사년 이후의 글이다.


 

이(理)와 기(氣)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이가 있는 곳에는 기 또한 있고 기가 있는 곳에는 이 또한 있다. 그리하여 곳마다 기(氣)가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이(理)가 아닌 것이 없으며, 물(物)마다 기가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이가 아닌 것이 없으며, 때마다 기가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이가 아닌 것이 없다. 이미 이가 없는 곳이 없다면 어찌 기가 없는 곳이 있으며, 이미 이가 없는 물이 없다면 어찌 기가 없는 물이 있으며, 이미 이가 없는 때가 없다면 어찌 기가 없는 때가 있겠는가.
이(理)를 알려고 한다면 기가 아니고는 알 수가 없으며, 기를 알려고 한다면 이가 아니고는 알 수가 없다. 이를 기의 밖에서 구하는 것은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더구나 어찌 이가 기의 밖에 있겠는가. 기(氣)를 이의 밖에서 구하는 것은 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더구나 어찌 기가 이의 밖에 있겠는가.

우주(宇宙)의 사이에 형체가 있든 없든 크든 작든 무릇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기(氣)이다.
어제와 오늘의 사이에는 밤이 있고, 지난달과 다음달의 사이에는 그믐이 있고, 지난해와 올해의 사이에는 겨울이 있다. 앞 천지[前天地]가 소멸하여 없어지고 뒤 천지[後天地]가 아직 생기지 아니하여, 소멸하여 없어지고 아직 생기지 않은 사이에 원기(元氣)가 닫혀 있어 혼돈(混沌)이 된다.
그러나 소멸하여 없어지는 가운데에 곧 다시 싹터 생겨나는 기미가 있다. 그리하여 잠시라도 소멸하여 없어지면 곧 다시 싹터 생겨나서 간격이 없으니, 기는 과연 어느 때든 없는 적이 없는 것이다. 기가 어느 때든 없는 적이 없는 것은 바로 이가 어느 때든 없는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기이며 구분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이와 기이다.

오르고 내리고 오고 가는 것은 기(氣)의 운행(運行)이요 응집(凝集)하여 형질(形質)을 이루는 것은 기의 취결(聚結 모여서 뭉침)이니, 운행이 있으면 취결이 없을 수 없고 취결이 있으면 운행이 없을 수 없으며, 운행하는 소이(所以)와 취결하는 소이가 이(理)이다.
위로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고 아래로 땅에 물과 불과 흙과 돌이 있는 것은 취결 중의 크고 바른 것이요, 시절(時節)에 나타나 더위와 추위와 밤과 낮이 있으며 조화(造化)에 시행되어 바람과 우레와 비와 이슬이 있는 것은 운행 중의 크고 바른 것이다.
혹 해와 달이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을 당하고 별이 운행하는 도수(度數)를 잃으며 물과 불이 재앙이 되고 흙과 돌이 무너지는 것은 형질의 변괴요, 추위와 더위와 낮과 밤이 순서를 잃고 바람과 우레와 비와 이슬이 절도(節度)가 없는 것은 운행의 변괴이다.
반드시 성인(聖人)이 천지(天地)의 이치에 순수하고 천지의 기운에 합하여 능히 참찬(參贊)하고 위육(位育)해서위아래로 천지와 함께 흐른 뒤에야 비로소 상도(常道)를 다하여 변괴가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理)와 기(氣)의 바름을 얻어 만물(萬物)의 우두머리가 되고, 성인은 또 빼어난 가운데에 빼어나고 바른 가운데에 바른 것을 얻은 자이다. 그리하여 천지(天地)와 그 덕(德)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그 밝음이 합하고 사시(四時)와 그 순서가 합하고 귀신(鬼神)과 그 길흉이 합하는 것이다.
중인(衆人)들도 성인(聖人)과 똑같이 천지의 이(理)를 받고 똑같이 천지의 기(氣)를 얻어서 형체(形體)를 소유하고 성(性)을 소유하였으나 혹은 어리석은 자가 되고 혹은 불초(不肖)한 자가 되는 것은, 성인은 이(理)를 유독 많이 받아 성인이 되고 중인은 기(氣)를 유독 많이 받아 어리석은 자가 되고 불초한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과 중인이 비록 똑같이 한 이와 한 기를 얻었으나 천지에 유행하는 기는 모두 순수(純粹)하고 바를 수가 없어서 잡되고 편벽(偏僻)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순수함과 바름을 얻어서 성인이 된 자가 세상에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아래로는 편벽되고 잡된 가운데에 많고 적은 분수(分數)가 비록 똑같지는 않다 해도 중인으로 귀결되지 않는 자가 드물다.
천지가 사람을 낼 적에 어찌 모두 순수하고 바르기를 원치 않겠으며, 또 어찌 그 마음에 후하고 박함이 있겠는가마는, 순수함이 적고 잡됨이 많으며 바름이 적고 편벽됨이 많은 까닭은 기가 유행함에 자연 똑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수(數)에오직 1만이 상대가 없고 2 이하는 모두 섞여 있으며, 팔괘(八卦)의 획수(劃數) 중에오직 건괘(乾卦)만이 순양(純陽)이 되고 태괘(兌卦) 이하는 모두 음(陰)이 있으니, 성현(聖賢)이 적고 중인(衆人)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치이다.
다만 중인들은 성인에 대하여 똑같이 한 이를 받아 성(性)이 되고 똑같이 한 기를 받아 형체가 되어서 이가 통할 수 없는 것이 없고 형체가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각각 그 재질(才質)에 따라 지극히 하기를 구한다면 비록 모두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성현의 무리가 되어서 자포자기(自暴自棄)로 돌아감을 면할 것이 틀림없다.

크고 작음을 말하면 이(理)는 크고 기(氣)는 작으니 이는 한계가 없으나 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요, 길고 짧음을 말하면 이는 길고 기는 짧으니 이는 다함이 없으나 기는 다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氣)가 한계가 있고 다함이 있는 것 역시 이(理)일 뿐이다. 기가 비록 한계가 있으나 한계 밖에 또 기가 있고, 기가 비록 다함이 있으나 다한 뒤에 다시 기가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이가 한계가 없고 다함이 없어서 기가 한계에 국한되지 않고 다함에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다한 한계가 있으므로 한계가 없음이 되고, 허다한 다함이 있으므로 다함이 없음이 되니, 이것은 이와 기가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무릇 물건이 된 것은 크면 작지 않고 작으면 크지 않으며, 높으면 낮지 않고 낮으면 높지 않아, 시(始)와 종(終), 중(衆)과 과(寡), 허(虛)와 실(實)이 모두 각기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이(理)로 말하면 큼이 이것보다 더 클 수 없으면서도 작음이 이것보다 더 작을 수가 없으며, 높음이 이것보다 더 높을 수 없으면서도 낮음이 이것보다 더 낮을 수가 없으며, 시작이 이것보다 더 시작일 수 없으면서도 끝이 이것보다 더 끝일 수가 없으며, 하나가 이것보다 더 하나일 수 없으면서도 많음이 이것보다 더 많을 수가 없으며, 실(實)함이 이것보다 더 실할 수 없으면서도 허(虛)함이 이것보다 더 허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大)와 소(小), 고(高)와 비(卑), 시(始)와 종(終), 다(多)와 과(寡), 허(虛)와 실(實) 등의 글자로 편벽되이 이름을 붙이고 모의(模擬)하여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또 대와 소, 고와 비, 시와 종, 다와 과, 허와 실 등의 글자를 합하여 널리 보지 않는다면 또한 그 전체를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이(理)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천지와 만물이 천지와 만물이 된 소이(所以)가 이것이요, 음양(陰陽)과 만변(萬變 온갖 변화)이 음양과 만변이 된 소이도 이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 이(理)가 근저(根柢)가 되었고 천지와 만물이 이미 생겨난 뒤에 이 이가 기강(紀綱)이 되었으며, 음양과 만변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 이가 종통(宗統)이 되었고 음양과 만변이 이미 일어난 뒤에 이 이가 추뉴(樞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이는 근저가 되고 기강이 되면서도 천지·만물과 함께 가지 않으며, 종통이 되고 추뉴가 되면서도 음양·만변과 함께 지나가지 않는다. 천지와 만물은 필경 모두 다함이 있으나 이 이는 따라서 다하지 않으며, 음양과 만변은 크고 작음이 모두 한정이 있으나 이 이는 따라서 한정되지 않으니, 이 생생(生生)하고 화화(化化)하는 기(機)와 변통하여 다하지 않는 묘(妙)는 단서를 찾을 수 없고 연구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것은 지극히 알맞고 지극히 바른 것이요, 지극히 순(順)하고 지극히 곧은 것이요, 지극히 공정(公正)하고 지극히 한결같은 것이요, 지극히 평(平)하고 지극히 떳떳한 것이요, 지극히 쉽고 지극히 간략한 것이니, 이것이 곧 이른바 이(理)가 이가 된다는 것이다.

소리가 있은 뒤에 귀로 듣고, 색깔이 있은 뒤에 눈으로 보고, 냄새가 있은 뒤에 코로 냄새를 맡고, 맛이 있은 뒤에 입으로 맛을 취하고, 형질(形質)이 있은 뒤에 손으로 만지고, 방소(方所)가 있은 뒤에 발로 밟는다.
그러나 이(理)로 말하면 소리도 아니요 색깔도 아니요 냄새도 아니요 맛도 아니요 형질도 아니요 방소도 아니다. 소리가 없으면서도 온갖 소리의 주체(主體)가 되고, 색깔이 없으면서도 온갖 색깔의 주체가 되고, 냄새가 없으면서도 온갖 냄새의 주체가 되고, 맛이 없으면서도 온갖 맛의 주체가 되고, 형질이 없으면서도 온갖 형질의 주체가 되고, 방소가 없으면서도 온갖 방소의 주체가 된다.
소리가 있는 것을 듣고서 소리가 없는 것을 알며, 색깔이 있는 것을 보고서색깔이 없는 것을 알며, 냄새가 있는 것을 맡고서 냄새가 없는 것을 알며, 맛이 있는 것을 취하여 맛이 없는 것을 알며, 형질이 있는 것을 만져 형질이 없는 것을 알며, 방소가 있는 곳을 밟아 방소가 없는 곳을 알게 되니, 이는 이(理)라는 것이 소리가 있고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고 맛이 있고 형질이 있고 방소가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명(高明)하여 만물을 덮어줌은 하늘이 그러한 것이요, 박후(博厚)하여 만물을 실어줌은 땅이 그러한 것이요, 해와 달과 성신(星辰)은 상(象)이 그러한 것이요, 산악(山嶽)과 천독(川瀆)은 질(質)이 그러한 것이요, 추위와 더위와 낮과 밤은 때가 그러한 것이요, 바람과 구름과 우레와 비는 기(氣)가 그러한 것이요, 동물과 식물, 나는 새와 물 속에 잠겨 있는 물고기들은 물건이 그러한 것이니, 이러한 것을 관찰하면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 수 있다.
소이연(所以然)이 있기 때문에 이에 소필연(所必然)이 되고, 소필연이 있기 때문에 이에 소당연(所當然)이 되고, 소당연이 있기 때문에 이에 소고연(所固然)이 되고, 소고연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소자연(所自然)이 됨을 알 수 있다. 소이연에서 시작되어 소자연에서 이루어지는데, 소필연과 소당연과 소고연은 그 사이에 들어 있다. 소이연은 그 시작을 근원한 것이요 소필연과 소당연과 소고연은 그 실제를 가리킨 것이요 소자연은 그 끝을 요약한 것이니, 이 다섯 개의 연(然)을 세우면 이(理)가 이가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理) 자체가 다섯 가지의 순서를 기다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이를인식하기 위해서 모름지기 다섯 개의 글자를 가지고 서로 인(因)하는 순서를 따라 함께 관찰한 뒤에야 거의 근거하는 바가 있어서 그 실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섯 개의 소(所)는 정(定)함이 있는 말[辭]이요, 다섯 개의 연(然)은 형기(形氣)가 드러난 것이요, 이(以)와 필(必)과 당(當)과 고(固)와 자(自)는 서로 징험하는 조목이다. 그렇다면 천지와 만물, 만변과 만화를 벗어나서 이(理)를 관찰할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인간이 묵묵히 이해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理)라는 글자가 여러 책에 흩어져 나와서 혹은 ‘다스림[治]’이라고 훈(訓)하고 혹은 ‘조리(條理)’라고 훈하여 옛날에는 깊이 말한 것이 없었는데, 오직 《주역(周易)》의 설괘전(說卦傳)에 공자(孔子)가 비로소 ‘이치를 궁구한다[窮理]’는 글을 발명하였으니, 이는 만물(萬物)과 만사(萬事)의 이치를 가리킨 것이다.
물건에는 천 가지 형체와 만 가지 모양이 있고 일에는 천 가지 조리와 만 가지 실마리가 있는데, 각각 그 형체를 간직하고 각각 그 모양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함께 길러져 서로 해치지 않으며, 각각 그 조리를 가지고 각각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함께 행해져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이 이치가 아니고 능히 그럴 수 있겠는가.
여러 가지 형체와 여러 가지 모양과 여러 가지 조리와 여러 가지 실마리를 보면 만 가지로 다른 것이 이치이며, 함께 길러져 해치지 않고 함께 행해져 모순되지 않음을 보면 한 근본인 것이 이치이다. 그리고 일이나 물건에 따라 각기 갖추어져 문란하지 않은 것이 이미 찬란한 용(用)이 되었다면 원두(源頭)로서 모두 모여 있고 한 근본이 만 가지를 꿰뚫고 있는 것이 어찌 혼연(渾然)한 본체(本體)가 아니겠는가.
한 근본인 가운데에 만 가지 다른 이치를 갖추고 있으나 유여(有餘)함을 볼 수 없으며, 만 가지 다른 곳에 한 근본의 이치를 합하고 있으나 부족(不足)함을 볼 수 없다. 근본은 물건이 있기 이전에 서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만 가지 물건을 보는 자가 한갓 물건이 있은 뒤에만 집착(執着)할 것이 없으며, 각각의 물건의 이치는 물건이 있은 뒤에 갖추어지는 것이니 그렇다면 물건을 연구하는 자가 한갓 물건이 있기 이전에만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 관찰하는 방법은 오직 활간(活看)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주를 합하여 거슬러 관찰하면 그 처음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하나가 하나인 것이 백(百)·천(千)·만(萬)·억(億)의 원조(元祖)가 되니, 그렇다면 어찌 다만 항상 하나에 그쳐서 변함이 없겠는가.
근본[本]은 반드시 지엽[末]이 있고 시작[始]은 반드시 끝[終]이 있으며, 체(體)는 반드시 용(用)이 있고 큰 것은 반드시 작은 것이 있으니, 이른바 하나라는 것은 곧 스스로 무궁한 변화가 있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이에 문자(文字)를 세워 발명해서 수많은 명목(名目)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보는 자가 모름지기 활간하여 각기 세운 명목에 구애되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한 근원이 만 가지로 달라진 이치를 깨달아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잃지 않게 될 것이다.
통합된 본체[統體]를 가지고 말하면 태극(太極)이라 이르고, 본연(本然)을 가지고 말하면 이(理)라 이르고, 작용을 가지고 말하면 기(氣)라 이르고, 유행(流行)을 가지고 말하면 도(道)라 이르고, 부여(賦與)함을 가지고 말하면 명(命)이라 이르고, 간직하고 있는 떳떳한 성품[秉彝]을 가지고 말하면 성(性)이라 이르고, 발하여 나온 것을 가지고 말하면 정(情)이라 이르고, 스스로 얻은 것을 가지고 말하면 덕(德)이라 이르고, 드러나고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하면 문(文)이라 이르고,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재(才)라 이른다. 그리하여 가리키는 바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고 명칭에 따라 글자를 달리하나 그 실제는 똑같은 것이다.

태극(太極)이란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진실하고 지극히 알맞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선(善)하고 지극히 순(順)하여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고 통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더할 수 없는 것을 이른다.
시작에 미루어 보면 시작을 다하고 끝에 미루어 보면 끝을 다하며, 큰 것에 미루어 보면 큰 것을 다하고 작은 것에 미루어 보면 작은 것을 다하며, 위에 미루어 보면 위를 다하고 아래에 미루어 보면 아래를 다하여,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고 흠결(欠缺)된 바가 없고 중단하는 때가 없다. 그러므로 태극이라고 말한 것이니, 태극이란 곧 이른바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나뉘어 둘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이에 셋이 되고 넷이 되고 다섯이 되어 십(十)·백(百)·천(千)·만(萬)의 무궁함에 이르는 것이다.

물건에는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에는 시(始)와 종(終)이 있으며, 도(道)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고 분수(分數)에는 대(大)와 소(小)가 있으니, 말은 본에서 나왔으나 말이 치우치면 본을 해치고, 종은 시에서 근원하였으나 종이 지나치면 시를 어기고, 용은 체에서 생겼으나 용이 치우치면 체를 해치고, 소는 대에게 통솔되나 소가 지나치면 대를 해친다.
치우쳐 해침을 보고는 본(本) 자체가 그렇고 말(末) 자체가 그렇다고 이르며, 지나쳐 어기는 것을 보고는 시(始) 자체가 그렇고 종(終) 자체가 그렇다고 이르며, 치우쳐 해침을 보고는 체(體) 자체가 그렇고 용(用) 자체가 그렇다고 이르며, 지나쳐 해침을 보고는 대(大) 자체가 그렇고 소(小) 자체가 그렇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요컨대 말은 항상 본을 좇아 치우침에 이르지 않고, 종은 항상 시를 돌아보아 지나침에 이르지 않고, 용은 항상 체를 주장하여 편벽됨에 이르지 않고, 소는 항상 대를 받들어 넘침에 이르지 않게 할 뿐이다.

태극은 똑같은 태극이나 원초(元初)의 통체(統體)의 태극은 체(體)이고 만물이 각기 갖추고 있는 태극은 용(用)이다. 통체의 태극이 이미 원초에 서 있기 때문에 각기 갖추고 있는 태극이 물건에 따라 정해짐이 있는 것이니, 각기 갖추고 있는 태극을 근본해 보면 이것이 통체의 태극이요, 통체의 태극을 미루어 보면 이것이 각기 갖추고 있는 태극이다. 그러나 통체의 태극은 일찍이 더하고 줄어듦이 없으나 각기 갖추고 있는 태극은 혹 각기 간직하고 있는 바에 치우침이 없을 수 없다.
토석(土石)은 형질(形質)이 있으나 생의(生意)가 없고 혈기(血氣)가 없고 지각(知覺)이 없고 언행(言行)이 없어서 있는 것이 하나이고 없는 것이 넷이며, 초목(草木)은 형질이 있고 생의가 있으나 혈기가 없고 지각이 없고 언행이 없어서 있는 것이 둘이고 없는 것이 셋이며, 금수(禽獸)는 형질이 있고 생의가 있고 혈기가 있고 지각이 있으나 언행이 없어서 있는 것이 넷이고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리 인간은 형질이 있고 생의가 있고 혈기가 있고 지각이 있고 언행이 있어서 다섯 가지를 모두 구비하고 있다.
단지 형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완전히 막힘이요, 두 가지가 있고 세 가지가 없는 것은 막힘의 다음이요, 네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비록 다소의 지각이 있으나 이미 언행이 없으니, 또한 막혀 있는 유가 될 뿐이다. 오직 다섯 가지를 모두 구비한 뒤에야 비로소 가장 영특하고 가장 귀한 물건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만물이 똑같지 않은 것은 모두 자연의 이치이며, 이처럼 똑같지 않게 만든 것은 태극의 용(用)이다. 이에 토석은 토석의 성질을 따르고 초목은 초목의 성질을 따르고 금수는 금수의 성질을 따르고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의 성질을 따른다면 똑같지 않은 가운데에 똑같은 것이 있어서 태극의 용이 똑같지 않아도 무방하다.
사람 가운데에도 어둡고 밝고 순수하고 잡박(雜駁)함에 차이가 있어서 그 에 따라 어리석고 지혜롭고 어질고 불초함에 똑같지 않음이 있으니, 진실로 음(陰)과 양(陽)은 기(氣)인데 여기에는 자연 청(淸)과 탁(濁)의 구별이 있으며, 강(剛)과 유(柔)는 질(質)인데 여기에는 자연 정(精)과 조(粗)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기를 받아 사람이 된 자가 자연 똑같지 않은 것이다.
오직 성인(聖人)은 음과 양, 강과 유의 바름을 얻어서 통명(通明)하고 중화(中和)한 덕(德)을 구비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그러나 음과 양에 청과 탁이 있고 강과 유에 정과 조가 있는 것도 모두 태극의 용이다. 청하고 정한 것만이 태극에서 나오고 탁하고 조한 것은 태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나, 변화(變化)하고 유행(流行)하는 묘(妙)가 자연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토석과 초목과 금수와 같은 물건과 달라서 하늘에 머리를 두고 발로 땅을 밟아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 서서 삼재(三才)가 되었다. 그리하여 귀는 천하의 소리를 다 거두고, 눈은 천하의 색깔을 다 거두고, 코는 천하의 냄새를 다 거두고, 입은 천하의 맛을 다 거두고, 손은 천하의 일을 다 하고, 발은 천하의 땅을 다 돌아다니고, 마음은 천하의 이치를 다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스스로 훌륭한 일을 하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면 마땅히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법이니, 이것이 성인이 학문하는 방법과 교회(敎誨)하는 방법을 만들어서 어둡고 어리석은 자들을 변화시켜 밝고 지혜롭게 만들고 박잡한 자들을 변화시켜 순수하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는 태극의 전체가 고금(古今)을 통해 일찍이 더하거나 줄어듦이 없는데 사람이 천지(天地)와 서로 똑같기 때문이니, 토석처럼 생의가 없고 초목처럼 지각이 없고 금수처럼 언행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

도(道)에는 만 가지 변화가 있고, 일에는 만 가지 실마리가 있고, 물건에는 만 가지 종류가 있다. 만 가지 변화 가운데에 정(精)과 조(粗)가 있고 만 가지 실마리 가운데에 경(輕)과 중(重)이 있고 만 가지 종류 가운데에 귀(貴)와 천(賤)이 있으니, 이는 크고 작은 분수가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과 조가 모두 도이고 경과 중이 모두 일이고 귀와 천이 모두 물건인 것이니, 크든 작든 그 이치는 똑같다.
큰 조화[大化]에 있어서는 천지가 크고 만물이 작으며, 한 세상에 있어서는 군후(君后)가 크고 신서(臣庶)가 작으며, 고금(古今)에 있어서는 성인(聖人)이 크고 중인(衆人)이 작으며, 한 몸에 있어서는 마음이 크고 중체(衆體 신체의 여러 기관)가 작은 것이다. 작은 것은 큰 것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또한 큰 것에게 작은 것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작은 것이 없다면 큰 것이 어찌 홀로 스스로 큰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분수(分數)에는 진실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이치에는 본래 크고 작은 구별이 없으니, 서로 바뀔 수 없는 것은 분수가 정해짐이요 두 가지가 없을 수 없는 것은 이치가 하나인 것다. 요컨대 모름지기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통솔하고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받들어서 크고 작은 것이 서로 구제한 뒤에야 천하의 이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천지는 만물이 없을 수 없고 만물은 천지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군후는 신서가 없을 수 없고 신서는 군후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성인은 중인이 없을 수 없고 중인은 성인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마음은 중체가 없을 수 없고 중체는 마음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안에 있어 의리(義理)를 모두 주관하고 귀와 눈과 코와 입과 사지(四肢)는 밖에 있어 각각 한 신체의 직책을 맡는다. 의리를 모두 주관하는 것은 진실로 천칙(天則)이며, 각기 한 직책을 맡고 있는 것 역시 모두 천칙이니, 큰 것만이 이치이고 작은 것은 이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의리가 행해짐은 각 직책을 맡고 있는 귀와 눈과 코와 입과 사지가 아니면 진실로 의지하여 할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러나 각각의 직책을 맡고 있는 것들이 만약 의리를 주관하는 마음에 순종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맡고 있는 것에 의거하여 스스로 자기 직책만을 주장한다면 맡은 일을 무너뜨리고 마음을 침해하여 성명(性命)을 상실(喪失)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만약 먼저 기강(紀綱)을 세워서 한결같이 의리로써 각각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작은 육신[小司]들을 관섭(管攝)한다면 밖에 있는 작은 육신들이 그 누가 감히 직책을 받들어 명령을 따르지 않겠는가. 이때문에 큰 것은 작은 것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것이 큰 것을 능멸함은 모두 큰 것이 제 스스로 서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반드시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주관한 뒤에야 중체가 각기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태극을 말씀하였으니, 이 이치를 설명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염계(濂溪) 주자(周子)가 무극(無極)을 태극의 위에 더하고는 인하여 이(而) 자(字)를 그 사이에 붙여서 통하게 하였으니,또 무극을 설명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주자(周子)는 공자께서 말씀한 태극 두 글자가 표현에 부족함이 있다고 여겨서 무극을 더한 것이 아니다. 대개, “이른바 태극이란 것은 횡(橫)으로 보고 종(縱)으로 보며 크게 보고 작게 보며 은미하게 보고 드러나게 보며 거슬러 올라가 보고 이끌어 내어 볼 적에, 오직 참되고 오직 바르고 오직 선(善)하고 오직 순(順)하여서 다시 더할 수 없는 명칭이다. 그러나 이미 극(極)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혹 형상(形象)과 모범(模範 고정된 틀)으로 모의(模擬)할 수 있는 것이라 의심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말씀하였으니, 무(無) 자는 태(太) 자와 서로 응한다. 이미 태 자가 있다면 무 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태(太)란 것은 이치의 실(實)함을 말한 것이요 무(無)란 것은 이치의 숨음[隱]을 말한 것이다. 태(太)라고 이르면 지나치게 유(有)라고 의심할까 두렵고, 무(無)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무(無)라고 의심할까 두렵다. 그러므로 반드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말한 뒤에야 태가 상(象)이 있는 것에 붙지 않고 무가 허무(虛無)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크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커서 극(極)이 극이 된 것이 형체가 없는 가운데에 드러나고 이름할 수 없는 즈음에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운데에 이(而) 자를 둔 것은 또 앞뒤의 극(極) 자가 두 가지 극이 아님을 드러내 밝힌 것이니, 이는 진실로 우주(宇宙)가 있은 이래로 공자(孔子)가 없으면 안 되고 공자가 있은 이래로 주자(周子)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대요(大堯)는 단지 ‘윤집궐중(允執厥中)’의 네 글자를 말씀하였는데, 대순(大舜)은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의 열두 글자를 더하여 ‘윤집궐중’의 뜻이 이에 밝아진 것과 같다.이는 대순이 ‘윤집궐중’의 네 글자가 부족하다고 여겨서 열두 글자를 더하여 스스로 자랑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극이 되어 없으면서도 큰 것이 과연 어떠하다 하겠는가.
이른바 참되고 바르고 선(善)하고 순(順)하다는 것은 형상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귀로 들을 수가 없고 손으로 더듬을 수가 없고 오직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눈이 아닌 것으로 보고 귀가 아닌 것으로 듣고 손이 아닌 것으로 더듬어서 그 숨은 것을 밝힐 수 있고 그 묘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측량할 수 없는 체(體)를 측량하고 연구할 수 없는 용(用)을 연구하여, 크면 크고 작으면 작고 높으면 높고 깊으면 깊고 안에 있으면 안에 있고 밖에 있으면 밖에 있고 위에 있으면 위에 있고 아래에 있으면 아래에 있고 가까우면 가깝고 멀면 멀어서, 사방으로 널리 퍼져 끝이 없고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고 이끌어 내려와도 끝남이 없다.
하늘과 땅이 개벽(開闢)하기 전에도 곧 이 이치였고, 하늘과 땅이 이미 개벽했을 때에도 또한 이 이치였고, 하늘과 땅이 이미 다한 뒤에도 반드시 이 이치인 것이다. 어찌 다만 하늘과 땅뿐이겠는가. 물건마다 이 이치이고 때마다 이 이치이고 곳마다 이 이치이니, 이 이치의 밖에 어찌 물건이 있겠으며 어찌 때가 있겠으며 어찌 곳이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것이다.
이미 태극이라고 말했으면 무릇 이른바 크고 작음과 드러나고 은미함과 높고 깊음과 멀고 가까움이란 것이 모두 그 가운데에 들어 있으며, 또 무극이라고 말했으면 이른바 형체가 되고 기운이 되어서 성쇠(盛衰)와 영허(盈虛)와 굴신(屈伸)과 소장(消長)이 있다는 것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치가 되는 소이(所以)일 것이다

성인(聖人)이 문자(文字)를 만들어서 만변(萬變)·만화(萬化)·만물(萬物)·만사(萬事)의 명목을 세웠으니, 하나의 일과 하나의 물건에는 반드시 체(體)와 용(用), 본(本)과 말(末), 정(精)과 조(粗), 표(表)와 이(裏)가 있다. 따라서 체와 용, 본과 말이 그 명칭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고, 정과 조, 표와 이가 그 명칭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다름을 따라 명칭을 세우고 명칭을 따라 글자를 달리하였으나 같은 가운데에도 다름이 있고 다른 가운데에도 같음이 있다.
오직 명목을 각기 세운 것은 성인이 일부러 달리한 것이 아니요 이 역시 모두 자연의 이치와 자연의 형세인데, 다르게 명칭한 까닭은 바로 같음을 밝혀서 하나임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런데 후학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에 교착(膠着)되고 심사(心思)에 빠져서 다름을 아는 자는 같음을 알지 못하고 같음을 아는 자는 다름을 알지 못하여, 필경 이(理)가 하나인 것이 곳마다 하나가 아님이 없고 도(道)가 같은 것이 때마다 같지 않음이 없음을 모르니, 그렇다면 성인의 본의를 멀리 벗어났다 할 것이다.
아, 문자라는 것은 사람의 귀와 눈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인데 이제 도리어 문자 때문에 교착이 되고, 명목을 세운 것은 심사를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 도리어 명목 때문에 불통(不通)하게 되니, 이 어찌 성인이 사람을 그르친 것이겠는가. 사람이 제 스스로 그르쳤을 뿐이다. 이는 문자를 가지고 문자를 관찰할 뿐 이(理)로써 문자를 관찰하지 못하고, 명목을 가지고 명목을 관찰할 뿐 도(道)로써 명목을 관찰하지 못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치를 궁구하여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어찌 더불어 변화의 요체(要體)를 논하고 사물의 근원을 살필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의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 하였으니, 여기에 이른바 ‘낳는다’는 것은 괘(卦)를 긋는 초기에 다만 곱절을 더하는 법(法)을 따라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어서 세 효(爻)를 이룬 것을 말한다.
여덟은 넷을 가지고 나누어 여덟이 된 것이요 넷은 둘을 가지고 나누어 넷이 된 것이요 둘은 하나를 가지고 나누어 둘이 된 것이니, 여덟은 곧 넷이요 넷은 곧 둘이요 둘은 곧 하나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손자를 낳아 서로 대(代)를 이어가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무궁하게 변화하는 묘함이 있는 것이다.
하나(태극)가 부족한 것이 아니요 둘(음양)과 다섯(오행)도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합하고 나누어 말하여 그 이치를 밝혔을 뿐이니, 이것이 성인의 가르침이다.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봄에 단지 그 확고하고 유순하고 아득하고 분분함을 볼 뿐이니, 당초에 어찌 이른바 태극(太極)과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이라는 명목이 있었겠는가. 또 어찌 이(理)와 기(氣)와 도(道)와 명(命)의 칭호가 있었겠는가.
다만 성인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드러난 것을 은미하게 하고 그윽한 것을 밝혀서 성명(性命)의 이치를 따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목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태극이라 하고 이것이 이기라 하고 이것이 오행이라 하고 이것이 사물이라 하고 이것이 도덕이라 하였을 뿐이니, 요점은 사람들이 활간(活看)하여 보고 세밀히 분석하여 하나임을 앎에 달려 있다.

원기(元氣)의 양(陽)이 밖에서 운행하는 것은 하늘이요, 원기의 음(陰)이 가운데에 모여 있는 것은 땅이다. 하늘과 땅이 이미 자리를 정하고 있으매 해와 달과 산과 못과 우레와 벼락과 바람과 비는 조화(造化)의 도구이고, 한 번 낮이 되고 한 번 밤이 되며 한 번 춥고 한 번 더워서 오르고 내리며 가고 오며굽히고 펴며 사라지고 자라남은 유행(流行)의 용(用)이다.
산과 들, 물과 육지, 높은 곳과 깊은 곳, 안과 밖의 지역에 두루 가득하고 충만하여, 혹 맑기도 하고 혹 탁하기도 하며, 혹 순수하기도 하고 혹 잡박하기도 하며, 혹 후(厚)하기도 하고 혹 박(薄)하기도 하며, 혹 정(精)하기도 하고 혹 거칠기도 하여, 서로 없을 수 없고 모두 똑같을 수 없는 것이 유행하는 기운이다.
얻은 바 기운의 맑고 탁함과 순수하고 잡박함과 후하고 박함과 정하고 거耔이 똑같지 않음에 따라서 생겨나는 물건도 선과 악, 편벽됨과 바름, 큼과 작음, 귀함과 천함의 일정하지 않음이 없을 수 없으니, 기운이 똑같지 않은 소이(所以)와 물건이 일정하지 않은 소이 역시 모두 자연의 이치이다.
진실로 이 이치의 밖에 별도로 어떤 물건과 어떤 일이 스스로 용사(用事)함이 있어 탁한 것이 되고 잡박한 것이 되고 박한 것이 되고 거친 것이 되어서, 편벽됨이 있고 악함이 있고 작음이 있고 천함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맑고 순수하고 정하고 후한 것은 기운의 근본이고, 탁하고 잡박하고 박하고 거친 것은 기운의 말(末)인데, 근본을 얻은 것은 물건 중에 선하고 바르고 귀하고 큰 것이 되며, 말을 얻은 것은 물건 중에 편벽되고 악하고 천하고 작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물건 중에 선하고 바르고 귀하고 큰 것이 주장이 되어 통솔하고, 편벽되고 악하고 천하고 작은 것이 종속(從屬)되어 제재를 받는 것이니, 선하고 바르고 귀하고 큰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겠으며, 편벽되고 악하고 천하고 작은 것은 중인(衆人)이 아니겠는가. 이는 성인이 군주와 우두머리가 되어서 사람들을 통솔하여, 편벽되고 악하고 천하고 작은 중인들로 하여금 선하고 바르고 귀하고 큰 교화(敎化)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감히 스스로 자기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한 몸 가운데에도 또한 귀하고 천함과 크고 작음의 일정하지 않음이 있으니, 성인이 성인이 된 것은 또한 귀한 것으로 천한 것을 제어하고 큰 것으로 작은 것을 통솔해서일 뿐이다. 이른바 천하고 작다는 것은 귀와 눈과 코와 입과 사지(四肢)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이른바 귀하고 크다는 것은 성명(性命)이 머물고 있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귀하고 천함과 크고 작음의 분별이 이미 한 몸에서 문란하지 않기 때문에 집안과 나라와 천하에서 문란하지 아니하여, 사람과 물건의 성(性)을 다하고 하늘과 땅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니, 아, 위대하도다.

이치라는 것은 참됨은 있고 망녕됨은 없으며 바름은 있고 간사함은 없으며 선은 있고 악은 없으며 순함은 있고 거스름은 없으니, 참되기 때문에 만변(萬變)의 주체가 되고 바르기 때문에 만화(萬化)의 근원이 되고 선하기 때문에 만사(萬事)의 종주가 되고 순하기 때문에 만물(萬物)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치라 이르니, 만일 혹시라도 한 털끝만한 망녕됨과 한 털끝만한 간사함과 한 털끝만한 악함과 한 털끝만한 거스름이 사이에 끼이게 되면 이것을 이치라고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한 이치가 없다면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이 비록 단 하루라도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만고(萬古)의 하늘과 땅이 되고 만고의 사람과 물건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은 만고가 지나도 항상 하늘이고 땅은 만고가 지나도 항상 땅이고 사람은 만고가 지나도 항상 사람이고 물건은 만고가 지나도 항상 물건이다. 그리하여 높고 밝은 하늘은 항상 높고 밝고, 넓고 후한 땅은 항상 넓고 후하고, 머리가 둥글고 발이 네모진 사람은 항상 머리가 둥글고 발이 네모지고, 머리를 횡으로 둔 금수와 머리를 아래로 둔 초목은 항상 머리를 횡으로 두고 머리를 아래로 두니, 이것은 형체의 떳떳함이다.
동(動)하고 굳센 하늘은 항상 동하고 굳세고, 고요하고 순한 땅은 항상 고요하고 순하며, 영특하고 귀한 사람은 항상 영특하고 귀하고, 편벽되고 작은 금수와 초목은 항상 편벽되고 작으니, 이것은 성질의 떳떳함이다.
이는 모두 이치가 스스로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하여 이치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 각각 그 떳떳함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참되면 변함이 없고 바르면 결손이 없고 선하면 실패함이 없고 순하면 무너짐이 없다. 그러므로 이치가 이치가 됨은 억만 대(代)를 지나도 일찍이 다하지 않고 억만 가지 물건을 생산하여도 일찍이 소모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은 다함이 있으나 이치는 다하지 않고, 사람과 물건은 다함이 있으나 이치는 다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함일 뿐이다.
혹자가 묻기를, “사람이 사람이 되고 물건이 물건이 된 것은 모두가 이 이치 가운데의 사람과 물건인데, 그 중에 망녕되고 간사하고 악하고 거스르는 행위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말(末)이 본(本)을 이기고 용(用)이 체(體)를 이기고 천한 것이 귀한 것을 해치고 작은 것이 큰 것을 해친다. 이에 망녕됨이 되고 간사함이 되고 악함이 되고 거스름이 되어 제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과 불은 본래 오행의 큰 쓰임이요 조화의 참다운 도구이나, 물은 혹 하늘에 닿을 듯한 홍수(洪水)의 재앙이 있고 불은 혹 초토화(焦土化)하는 화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상히 여길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함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망녕된 것은 반드시 멸망하고 간사한 것은 반드시 죽고 악한 것은 반드시 실패하고 거스르는 것은 반드시 흉하게 된다. 잠시 동안은 비록 참됨을 이기고 바름을 해치고 선함을 전복시키고 순함을 빠뜨리는 듯하나, 하늘이 정해진 뒤에 이르러서는 참됨이 망녕됨을 이기지 못함이 없고 바름이 간사함을 이기지 못함이 없고 선함이 악함을 이기지 못함이 없고 순함이 거스름을 이기지 못함이 없는 것이니, 이는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함이 바로 이치의 떳떳함이기 때문이다. 아, 이치를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찮게 여길 수 있다면 이치가 아니니, 진실로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하다 할 것이다.”

하였다.

물건마다 근본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치의 온전함이요, 일마다 주재(主宰)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치의 묘함이요,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치의 두루함이요, 때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니, 참되고 바르고 선하고 순하다는 것은 덕(德)을 가지고 이치를 말한 것이요, 온전하고 묘하고 두루하고 떳떳하다는 것은 재주를 가지고 이치를 말한 것이다.
이치는 진실로 재주와 덕을 가지고 말할 수 없으나 만약 언어(言語)를 사용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문자(文字)가 아니면 참고하여 징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있지 않음이 없고 잠시라도 혹 쉼이 없다. 그리하여 모두 있고 빠짐이 없는 가운데에 자연 본말(本末)과 대소(大小)와 귀천(貴賤)과 경중(輕重)의 구분이 있으며, 항상 운행하여 쉬지 않는 가운데에 또 장단(長短)과 구잠(久暫)과 동정(動靜)과 긴헐(緊歇)의 요점이 있으니, 이는 없을 수 없고 쉴 수 없는 사이에 마침내 문란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도가 있는 것이다.
없을 수 없고 쉴 수 없는 것은 경(經)이요, 문란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것은 위(緯)이다. 없을 수 없는데 없고 쉴 수 없는데 쉰다면 이치가 이지러지고 중단됨에 이를 것이요, 문란할 수 없는데 문란하고 바꿀 수 없는데 바꾼다면 이치가 괴려(乖戾)되고 착란(錯亂)됨에 이를 것이니, 이는 패란(敗亂)과 멸망(滅亡)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성인이 된 소이와 다스려진 세상이 다스려진 세상이 된 까닭은 모두 이 이치를 따른 것일 뿐이다.

《주역》의 건괘(乾卦) 괘사(卦辭)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이것을 네 가지 덕으로 설명하였으니, 단전(彖傳)에 이른바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해서 하늘을 통솔한다[萬物資始 乃統天]’는 것은 원(元)의 사업이요, ‘구름이 흘러다니고 비가 내림에 온갖 물건이 형체를 간직한다[雲行雨施 品物流形]’는 것은 형(亨)의 사업이요, ‘건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간직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는 것은 이(利)의 사업이요, ‘대화를 보합한다[保合大和]’는 것은 정(貞)의 사업이다. 그리고 문언전(文言傳)에 이른바 ‘선(善)의 우두머리’요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의(義)의 화함’이요 ‘일의 근간(根幹)’이라는 것은 원(元)·형(亨)·이(利)·정(貞)의 실제이다.
천도(天道)의 조목은 네 가지일 뿐인데, 선(善)에 으뜸이 되고 아름다움을 모으고 의를 조화롭게 하고 일에 근간이 되어서 천하의 도가 이에 다하며, 의뢰하여 시작하고 형체를 간직하고 각각 성명을 간직하게 하고 보화(保和)해서 천하의 물건이 이에 다한다.
이것이 음양(陰陽) 및 오행(五行)과 명칭을 달리하는 까닭은 음양과 오행은 기(氣)로써 말한 것이요 원·형·이·정은 덕(德)으로써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과 형은 성(誠)이 통함이니 기운에 있어 양(陽)이요, 이·정은 성(誠)이 돌아옴이니 기운에 있어 음(陰)이다. 그렇다면 음양의 밖에 따로 원·형·이·정의 네 가지 덕(德)이 있겠는가.
원(元)이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게 하는 것은 목(木)의 기운이 행하는 것이요, 형(亨)이 만물의 형체를 간직하게 하는 것은 화(火)의 기운이 행하는 것이요, 이(利)가 각기 만물의 성명을 간직하게 하는 것은 금(金)의 기운이 행하는 것이요, 정(貞)이 만물을 보합(保合)하게 하는 것은 수(水)의 기운이 행하는 것이요, 네 가지 덕(德)이 모두 그 쓰임을 진실하게 하는 것은 토(土)의 기운이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행의 밖에 따로 네 가지 덕이 있겠는가. 음양의 두 기운이 왕래함과 오행이 순히 펴짐은 모두가 네 가지 덕이 제때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굴신(屈伸)으로써 말하기 때문에 음양이라 이르고 변화(變化)로써 말하기 때문에 목·화·금·수·토라 이른다. 만약 덕(德)으로써 말하면 이것을 원·형·이·정이라 하는 것이니, 진실로 음양과 오행과 네 가지 덕이 각기 그들 나름의 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네 가지 덕이 나뉘어서 넷이 된 것은 이치 가운데에 본래 이 네 쪽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조화가 유행하는 즈음에 나아가매 곧 이 선후(先後)와 시종(始終)의 차서(次序)와 분한(分限)이 있는 것뿐이다.
네 가지 덕은 본래 한 이치이니, 처음에 어찌 이른바 원과 형과 이와 정이라는 명칭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공용(功用)에 나타남에 이르러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였으므로 원이라 이르고, 형체를 부여(賦與)받았으므로 형이라 이르고, 각각 성명(性命)을 간직하였으므로 이라 이르고, 보합하였으므로 정이라 이른 것이다. 다만 똑같은 한 태극인데 원할 수 있고 형할 수 있고 이할 수 있고 정할 수 있으므로 원할 때를 당하면 원하고 형할 때를 당하면 형하고 이할 때를 당하면 이하고 정할 때를 당하면 정하는 것이다. 덕의 수(首)로써 말하면 형이 되고 이가 되고 정이 됨은 곧 한 원(元)이 변(變)한 것이요, 덕의 종(終)으로써 말하면 원이 되고 형이 되고 이가 됨은 곧 한 정(貞)이 화(化)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들어 있는 형(亨)과 이(利)는 곧 원을 받들어서 정을 이루는 것이다.
덕은 네 가지에 그치나 위로는 천지(天地)의 도(道)를 다하고 아래로는 만물(萬物)의 성(性)을 다하니, 어찌 네 가지 덕이 한 태극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하고 만물 가운데에 우두머리가 되어 이 몸을 소유하였으며, 하늘이 되고 땅이 된 이치와 기운이 또 그 사이에 모여 가장 빼어난 것을 얻은 자이다.
형질(形質)이 응결(凝結)되어 온갖 육체를 이루고 일정하여 변치 않는 것은 사람의 몸에 땅인 것이요, 기운이 온몸에 두루 충만하여 운행하고 쉬지 않는 것은 사람의 몸에 하늘인 것이니, 이는 원기(元氣) 중에 가볍고 맑은 것이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이 땅이 되어서, 땅이 하늘 기운 가운데에 있어 들어주고 잡아주는 바가 되며 하늘이 땅의 형질 위에 의지하여 부착(附着)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밖의 형체인 힘줄과 뼈와 피와 살과 모발(毛髮)은 오행의 형질이요, 안의 장기(臟器)인 심장(心臟)과 간장(肝臟)과 비장(脾臟)과 폐장(肺臟)과 신장(腎臟)은 오행의 정(精)이며, 담(膽)과 삼초(三焦)와 대장(大腸)과 소장(小腸)과 위(胃)와 방광(膀胱)의 육부(六腑)가 뱃속에 있는 것은 산림(山林)과 원야(原野)와 천택(川澤)이 땅 가운데에 천연의 부고(府庫)가 된 것이요, 귀와 눈과 입과 코의 일곱 구멍이 머리와 얼굴에 있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이 태허(太虛)에 있어 하늘의 상(象)이 된 것과 같다. 잡음에 손이 있고 보행(步行)함에 발이 있는데 팔과 다리가 각각 둘씩인 것은 양의(兩儀)의 수(數)이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다섯씩인 것은 오행의 수(數)이다.
물건은 반드시 형색(形色)이 있으므로 눈이 있어 이에 응하고, 물건은 반드시 음성(音聲)이 있으므로 귀가 있어 이에 응하고, 물건은 모두 냄새가 있는데 코로써 이에 응하고, 물건은 모두 맛이 있는데 입으로써 이에 응한다. 귀와 눈과 코와 입이 모두 구멍이 두 개씩인 것은 또한 양의의 수이고, 입에 인후(咽喉)가 있으니 입 또한 두 구멍이다. 눈은 오색(五色)을 구분하고 귀는 오성(五聲)을 구분하고 코는 오취(五臭)를 구분하고 입은 오미(五味)를 구분하니,이 또한 모두 오행의 수이다.
반드시 육부(六腑)가 있는 까닭은 오장(五臟)을 자양(滋養)하고 도와서 육체의 모든 부분을 윤택하게 기르기 위한 것이요, 반드시 오장이 있는 까닭은 심장은 신(神)을 간직하고 간장은 혼(魂)을 간직하고 비장은 지혜[智]를 간직하고 폐장은 백(魄)을 간직하고 신장은 정(精)을 간직하니, 이러한 뒤에야 주재(主宰)할 수 있고 지각(知覺)할 수 있고 사려(思慮)할 수 있고 기억(記憶)할 수 있고 영감(靈感)으로 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뒤에야 기뻐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기뻐하고, 노여워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노여워하고, 슬퍼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슬퍼하고, 즐거워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즐거워하고, 사랑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사랑하고, 미워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미워하고, 하고자 할 일을 당하면 반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안과 밖의 형질이 갖추어지고, 크고 작은 육체가 구비되고, 귀하고 천함의 맡음이 다 포괄되어서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훌륭한 사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색깔을 보고 천하의 소리를 듣고 천하의 냄새를 맡고 천하의 맛을 맛볼 수 있으며, 천지 만물의 이치에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우주 사이의 사업에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 인간이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고 천지에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는 사람이 제 스스로 능한 것이 아니요 이치가 본래 그러한데, 사람은 온전한 이치를 받았기 때문에 형질과 체상(體象)이 안과 밖이 갖춰지지 않음이 없고, 크고 작은 것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고, 귀하고 천한 것이 포괄되지 않음이 없어서 성정(性情)과 재능(才能)이 통하지 않음이 없고 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심장(心臟)은 오장의 하나인데 한 몸의 주장이 되어 여러 형체의 군주(君主)라고 이르는 까닭은 혼(魂)과 백(魄)과 정(精)과 지(智)가 각기 네 장기(臟器)를 주장하고 있으나 모여서 머물고 있는 것은 심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한 몸을 주재하고 여러 형체의 군주가 된다. 마음속의 성(性)은 병이(秉彝)의 천리(天理)를 간직하고 정(情)은 만물의 마땅함을 저울질하며, 귀와 눈과 입과 코를 통솔하고 손과 발과 육체의 모든 부분을 사역(使役)시킨다. 그리하여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도록 하는 것이 모두 그 책임이니, 사람이 귀하다 할 것이며 마음이 위대하다 할 것이다.

이치가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을 원(元)·형(亨)·이(利)·정(貞)이라 이르고 사람에게 있는 것을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라 이른다. 하늘과 땅의 원은 사람에게는 인에 해당되고, 하늘과 땅의 형은 사람에게는 예에 해당되고, 하늘과 땅의 이는 사람에게는 의에 해당되고, 하늘과 땅의 정은 사람에게는 지에 해당되고, 하늘과 땅의 네 가지 덕이 진실함은 사람에게는 신에 해당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원을 사람에게 있는 인이라고 말하고 하늘에 있는 형을 사람에게 있는 예라고 말하고 하늘에 있는 이를 사람에게 있는 의라 말하고 하늘에 있는 정을 사람에게 있는 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든 사람에게 있든 그 형체를 따라 그 이치가 저절로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원(元)·형(亨)·이(利)·정(貞)이 있는 것은 애당초 다른 물건이 하늘과 땅의 앞에 있어서 네 가지 덕(德)을 주는 것이 아니요 하늘과 땅이 있으면 그 이치가 진실로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사람에게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 있는 것은 실로 하늘과 땅이 오상(五常)을 주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있으면 그 이치가 또한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인간 세상에 저 사람이 주고 이 사람이 받아서 물건을 얻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른바 부여(賦與)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이치[理]와 기운[氣]의 큰 근원이 되어서 그 사이에 생명을 받아 형체를 간직한 것들로, 사람은 사람의 이치가 있고 물건은 물건의 이치가 있어서 사람마다 물건마다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사람에 따라 물건에 따라 명령하여 분부해 준 것과 같음이 있다. 그러므로 부여한다고 말한 것이니, 설령 준 뒤에 받는다면 어찌 사람마다 물건마다 똑같이 가지고 있어서 부족하거나 빠짐이 없겠는가. 이는 이른바 고유(固有)하다는 것이다.
이것의 공공(公共)한 명칭은 이치[理]와 태극(太極)이며, 각기 이루어진 형체의 가운데에 있으면 성(性)이라 이르고 각기 형체의 주재(主宰)가 되었으면 심(心)이라 이른다. 또한 이것은 본연(本然)의 선(善)을 얻지 않음이 없으므로 덕(德)이라 이르고 이미 고유하여 옮기거나 바꿀 수 없으므로 상(常)이라 이르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도 이 이치이고 밖에 나타나는 것도 이 이치이고 입으로 말하는 것도 이 이치이고 몸으로 행하는 것도 이 이치이고 물건을 접하는 것도 이 이치이고 일에 응하는 것도 이 이치여서 일상 생활에 떳떳이 행하는 것이 되므로 도(道)라고 이른다.
천하의 물건이 무수히 많지만 이 인(仁)이 모두 포괄하고, 천하의 일이 무수히 많지만 이 의(義)가 모두 제재하고, 천하의 분수(分數)가 무수히 많지만 이 예(禮)가 모두 순서를 정하고, 천하의 이치가 무궁하게 많지만 이 지(智)가 모두 구별하고, 천하의 정(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신(信)이 모두 견고히 하여, 다섯 가지가 하늘과 땅 사이의 온갖 변화를 다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조목이 이 다섯 가지에 그치는 것이다.
이 이치는 사람과 물건이 함께 얻었고 성인(聖人)과 어리석은 자가 함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물건의 구분이 있고 성인과 광인(狂人)의 차이가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치는 진실로 체(體)와 용(用)이 있고 본(本)과 말(末)이 있으니, 일이 있기 이전이 체가 되고 일이 있은 뒤가 용이 되며 물건이 있기 이전이 본이 되고 물건이 있은 뒤가 말이 된다. 일은 변(變)에 따라 실마리가 많고 물건은 화(化)에 따라 종류가 많으니, 실마리가 많은 것은 정(精)하고 거친 것과 후(厚)하고 박(薄)한 것이 똑같지 않은 이유이고, 종류가 많은 것은 편벽되고 바른 것과 크고 작은 것이 일정하지 않은 이유이다. 이에 조화(造化)가 낳는 것이 모두 사람일 수가 없어서 물건이 더 많으며, 우리 인간의 종류가 모두 성인일 수가 없어서 어리석은 자가 또한 많은 것이다.
물건은 편벽되고 어리석은 자는 가려진다. 그러므로 편벽된 것은 바름에 위반되고 가려진 자는 성인에 괴려(乖戾)된다. 이에 이치의 본체가 그 온전함을 얻지 못하고 이치의 근본이 그 떳떳함을 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상(五常)의 이치가 비록 일찍이 이지러지거나 망가진 적이 없으나 사람과 물건이 얻은 것은 편벽되고 가려짐이 있음을 면치 못하니, 인(仁)에 가까운 자는 혹 의(義)에 멀고 의에 가까운 자는 혹인에 멀며, 예(禮)와 지(智)와 신(信) 세 가지에 있어서도 또 모두 가깝고 멂의 차이가 있다.
한자(韓子)의 이른바 “상품(上品)인 자는 다섯 가지에 있어 하나를 주장하면서도 네 가지를 모두 행하고, 중품(中品)인 자는 다섯 가지에 있어 하나가 조금 있지 않으면 조금 위반되어 네 가지에 혼잡(混雜)되며, 하품(下品)인 자는 다섯 가지에 있어 하나에 위반되면 네 가지에 모두 어그러진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五常)은 성인이 아니면 그 누가 다하여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성인이 군주와 스승의 지위에 있어서 교화의 권력을 맡은 뒤에야 인(仁)하지 못한 자들을 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의(義)롭지 못한 자들을 의로 돌아가게 하고 예(禮)를 행하지 않는 자들을 예로 돌아가게 하고 지혜롭지 않은 자들을 지(智)로 돌아가게 하고 성실하지 않은 자들을 신(信)으로 돌아가게 해서 사람과 물건의 성(性)이 이에 다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이치의 체(體)가 원래 스스로 줄어들지 않고 이치의 근본이 원래 스스로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理) 한 글자를 가지고 그 지극함을 연구해 보면 마음으로 알 수는 있으나 입과 혀로 말할 수는 없으니, 곧 이른바 도(道)와 덕(德)과 성(性)과 명(命)의 근원이 되지만 도와 덕과 성과 명으로 지목할 수가 없으며, 중(中)과 정(正)과 평(平)과 직(直)의 근본이 되지만 중과 정과 평과 직을 가리켜 말할 만한 체단(體段)이 있음을 볼 수가 없으며, 진(眞)과 실(實)과 이(易)와 간(簡)의 뿌리가 되지만 진과 실과 이와 간을 징험할 만한 단서가 있음을 볼 수 없다.
단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일정한 방소(方所)도 없으나 변할 수 없고 어길 수 없는 것이 존재하니, 이것이 바로 체가 없는 본체(本體)이고 극이 없는[無極] 태극(太極)이다.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됨에 이른 뒤에야 명(命)이라 하고 성(性)이라 하고 도(道)라 하고 덕(德)이라 하여, 각기 그 가리키는 바에 따라 명목(名目)이 서게 된다.
사람의 성(性)을 지목하여 이르기를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라고 하는데, 한 이치가 온전히 있을 때에는 애당초 어찌 인·의·예·지·신의 구별이 있겠는가. 용(用)이 이미 드러나서 맥락(脈絡)이 이미 분별되므로 비로소 인이 되고 의가 되고 예가 되고 지가 되고 신이 됨을 알아서 지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다섯 가지의 성(性)이 본래 스스로 혼연(渾然)한 한 이치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치가 모두 포함하고 모두 간직하여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용(用)에 발하여 인이 인이 되고 의가 의가 되고 예가 예가 되고 지가 지가 되고 신이 신이 된다. 그렇다면 이른바 중(中)과 정(正)과 평(平)과 직(直)은 바로 도(道)인데 혹 흘러서 중하지 못하고 정하지 못하고 평하지 못하고 직하지 못함이 되는 것을 따라서 구분할 수 있으며, 진(眞)과 실(實)과 이(易)와 간(簡)은 바로 도인데 혹 떠나서 진하지 못하고 실하지 못하고 이하지 못하고 간하지 못함이 되는 것을 따라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인·의·예·지·신의 다섯 가지는 하늘과 땅 사이의 사물을 다 포괄하고 우주의 도리를 모두 꿰뚫는다. 그러하니 다섯 가지 이외에 어찌 일이 있겠으며, 어찌 물건이 있겠으며, 어찌 도리가 있겠는가. 인·의·예·지·신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성(性)을 가지고 명칭한 것인데, 다섯 가지의 이치는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하늘이 하늘이 되고 땅이 땅이 된 원리도 모두 이 이치이다.
하늘은 원(元)·형(亨)·이(利)·정(貞)의 네 가지 덕(德)이 있어서 춘(春)·하(夏)·추(秋)·동(冬)의 사시(四時)에 유행하고 이 속에 산포(散布)되어 있는데, 원·형·이·정에 성(誠)을 포함하여 다섯 가지 덕[五德]이 된다. 땅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오행(五行)이 있어서 동(東)·서(西)·남(南)·북(北)의 사방(四方)에 상대(相對)가 되고 형질(形質)이 그 사이에 갖추어져 있는데, 금·목·수·화에 중앙의 토를 아울러 오행(五行)이 된다. 비록 하늘에 있고 땅에 있다 하여 명목을 달리하나 이 이치가 서로 통하고 조리가 관통함은 일찍이 똑같지 않은 적이 없다.
해와 달과 별이 나열되어 있고 바람과 우레와 비와 이슬이 교대로 시행되고 아침과 저녁과 낮과 밤이 교대함에 이르러서도 모두 이 이치가 경위(經緯)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은 사람에게서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요, 애당초 한 근원이 혼연(渾然)한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어서 하늘에 있으면 하늘의 이치가 되고 땅에 있으면 땅의 이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으면 이 이치가 곧 사람에게 있어서 다섯 가지의 성(性)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가 어찌 다만 형이상(形而上)의 도리일 뿐이겠는가. 무릇 기(氣)가 되고 형체(形體)가 되고 기구(器具)가 되고 물건이 됨은 모두 이 이치가 하는 것이다. 횡이든 종이든 위로 올라가든 아래로 내려오든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정(精)하든 거칠든 어디를 가나 다섯 가지의 이치가 아님이 없다.
한 몸을 가지고 통합하여 말하면 오장(五臟)과 육부(六腑)와 지체(肢體)가 유통하여 서로 응하는 것은 인(仁)이며, 대소(大小)와 상하(上下)가 차례가 있고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이 구분이 있어서 모두 갖추어지고 다 구비한 것은 예(禮)이며, 작은 것은 큰 것에 매여 있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통솔되며 밖은 안을 따르고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을 받들어서 서로 제재하고 서로 순종하는 것은 의(義)이며, 귀는 들을 줄을 알고 눈은 볼 줄을 알고 코와 입은 냄새를 맡고 먹을 줄을 알고 손과 발은 잡고 걸을 줄을 알아서 굳이 가르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지(智)이며, 실제로 이 형질과 체상(體象)을 소유하고 실제로 이 정신(精神)과 운용(運用)을 소유하여 사람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은 신(信)이다.
나누어 말하면 귀와 눈과 입과 코가 모두 머리가 되고 왼쪽과 오른쪽의 손과 발이 모두 몸이 되고 피와 살과 힘줄과 뼈와 모발이 합하여 신체를 이루고 심장과 간장과 비장과 폐장과 신장이 갖추어져 오장이 된 것은 모두 각기 다섯 가지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칠정(七情)을 가지고 통합하여 말하면, 기뻐할 때를 당하여 기뻐할 줄을 알고 노여워할 때를 당하여 노여워할 줄을 알며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할 때를 당하여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할 줄을 알아서 측은(惻隱)한 마음이 동하는 것은 인(仁)이다. 이미 마음이 동하면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하는 정(情)을 말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내어 행하는 일에 드러내는 것은 예(禮)이다. 정이 발(發)하여 조처할 때에 물건의 크고 작음을 따르고 일의 경중을 따라서 절제하여 맞게 하고 마땅함에 그치게 하는 것은 의(義)이다. 발하는 초기에 일에 마땅히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할 줄을 알아서 응함에 어그러지지 않게 하며 정이 발할 때에 정을 절제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살펴서 반드시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은 지(智)이다. 마땅히 발하여야 할 때에 반드시 발하고 마땅히 절제하여야 할 때에 반드시 절제하여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 어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은 신(信)이다.
사업(事業)에 있어서는 지로써 알고 인으로써 행하고 예로써 펴고 의로써 제재하고 신으로써 이루는 것이 이 이치이며, 오륜(五倫)에 있어서는 부자간(父子間)의 친함은 인이요 군신간(君臣間)의 의리는 의요 부부간(夫婦間)의 분별은 지요 장유간(長幼間)의 차례는 예요 붕우간(朋友間)의 신의는 신이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와 같은 물건들도 또한 모두 이 이치를 따라 형체를 간직하고 이 이치를 받아 성(性)이 되었으나, 다만 편벽되고 막혀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호랑이의 인(仁)과 벌과 개미의 의(義)와 저구(雎鳩)의 구별[別]과 기러기의 차례[序]가 비록 홀로 한쪽에는 밝으나 다섯 가지를 온전히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땅에 붙어 있는 초목에 이르러서도 모두 뿌리와 큰 가지와 작은 가지와 잎새와 꽃과 열매가 있어서 사시(四時)의 낳고[生] 자라고[長] 거두고[收] 감춤[藏]을 따르는 것이 또한 이 이치이니, 진실로 이 이치의 밖에 다시 다른 이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형기(形氣)를 간직하고 성명(性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다섯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가지의 성(性)은 본래 한 이치로 원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다섯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더할 수 없고 한 가지도 뺄 수 없으며, 다섯 가지를 떠나면 사물(事物)이 없고 다섯 가지를 벗어나면 성(性)이 없다. 사람에게 있는 것은 겉과 속이 진실로 모두 이것이요, 정하고 거친 것이 진실로 모두 이것이다.
마음속에 뿌리박힌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정(情)이라 이르고, 이것을 행함을 도(道)라 이르고, 이것을 얻음을 덕(德)이라 이르고, 이것을 일삼는 것을 사(事)라 이르고, 이것을 맡음을 업(業)이라 이르니, 이는 모두 다섯 가지를 가지고 거행하는 것이다.
천지의 사물을 꿰뚫고 있는 것은 인인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이치이며, 천지의 사물을 차례대로 순서짓는 것은 예인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공경하는 이치이며, 천지의 사물을 제재하는 것은 의인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땅하게 하는 이치이며, 천지의 사물을 밝히는 것은 지인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분별하는 이치이며, 천지의 사물을 믿게 하는 것은 신인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실한 이치이니, 이 다섯 가지로 천지의 사물을 다하게 할 수 있다.
마음으로부터 몸에 이르고 몸으로부터 집안에 이르고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고 천하로부터 천지에 이르고 천지로부터 고금에 이르고 고금으로부터 만만세(萬萬世)에 이르는바, 이는 모두 이 이치를 따라 통하는 것이니, 다섯 가지의 도가 어찌 크지 않겠으며 어찌 원대하지 않겠으며 어찌 요긴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이것을 병이(秉彝)라 하고 오상(五常)이라 하는 것이다.
이미 이(彝)라 하고 상(常)이라 하였는데 만물 가운데 사람과 물건이 있고 우리 인간 가운데 선(善)한 자와 악(惡)한 자가 있어서 인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예가 없고 지가 없고 신이 없는 자가 있기까지 함은 어째서인가? 이 이치에는 경(經)이 있고 위(緯)가 있으니, 고금(古今)과 피차(彼此)를 막론하고 한번 정해져서 변치 않는 것은 경이요, 정(精)하고 거친 것이 있고 무겁고 가벼운 것이 있어 여러 가지 단서여서 똑같지 않은 것은 위이다. 경은 위가 없을 수 없으며, 똑같지 않은 위가 끝내 똑같은 경을 해치지 않는다.
이른바 이(理)라는 것은 어찌 항상 일이 없고 물건이 없어서 한갓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을 뿐이겠는가. 다만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의 근간이 되기 때문에 이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이치는 반드시 유행(流行)하고 변화(變化)하는 용(用)이 있은 뒤에야 조화가 나오니, 이른바 변화라는 것은 음(陰)과 양(陽)일 뿐이다. 양은 곧 천지(天地)의 인(仁)과 예(禮)이고 음은 곧 천지의 의(義)와 지(智)이다.
음과 양은 한번 먼저 하고 한번 뒤에 하며 한번 선창(先唱)하고 한번 화답(和答)하여 반드시 서로 뿌리가 되고 서로 구제하는 용(用)이 있으며, 또 한번 저것이 되고 한번 이것이 되며 한번 왼쪽이 되고 한번 오른쪽이 되어서 끝내 편벽됨과 바름의 차별이 없을 수 없다.
기(氣)를 가지고 말하면 양은 청(淸)하고 음은 탁(濁)하며 질(質)을 가지고 말하면 양은 강(剛)하고 음은 유(柔)한데, 기가 되고 질이 되어 청하고 탁하고 강하고 유한 것도 모두 이 이치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청탁과 강유가 있으면 또 많고 적음이 똑같지 않은 분수가 있어서 순수하게 청하고 순수하게 강한 자가 있으며, 청탁과 강유가 반반쯤 되는 자가 있으며, 청이 많고 탁이 적으며 강이 많고 유가 적은 자가 있으며, 탁이 많고 청이 적으며 유가 많고 강이 적은 자가 있으며, 오로지 탁하고 오로지 유한 자가 있으니, 이 때문에 이(理)의 위(緯)가 여러 단서여서 똑같지 않은 것이다. 이에 혹 인하고 혹 인하지 못하며 혹 의롭고 혹 의롭지 못하며 예와 지와 신에 있어서도 모두 서로 반대됨이 있는데, 그 사이에 나누어지는 수가 또한 십(十)·백(百)·천(千)·만(萬)으로 일정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잘하는 자는 청(淸)과 강(剛)의 부류이고, 인·의·예·지·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는 탁(濁)과 유(柔)의 부류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인하고 인하지 못함과 의롭고 의롭지 못함을 보며 예와 지와 신을 보존하고 보존하지 못함을 볼 수 있는가? 이는 곧 칠정(七情)일 뿐이다.
만일 과연 기뻐할 때를 당하여 기뻐하고 사랑할 때를 당하여 사랑한다면 이것은 인한 것이요, 기뻐하지 말아야 할 때에 기뻐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때에 사랑하는 것은 인하지 못한 것이다. 미워할 때를 당하여 미워하고 노여워할 때를 당하여 노여워하는 것은 의로운 것이요, 미워하지 말아야 할 때에 미워하고 노여워하지 말아야 할 때에 노여워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이다. 슬퍼할 때를 당하여 슬퍼하고 즐거워할 때를 당하여 즐거워하는 것은 예요, 슬퍼하지 말아야 할 때에 슬퍼하고 즐거워하지 말아야 할 때에 즐거워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자 할 때를 당하여 하고자 함은 지요, 하고자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당하여 하고자 함은 지가 아니며,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은 가운데에 신실(信實)하고 신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또 칠정(七情)이 동함에 모두 마땅함을 얻음은 인이요, 동함에 모두 베풂을 얻음은 예요, 베풀어서 모두 절도에 맞음은 의요, 절도에 맞게 하여 일이 지나치면 곧 그만두는 것은 지요, 동하고 베풀고 절도에 맞고 그만둠에 어그러짐이 없게 하는 것은 신이며, 이에 반대로 하는 것은 인하지 못하고 예(禮)스럽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한 것이다. 성(性)이 칠정에 발로되며 정(情)이 말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나고 덕행에 드러남이 이러한 것이다.
정은 일곱 가지가 있는데 따라서 나오는 것은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두 가지일 뿐이니, 하고자 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네 가지는 순경을 따라 나오는 것이요,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는 세 가지는 역경을 따라 나오는 것이다. 하고자 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모두 선(善)에 있고,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는 것이 모두 악(惡)에 있으면 순경과 역경에 응함이 떳떳한 이치를 얻어서 과연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잘하는 자이다. 그리고 혹 악(惡)을 순경이라고 여겨서 하고자 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좋아하는 자리로 삼고, 혹 선(善)을 역경이라고 여겨서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는 자리로 삼는다면 이는 순경과 역경에 응함이 떳떳한 이치를 위반하여 인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예가 없고 지가 없고 신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고자 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좋아함이 모두 선에 있을 뿐이면 마음이 편안하고 천하가 복종하고 천지가 응하고 귀신이 감동하며,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함이 모두 악에 있을 뿐이면 마음이 상쾌하고 천하가 두려워하고 천지가 밝고 귀신이 순하니, 무릇 이(理)와 기(氣)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 가운데 그 무엇이 인·의·예·지·신의 가운데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중용(中庸)》에 위육(位育)의 공부는 반드시 중화(中和)를 지극히 함에 근본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일곱 가지 정이 떳떳한 이치를 위반하는 자는 밖으로부터 응하는 것 또한 떳떳한 도를 위반하지 않음이 없어서 윤리(倫理)를 무너뜨리고 기강(紀綱)을 어지럽히는 풍속이 나오고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없애는 화(禍)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물건은 물건다운 물건이 되지 못하고 하늘은 하늘다운 하늘이 되지 못하고 땅은 땅다운 땅이 되지 못하니, 이는 모두 일곱 가지 정이 방탕하여 다섯 가지 성(性)을 해침에 말미암는 것이다. 만약 일곱 가지 정이 방탕한 데로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패란(悖亂)하도록 내맡겨서 변화(變化)하는 방도(方道)를 쓰지 않는다면 사람이 금수(禽獸)가 되어서 반드시 상패(喪敗)하고 잔멸(殘滅)하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사람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법을 세우고 학문(學問)하는 방법을 만들어서 정(情)을 절제하여 본성을 회복하게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탁한 자가 맑아지고 유한 자가 강해지며 인하지 못한 자가 인해지고 의롭지 못한 자가 의로워져서, 예가 없고 지가 없고 신이 없는 자가 모두 예와 지와 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어찌 본래 한 이치가 사람의 지혜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따라 가감(加減)함이 없어서 항상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겠는가. 이는 이른바 이치의 경(經)이 일정하여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가지의 성(性)이 행해지고 행해지지 못함은 일곱 가지의 정을 절제하느냐 절제하지 못하느냐에 말미암지 않겠는가.
이른바 사단(四端)이라는 것은 맹자(孟子)가 다만 일곱 가지 정에 나아가 성(性)으로부터 곧바로 나와서 발로하는 초기에 사사로운 마음을 범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단(端)이라고 이른 것이니, 인·의·예·지의 나타남이 마치 물건의 씨앗에 처음 싹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사단은 곧 일곱 가지 가운데의 정(情)이니, 어찌 일곱 가지 정 이외에 별도로 사단의 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곱 가지의 정은 진실로 모두 달도(達道)의 화(和)가 되지는 못한다. 정이 발할 때에 혹 일에 마땅하지 않음이 있고 일에 혹 제때가 아님이 있고 때에 혹 절제하지 않음이 있으면, 기쁨은 망녕스럽게 되고 즐거움은 지나치게 되고 사랑은 빠지게 되고 하고자 함은 방사(放肆)하게 되고 미워함은 심하게 되고 노여워함은 포악하게 되고 슬픔은 화(和)를 손상하게 됨을 면치 못하니, 이는 곧 일곱 가지 정이 사사로움을 간직하여 용(用)에게 이김을 당한 것이다.
이에 다섯 가지의 성(性)이 중정(中正)하고 평직(平直)하고 진실(眞實)하고 이간(易簡)한 떳떳한 이치를 잃어서, 인은 인하지 못한 것이 되고 의는 의롭지 못한 것이 되고 예는 예가 아닌 것이 되고 지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 되고 신은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경우가 십중팔구이다. 사람들은 혹 그 성(性)이 고유하지 않은가 의심하여, 본래 하나인 이치로 경(經)이 되어서 변치 않는 것이 일찍이 한결같이 선(善)하여 악(惡)함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것을 가엾게 여기고 마침내 사단(四端)의 말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성이 원래 있고 본래 선한 것임을 알아서 단서(端緖)가 나타나는 참됨[眞]을 확충(擴充)하여 반드시 용(用)이 이기는 흐름을 절제하게 하신 것이다.
사단이라는 것은 곧 사람이 물건과 사귈 적에 접촉함에 따라 즉시 감동되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앞에 닥치면 측은(惻隱)해하는 마음이 동하고, 도리가 아닌 일이 앞에 닥치면 수오(羞惡)하는 마음이 동하고, 분수가 아닌 일이 앞에 닥치면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동하고, 선악(善惡)의 일이 앞에 닥치면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마음이 동하니, 이는 남의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요 자신의 이로움을 따르는 것도 아니요, 자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마음속으로부터 나와서 진실로 인·의·예·지 네 가지 성(性)이 발로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정(情)이라 이르지 않고 곧바로 단(端)이라 이르는 것이니, 한 마음속에 사단(四端)의 문(門)이 하나 따로 있고 칠정(七情)의 문(門)이 하나 따로 있어서 동서와 남북의 문이 다른 것과는 같지 않다.
정(情)은 똑같은 정인데 처음 나와서 참을 잃지 않은 것은 곧 이른바 단(端)이요, 이미 용사(用事)를 하여 선(善)과 악(惡)으로 나뉜 것은 곧 이른바 정(情)이다. 사단은 성이 처음 동한 것으로 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요, 정은 단에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한 용(用)을 이룬 것이다. 단은 처음 동하였기 때문에 악이 뒤섞이지 않고, 정은 이미 용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두 선하지는 못하니, 이 때문에 단(端)과 정(情)을 구별하여 말함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사단을 확충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칠정에 나아가서 그 참됨을 잃지 않게 할 뿐이니, 참됨이라는 것은 곧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사단의 나옴이 애당초 칠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확충하는 공부 또한 칠정을 절제함[約]에 있는 것이다.
사단은 확충하기 어렵기 때문에 확충[擴]이라고 말하였고 칠정은 방탕하기 쉽기 때문에 절제[約]라고 말하였으니, 확충함은 그 근본을 밝히는 것이요 절제함은 그 용을 바로잡는 것이다. 확충함은 절제함에 달려 있고 절제함은 확충함에 달려 있으니, 그 실제는 곧 한 가지 일이다. 혹자는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서 두 가지 물건과 일로 삼는데, 이는 옳지 않은 듯하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것에 이르러서도 또한 두 개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원초(原初)에는 오직 한 마음뿐이요 한 사려(思慮)뿐인데, 천리(天理)로 말미암아 나온 것은 도심이고 사사로움을 따라 행하는 것은 인심이니, 사사로움은 끌리기 쉽기 때문에 위태롭다[危]고 말하였고 이치는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미묘하다[微]고 말한 것이다. 두 마음의 사귐을 잘 살펴서 혹시라도 사(邪)와 정(正)을 잘못 혼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이른바 정(精)이요, 도의 바름을 지켜서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一)이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중(中 진리)을 받아서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이 도(道)이다. 그러나 이미 형기(形氣)를 받아 스스로 한 물건이 되었으면 혹 그 마음을 광대(廣大)하게 하지 못하여 중정(中正)한 도를 체행(體行)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에 가리어진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그 미묘함을 염려하고 그 위태로움을 걱정하여 반드시 윤집(允執)·정일(精一) 등의 말로 제위(帝位)를 주고받는 즈음에 정녕(丁寧)히 당부하신 것이다.
공자(孔子)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과 자사(子思)의 명선(明善)·성신(誠身), 중(中)·화(和)와 맹자(孟子)의 사단(四端)을 확충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것은 모두 전수(傳授)해 준 것이다. 만약 인심과 도심을 분별하여 인심을 별개의 한 마음이라 하고 도심을 별개의 한 마음이라 하여, 한 몸 가운데에 원래 두 개의 머리와 꼬리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 세 성인(聖人)이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을 안다 하겠는가.
원초(原初)에는 오직 도심의 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정(精)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한 뒤에 다시 하나의 도심이 있을 뿐이니, 유일(惟一)이란 말씀은 성인의 공부가 귀숙(歸宿)하는 자리로 중(中)이 있는 곳이다. 윤집(允執)이란 이것을 잡는 것일 뿐이니, 윤(允)이라는 것은 성인의 성실(誠實)함일 것이다.

[주D-001]참찬(參贊)하고 위육(位育)해서 : 참찬은 하늘과 땅에 참여하여 돕는 것이며, 위육은 하늘과 땅이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天地位 萬物育]으로, 《중용(中庸)》에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라야 본성을 다할 수 있으니, 본성을 다하면 사람의 본성을 다하게 할 수 있고, 사람의 본성을 다하면 물건의 본성을 다하게 할 수 있고, 물건의 본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 하였으며, 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 하였다.
[주D-002]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수(數)에 : 하도는 복희씨(伏羲氏) 때에 하수(河水)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1부터 10까지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복희씨가 이것을 보고 《주역》의 팔괘(八卦)를 그었다 하며, 낙서는 하(夏) 나라 우왕(禹王)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1부터 9까지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우왕이 이것을 보고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 한다.
[주D-003]팔괘(八卦)의 획수(劃數) 중에 : 순양(純陽)은 순수하게 양효(陽爻)로만 이루어진 것을 이른다. 《주역》의 팔괘는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 건괘만이 3획이 모두 양효이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주D-004]자포자기(自暴自棄) : 자포는 스스로 해치는 것으로 도덕(道德)과 예의(禮義)를 부정함을 이르고, 자기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으로 자신은 도덕과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체념함을 이른다. 맹자는 “자포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하는 자와는 더불어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으니, 예의를 비난하는 자를 자포라 이르고 내 몸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자를 자기라 이른다.”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D-005]활간(活看) : 글을 볼 적에 글자나 글귀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널리 보아 본의를 파악함을 가리킨다.
[주D-006]중화(中和)한……인극(人極)을 세웠다. : 중화는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함이 없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이르며, 인극(人極)은 사람이 행하여야 할 중(中)·정(正)·인(仁)·의(義)의 도리를 이른다.
[주D-007]천칙(天則) : 천지 자연의 법칙을 이른다.
[주D-008]무극(無極)을……하였으니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말한 것으로, 이는 ‘무극이면서 태극’이란 뜻이다.
[주D-009]대요(大堯)는……것과 같다 : 대요와 대순(大舜)은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높여 부른 것이며, 위의 내용은 《논어(論語)》 요왈(堯曰)과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각각 보인다.
[주D-010]눈은 오색(五色)을……구분하니 : 오색(五色)은 다섯 가지 색깔로 청(靑)·황(黃)·적(赤)·백(白)·흑(黑)이고, 오성(五聲)은 다섯 가지 소리로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이며, 오취(五臭)는 다섯 가지 냄새로 노린내[羶]·비린내[腥]·향내[香]·탄내[焦]·썩은내[朽]이고, 오미(五味)는 다섯 가지 맛으로 신맛[酸]·짠맛[鹹]·매운맛[辛]·단맛[甘]·쓴맛[苦]이다.
[주D-011]위육(位育)의……근본한다 : 위육은 천지가 편안히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잘 자라는 것이며, 중(中)은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때에 수양공부가 잘되어 미발(未發)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화(和)는 마음이 이미 동할 때에 감정이 모두 절도에 맞음을 이르는 것이다. 《중용》에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2]달도(達道)의 화(和) : 달도는 사람 누구나 모두 행하여야 할 도리로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父子有親]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는[君臣有義] 등의 오륜(五倫)을 가리킨다. 《중용》에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정이 나타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이다.” 하였으니, 큰 근본이란 곧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3]인심(人心)과……일(一)이다. : 인심은 사람의 육신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마음으로 배가 고프면 먹으려 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으려 하는 것을 이르며, 도심(道心)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사단(四端) 따위를 이르니,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한 내용을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여헌선생속집 제5권_    잡저(雜著)_    녹의사질(錄疑竢質)

 

제목을 ‘녹의사질(錄疑竢質)’이라 하였는데, 의(疑)는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말이다. 이미 어리석은 소견이 있으므로 우선 한 가지 설(說)을 구비하여 기록해 두어 후세의 군자가 취사선택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내 어찌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옳다 하여 반드시 참람하고 망녕된 죄를 범하겠는가. 이것을 보는 자들은 부디 나의 이러한 심정을 용서해 준다면 다행이겠다.

《대학(大學)》·《중용(中庸)》 두 편(篇)은 본래 《대기(戴記)》가운데에 실려 있었는데, 송(宋) 나라의 두 정자(程子)가 비로소 이 책을 높이고 믿어 세상에 널리 알렸다. 《대학》은 경문(經文)과 전문(傳文) 및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이 있는데,옛 책에는 착간(錯簡)이 많으므로 두 정자가 각기 개정(改正)한 것이 있고 주자(朱子)가 또 두 정자의 개정한 것을 가지고 다시 차례를 만들었다.

‘지지(知止)’와 ‘물유(物有)’의 두 절(節)이 경문의 첫머리 삼강령의 아래에 있는 것이 원본(元本)이니,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이 모두 이것을 따랐고 회암(晦菴 주자(朱子)의 별호)도 이것을 따랐다.

‘자왈(子曰)’의 한 절(節)이 원본에는 ‘지어신(止於信)’ 아래에 있었는데, 명도가 개정하여 위로 ‘시운첨피(詩云瞻彼)’와 ‘시운오호(詩云於戱)’의 두 절(節)에 연결하여 평천하장(平天下章)의 ‘시운절피(詩云節彼)’의 절(節) 아래에 두었으며, 이천(伊川)은 이것을 개정하여 아래로 ‘차위지본(此謂知本)’과 ‘차위지지(此謂知之)’의 두 절을 연결하여 경문의 아래에 두었으며, 회암은 이것을 개정하여 본말(本末)을 해석한 것이라 하고 지지선장(止至善章)의 아래에 두었다.

‘차위지본(此謂知本)’과 ‘차위지지(此謂知之)’의 두 절은 원본에는 경문의 아래에 있었는데, 명도는 그대로 따랐으나 이천은 위로 ‘자왈(子曰)’의 한 절을 연결하여 또한 경문의 아래에 두었으며, 회암은 개정하여 두 절을 ‘자왈(子曰)’의 절에 두어 본말장(本末章)의 아래로 삼고는 위의 ‘차위(此謂)’는 연문(衍文)이라 하고 아래의 ‘차위(此謂)’는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을 끝맺은 말이라 하였으며, 격물(格物)·치지(致知)의 전문(傳文)의 전문(全文)은 빠졌다 하고 정자의 뜻을 취해서 ‘간상(間嘗)’의 한 단락을 지어 그 빠진 부분을 보충하였다.

그 후에 문정공(文靖公) 동괴(董槐)와 승상(丞相) 섭몽정(葉夢鼎), 문헌공(文憲公) 노재(魯齋) 왕백(王柏)이 모두 이르기를 “전문(傳文)이 일찍이 빠진 것이 없으므로, 마침내 경문의 ‘지지(知止)’와 ‘물유(物有)’ 두 절을 ‘자왈(子曰)’의 절 위로 돌리고, 합하여 전 4장(傳四章)을 만들어 격물·치지를 해석한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되면 회암이 본말을 해석한 것이라 하여 제4장으로 개정한 것이 없어지고, 격물치지장이 이에 빠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허재(虛齋) 채청(蔡淸)은 또 이르기를 “여러 선생들이 바로잡은 것이 또한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소위치지재격물자(所謂致知在格物者)’의 여덟 글자를 ‘물유(物有)’절의 위에 더하여 장(章)의 첫머리로 삼은 뒤에 ‘지지(知止)’의 절을 그 뒤에 놓고, 다음에 ‘자왈(子曰)’의 절을 놓고, 맨끝에 ‘차위지지(此謂知之)’의 절을 두어야 한다.” 하였다.

자계(慈溪) 황진(黃震)은 자(字)가 동발(東發)인데 《일초(日抄)》를 지었고, 채허재(蔡虛齋)는 《몽인(蒙引)》을 지었고, 방정학(方正學) 효유(孝孺)는 《대학(大學)》의 전서정문(篆書正文) 뒤에 글을 썼고, 오군(吳郡)의 도목(都穆)은 ‘청우기담(聽雨記談)’을 지었는데 모두 각각 이러한 말이 있는바,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킴)가 편집(編集)한 《개정대학(改正大學)》 가운데 상세히 실려 있다.


우리 동방(東方)에는 본조(本朝)의 유선(儒先) 중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소견이 대략 이와 부합하였다. 그가 개정한 《대학》의 서문(序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내 일찍이 《대학》을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항상 본문을 볼 수 없음을 한탄하였는데, 근년에 들으니 중국의 대유(大儒)가 빠진 글을 편(篇) 가운데에서 찾아내어 다시 장구(章句)를 지었다 한다. 내 이 글을 얻어 보고자 하였으나 얻을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감히 억측으로 경문(經文) 가운데에서 두 절(節)을 취하여 격물치지장의 글로 삼았다. 그리고 반복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말이 부족함이 없고 뜻이 분명하여 경문(經文)에 흠이 없고 전문(傳文)의 뜻에 보탬이 있으며, 또 위아래의 글 뜻과 맥락이 관통하는바, 비록 회암이 다시 나오셔도 또한 혹 이것을 취할 것이다.”

회재는 이에 ‘물유(物有)’의 한 절을 장(章)의 첫머리로 삼고, “장의 첫머리에 ‘소위치지재격물자(所謂致知在格物者)’의 여덟 자가 있었을 듯한데 이제 없어졌다.”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에는 ‘지지(知止)’의 절을 놓고 다음에는 정자(程子)가 연문(衍文)이라고 말씀한 ‘차위지본(此謂知本)’의 절을 놓고 맨 끝에는 상문(上文)의 두 절을 맺은 뜻이라는 ‘차위지지(此謂知之)’의 절을 놓았으며, 또 ‘자왈(子曰)’의 한 절을 경문의 끝에 두고 “이천이 정한 것을 따랐다.” 하였다.

이 또한 격물치지장이 빠지지 않았다는 의논인데 별도로 본말장(本末章)을 세우지 않았으니, 전문(傳文)은 다만 9장이 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처음 《대학》을 읽었는데, 다만 전문(傳文) 가운데 격물치지장의 전문(全文)이 빠진 것이 한스러울 뿐만 아니라, 경문의 첫머리 삼강령(三綱領) 세 구(句)의 한 절 아래에 갑자기 ‘지지(知止)’와 ‘물유(物有)’ 두 절을 이은 것이 적당한 차례가 아니어서 위아래의 글 뜻이 견강부회함에 가까워 합당하지 못함이 있는 듯하였다. 이는 내가 억지로 뜻을 두어 찾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요, 지각(知覺)이 미치는 바에 저절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생각하기를, ‘고문(古文)의 원본이 이미 정해져 내려온다면 이는 반드시 후생(後生)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본의(本義)를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이 있는 것이다’ 하고 이에 감히 억지로 구설(舊說)을 지켜왔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아무리 반복해서 생각하여도 이것이 과연 합당한지 알 수가 없었으니, 의심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뒤에서야 비로소 회재(晦齋)가 위와 같이 개정하였다는 말을 들었고, 다시 중국의 후대 유자(儒者)들 또한 이미 이러한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의심이 풀리는 듯하였다. 후학(後學)의 다행스러움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는가.
이후로는 《대학》을 외고 읽을 적에 개정한 순서에 따라 반복하여 생각하기를 마지않으니, 진실로 상쾌하고 흡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정해 놓은 차서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의 소견으로는 또한 의심스러워 마땅히 질정(質正)하여야 할 것이 있을 듯하다.
‘자왈(子曰)’의 한 절을 명도(明道)는 평천하장(平天下章)의 가운데에 두었고 이천(伊川)은 ‘차위지본(此謂知本)’과 ‘차위지지(此謂知之)’의 두 절을 아울러 경문(經文)의 아래에 두었으며, 회암(晦菴)은 별도로 본말장(本末章)을 만들어 지지선장(止至善章)의 아래에 두었는데, 후대 유자들은 모두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의 글이라 하여 제3절로 삼았으며, 우리 나라의 회재는 이천이 정한 것을 따라 다시 경문의 끝에 두었다.
이제 어리석은 나의 소견은 이 한 절이 진실로 격물치지장의 가운데를 떠나지 아니하여 장(章)의 첫머리 ‘물유(物有)’의 절 아래에 있어야 할 듯하다. 그리하여 다음에는 ‘지지(知止)’의 절을 놓고 맨 마지막에는 ‘차위물격(此謂物格)’과 ‘차위지지(此謂知之)’의 두 절을 놓는다면 더욱 합당할 듯하다. 시험삼아 다음과 같이 배정(排定)하는 바이다.
이른바 지식을 지극히 함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는 것은 물건에는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에는 종(終)과 시(始)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所謂致知在格物者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이는 채허재(蔡虛齋)와 이회재(李晦齋)가 정한 것을 따른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송사(訟事)를 다스림은 내 남과 같이 하겠으나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함이 없게 하겠다.” 하였으니, 실정이 없는 자가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하여 복종시키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한다.[子曰 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이는 마땅히 제2절이 되어야 하는바, 바로 나의 어리석은 견해이다.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얻어진다.[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이는 마땅히 제3절이 되어야 하는바, 이 또한 나의 견해이다.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 하고[此謂知本]
나의 소견은 지본(知本)은 마땅히 물격(物格)이 되어야 할 듯하니, 그렇다면 이 절이 연문(衍文)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지식이 지극하다 한다.[此謂知之至也]
이는 회암이 ‘격물치지장의 결어(結語 맺음말)’라고 한 말씀을 따른 것이다. ○ ‘지본(知本)’ 두 글자를 만약 물격(物格)으로 쓴다면 이 두 차위(此謂)의 글귀가 마땅히 합하여 한 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가 묻기를 “물유(物有)의 한 절을 반드시 장의 첫머리로 삼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경문(經文)에 이미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致知在格物]’고 말하였으니, 물건의 이치를 마땅히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물건의 이치를 말하려 한다면 물건에 있는 이치는 본(本)·말(末)을 들지 않으면 체(體)·용(用)을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다’고 말한 것이며, 이미 물건이 있으면 물건에는 반드시 일이 있게 마련인데 일의 이치는 종(終)·시(始)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일에는 종과 시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만일 물건의 본과 말, 일의 종과 시를 밝게 안다면 마땅히 먼저 해야 할 것은 본과 시이고 마땅히 뒤에 해야 할 것은 말과 종이니, 지혜가 이에 미치면 순서를 따라 나아가서 도를 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도에 가깝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하니 이 한 절이 장의 첫머리가 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혹자가 또 묻기를 “구본(舊本)에는 ‘소위치지재격물자(所謂致知在格物者)’라는 여덟 글자가 없는데, 허재(虛齋)와 회재(晦齋)가 처음 더한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또 이를 따랐으니, 이것도 과연 옳은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문(傳文)에서 경문(經文)을 해석한 방식을 살펴보면 강령의 세 장에는 장의 첫머리에 모두 ‘소위(所謂)’라는 말이 없고, 조목의 다섯 장에 이르러서는 모두 ‘소위 아무 조[所謂某條]’라는 말을 장마다 첫머리에 덧붙였는데, 격물·치지(格物致知) 한 장은 조목의 위와 강령의 아래에 있으므로 혹 전문(傳文)을 기록하는 자가 강령의 전문의 예(例)를 따라 잘못 머리말을 빼서 마침내 ‘소위운운(所謂云云)’ 한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으레 첫머리에 덧붙이는 머리말을 잃어 격물·치지를 해석하는 것임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인하여 착간(錯簡)으로 여기고, ‘지지(知止)’의 절과 함께 잘못 경문의 첫머리 삼강령의 ‘지지선(止至善)’ 아래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령의 글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두 절을 그 아래에 넣는 것이 합당함을 볼 수 없으며, 격물치지장의 빠진 글로 돌리는 것이 매우 적합할 듯하다. 그렇다면 이 없어진 여덟 글자를 마땅히 다시 도출(挑出)하여 ‘물유(物有)’의 위에 덧붙여서 조목의 장 첫머리의 범례(凡例)를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옛 사람들은 책을 만들 적에 대부분 죽간(竹簡)을 사용하였으므로 편(篇)을 연결할 때에 혹 자세히 대조하지 못하여 착오가 생기는바, 그 착간(錯簡)과 오자(誤字) 또한 모두 원인이 있어 오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장을 가지고 말하면 장의 첫머리에 있는 여덟 글자가 없어진 것은, 강령의 전문(傳文) 세 장에 모두 머리말이 없기 때문에 ‘물유(物有)’의 한 절이 장의 첫머리가 될 수 없고, ‘지지(知止)’의 한 절이 경문의 첫머리에 있는 ‘지지선(止至善)’의 말을 따라 잘못 그 아래에 들어갔기 때문에 ‘물유(物有)’의 절이 잘못 그 다음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제 머리말의 여덟 글자를 ‘물유(物有)’의 위에 더하여 머리절[首節]로 삼는다면 어찌하여 갑자기 ‘자왈(子曰)’의 한 절을 ‘즉근도의(則近道矣)’의 아래에 넣었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문(傳文)에서 경문(經文)을 해석한 배열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장마다 첫머리에는 먼저 큰 강령을 들고 또 반드시 증거할 만한 중요한 말을 써서 실증하였다.
예컨대 명명덕장(明明德章)에 먼저 강고(康誥)의 말을 들어 단서를 삼았으면, 다음에 태갑(太甲)의 말을 들어 실증을 하였으며 제전(帝典)을 인용한 것은 그 효험을 든 것이다. 그리고 신민장(新民章)에는 먼저 탕(湯)임금의 반명(盤銘)을 들어 근본을 삼았으면, 다음에 강고의 말을 들어 실증을 하였으며 ‘시운(詩云)’의 한 절은 그 효험을 든 것이다. 그 아래 각 장(章)의 문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왈(子曰)’의 한 절은 이 장의 머리절 다음에 있어야 함을 아니, 이것이 바로 그 유례(類例)이다.
머리절에 이미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다’고 말하였으면, 송사를 다스리기 이전에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이 바로 그 본이요 시이며 송사가 있은 뒤에 다스리는 것은 바로 그 말이요 종이니, 이것이 본과 말, 종과 시를 징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천하에는 본과 말이 없는 물건이 없고 종과 시가 없는 일이 없는 것이다. 본이 되고 말이 되며 시가 있고 종이 있는 것은 모두 자연의 묘한 진리이다. 물건은 본과 말을 갖추어 물건이 되고 일은 종과 시를 얻어 일이 되니, 그렇다면 사물의 이치는 진실로 본과 말, 종과 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미 모든 물건과 온갖 일에서 본과 말, 종과 시를 보았다면 나의 지식이 어찌 지극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지선(至善)에 마땅히 그치는 것이 모두 내 마음과 내 눈의 가운데에 있게 될 것이다.
뒤의 여섯 가지 조목을 가지고 말하면 성실히 함은 뜻의 지선이요, 바르게 함은 마음의 지선이요, 닦음은 몸의 지선이요, 가지런히 함은 집안의 지선이요, 다스림은 나라의 지선이요, 화평하게 함은 천하의 지선이다. 이미 지선이 있는 곳을 알았으면 뜻을 진실로 성실히 하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을 진실로 바루지 않을 수 없고 몸을 진실로 닦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고 천하를 평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바, 모두 이 도리이다.
그렇다면 여섯 가지 조목의 지선이 어찌 격물·치지에 바탕을 두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격물·치지의 효험을 말하면서 반드시 능정(能定), 능정(能靜), 능안(能安), 능려(能慮), 능득(能得)을 말한 것이니, 정(定)은 성의(誠意)의 기틀이요, 정(靜)은 정심(正心)의 기틀이요, 안(安)은 수신(修身)의 기틀이요, 여(慮)는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기틀이며, 득(得)은 그 이치를 얻는 것이다. 그 기틀이 이미 서고 그 이치가 이미 얻어지면 도가 과연 가깝지 않겠는가.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구삼효(九三爻)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이를 데를 알아 이르기 때문에 더불어 기미를 알 수 있으며, 마칠 데를 알아 마치기 때문에 의(義)를 보존할 수 있다.’하였다. 그렇다면 이르고 마치는 본(本)과 시(始)가 모두 격물·치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지(知止)’의 절이 격물·치지의 효험이 되어, 마땅히 ‘자왈(子曰)’의 절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위에 있는 ‘차위(此謂)’의 절에 ‘지본(知本)’이라는 두 글자를 어찌하여 물격(物格)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차위지본(此謂知本)’과 ‘차위지지(此謂知之)’의 두 절이 구본(舊本)에는 경문의 아래 성의장(誠意章) 위에 있었는데 회암(晦菴) 역시 이것을 성의장 위에 두었다. 그리하여 위에 있는 ‘차위지본(此謂知本)’의 한 절은 정자(程子)를 따라 연문(衍文)이라 하였고, 아래에 있는 ‘차위지지(此謂知之)’의 한 절은 치지(致知)의 결어라 하고는 보망장(補亡章) 끝에 말씀하기를 ‘이것을 일러 사물의 이치가 이른다 하고 이것을 일러 지식이 지극하다 한다.[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차위지본(此謂知本)’은 바로 ‘자왈(子曰)’ 절의 마지막 말인데 본장(本章)의 가운데 있으므로 잘못 그 말을 인습하여 거듭 ‘지본(知本)’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실제는 ‘물격(物格)’ 두 글자가 본래의 말이어서 회암이 보망장의 맺음말로 한 것이 맞다. 그러하니 여덟 자를 ‘물유(物有)’의 절 위에 더하여 머리절로 만들고, ‘자왈’의 절을 그 다음에 배치하여 제2절로 만들고, ‘지지(知止)’의 절을 그 다음에 배치하여 제3절로 만들고, ‘차위지본(此謂知本)’과 ‘차위지지(此謂知之)’의 두 절을 그 끝에 두어 한 장을 맺는 글로 삼는다면 이에 격물치지장의 전문(全文)이 굳이 보충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완전해진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제 경문의 두 절을 취하여 격물치지장의 글이라고 한다면 격물치지장은 온전한 글이 되어 빠짐이 없게 된다. 그러나 경문에 있어 과연 부족한 단락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대학》의 도는 강령으로 나열하면 세 가지가 되고 조목으로 나열하면 여덟 가지가 되니, 강령은 조목의 강령이고 조목은 강령의 조목이다. 앞에 먼저 삼강령을 말하지 않으면 팔조목을 통솔할 수 없고 뒤에 팔조목을 말하지 않으면 삼강령을 실증할 수 없는바, 이처럼 글의 뜻과 말의 순서는 마땅히 선후가 있고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삼강령을 머리절에 들었으면 또 모름지기 팔조목을 그 아래에 차례로 서술하여야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강령이 조목을 통솔하고 조목이 강령에 매여 있어 반드시 서로 연결되고 반드시 서로 참조(參照)가 된다. 그러므로 ‘지지(知止)’와 ‘물유(物有)’의 두 절을 그 사이에서 제거하면 ‘고지(古之)’의 절이 곧바로 머리 절의 아래로 들어와 삼강령이 팔조목의 강령이 되고 팔조목이 삼강령의 조목이 되어 마침내 서로 붙어 나란히 이어져 간격이 없게 된다.
또 ‘지지’와 ‘물유’의 두 절을 보면 글을 지어 설명한 뜻이 따로 별단(別段)의 문자가 되어 삼강령과 팔조목의 사이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 듯하다. 만약 원본(原本)에 배열한 바와 같다면 이것을 위로 삼강령에 매여 있다 하겠는가, 아래로 팔조목에 연결된다 하겠는가?
‘지지(知止)’의 지(止)는 비록 ‘지지선(止至善)’의 지(止)와 똑같은 글자이나 진실로 삼강령 가운데 홀로 ‘지지선’의 한 구(句)를 들어 곧바로 그 공효(功效)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칠 데를 알고 능히 얻는[知止能得] 일은 모두 아래의 두 절인 팔조목의 공부와 공효의 가운데 있으니, 굳이 미리 팔조목의 위에 말할 필요가 없다.
물건의 본과 말, 일의 종과 시에 이르러는 자연 전문(傳文) 가운데 사물을 말하는 장에 나와야 할 것이다. 경문에 강령과 조목을 차례로 배열하였으니, 먼저 물건과 일을 언급하지 않아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위로 강령에 매이는 것도 합당하지 않고 아래로 조목에 연결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으니, 어찌 경문에서 빼어도 부족함이 없고 전문에 돌리면 온전해지는 것만 하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그럴 듯하나 두 절이 삼강령과 팔조목의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구본(舊本)인바, 모두 두 정자(程子)의 개정을 거쳤고 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설(異說)이 없다. 주자의 주석에는 ‘물건은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다’는 한 절을 상문(上文)의 두 절을 맺은 말로 삼아, 물건은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에 해당시키고 일은 지지(知止)와 능득(能得)에 해당시켰으니, 이와 같다면 이 두 절이 삼강령의 아래에 있지 않을 수 없다. 이 어찌 십분 옳은 소견이 아니겠는가. 후대 유자들의 소견이 어찌 정자와 주자의 견식(見識)보다 더 낫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 일찍이 반복하여 글의 뜻을 생각해 보니, 명덕과 신민을 물건이라고 한 것은 본의가 아닐 듯하며, 일은 또 지지와 능득만을 가리킨 말이 아닐 듯하다. 무릇 물건과 일은 모두 하문(下文)의 팔조목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어찌 갑자기 열거하여 이 사이에 끼이게 할 리가 있겠는가. 이는 주자가 구본(舊本)을 독실히 믿었으므로 이 뜻을 끌어내어 해석하였을 뿐이다. 책을 보는 방법은 옛날의 학설에 구애되지 말고 사사로운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오직 천연(天然)의 지각(知覺)에 스스로 흡족하게 하여야 하니, 이렇게 하면 옳은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문에는 첫번째로 삼강령을 들고 뒤이어 팔조목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전문(傳文)을 기술할 때에도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이미 삼강령을 해석하고 마침내 팔조목을 언급하였으니, 이 때문에 격물치지장이 네번째에 위치하여 지지선장(止至善章)의 다음이 되는 것이다. 격물치지장을 진실로 지지선을 해석한 장에 접속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격물치지장의 ‘물유(物有)’와 ‘지지(知止)’ 두 절을 잘못 그 선후를 바꾸어서 경문 머리절의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는 말을 따라 마침내 경문의 제2절과 제3절로 만들었는데, 후대 유자와 선생들이 모두 그대로 인습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최후에 이르러 ‘곧 이 두 절은 격물치지장의 탈간(脫簡)이니 마땅히 전문(傳文)의 지지선장 아래에 돌려서 격물·치지의 빠진 글을 보충하여야 한다.’ 하였는바, 이 말은 진실로 의심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자왈’의 한 절은 마땅히 격물치지장의 제2절이 되어, 위로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종과 시가 있다’는 글을 이어받고, 아래로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다[知止而后有定]’는 글을 접속하여야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한 장의 의미가 말이 구비하고 뜻이 충족하여 격물치지의 공부가 실증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물건의 이치를 궁구하고 지식을 지극히 함[格物致知]’은 물건에 있는 이치를 밝혀 마땅히 그쳐야 할 도(道)를 아는 것이다. 물건의 이치가 본과 말에 벗어나지 않고 일의 이치가 모두 종과 시를 꿰뚫고 있는데,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은 실로 《대학》의 강령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게 하는 것이 자신의 덕을 밝힘에서 말미암지 않겠는가. 분쟁을 다스리는 것이 백성을 새롭게 하는 지엽적인 다스림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물건의 본과 말, 일의 종과 시가 모두 여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미 여기에 그 본과 말, 종과 시의 이치를 알아서 마땅히 먼저 해야 할 것을 알고 마땅히 뒤에 해야 할 것을 안다면 그 나머지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물건의 법칙이 어찌 여기에서 벗어남이 있겠는가. 마땅히 그쳐야 할 지선(至善)이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절은 본래 ‘지지(知止)’의 절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본(舊本)에 다섯 지(止) 자를 잘못 따라 ‘지어신(止於信)’의 아래에 잘못 놓은 것이니, 이제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별도로 끌어내어 본말장이라고 해서 전문(傳文)의 범례(凡例)에 위배됨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혹자는 또 “이미 두 절을 옮겨 전문의 격물치지장으로 삼는다면 경문에 있는 삼강령이 결어(結語)가 없게 되니, 이것이 흠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그렇지 않다. 강령은 조목의 강령이고 조목은 강령의 조목이니, 강령이 조목을 통솔하고 조목이 강령에 매여있어야 한다. 그러하니 그 사이에 결어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강령으로 조목에 임하고 조목으로 강령을 계승한 뒤에야 삼강령이 팔조목의 근본이 되고 팔조목이 삼강령을 포괄하게 됨이 분명하다.
강령 세 가지를 이미 머리절에 열거하고 조목 여덟 가지의 공부(工夫)와 공효(功效)를 또 이미 두절에 모두 서술한 뒤에야 마침내 경문의 끝 두 절을 가지고 맺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말하는 순서의 당연함이요 문세(文勢)의 필연적인 것이다. 만약 강령의 아래에는 별도로 강령의 맺음말이 있어야 하고, 조목의 아래 두 절은 다만 조목의 맺음말이 될 뿐이라고 한다면, 이는 강령과 조목이 한 가지 일이 아닌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성의장(誠意章)의 제2절 끝에 “이것을 일러 가운데(마음속)에 진실하면 밖(외모)에 나타나는 것이다.[誠於中 形於外]”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을 읽는 자들은 항상 ‘소인(小人)이 불선(不善)을 마음속에 진실히 하는 것’을 성(誠)이라고 여긴다. 회암(晦菴)이 성(誠)을 논하면서 혹자가 이 말을 물은 것에 답한 글에서도 “천리(天理)의 대체(大體)를 가지고 보면 선(善)을 함이 진실로 허(虛)하고,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을 가지고 보면 악을 함이 무엇이 이보다 진실하겠는가. 어찌 성(誠)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회암 역시 악이 마음속에 진실함을 성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내 일찍이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니, 자못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졌다. 성(誠)은 ‘진실하고 망녕됨이 없음[眞實無妄]’을 이르니, 이 성 자는 마땅히 도리의 올바른 곳에 놓아야 하고 악을 하는 진실함에 놓아서는 안 된다. 본절(本節)은 소인이 한가히 거처할 때에 불선을 하다가 군자를 만난 뒤에 이것을 엄폐할 수 없음을 위주로 하여 말했기 때문에 ‘마음속에 진실하다’는 것이 악을 하기를 진실히 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반복하여 글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용한바 “가운데에 진실하면 밖에 나타난다.”는 말은 불선을 엄폐하고자 하여도 엄폐할 수 없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요, 바로 선을 드러내고자 하여도 드러낼 수 없음을 위하여 말한 것이다. 마음속에 선을 하는 진실함이 없으면서 겉으로 이것을 드러내고자 하면 마침내 폐간(肺肝)을 들여다 보는 듯한 안목을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을 인용하여 증명해서 반드시 선을 하는 진실함이 마음속에 쌓인 뒤에야 선을 하는 징험이 비로소 밖에 나타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만약 마음속에 선을 하는 진실함이 없다면 어찌 선을 행함이 밖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침내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를 삼간다.[故君子必愼其獨也]”라고 한 것이니, 이는 선을 함을 위하여 이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장은 바로 성의(誠意)를 해석한 것이니, 성의의 성(誠)은 곧 공자(孔子)의 이른바 ‘성실히 함[誠之]’의 성으로 진실하지 못하고 망녕됨이 없지 못하여 진실하고 망녕됨이 없고자 하는 도이다.
머리절에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는 것, 이것을 일러 스스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는 것은 성실히 하는 공부이며, “증자(曾子)가 말씀하기를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무섭다.[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하였다.”는 것은 성실히 하라는 경계이며, 마지막 절에 이른바 “부유함은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니, 덕이 있으면 마음이 넓고 몸이 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성실히 한다.[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는 것은 성실히 한 효험이다. 그렇다면 한 장(章)에서 말한 성(誠)이 모두 도리의 올바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어찌 홀로 그 가운데 한 절(節)에서만 소인이 악을 하는 진실함을 가리켜 성(誠)이라고 말하였겠는가.
만일 마음속에 악을 진실히 함을 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진실(眞實)이라 하겠는가, 무망(无妄)이라 하겠는가. 진실이 아니고 무망이 아니면서 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회암은 끝에 다시 말씀하기를, “천리(天理)의 진실무망(眞實无妄)한 본연이 아니면 그 성(誠)은 다만 본연의 선(善)을 비워 도리어 불성(不誠)이 되고 만다.” 하였다.
어리석은 나의 생각에는, 진실무망이 아니면 성(誠)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없고, 천리의 바름이 아니면 진실무망의 실제에 해당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천리의 밖에 어찌 딴 성(誠)이 있겠는가. 악의 진실함은 스스로 악을 함의 진실함이 될 뿐이니, 결코 성에 비의(比擬)될 수 없는 것이다. 회암의 이른바 ‘도리어 불성함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성의 근본을 얻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인용한바 ‘가운데에 성실하면 밖에 나타난다’는 것은 다만 소인으로서 군자를 보고 그 선을 드러내려 하는 자는 단지 밖을 꾸밀 뿐이니, 밖을 꾸미는 자는 끝내 사람을 속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마음속에 선을 성실히 하는 자라야 비로소 밖에 나타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가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감을 거듭 말하여 권면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중용(中庸)》의 비은장(費隱章)을 구설(舊說)에는 대부분 ‘성인(聖人)이 알지 못하고 능하지 못하다’는 부분을 은(隱)으로 보아 말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이것을 취하지 않고 체(體)의 작은 것을 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의 생각에는 구설이 아마도 자사(子思)의 본의가 아닌가 싶다.
‘비(費)’와 ‘은(隱)’ 두 글자는 모두 빌려 쓴 말이니, 비(費)는 널리 베풂을 이르고 은(隱)은 감추어 숨음을 이른다. 도가 어찌 일찍이 널리 베푸는 것이 있고 일찍이 감추어 숨는 것이 있겠는가. 자사는 이 도의 용(用)이 그 낮고 얕고 가깝고 작은 것에 두루하여 빠뜨림이 없어서 널리 베푸는 것과 유사하므로 비라고 말씀하였고, 또 지극히 높고 깊고 멀고 커서 측량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감추어 숨는 듯하므로 은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또 혹 비(費) 자와 은(隱) 자를 굳이 빌려 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옛날에는 글자가 적고 쓰임이 많았기 때문에 한 글자를 가지고 여러 가지 뜻을 겸한 경우가 많으니, 비 자가 실로 낮고 얕고 가깝고 작은 뜻을 겸하였고, 은 자가 실로 높고 깊고 멀고 큰 뜻을 겸하였기 때문에 자사가 이 두 글자를 사용하여 이 도의 용을 밝힌 것인지를 어찌 알겠는가.
하문(下文)에 이른바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가 더불어 알고 더불어 능하다.[愚夫愚婦之與知與能]”는 것이 바로 비이며, “성인이 알지 못하는 바가 있고 능하지 못한 바가 있으며, 천지의 큼으로도 사람들이 오히려 한(恨)하는 바가 있다.[聖人之有所不知不能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는 것이 바로 은이다. 비이기 때문에 천하가 깨뜨릴 수가 없어 그 작음이 안이 없는 것이요, 은이기 때문에 천하가 실을 수가 없어 그 큼이 밖이 없는 것이니, 이에 진실로 비와 은이 이 도의 용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래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시(詩)를 인용하고, “상하에 이치가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言其上下察也]” 하였으니, 이 또한 빌려 인용해서 이 도가 위로 드러나고 아래로 드러나 없는 곳이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솔개가 하늘에 이름이 과연 도의 높고 깊고 멀고 큼을 지극히 하고, 물고기가 못에서 뛰는 것이 과연 도의 낮고 얕고 가깝고 작음을 다하였음을 말한 것이 아니요, 다만 취하여 이치가 위와 아래에 드러난 증거로 삼았을 뿐이다.
그리고 장의 끝 부분의 맺은 글에 이르러서는 말씀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단서를 짓는데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천지에 드러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하였으니, 이른바 ‘부부에게서 단서를 짓는다’는 것은 낮고 얕고 가깝고 작은 비(費)가 아니겠는가. 이른바 ‘천지에 드러난다’는 것은 높고 깊고 멀고 큰 은(隱)이 아니겠는가.
무릇 천하의 일은 지극히 낮음으로부터 지극히 높음에 이르고, 지극히 얕음으로부터 지극히 깊음에 이르고, 지극히 가까움으로부터 지극히 멂에 이르고, 지극히 작음으로부터 지극히 큼에 이르기까지 군자가 떳떳이 행하는 도 아님이 없다. 위만 있고 아래가 없는 것은 도가 아니며 아래만 있고 위가 없는 것도 또한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장의 첫머리에 반드시 비(費)·은(隱)을 말의 첫머리로 삼아 위에 놓고 이(而) 자를 두 글자 사이에 두어서 높고 낮고 깊고 얕고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것이 통하여 이 도의 전체가 됨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래 각 장(章)에 미루어 넓히고 반복한 것이 모두 비·은의 뜻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사(子思)가 비(費)를 말씀한 까닭은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가 더불어 알고 더불어 능할 수 있는 것을 소홀히 하여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은(隱)을 말씀한 까닭은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성인이 알지 못하는 바를 알려 하고 성인이 능하지 못한 바를 능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하늘에 명(命)을 받고 자기 몸에 성(性)을 간직하여, 일상 생활하고 떳떳이 행함에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여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행하여야 할 도에 있어서는 낮고 얕고 가깝고 작다 하여 빠뜨리는 바가 없고, 높고 깊고 멀고 크다 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함을 말씀한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능사(能事)를 다하고 전체를 얻어서 성분(性分)과 직분(職分)을 이에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도(道)의 비(費)는 일반 사람들도 진실로 알 수 있고 또 능할 수 있으나 은(隱)에 있어서는 성인과 천지(天地)도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음은 어째서인가? 하물며 배우는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천지와 성인이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은 그 지혜와 생각과 역량이 실로 부족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요 또 다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다만 형세가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지혜와 생각과 역량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형세가 통하지 못하여 지혜와 생각과 역량을 쓸 수 없는 곳에는 비록 천지와 성인이라도 또한 어쩔 수 없었으니, 만일 지혜와 생각과 역량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인이 어찌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에 알 수 있고 능할 수 있는 것은 성인이 일찍이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성인을 배우는 자들이 성인이 알고 능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연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가 더불어 알고 더불어 능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알고 능하여 성인이 아는 것을 모두 알고 성인이 능한 것을 함에 이른다면 정자(程子)의 이른바 ‘종신토록 쓰더라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도가 중(中)이 되고 용(庸)이 되는 것은 이 비(費)·은(隱) 때문이니, 도가 중·용이 아니면 과연 위를 통하고 아래를 통하여 만 가지 일을 두루 다해서 부족함이 없겠는가.
이미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 또한 알지 못하더라도 중·용을 아는 것에 해롭지 않으며, 성인이 능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 또한 능하지 못하더라도 중·용을 행함에 해롭지 않은 것이다. 하물며 천지도 한(恨)하는 바가 있는 부분에 사람이 어쩔 수 있겠는가. 이는 다만 도리가 무궁함을 말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비와 은을 진실로 모두 도의 용(用)을 가지고 말하였다면 이는 다만 용(用)만 말하고 체(體)를 말하지 않은 것이니, 도가 어찌 체가 없는 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별도로 체를 말하지 않아도 용을 말한 부분에 체가 일찍이 그 가운데 들어있지 않음이 없으니, 굳이 상대하여 들고 아울러 말한 뒤에야 체에 이 용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다. 정자는 말씀하기를, ‘《중용》 책은 처음에는 한 이치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져 만 가지 일이 되고 끝에는 다시 합하여 한 이치가 되어, 풀어 놓으면 육합(六合)에 가득하고 거두면 물러가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다.[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체와 용은 근원이 하나이며 드러남과 은미함은 간격이 없다.[體用一原 顯微無間]’ 하였으니, 이미 근원이 하나라고 말했으면 체와 용을 둘로 삼을 수 없고, 이미 간격이 없다고 말했으면 간격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서(本書 《중용》을 가리킴)의 대지(大旨)가 체와 용을 분별함에 있으면, 이미 체를 말했으면 또 모름지기 용을 말하여야 하고 바야흐로 용을 말했으면 또 모름지기 체를 말하여야 하니, 이는 문세(文勢)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편은 오직 도를 밝힘을 요점으로 삼았는바, 도는 체와 용을 겸하고 드러남과 은미함을 합하여 말한 것이니, 체를 말하면 용이 그 가운데 들어 있고 용을 말하면 체가 그 가운데 들어 있다. 어찌 용이 없는 체가 있으며 또 어찌 체가 없는 용이 있겠는가.
이치는 도의 체이고 일은 도의 용이니, 도의 용이 흩어져 만 가지 일이 되기 때문에 장차 만 가지 일을 말하려 하면 반드시 한 이치에 근본하고, 이미 만 가지 일을 말했으면 끝내는 한 이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이치에 시작하고 마치는 것은 용이 체를 떠나지 않고 체가 항상 용을 주관한다.
이른바 ‘처음에 한 이치를 말했다’는 것은 곧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성이 하늘에 근본한 것이며, 이른바 ‘끝에 한 이치를 말했다’는 것은 곧 ‘하늘의 일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덕이 하늘과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말한 한 이치는 바로 중용의 도의 근원이며, 끝에 말한 한 이치는 바로 중용의 도의 극(極)이다. 근원은 시작함을 이르고 극은 마침을 이르니, 근원함도 진실로 이 이치이며 지극함 또한 이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치가 중용의 도의 체가 아니겠는가.
사업(事業)에 있는 용(用)으로 말하면 이른바 ‘비하면서도 은하다[費而隱]’는 것이 이것이다. 이미 비라고 말했으면 낮고 얕고 가깝고 작은 일[事]이 극진하지 않음이 없고, 또 은이라고 말했으면 높고 깊고 멀고 큰 업(業)이 열거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몸에 있어서는 몸의 도가 되고, 평소의 지위에 있어서는 평소의 지위의 도가 되고, 집에 있어서는 집의 도가 되고, 나라에 있어서는 나라의 도가 되고, 천하에 있어서는 천하의 도가 되고, 만세(萬世)에 있어서는 만세의 도가 되니, 비하면서도 은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비한 까닭은 이치가 비하기 때문이요, 은한 까닭은 이치가 은하기 때문이다. 이미 비가 이치 때문에 비하고 은이 이치 때문에 은하다면 비와 은이 어찌 일찍이 이치를 떠나 비하고 은하겠는가. 용이 체로 말미암아 나오고 체가 용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이 중용의 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비와 은이 모두 도의 용이 되는데 체가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굳이 비와 은을 나누어 한 체와 한 용으로 삼은 뒤에야 체와 용이 구비되겠는가. 바야흐로 이 도의 용이 위아래와 만 가지 일에 드러남을 말하면서 겸하여 체를 들어 용과 상대한다면 그 체가 혹시라도 너무 천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편의 첫머리에 이미 체의 근본을 말하였고 편의 끝에 장차 체의 은미함에 귀숙(歸宿)하게 하였으니, 어찌 중간에 용을 말하는 즈음에 겸하여 체를 말하겠는가.
비와 은의 뜻이 참으로 풍부하다. 혹 비를 말하여 은에 이르고 혹 은을 말하면서 비를 포함하여, 종횡으로 교차하고 종합하며 층층이 나타나고 서로 발명하였다. 이것을 한번 들어 말하면,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은데 공자(孔子)는 스스로 능하지 못하다 하였고, 행실은 평소의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데 들어가는 곳마다 자득하지 않음이 없음에 이르며, 처자(妻子)가 서로 화합하고 형제가 우애함이 모두 가깝고 또 낮은 일인데 부모가 편안하시기에 이르며,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귀신이 사물의 근간이 되어 빠뜨리지 않는 용이 된다.
대순(大舜)과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도는 떳떳한 행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성인이 되고 천자(天子)가 되어 종묘에서 선조에게 제향하고 후손들이 잘 보존함에 이른다. 그리고 몸을 닦는 방법을 아는 자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데 이르며,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는 데서 말미암는다. 어리석은 자가 반드시 밝아지고 유약한 자가 반드시 강해지는 것은 남이 한 번 하면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 하면 자신은 천 번을 하는 데서 말미암는다.
그리고 천지의 화육(化育)을 돕는 것이 처음에는 자신의 성(性)을 다하는 데서 말미암으며, 동(動)하고 변(變)하고 화(化)하는 덕이 처음에는 한쪽을 지극히 하는[致曲] 데서 말미암는다. 박후(博厚)하고 고명(高明)하고 유구(悠久)한 업이 쉬지 않는 데에서 시작되며, 만물을 발육(發育)하여 높기가 하늘에 이르는 도가 3백 가지 큰 예(禮)와 3천 가지 작은 예를 쌓는 데에서 연유한다.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여 정미(精微)함을 극진히 하고 고명(高明)함을 지극히 하여 중용(中庸)을 따르며 서민(庶民)에게 징험하고 삼왕(三王)에 고찰하고 천지에 세우고 귀신에게 질정하고 백세(百世)를 기다리는 것이 자신의 몸에 근본하며, 공손함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화평해지는 교화가 비단옷을 입고 위에 홑옷을 더하는 데에서 말미암으니, 그렇다면 한 편 가운데 어디인들 비와 은이 아니겠는가.
26장에 말하기를 ‘지금 하늘은 조금 밝은 것이 많이 모인 것인데, 무궁(無窮)함에 미치면 해와 달과 별이 매여 있으며 만물을 덮고 있다. 이제 땅은 한 줌 흙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광후(廣厚)함에 미치면 화악(華嶽)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하지 않고 하해(河海)를 거두어도 새지 않으며 온갖 만물이 실려 있다. 이제 산은 한 조각 자갈[石]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광대(廣大)함에 미치면 초목이 자라고 금수(禽獸)가 살며 보장(寶藏)이 나온다. 이제 물은 한 잔의 물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헤아릴 수 없음에 미치면 큰 자라와 악어와 교룡(蛟龍)과 물고기와 자라가 나오며 재화가 불어난다.’ 하였으니, 이 한 절(節)은 비와 은의 전체가 됨이 분명하고 또 자세하다.
이른바 조금 밝다는 것과 한 줌의 흙과 한 조각 자갈과 한 잔의 물이라는 것은 비(費)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무궁함과 광후함과 광대함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은(隱)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와 은은 곧 한 이치인 것이다. 비는 은에 통하고 은은 비에 포함되니, 비가 없으면 은이 없고 은이 없으면 비가 없다. 그 소이연(所以然)은 곧 이치이니, 하필 체(體)의 은미한 것을 은에 해당시킨 뒤에야 체가 올바른 체가 되겠는가. 마땅히 비와 은을 아울러 도의 용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자연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체가 높고 또 신묘하지 않겠는가. 편의 첫머리와 편의 끝에 말한 바의 한 이치가 이에 일관되는 것이다.”


25장의 머리절[首節]에 이르기를 “성(誠)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도(道)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성은 물건이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도는 사람이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誠者物之所以自成 而道者人之所當自行也]” 하였다.
나는 일찍이 반복하여 참고하고 연구하였으나 끝내 분명하지 못함이 있었다. 내 망녕된 생각으로는 ‘자성(自成)’의 성(成) 자는 마땅히 이 성(誠) 자가 되어야 하는데 등사(謄寫)하는 자가 잘못 편방(偏旁)의 언(言) 자를 제거하여 마침내 성(成) 자가 된 것이니, 아랫절[下節]에 자성(自成)이란 글이 있기 때문에 옆의 것을 잘못 보아 오자(誤字)를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글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름지기 성(誠) 자가 된 뒤에야 그 뜻이 명쾌해진다.
이 편(篇 《중용》을 가리킴)에서 성(誠)을 말한 것이 20장에 처음 나오는데 성은 실로 이 편의 주안점이다. 이 절의 이른바 성(誠)은 곧 20장의 “하늘의 도[天之道]”의 성인 것이요 아랫절에 이른바 “성실히 한다.[誠之]”는 것은 곧 20장에 “사람의 도[人之道]”의 성인 것이니, 사람이 성실히 하는 공부를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려 하였으므로 장의 첫머리에 먼저 성인(聖人)의 성(誠)을 말하여 이르기를, “성은 스스로 성실함이요 도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誠者自誠也 而道自道也]”라고 한 것이다.
이치가 천지에 있는 것은 본래 스스로 진실되고 망녕됨이 없기 때문에 천지의 도는 성(誠)일 뿐이요, 성인이 천지에게서 얻어 성(性)의 이치가 된 것 또한 스스로 진실하고 망녕됨이 없으니, 곧 이른바 ‘성은 스스로 성실하다’는 것이다.
성(性)이 발하여 정(情)이 되어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유행하는 것은 억지로 힘씀에서 나오지 않고 굳이 닦음에 말미암지 않고 모두가 당연한 도리이니, 이것이 이른바 ‘도는 스스로 행한다’는 것이다. 이미 스스로 성실하고 스스로 행한다고 말했으면 바로 이른바 ‘하늘의 도’의 성(誠)인 것이다.
성(誠)의 이치가 이와 같기 때문에 모든 물건이 물건이 될 적에는 반드시 성실함이 있고 나서 시작도 마침도 할 수 있으니, 곧 이른바 ‘성실함이 아니면 사물이 없다’는 것이다. 군자가 반드시 성실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실히 한다’는 것은 하늘의 도의 성실함에 미치지 못하여, 모름지기 사람에게 있는 도리를 다해서 하늘의 도의 성실함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성실한 성(誠)은 성실히 하는 자의 준칙(準則)이 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 이루어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말함이요, 성(誠)은 본래 스스로 성실한 것이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실함이 이미 확립되어 있으니, 어찌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자성(自成)의 성(成)은 이 성(誠) 자의 오자인데 편방에 언(言) 자가 없어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중용》의 20장 끝에 “배우기를 널리하고 묻기를 자세히 하고 생각을 삼가고 분변하기를 밝게 하고 행하기를 독실히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선(善)을 잘 가리고 굳게 잡아 지키는 공부의 조목을 말한 것이다.
그 아랫글에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우면 능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묻지 않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분변하지 않을지언정 분변하면 분명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아서,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 과연 이 도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진다.[有不學 學之 不能不措也 有不問 問之 不知不措也 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也 有不行 行之 不篤不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剛]” 하였다.
주자(朱子)의 장구(章句)에 이르기를,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하면 반드시 이루기를 요구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은 ‘배우지 않고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분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는 다섯 구(句)의 뜻을 가리켜 해석한 것이며, 이른바 ‘하면 반드시 그 이루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배우면 능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분변하면 분명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행하면 독실하지 않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라’는 다섯 구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또 주자는 말씀하기를, “이 문법은 ‘싸우지 않을지언정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有不戰 戰必勝]’는 유(類)와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딴 문장을 인용하여 이 장의 문세를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은 자들은 항상 생각하기를 ‘배우지 않고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분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지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고 행하는 일에 전혀 뜻이 없어 단연코 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 것이라 여기고, 그 구의 끝에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不爲則已]”의 이(已) 자는 바로 전혀 다시 가망이 없는 뜻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고 행한다는 학지(學之), 문지(問之), 사지(思之), 변지(辨之), 행지(行之)의 각각 두 글자를 곧 말의 첫머리로 삼아 제기해서 배우는 자를 권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이것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면, 윗글에 이미 다섯 가지 공부의 조목을 차례로 말했기 때문에 아랫글에 다섯 가지 조목을 따라 조목조목 권면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 뜻을 살펴보면 ‘후학이 과연 배우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부터 배워서 능하지 못한 것을 감히 그대로 버려두어 배움을 놓지 말고, 과연 묻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부터 물어서 알지 못하는 것을 감히 그대로 버려두어 질문을 접어두지 말고, 과연 생각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부터 생각하여 터득하지 못한 것을 감히 그대로 버려두어 생각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고, 과연 분변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부터 분변하여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감히 그대로 버려두어 분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고, 과연 행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부터 행하여 독실하지 못한 것을 감히 그대로 버려두어 불성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글 뜻이 윗글을 따라 거듭 권면한 것이 순하고 굽힘이 없으니, 어찌 반드시 배우지 않고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분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자를 들어 물리친 뒤에 저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고 행하는 사람을 권면하였겠는가.
힘쓰지 않아도 도에 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는 성인이 아니라면 그 누가 배우지 않고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분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절목(節目)이 없겠는가. 배우지 않으면 반드시 능하지 못한 바가 있고, 묻지 않으면 반드시 알지 못하는 바가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터득하지 못하는 바가 있고, 분변하지 않으면 반드시 분명하지 못한 바가 있고,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독실하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
이에 과연 그 능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배우며, 알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물으며, 터득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생각하며, 분명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분변하며, 독실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행한다면, 처음에 능하지 못하던 것이 마침내 능하지 못한 바가 없게 될 것이요, 처음에 알지 못하던 것이 마침내 알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요, 처음에 터득하지 못한 것이 마침내 터득하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요, 처음에 분명하지 못하던 것이 마침내 분명하지 못한 바가 없게 될 것이요, 처음에 독실하지 못하던 것이 마침내 독실하지 못한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비록 어렵게 알고 힘써 행하는 자라도 스스로 공부를 백 배를 하고 천 배를 한다면 성공에 이르러서는 똑같게 되니, 이것이 성인의 뜻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않고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분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아랫글의 각 조목을 일으키는 말로 삼아, 반드시 배우지 않은 것을 배워서 배우지 않은 바가 없고, 반드시 묻지 않은 것을 물어서 묻지 않은 바가 없고, 반드시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서 생각하지 않은 바가 없고, 반드시 분변하지 않은 것을 분변해서 분변하지 않은 바가 없고, 반드시 행하지 않은 것을 행해서 행하지 않은 바가 없게 하도록 권면한 것이니, 이는 글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성현이 책을 지어 글을 쓴 것은 한 장(章)과 한 구(句)에 모두 일정한 종지(宗旨)가 있는데, 옛 사람들은 문법이 간략하고 심오하며 의취(義趣)가 원만하고 넓어서 내용이 얕고 뜻이 드러나 쉽게 이해하고 쉽게 알 수 있는 후세의 문자(文字)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책을 엮는 자가 혹 두루 살펴보지 못하여 착각하고 잘못 갖다 붙이며 읽는 자들 또한 억측(臆測)으로 헤아리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본의를 잃는 경우가 많다.
비록 통달한 식견으로도 범범히 보고 그대로 지나침을 면치 못하여 혹 미처 다 이정(釐正 개정)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을 옮겨 개정하고 다시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선현(先賢)들이 일찍이 주목하였고 이미 손을 거쳤으니, 후학들이 그 사이에 이동(異同)을 가하고 가부(可否)를 논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진실로 선유(先儒)들을 독실히 믿는 것이니 그 뜻이 좋고, 경전(經傳)을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그 의논이 확고하다.
그러나 의리의 공정(公正)함을 사람들이 똑같이 얻었으니,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누추한 자라도 혹 한 가닥 길을 통달하여 다만 한 가지라도 옳게 터득한 뜻이 있으면 마땅히 그것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 대순(大舜)이 사람들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살펴 큰 지혜가 된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학》과 《중용》 두 책은 진실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눈과 손을 거쳤는데, 명도(明道)가 수정한 것을 이천(伊川)이 이미 다 따르지 않았고, 명도와 이천 두 정자가 수정한 것을 회암(晦菴)이 또한 다 따르지 않았는 바, 다 따르지 않은 까닭을 스스로 혐의하지 않은 것은 공공(公共)의 의리(義理)에 있어 각각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는 것이 또한 자신의 분수 안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감히 스스로 다하지 않을 수 없어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선현에게 죄를 얻는 것이겠는가. 이 또한 선현들이 인정할 것이 분명하다.
일찍이 《주역(周易)》 한 책을 보면 전문(傳文)은 이천에게서 나왔고 본의(本義)는 회암에게서 나왔는데 똑같이 경문(經文)의 뜻을 발명하였으나 본의의 말씀이 또한 정전의 말씀을 다 따르지 않고 혹 별도로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설명한 곳이 있다. 이천을 높이고 숭상함이 그 누가 회암만 하겠는가. 그런데도 글에 대하여 달리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선유(先儒)와 달리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요 공의(公義)가 있는 곳에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달리하는 것은 글 뜻 사이에 세미한 곡절(曲折)일 뿐이니, 도리의 큰 두뇌가 있는 부분은 일찍이 똑같지 않은 것이 아니다.

[주D-001]《대기(戴記)》 : 한(漢) 나라 때 대성(戴聖)이 주해(註解)한 《예기(禮記)》를 이른다. 대성은 숙부인 대덕(戴德)에게 예를 배웠는데, 대덕은 일찍이 《의례(儀禮)》를 주해하였다. 이 때문에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 칭하고 《의례》를 대대기(大戴記), 《예기》를 소대기(小戴記)라 하여, 《의례》와 《예기》를 모두 ‘대기’라고도 칭하나 후대에는 주로 《예기》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두 정자(程子) :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를 이른다.
[주D-003]지지(知止)와 물유(物有)의 두 절(節) : 《대학》의 세번째 절인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네번째 절인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를 가리킨 것이다.
[주D-004]자왈(子曰)의 한 절(節) : ‘子曰 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5]연문(衍文) : 쓸데없이 중복된 글을 이른다.
[주D-006]간상(間嘗)의 한 단락 : “요즘 내 일찍이 정자의 뜻을 취하여 보충한다.[間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는 글을 가리키는바, 주자는 격물치지장이 빠져 있다는 정이천(程伊川)의 말을 따라, 격물·치지의 뜻을 자신이 지어 아래에 끼워 넣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7]여섯 가지 조목 : 《대학》의 팔조목(八條目) 중 격물·치지를 뺀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
[주D-008]이를 데를……보존할 수 있다 : 이를 데를 알아 이르는 것은 지공부(知工夫)로 학문의 시작에 해당하고,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행공부(行工夫)로 학문을 끝마침에 해당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주D-009]팔조목의 공부와 공효 : 《대학》의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루고, 그 마음을 바루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지극히 하여야 하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함에 있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한 것을 팔조목의 공부라 하며, 바로 다음에 있는 “사물의 이치가 지극해진 뒤에야 지식이 지극해지고, 지식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성실해지고……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고르게 된다.[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國治而后天下平]” 한 것을 팔조목의 공효라 한다.
[주D-010]다섯 지(止) 자 : 문왕(文王)의 덕을 말하면서 “인군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사랑에 그치고, 백성들과 사귈 때에는 신(信)에 그쳤다.[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 爲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는 글을 가리킨다.

 

여헌선생속집 제5권_     잡저(雜著)_      만학요회(晩學要會)

 

원집(原集)의 ‘성리설(性理說)’이라는 편목(篇目) 가운데에도 만학요회(晩學要會)가 있는바, 이 편은 곧 맨 처음 쓴 초고(草稿)이다. 편목은 비록 같으나 글은 똑같지 않다.

 

○ 다섯 마디의 종지(宗旨)

성(性)은 선(善)하다. 하늘에서 받은 것을 성이라 하고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순수함을 선이라 한다.
도(道)는 중(中)이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일의 이치와 사물의 법칙에 알맞음을 중이라 한다.
덕(德)은 경(敬)이다. 도를 응집하는 것을 덕이라 하고 표리(表裏)가 한결같이 바름을 경이라 한다.
심(心)은 성(誠)이다. 몸을 주관하는 것을 마음[心]이라 하고 뜻을 써서 이겨 극진하게 함을 성이라 한다.
학문[學]은 생각함이다. 마음을 다스림을 학문이라 하고 미루어 지극히 하여 궁극에 도달함을 생각이라 한다.

상고(上古)의 성인(聖人)이 서계(書契)를 만들고 문자(文字)를 지어 명목(名目)을 세우고 지의(旨義 뜻임)를 밝히니, 큰 명목 가운데 또 각기 작은 명목이 있고 큰 지의 가운데 또 각기 작은 지의가 있어, 그 종류가 억(億)뿐만이 아니고 그 변화가 끝이 없다. 모여서 장구(章句)와 훈모(訓謨)가 되고 쌓여서 방책(方冊)과 경전(經傳)이 되니, 이는 모두 정미(精微)한 이치를 개발하고 의리를 밝혀 이 인간을원문 빠짐. 다만 언변(言邊)만이 남아 있다.한 것이다. 그러나 억뿐만이 아닌 명목을 따라 무궁한 지의가 있으니, 만약 그 요점을 알지 못하고 그 실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공부하는 방법을 알아 지극한 경지에 나아가는 방법을 알겠는가.
이제 우리 인간의 분수에 있어 유가(儒家)의 종지(宗旨)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겠다.
하늘에서 받은 것은 성(性)이요 그 성을 따르는 것은 도(道)이며, 그 도를 응집하는 것은 덕(德)이요 덕을 주관하는 것은 마음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학문이니, 이른바 성과 도와 덕과 마음과 학문 이 다섯 가지는 어찌 명목 중에 크면서도 간절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알고 따르고 응집하고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은 과연 그 요점을 알지 못하고 그 실제를 알지 못하고서 가능하겠는가. 성(性)의 실제는 바로 선(善)이요, 도의 실제는 바로 중(中)이요, 덕의 실제는 바로 경(敬)이요, 마음의 실제는 바로 성(誠)이요, 학문의 실제는 바로 생각함이니, 그 실제를 알면 요점이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인·의·예·지의 순수함을 선(善)이라 하고, 일의 이치와 사물의 법칙에 알맞음을 중(中)이라 하고, 표리(表裏)가 한결같이 바름을 경(敬)이라 하고, 뜻을 극진히 함을 성(誠)이라 하고, 미루어 지극히 하여 궁극한 경지에 도달함을 사(思)라 하니, 이는 곧 다섯 가지의 지의(旨義)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性)만이 선의 지의(旨義)에 해당하고 오직 선만이 성의 명목(名目)을 다할 수 있으며, 오직 도(道)만이 중(中)의 지의에 해당하고 오직 중만이 도의 명목을 다할 수 있으며, 오직 덕(德)만이 경(敬)의 지의에 해당하고 오직 경만이 덕의 명목을 다할 수 있으며, 오직 마음만이 성(誠)의 지의에 해당하고 오직 성만이 마음의 명목을 다할 수 있으며, 오직 학문만이 사(思)의 지의에 해당하고 오직 사(思)만이 학문의 명목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善)을 버려두고 성(性)을 말하며 중(中)을 버려두고 도를 말하며 경(敬)을 버려두고 덕을 말하며 성(誠)을 버려두고 마음을 말하며 사(思)를 버려두고 학문을 말한다면 나는 그 실제를 알고 요점을 안다고 보지 못하겠다. 이 다섯 가지의 명목에 있어 다섯 가지의 지의를 안다면 크고 작은 명목과 크고 작은 지의에 있어 어느 것을 연구한들 그 실제를 알지 못하며 그 요점을 알지 못하겠는가.

성(性)은 사람과 물건이 사람과 물건이 된 소이(所以)의 이치이니, 사람이 된 자는 반드시 이 성을 받들어 잡고 보존하여 지킨 뒤에야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성을 받들어 잡고 보존하여 지키는 자가 적으니, 어찌 참으로 그 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혹자들은 사람의 성(性)이 악하다고 말하고, 또 혹자들은 사람의 성이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말하는데, 오직 맹자(孟子)만은 홀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여 본연(本然)의 참다움이 되고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떳떳한 본성임을 밝혔으니, 성이 과연 불선(不善)한 것이 있겠는가.
성(性)은 요(堯)·순(舜)과 걸(桀)·주(紂)가 함께 얻은 것이다. 그 이치는 곧 태극(太極)의 이치로 하늘이 얻어 하늘의 성이 되고 땅이 얻어 땅의 성이 되었으니,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 태어난 자 또한 모두 이 이치를 성으로 간직하였다. 성은 하나이니, 다만 맹자가 말씀한 선한 것이 있을 뿐이다. 어찌 딴 성이 있겠는가.
송(宋) 나라 때의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에 이르러 비로소 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다를 듯하여 두 가지의 성(性)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體)가 원래 두 가지 성이 나란히 서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요, 다만 체(體)와 용(用), 경(經)과 위(緯)를 분별하는 데 있어 서로 다름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그 체가 되고 경이 되는 것을 가리켜 본연지성이라 하고, 그 용이 되고 위가 되는 것을 가리켜 기질지성이라 한 것이다.
기질지성은 본래 본연지성 가운데에 있으나 천지에 유행하는 용에서 받은 것은 반드시 모두 똑같지 않은 단서가 있으므로 또한 이름하여 성이라 하였으나 그 성은 참다운 본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만 한 물건, 한 때의 성이 될 뿐이요, 천지 만물에 공공(公共)하여 항상 있는 본성은 아니다.
이치는 본래 하나인데 쓰임이 되는 것은 반드시 기(氣)로써 이뤄지기 때문에 이 이치는 기를 용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기는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니, 별도로 이치 밖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가 되어 쓰임을 지극히 하는 즈음에 변화하고 작용하는 기틀이 없을 수 없으므로, 유행하는 사이에 반드시 정하고 거칠고 후하고 박함이 똑같지 않으며, 모이고 흩어지고 성하고 쇠함이 일정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여러 물건이 만나는 바에 청(淸)과 탁(濁), 수(粹)와 박(駁), 강(剛)과 유(柔), 선(善)과 악(惡)의 만 가지 다름이 있으니, 이렇게 되면 진실로 병이(秉彛)의 똑같음을 볼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장자(張子)는 다시 말씀하기를, “기질지성을 군자(君子)는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성으로 여기지 않는 성을 끝내 성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반드시 기질지성이라고 말하여 성을 기질에 칭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기질로 받은 것을 원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본성이라고 여겨 성악설(性惡說)과 선·악이 뒤섞여 있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우리 본연의 순수한 본성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이다.
그렇다면 기질지성이라고 말한 까닭은 바로 이 본연지성을 드러내어 맹자의 성선(性善)의 뜻을 발명함이 있는 것이니, 성이 과연 두 가지 성이 있어 불선(不善)함이 있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사람은 다만 본연지성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노니, 맹자가 말씀한 성선(性善)이 이것이다.

자사(子思)는 말씀하기를, “성을 따름을 도라 한다.[率性之謂道]” 하였다. 이른바 ‘성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간직한 성의 이치를 순히 따르는 것이니, 이것을 내 마음에 보존하고 이것을 내 몸에 행하고 이것으로 모든 일을 응하고 이것으로 모든 물건을 접하는 것이다. 이 몸이 있으면 이 도가 있게 마련이니,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가 이 도를 행하는 세(歲)·월(月)·일(日)·시(時)인 것이다.
이치는 진실로 때마다 없을 때가 없고 곳마다 없는 데가 없고 일마다 없는 것이 없고 물건마다 없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 몸이 만나는 때와 처하는 자리와 접하는 물건과 당하는 일이 모두가 이 도를 체행할 수 있는 그 곳이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곧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이다. 이 때를 만나서는 마땅히 이 때를 만난 이치를 다하여야 하고, 이 지위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 지위에 처한 이치를 다하여야 하고, 이일을 응해서는 마땅히 이 일을 응한 이치를 다하여야 하고, 이 물건을 접해서는 마땅히 이 물건을 접한 이치를 다하여야 하니, 이것이 곧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인 것이다.
도의 근본은 성도(性道)의 기틀에 감춰져 있고 정도(情道)의 발함에 달려 있고 귀와 눈, 입과 코, 손과 발의 기능에 말미암으며, 도의 쓰임은 널리 집안과 나라와 천하에 두루하고 멀리 천지와 고금에까지 미친다.
성(性)은 곧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五常)이요, 정(情)은 곧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이다. 오상은 사람이 똑같이 간직한 성이요 칠정 또한 사람이 똑같이 간직한 정이며, 귀와 눈, 입과 코, 손과 발은 사람이 똑같이 간직한 몸이요 때와 처지, 일과 물건은 사람이 똑같이 당하는 것이며, 집안과 나라와 천하는 사람이 똑같이 거(居)하는 것이니, 그 행하는 도가 피차의 간격이 없고 고금의 차이가 없어서 한결같이 모두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표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성인(聖人)은 인극(人極 인간의 지극한 도리)을 세워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質正)하여도 의심이 없어 삼재(三才)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현인(賢人)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중인(衆人)이 있고 또 그 다음으로는 하우(下愚)가 있는데 하우의 악함은 한 종류가 아니며, 또 그 밖으로는 이단(異端)이 있는데 이단의 종류 또한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어째서인가? 이는 중(中)을 얻지 못하여 그러함에 불과할 뿐이다.
이른바 중(中)이라는 것은 바로 사물의 당연한 법칙이요, 이른바 사물의 당연한 법칙이라는 것은 곧 그 평상(平常)한 이치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를 행하여야 하니, 이것이 평상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부자간에 친하고 군신간에 의롭고 부부간에 분별하고 장유간에 차례가 있고 붕우간에 신(信)을 지키는 것이 곧 당연한 법칙이다.
소의 성질을 순히 하여 밭 가는 데 사용하고 말의 성질을 순히 하여 타는 데 사용하며, 닭의 성질을 순히 하여 새벽을 맡아 시간을 알리게 하고 개의 성질을 순히 하여 밤을 맡아 도둑을 지키게 하니, 만약 말을 밭 가는 데 사용하고 소를 타는 데 사용하며 밤에 도둑을 지키는 것을 닭에게 맡기고 새벽에 시간을 알리는 것을 개에게 맡긴다면 이 어찌 당연한 법칙이요 평상한 이치이겠는가.
당연한 법칙과 평상한 이치는 각각 사물의 가운데에 있어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없으니, 그렇다면 알기가 어렵지 않고 행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 중에 이 법칙과 이 이치를 따르는 자가 드문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진실로 이기(二氣 음·양을 가리킴)와 오행(五行)에서 받은 기질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며, 그 기틀은 칠정의 발함이 절도에 맞기도 하고 절도에 맞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칠정은 성(性)에 근본하여 말과 행실에 행해지는 것이니, 칠정이 절도에 맞으면 인·의·예·지·신의 오상이 그 떳떳함을 얻고 말과 행실이 그 바름을 얻어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도가 이에 확립된다. 그러나 칠정이 절도에 맞지 않으면 오상이 그 떳떳함을 잃고 언행이 그 바름을 잃어 대중 지정한 도가 이에 어두워진다.
이른바 칠정이 절도에 맞는다는 것은 희·노·애·낙·애·오·욕이 마땅히 나와야 할 때에 나오고 마땅히 멈추어야 할 때에 멈추며, 마땅히 중(重)하게 하여야 할 때에 중하게 하고 마땅히 가볍게 하여야 할 때에 가볍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절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마땅히 나와야 할 때에 나오지 않고, 마땅히 나오지 말아야 할 때에 나오며, 마땅히 멈추어야 할 때에 멈추지 않고 마땅히 멈추지 말아야 할 때에 멈추며, 마땅히 중하게 하여야 할 때에 중하게 하지 않고 마땅히 중하게 하지 말아야 할 때에 중하게 하며, 마땅히 가볍게 하여야 할 때에 가볍게 하지 않고 마땅히 가볍게 하지 말아야 할 때에 가볍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땅히 나와야 할 때에 나오지 않고 마땅히 멈추지 말아야 할 때에 멈추며, 마땅히 중하게 하여야 할 때에 중하게 하지 않고 마땅히 가볍게 하지 말아야 할 때에 가볍게 하는 것은 도에 미치지 못하는 자이다. 그리고 마땅히 나오지 말아야 할 때에 나오고 마땅히 멈추어야 할 때에 멈추지 않고, 마땅히 중하게 하지 말아야 할 때에 중하게 하고 마땅히 가볍게 하여야 할 때에 가볍게 하지 않는 것은 도에 지나친 자이니,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은 똑같이 중(中)을 잃음이 된다. 중을 잃음은 그 도를 잃은 것이니, 그렇다면 도를 얻고 잃음은 다만 칠정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도는 언(言)·행(行)과 사업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우리 인간의 사업은 언·행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음이 없고 언·행은 칠정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그 기틀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도는 곧 이치인데, 고유(固有)하다 하여 이치라 이르고 떳떳이 행한다 하여 도(道)라 이르고 물건에 있다 하여 성(性)이라 이르고 일에 있다 하여 의(義)라 이르고 지극히 중정(中正)하고 지극히 마땅하고 지극히 선(善)하다 하여 태극(太極)이라 이른다. 그 가리키는 바에 따라 명목을 달리하나 한 가지 명목을 들면 나머지는 모두 그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이제 도라고 말하면 이른바 이치와 성(性)과 의(義)와 태극이란 것이 하나일 뿐이다. 통합하여 말하면 천지와 만물의 이치가 한 태극이 합한 것이요, 나누어 말하면 천지와 만물이 각기 한 태극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진실로 이 태극의 밖에 벗어난 것이 있지 않은데 도를 어기는 자가 많음은 어째서인가? 도는 하나일 뿐이니,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나 오직 중(中)을 얻은 자가 드물기 때문에 도를 어기는 자가 많은 것이다. 중은 별다른 것이 없고 하나의 십분 합당하고 좋은 것이면 바로 중이니, 지나쳐서 올라감도 중이 아니요 미치지 못하여 내려감도 중이 아니며, 앞으로 쏠리고 뒤로 쏠리며 오른쪽에 치우치고 왼쪽에 치우침도 모두 중이 아니다. 중이 아니면 당연한 법칙이 아니고 일정한 이치가 아니어서 행할 수 없으니, 행할 수 없는 것을 과연 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중은 전체(全體)의 중이 있고 일단(一端)의 중이 있으니, 일단의 중은 일[事]을 가지고 말하며 전체의 중은 사람을 가지고 말한다. 일단의 중은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때로 얻을 수 있으나 전체의 중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얻지 못한다. 전체의 중을 얻은 자는 일단의 중을 잃는 경우가 없으나 일단의 중을 얻은 자는 반드시 전체의 중을 온전히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단의 중을 쌓은 뒤에야 전체의 중을 이룰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일단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응하는 것은 모두가 일이고 무릇 접하는 것은 모두가 물건이며 무릇 처하는 것은 모두가 지위이고 무릇 만나는 것은 모두가 때인데, 의리의 만나는 바로 말미암아 일에 따라 물건에 따라 지위에 따라 때에 따라 대처하는 도리가 각기 다르다. 저쪽에 마땅한 것이 때로는 혹 이쪽에 마땅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이쪽에 마땅한 것이 때로는 혹 저쪽에 마땅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앞에 마땅한 것이 혹 뒤에 마땅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뒤에 마땅한 것이 혹 앞에 마땅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일이 혹 같더라도 내가 응하여야 할 의(義)가 혹 같지 않으며, 물건이 혹 같더라도 내가 접하여야 할 예(禮)가 혹 같지 않으니, 이는 때에 따라 지위에 따라 똑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응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만나는 일이 똑같지 않으면 일에 응하는 의가 다르지 않을 수 없으며, 접하는 것은 모두 나 자신이지만 만나는 물건이 똑같지 않으면 물건을 접하는 예가 다르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일에 따라 물건에 따라 똑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일단의 중이다. 전체의 중으로 말하면 바로 천지의 중간에 서서 우리 인간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다. 오상의 성(性)을 순히 하고 칠정의 정(情)을 바루며, 육예(六藝)를 통달하고 오륜(五倫)을 돈독히 하여, 마음으로부터 몸에 이르고 몸으로부터 집안에 이르고 또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러 천지에 참여하고 고금을 관통하니, 이것이 성인(聖人)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체 이와 반대로 하여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도를 행한다고 하나 올바른 도가 아닌 것은 바로 하우(下愚)와 이단(異端)이 그것이다. 저 이단과 하우 역시 어찌 성(性) 밖의 사람이겠는가. 처음에는 칠정의 중을 잃음에 불과하였는데, 하우가 되고 이단이 되어 끝내는 천지 사이의 큰 적(賊)이 됨에 이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성인(聖人)으로 말하면 태어날 때에 중화(中和)의 기운을 얻었기 때문에 성(性)이 발하여 칠정이 되는 것이 저절로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 영달하여 윗자리에 있으면 권도(權度 저울과 자로, 지식을 뜻함)가 이미 확립되어 두 끝을 잡아 백성들에게 중(中)을 쓰며, 곤궁하여 아래에 있으면 중용(中庸)을 따라 세상에 은둔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는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는 도이다. 현인(賢人)은 성인의 중을 배우는 자이고 중인(衆人)은 오직 그 윗자리에 있는 자가 인도함에 달려 있을 뿐이며, 하우(下愚)로 말하면 받은 바의 기질이 지극히 탁(濁)하고 지극히 잡박(雜駁)한 자이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됨은 비록 일곱 가지에 벗어나지 않으나 강(剛)한 자는 괴려(乖戾)하고 전도(顚倒)되어 거꾸로 행하고 역(逆)으로 나와 발하지 않아야 할 때에 발하고 중하게 하지 말아야 할 때에 중하게 하여 항상 중에 지나치며, 유(柔)한 자는 혼추(昏墜)하고 황란(荒亂)하며 어둡고 깨달음이 없어 발하여야 할 때에 발하지 않고 중하게 하여야 할 때에 중하게 하지 아니하여 항상 중에 미치지 못한다. 당연(當然)한 법칙과 평상(平常)의 이치를 굳이 말할 것이 없으니, 도에 있어 거리가 멀지 않겠는가.
이단으로 말하면 또 괴려(乖戾)한 기운을 받은 자이다. 또한 오성을 본성으로 삼지 않은 것도 아니고 칠정을 정으로 삼지 않은 것도 아니나 그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은벽(隱僻)함과 궤이(詭異)함과 사위(邪僞)이며,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는 것이 중정(中正)과 예법(禮法)과 평상(平常)이다. 인(仁)인 것 같으면서 인을 해치고 의(義)인 것 같으면서 의를 해치며 지(智)와 비슷하나 지가 아니고 신(信)과 비슷하나 신이 아니니, 또 어찌 모임을 아름답게 하는 예(禮)를 알겠는가.
그 병통의 근원을 연구해보면 하우와 이단은 모두 칠정의 욕(欲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정에 욕망이 있는 것이 처음에야 어찌 이치가 아니겠는가. 욕망이 없으면 사람 또한 나무나 돌과 다름이 없다. 사람은 천지가 물건을 낳는 마음을 얻어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에 태어난 이치가 발동하여 마침내 성(性)의 욕망이 되니, 한 몸의 식색(食色)과 의복(衣服)으로부터 천하의 일과 천하의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에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법칙을 이루고 이치를 다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이 욕망의 일이 아니겠는가. 욕망이 절도에 맞으면 도의 큰 단서가 되니, 어찌 도의 병통이 되겠는가.
저 하우들은 욕망을 내지 말아야 할 때에 욕망을 내고, 또 함부로 행하고 망녕되이 쓰기 때문에 천리(天理)를 상실함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으며, 혹원문 2자 빠짐게으르고 후퇴하여 자포자기하는 것을 달게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굳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단이 된 자들은 욕망하는 것이 성현의 위로 높이 솟아 이륜(彛倫)의 직분을 천하게 버린다. 그리하여 허무한 것을 지극히 귀한 것으로 여기고 적멸(寂滅)한 것을 지극한 낙으로 삼아, 오직 은벽(隱僻)한 것을 찾고 오직 궤이(詭異)한 것을 행한다. 그리하여 다만 스스로 인간의 이치를 끊고 성현의 가르침을원문 빠짐하여 천지의 도를 해치는 자이니, 큰 적(賊)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또한 욕망을 잘못 내고 정을 거슬려 이에 이른 것이다. 그 차이는 털끝만하나 그 오류는 어찌 천리(千里)일 뿐이겠는가. 이는 곧 하늘과 땅의 차이이고 유(幽)·명(明)의 간격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中)을 잃고 도(道)를 떠남이 마침내 이와 같으니, 내가 중을 도의 표준으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극하다, 중이여! 이치의 극치이고 의리의 극진함이고 성(性)의 떳떳함이고 정(情)의 법이니, 곧 이것이 도이다. 이로써 사물을 통달하고 이로써 천지를 통하고 이로써 고금을 한결같이 할 수 있으니, 앞서 천고의 옛 성인과 억만년 뒤의 성인이 이 밖에 딴 도가 없다. 요(堯)·순(舜)과 우(禹) 임금이 서로 전한 것이 이 중(中)일 뿐이니, 어찌 백왕(百王 백대(百代)의 제왕(帝王))의 표준이 아니겠는가.
중의 이치가 이러하나 이치에 밝지 못하면 중을 알기 어렵고, 덕(德)에 나아가지 않으면 중을 잡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요(姚)·사(姒)의 유정(惟精)·유일(惟一)과 공자(孔子)의 박문(博文)·약례(約禮)와 증씨(曾氏)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과 자사(子思)의 명선(明善)·성신(誠身)이 바로 그 방법이다.

덕(德)은 선(善)을 소유함을 이른다.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하늘에서 받아 자신의 본성으로 삼으면 이것을 명덕(明德)이라 이르고, 이 성(性)을 밝혀 온전히 다하면 대덕(大德)이라 이르고 다하여 더할 수 없으면 지덕(至德)이라 이르며,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실의 선(善)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덕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덕은 크고 작음과 높고 낮음이 있으니, 만일 총명(聰明)하고 예지(叡智)하여 성(誠)으로부터 밝아지는 성인(聖人)이 아니면 모름지기 닦은 뒤에야 이루어지는바, 닦는 것은 반드시 작은 데에서부터 큰 데에 이르고 낮은 데에서부터 높은 데에 이르러야 한다.
덕에 들어간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요 덕에 나아간다는 것은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것이니, 들어가고 나아감이 모두 닦는 자의 일인데, 혹은 공부의 절목(節目)을 말하고 혹은 차례의 등급(等級)을 말한다. 그러나 그 실제를 구명해 보면 경(敬)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경은 성인(聖人)을 만드는 기본으로 시작을 이루고 끝을 이루는 큰 방법이다.
항상 진수(進修)에 방해되고 심신(心身)의 병통이 되는 것은 모두 태타(怠惰)하고 해이(解弛)하며 방사(放肆)하고 횡분(橫奔 제멋대로 달림)하는 폐단이다. 경(敬)은 일체 마음과 몸을 수속(收束 거두어 검속함)하는 것이니, 마음과 몸이 과연 수속하는 가운데에 있으면 천 가지 사악함이 물러가 복종하고 만 가지 선(善)이 드러나게 된다. 무릇 태타하고 해이하며 방사하고 횡분한다는 것이 어찌 다시 병통이 될 수 있겠는가.
밖이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하며 안이 허명(虛明)하고 정일(靜一)하게 하는 것이 수속의 실제이다. 광대(光大)하고 관화(寬和)하여 살려는 뜻이 활발하여 인(仁)의 덕이 확립되며, 안의 마음이 이미 정직해지고 밖의 일이 저절로 방정하여 의(義)의 덕이 확립되며, 거두고 억제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겸손하고 공손하여 예(禮)의 덕이 확립되며, 청명(淸明)하고 통철(洞徹)하여 은미한 것을 밝게 비추어 지(智)의 덕이 확립되며, 하나를 주장하여 딴 데로 가지 않고 시종 간격이 없어 신(信)의 덕이 확립되니, 이렇게 되면 다섯 가지의 덕이 확립되어 말은 사물에 징험되고 행실은 떳떳함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일을 처리함에 상세하고 사물을 접함에 공손하고 윗자리에 있으면 겸손하고 아랫자리에 있으면 순하여, 억지로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 법칙이 있다.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여 천지가 편안하고 만물이 길러지는 사업도 이로써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경(敬)의 지극한 공부가 아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경(敬)의 덕의 실제가 이와 같은데도 오상(五常)의 성(性)의 조목에 나열되어 있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이미 오상의 성에 나열되어 있지 않는다면 다만 사람이 스스로 행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경은 비록 우리 인간이 스스로 행한 뒤에야 될 수 있는 것이나 실제는 이치에 원래부터 저절로 있는 것이다. 참되어 망녕됨이 없고 바루어 간사함이 없고 한결같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고 항상 있으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이 이치가 아니겠는가. 경은 스스로 이 이치를 보존하는 것일 뿐이요 별도로 딴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성(五性)은 이치의 가운데에 나아가 그 맥락을 나눈 것이니, 정(情)의 사랑함을 통하여 이치가 인(仁)이 됨을 알고, 정의 마땅함을 통하여 이치가 의(義)가 됨을 알고, 정의 사양함을 통하여 이치가 예(禮)가 됨을 알고, 정의 분별함을 통하여 이치가 지(智)가 됨을 알고, 정의 진실함을 통하여 이치가 신(信)이 됨을 아는 것이다. 신(信)은 또한 별도로 맥락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여 인·의·예·지 네 가지 성(性)에 부쳐 있다.
그리고 경(敬) 또한 별도로 맥락이 되지는 않으나 오성이 덕이 되는 것은 실로 이 경으로 말미암아 득력(得力)하니, 그렇다면 신(信)에 가깝다 할 것이다. 다만 신(信)의 덕은 진실함일 뿐이요 경(敬)의 덕은 진실함에 그치지 아니하여 마침내 고명(高明)하고 엄정(嚴正)한 뜻이 있으니, 이 어찌 이치의 자연함이 아니겠는가.”


이치가 이치가 됨은 진실함일 뿐이다. 하늘이 된 진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 하늘이 있고, 땅이 된 진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 땅이 있고,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된 진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 사람과 물건이 있는 것이다.
하늘은 진실한 이치를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기운이 아래로 내려와 땅에 붙어 있고 땅은 진실한 이치를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사귀니, 하늘과 땅의 도는 한 지성(至誠 지극히 성실함)일 뿐이다. 그러므로 조화가 만물을 내는 이치가 넓고 크고 두루 미쳐 비록 지극히 작고 지극히 세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낳고 낳고 변화하고 변화해서 각기 본성을 소유하고 각각 행해야 할 도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쉬지 아니하여 간격이 없기 때문에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은 계속하여 오늘이 어제와 같아 날이 쌓여 달이 되고, 다음 달이 지난달과 같아 달이 쌓여 해가 되며, 올해가 지난해와 같아 만고(萬古)를 지나도 항상 그러한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항상 있고, 산악(山嶽)과 강하(江河)는 땅에 항상 있으며, 초목과 모든 생물은 하늘과 땅 두 사이에 항상 있으니, 이는 어찌하여 그러한가? 성실함의 작용에 불과할 뿐이다. 진실로 성실함이 있은 뒤에야 물건이 있기 때문에 ‘성실하지 않으면 물건이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조그마한 몸으로 만물의 사이에 위치하여 천지와 더불어 유통(流通)하고 만물과 더불어 발육(發育)하며 귀신과 더불어 감통(感通)하니, 이것은 어째서인가? 이 또한 성실함 때문이다.
성실함을 간직한 곳은 어디인가? 곧 이 방촌(方寸 사방(四方)한 치)의 마음이니, 만일 하나의 성실함이 아니면 어떻게 일개 방촌의 지각(知覺)을 가지고 우주 사이의 사업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면 다만 사람의 뱃속에 들어 있는 방촌의 한 장부(臟腑)가 될 뿐이니,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실함을 귀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한 몸으로 만 가지 몸을 통하고 한 물건으로 만 가지 물건을 통하고 한 세상으로 만고의 세상을 통하여, 만고의 아래에서 만고의 위를 통하고 억 년의 앞에 있으면서 억 년의 뒤를 밝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커도 이르지 못함이 없고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못함이 없고 아무리 높아도 도달하지 못함이 없고 아무리 깊어도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며, 또한 가깝고 작고 낮고 천하다 하여 소홀히 하여 버리지 않는다. 이치가 있는 곳에는 성실함이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치는 진실로 일마다 없는 것이 없고 물건마다 없는 데가 없고 자리마다 없는 곳이 없고 때마다 없을 때가 없다. 이 성실함이 어찌 통하지 못하는 데가 있겠는가.
이른바 성실함이란 어떠한 물건인가? 이치를 말하는가, 도를 말하는가, 덕을 말하는가? 이는 모두가 마음인데 마음이 혹 성실하고 성실하지 못함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성실함은 진실함일 뿐이다. 이치가 진실하기 때문에 도가 되고 도가 진실하기 때문에 덕이 되는데, 이 마음은 지각(知覺)이 내 몸에 있어 이 이치를 주관하고 이 도를 내고 이 덕을 만드는 것이다. 마음은 사람에게 있어 각자 한 몸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마음을 성실하게 하면 도가 되고 덕이 되어 성실함이 되고, 사람이 자기 마음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면 도를 하지 못하고 덕을 하지 못하여 성실하지 못함이 되니, 성실함과 성실하지 못함은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성인(聖人)은 하늘과 땅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저절로 성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순순(肫肫)한 그 인(仁)이며 연연(淵淵)한 그 못이며 호호(浩浩)한 그 하늘이어서 천하의 대경(大經)을 경륜(經綸)하고 천하의 대본(大本)을 세우고 천지의 화육(化育)을 알아, 자신의 본성을 다하고 남의 본성을 다하고 물건의 본성을 다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와 천지와 참여한다.”는 것이다. 현인(賢人)은 성실히 할 것을 생각하여 성실히 하는 공부를 힘쓰는 자이고, 중인(衆人)은 성실한 이치를 알지 못하여 무무(貿貿 어두운 모양)함에 맡기는 자이다.
진실한 이치는 속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 마음을 완전히 거짓에 내맡기는 자는 응할 리가 없으나 혹 일분(一分)의 성실함이 있으면 반드시 일분의 응함이 있으니, 하물며 지극히 성실하여 그침이 없는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금석(金石)을 뚫고 다른 종류를 감동시키며 천지를 동하고 귀신을 이르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동포(同胞)와 동기간과 마음을 같이 하는 사이에 있어서이겠는가.
공손하고 겸양하여 백성들이 크게 변하여 화한 것은 대요(大堯)의 성실함이요, 요(堯) 임금을 이어 소(韶)라는 음악을 연주하자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봉황이 와서 춤춘 것은 대순(大舜)의 성실함이요, 우왕(禹王)과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을 겸할 것을 생각하여 깨달음이 있으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그대로 시행하여 하늘에는 사나운 바람이 없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일지 않은 것은 주공(周公)의 성실함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응함이 온 천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성실함도 별도로 딴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치를 다함에 불과할 뿐인데, 그 이치는 곧 사람들이 함께 소유하고 있는 이치이니, 그렇다면 성인이 어찌 딴 성실함이 있겠는가. 다만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한시도 간단(間斷)함이 없어 전체의 성실함이 될 뿐이다.
사람이 만약 성실히 할 것을 생각하여 성실히 하는 공부를 지극히 할 경우 그 처음은 비록 한쪽의 성실함을 따라 지극히 하나 지극히 하여 쌓고 또 쌓아 전체의 성실함이 된다면 또한 성인과 더불어 형(形)·저(著)·명(明)·동(動)·변(變)·화(化)의 공용(功用)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법(心法)의 중요함이 어찌 이 성실함에서 벗어나겠는가.
성실함을 세우는 요점은 모름지기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선(善)을 알면 반드시 행하고 악(惡)을 알면 반드시 제거함을 이른다. 혹시라도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인 줄을 알면서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미 먼저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 끝내는 반드시 남을 속이게 되니, 어찌 경계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성실함은 하늘의 도이고 성인의 도이니,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진실한 이치를 잃게 되어 부모와 형제와 처자들에게도 도(道)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그 밖의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학문은 이 마음을 거두어 다스려 이 도(道)를 강명(講明)하고 이 덕(德)을 진수(進修)하고 이 성(性)을 온전히 다하는 것이다. 생각은 곧 지각(知覺)이 동한 것이요 의리의 실마리인바, 사방(四方)과 상하(上下)와 시종(始終)을 미루어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한 뒤에야 사람이 이 몸이 있으면 반드시 이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성이 있고, 이 성이 있으면 반드시 이도가 있고, 이 도가 있으면 반드시 이 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덕(德)을 진수하지 않으면 안 됨을 알아 진수할 것을 생각하고 이 도(道)를 강명하지 않으면 안 됨을 알아 강명할 것을 생각하고 이 마음을 거두어 다스려 이 성(性)을 온전히 다할 것을 생각하여, 힘써 공부하여 현인(賢人)이 되고 성인(聖人)이 됨에 이르는 것도 모두 이 생각이 기관(機關)이 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성인(聖人)으로 말하면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음에 이르러서 생각하지 않고도 저절로 아니, 진실로 생각을 지극히 하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성인 이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 도(道)는 지극히 작은 데에서부터 지극히 큰 데에 이르고 지극히 낮은 데에서부터 지극히 높은 데에 이르고 지극히 얕은 데에서부터 지극히 깊은 데에 이르고 지극히 가까운 데에서부터 지극히 먼 데에 이르러 그 일이 만 가지 단서인데 단서에 따라 응함이 다르고, 그 물건이 만 가지 형체인데 형체에 따라 분수가 다르고, 그 기틀이 만 가지로 변화하는데 변화에 따라 재성(裁成)함이 다르다. 때가 한결같지 아니하여 때에 따라 다르고 지위가 똑같지 아니하여 지위에 따라 분별되어, 그 체(體)가 지극히 은미하고 그 용(用)이 지극히 넓어, 이것을 풀어 놓으면 육합(六合)에 가득 차고 거두면 물러나 은밀한 데에 감춰지니, 이 어찌 생각하지 않고서 그 요점을 알 수 있겠는가.
또 도는 《서경(書經)》에 이른바 ‘그 중(中)’이라는 것이요, 《주역(周易)》에 이른바 ‘경(敬)과 의(義)와 전례(典禮 떳떳한 예)’라는 것이요, 《시경(詩經)》에 이른바 ‘사물과 법칙’이라는 것이요, 《대학(大學)》에 이른바 ‘지선(至善)’이라는 것이요, 주자(朱子)의 이른바 ‘사물의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다.
왼쪽으로 치우치거나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모두 도가 아니며, 앞으로 기울어지거나 뒤로 기우는 것도 모두 도가 아니며, 과(過)함도 도가 아니요 불급(不及)함도 도가 아니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금방 앞에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 있으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권도(權度)의 정(精)함을 알 수 있겠는가.
지극하다, 생각함이여! 안이 없는 작은 것을 살피고 밖이 없는 큰 것을 지극히 할 수 있으며, 견줄 수 없는 작은 것을 환히 비추고 끝이 없는 먼 곳에 도달하고 측량할 수 없는 깊은 것을 헤아리며, 무궁무진한 변화를 알고 드러나지 않는 은미함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천지의 귀신과 고금의 사물을 통하지 않음이 없고 포함하지 않음이 없고 다 알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안목(眼目)이 통달하고 심지(心地)가 밝아지고 보무(步武 조예를 가리킴)가 높아지고 덕업(德業)이 성해지는 것은 실로 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학》의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중용(中庸)》의 삼덕(三德)과 구경(九經)이 어느 것인들 이 생각을 지극히 함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생각함이 있은 뒤에야 앎이 있고, 앎이 있은 뒤에야 행함이 있을 수 있으니, 도덕과 사업의 기틀이 모두 생각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배움의 요점으로 삼는 것이 과연 그 진실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은 마음을 운용하고 이치를 미루어 나간다. 무릇 우주 사이의 모든 사물은 이치 아닌 것이 없으니, 내 마음 또한 이치이다. 그런데 오직 사람만이 이 마음을 밝히고 이 마음을 운용할 수 있으니, 이 마음의 이치를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미루어 나간다면 어찌 내 마음이 간직하고 있는 떳떳한 성품에서 벗어나겠는가.
이 생각이 통하는 것을 진실로 다할 수 없는데, 생각하는 공부는 실로 구사(九思)로부터 시작된다. 만약 구사가 각각 그 법칙에 맞는다면 높고 깊고 멀고 큰 이치가 또한 당연(當然)과 소이연(所以然)의 떳떳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다.
또한 이른바 ‘간사한 생각’이라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본래 활물(活物 활동하는 물건)이다. 무릇 이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그 누구인들 생각함이 없겠는가. 다만 간사하고 바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 이루어지는 바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별이 없지 못하니, 이는 또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시라도 생각하는 바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어서, 생각함이 낮은 자는 물욕(物欲)에 구애되어 생각이 항상 음식과 여색과 권세와 이익의 사이에 있고, 생각함이 높은 자는 은벽(隱僻)함을 추구하여 생각이 반드시 허원(虛遠)하고 괴이(怪異)한 경지에 있을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청(淸)과 탁(濁)이 비록 다르나 모두가 간사한 생각이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치에 크게 어긋나고 도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다.
비부(鄙夫)가 되고 이단(異端)이 되어 끝내는 천하의 악(惡)이 자신에게 돌아옴을 면치 못하여 성인(聖人)에게 죄를 짓는 것도 모두 생각의 간사함에서 나오니, 두려워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두려워할 만하고 경계할 만함을 알아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은 단지 생각이 처음 동할 때에 성찰(省察)함에 달려 있으니, 여기에 나아가 자신이 생각한 것이 과연 의리의 올바름에서 나온 것인가, 혹은 사욕의 간사함에서 제멋대로 나온 것인가를 살펴본다. 본연(本然)의 권도(權度)를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이것을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한 것이 과연 바른 것이면 이것을 넓히고 채워 모름지기 지선(至善)을 지극히 한 뒤에 그만두고, 생각한 것이 혹 간사한 것이면 이것을 막고 저지하여 반드시 뿌리를 뽑고난 뒤에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분하는 것 또한 모두가 생각이니, 생각함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사(子思)는 몸을 성실히 하는 공부를 말씀하면서 생각을 삼가는 것을 박학(博學)·심문(審問)의 뒤, 명변(明辨)·독행(篤行)의 앞에 두었으니, 반드시 배우고 물어서 그 의리를 넓게 안 뒤에야 생각을 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함이 아무리 올바르더라도 또 모름지기 밝게 분변하고 독실히 행한 뒤에야 생각하여 얻은 것이 나의 소유가 되어 몸과 마음이 성실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작과 끝을 연구하여 말한다면 경(敬)에 거하는 것이 어찌 이 성공하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주D-001]요(姚)·사(姒)의……명선(明善)·성신(誠身) : 요(姚)는 순제(舜帝)의 성(姓)이고 사(姒)는 우왕(禹王)의 성으로 곧 순제와 우왕을 가리킨다. 유정(惟精)은 옳고 그름을 정밀하게 구별하는 것이고 유일(惟一)은 한결같이 행함을 이르는바,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인심과 도심을 정하게 구별하고 한결같이 행하여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박문(博文)은 글을 널리 배우는 것이고 약례(約禮)는 몸을 예로 묶는 것으로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글을 널리 배우고 몸을 예로 묶으면 도(道)를 위배하지 않을 것이다.[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하였다. 증씨(曾氏)는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을 가리킨다.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이며, 성의(誠意)는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이고 정심(正心)은 마음을 바루는 것인데 이 내용은 《대학》에 보이는바, 주자(朱子)는 《대학》을 증삼의 저서로 추정하였다. 명선(明善)은 선을 밝게 아는 것이고 성신(誠身)은 몸을 성실히 하는 것인바, 《중용》에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히 하지 못한다.[不明乎善 不誠其身]”는 말을 역으로 인용한 것으로, 주자는 《중용》을 자사(子思)의 저서로 추정하였다. 위의 유정과 박문·격물·치지·명선은 지공부(知工夫)로 중(中)을 아는 것이고, 유일과 약례·성의·정심·성신은 행공부(行工夫)로 중을 잡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주D-002]성(誠)으로부터 밝아지는 성인(聖人) : 《중용》에 “성으로부터 밝아짐을 성(性)이라 하고 밝음으로부터 성해짐을 교(敎)라 한다.[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하였는바, 성(誠)은 성실히 하는 것으로 행(行)에 해당하고 밝음[明]은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 지(知)에 해당하며, 성(性)은 배우지 않고 본성대로 하는 것으로 성인을 이르고, 교(敎)는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선행을 하는 현인을 이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주D-003]순순(肫肫)한……참여한다 : 모두 《중용》에 보이는 내용으로 순순은 간절하고 지극한 모양이고, 연연(淵淵)은 깊은 모양이며, 호호(浩浩)는 넓고 큰 모양이다. 대경(大經)은 큰 법으로 오륜(五倫)을 가리키고 대본(大本)은 큰 근본으로 오성(五性)을 가리키며, 화육(化育)은 천지의 조화로 만물을 길러줌을 이른다.
[주D-004]형(形)·저(著)·명(明)·동(動)·변(變)·화(化)의 공용(功用) : 형은 가운데에 쌓여 밖에 나타나는 것이고 저는 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명(明)은 또 빛남이 있는 것이며, 동(動)은 물건을 감동시키는 것이고 변(變)은 물건이 따라서 변하는 것이고 화(化)는 그 까닭을 모르면서 이렇게 변화함을 이르며 공용은 공효(功效)와 같은 말이다. 《중용》에 “한쪽을 지극히 하면 성실할 수 있으니, 성실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할수 있다.[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하였다.
[주D-005]사물과 법칙 : 사물의 당연한 법칙으로 사물은 부자(父子)·군신(君臣) 등을 가리키며 법칙은 부자간에 친하고 군신간에 의로운 것 등을 가리키는바,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으시니, 사물이 있으면 그에 따른 법칙이 있다.[天生烝民 有物有則]” 하였다.
[주D-006]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 삼강령은 세 가지 강령으로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 지선에 머무는 것[止於至善]을 가리키며, 팔조목(八條目)은 여덟 가지 조목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格物],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致知],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루는 것[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平天下]을 이른다.
[주D-007]삼덕(三德)과 구경(九經) : 삼덕은 삼달덕(三達德)을 줄여서 쓴 것으로 사람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덕을 가리키는바, 곧 지(智)·인(仁)·용(勇)을 이른다. 구경은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법칙으로, 여헌속집 제2권 소(疏) “의소(擬疏)”에 나오는 ‘《중용(中庸)》의 구경(九經)’ 주에 보인다.
[주D-008]구사(九思) : 아홉 가지 생각으로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군자가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으니, 볼 때에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에는 귀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성실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공경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하고, 분노가 치밀 때에는 뒤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얻는 것을 보게 되면 의리를 생각한다.” 하였다.

여헌선생속집 제5권_

잡저(雜著)_

 

덧붙여 말함6개 조항

 

이치는 체단(體段 형체)으로 견줄 수 없는 것이 15가지가 있다. 오직 한 이치는 그 묘함이 지극히 구비되어 있으니, 한 말과 한 글자로 지극히 구비된 그 묘함을 다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반드시 이 15자(字)의 뜻을 모은 뒤에야 거의 묘함을 다할 수 있으니, 무릇 이 15자는 한 글자도 가감(加減)할 수가 없다.15자의 조목은 경위설(經緯說)에 보인다.

기(氣)가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무궁한 기가 될 수 있으며, 명(命)이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그치지 않는 명이 될 수 있으며, 성(性)이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만 가지원문 빠짐성이 될 수 있으며, 심(心)이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지각(知覺)의 마음이 될 수 있으며, 인(仁)이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온갖 선(善)의 으뜸이 될 수 있으며, 의(義)가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여러 물건의 만 가지가 될 수 있으며, 공(功)이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함이 있는 부지런함이 될 수 있겠으며, 업(業)이 이 이치가 아니면 어찌 생성(生成)하는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치에 기(氣)가 있음은 나라에 도성(都城)이 있고 사람에게 집이 있는 것과 같아 붙여 살아 편안히 머물 수 있으며, 기물(器物)과 기계(機械)가 있는 것과 같아 만물을 조화할 수 있으며, 사환(使喚)과 같아 힘을 다해 사무에 응할 수 있다. 또한 기능과 같아 형형색색의 정(精)하고 거칠고 크고 작은 것이 구비되지 않은 바가 없으며, 재화(財貨)와 같아 써도 다하지 않고 생산함이 무궁하며, 타고 싣는 수레와 같아 먼 곳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고 곳곳마다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해와 달과 별이 태허(太虛)에 있는 것과 같고 산악(山嶽)과 강하(江河)가 땅에 있는 것과 같고 풀과 나무가 흙에 있는 것과 같고 나는 새가 바람을 타는 것과 같고 물고기류가 물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양(陽)을 먼저 말하는 것은 양(陽)이 주(主)가 되고 음(陰)이 보좌가 되기 때문이니, 일(一)과 이(二)는 수(數)로 말한 것이요, 전체와 반은 체(體)로 말한 것이요, 동(動)과 정(靜)은 성(性)으로 말한 것이요, 건(健)과 순(順)은 덕(德)으로 말한 것이요, 강(剛)과 유(柔)는 본질로 말한 것이요, 상(上)과 하(下)는 위치로 말한 것이요, 청(淸)과 탁(濁)은 기운으로 말한 것이요, 명(明)과 암(暗)은 상(象)으로 말한 것이요, 가득함과 빔은 내용으로 말한 것이요, 올라감과 내려옴은 변화로 말한 것이요, 낮과 밤은 날로 말한 것이요, 선(善)과 악(惡)은 종류로 말한 것이요, 숙(淑 좋음)과 특(慝 나쁨)은 징험으로 말한 것이요, 남음과 부족함은 씀으로 말한 것이요, 전(前)과 후(後)는 경(經)으로 말한 것이요, 좌(左)와 우(右)는 자리로 말한 것이요, 남(男)과 여(女), 부(夫)와 부(婦)는 인간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음(陰)을 먼저 말하는 것은 음이 어머니가 되고 양이 자식이 되기 때문이니, 합(闔 닫힘)과 벽(闢 열림)은 기틀로 말한 것이요, 모음과 흩트림은 공(功)으로 말한 것이요, 굴(屈)과 신(伸)은 정(情)으로 말한 것이요, 왕(往)과 내(來)는 운행(運行)으로 말한 것이요, 추위와 더위는 철로 말한 것이요, 그믐과 초하루는 달로 말한 것이요, 허(虛)와 실(實)은 도(道)로 말한 것이요, 빈(牝)과 무(牡), 자(雌)와 웅(雄)은 물건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본첩(本帖)에 기재한바, 출(出)과 입(入)은 형세로 말한 것이요, 부(浮)와 침(沈)은 또한기(氣)로 말한 것이요, 편벽됨과 바름은 또한 도(道)로 말한 것이요, 순(順)과 역(逆)은 또한 성(性)으로 말한 것이요, 후(厚)와 박(薄)은 또한 덕(德)으로 말한 것이요, 귀(貴)와 천(賤)은 또한 분수로 말한 것이요, 통함과 막힘은 또한 도(道)로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말세(末世)의 재앙은 그 나옴이 무상(無常)하므로 굳이 놀랄 것이 없으며, 물건에 나타나는 변이(變異)도 각기 그 물건에 따르고 인간과 상관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는 모두 무식한 말이다. 옛날과 지금이 똑같은 이치이고 물건과 내가 한 도이니, 천하에 어찌 선행(善行)이 없는 복이 있고 악행(惡行)이 없는 화가 있겠는가. 선을 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화를 받는바, 이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치가 반드시 그러하니, 어찌 홀로 말세의 재앙만은 불러옴이 없겠는가.
물건은 정(情)이 없고 사람은 정이 있으니, 정이 없는 물건의 응함은 반드시 정이 있는 인간에게서 말미암는다. 어찌 정이 없는 물건이라고 핑계하여 정이 있는 인간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귀와 눈이 없어 보고 듣지 못하며, 만물은 각각 형질(形質)을 간직하고 있어 천지와 만물이 각자 천지와 만물이 되었으니, 우리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공자(孔子)께서 어찌 “선한 말을 내면 천리 밖에서 호응하고 나쁜 말을 내면 천리 밖에서 어기니, 말과 행실은 군자(君子)의 추기(樞機)이다. 추기의 발로는 영(榮)·욕(辱)의 주(主)가 되니, 말과 행실은 군자가 천지를 동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러하니 사람이 진실로 천지 만물과 서로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과 행실은 성인(聖人)이 다만 사람들이 함께 듣고 함께 보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셨을 뿐이다. 사려(思慮)와 정의(情意)가 일어나는 것은 다만 방촌(方寸)의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천지와 귀신이 모두 알고 있다. 그 도리가 서로 통하여 간격이 없어서 굳이 귀와 눈으로 보고 듣거나 형질이 똑같지 않고도 그러하니, 이는 상(上)·하(下)와 피(彼)·차(此)에 한 도리가 유통(流通)하기 때문이다.

여헌선생속집 제5권_

잡저(雜著)_

 

우리 인간이 항상 접하는 것

 

우리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하여 하늘과 땅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지 않음이 없으며, 사람과 물건 가운데에 처하여 사람과 물건을 이웃하고 대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바로 한 세상에 태어난 자가 항상 접하는 것이다.
고명(高明)하여 위에 있는 것은 하늘이고 박후(博厚)하여 아래에 있는 것은 땅이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중간에 서 있는 것은 사람이며 혈(血)·기(氣)를 얻어 머리를 가로로 하고 날고 달리는 것은 동물이며 흙에 뿌리를 박고 싹이 터서 온갖 초목이 되는 것은 식물이니, 이는 곧 하늘과 땅, 사람과 물건의 형상(形像)이다.
지극히 굳세고 항상 평이해서 자뢰하여 품휘(品彙 만물)를 시작하게 하는 것은 하늘이고, 지극히 순하고 항상 간략해서 자뢰하여 만물을 낳게 하는 것은 땅이며, 본성을 다하여 천명에 이르러 자신을 이루고 남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고, 낳고 이룸을 때에 따라 순히 이루어 조화로 돌아가는 것은 물건이니, 이는 곧 하늘과 땅, 사람과 물건의 성정(性情)이다.
아, 심원(深遠)한 이치가 그치지 아니하여 각각 성정을 바루어 보전하게 하는 것은 하늘이고, 잡아 주고 실어 주어 하늘을 받들어서 함홍(含弘)하고 광대(光大)하여 모두 형통하게 하는 것은 땅이며, 천지의 조화에 참여하여 도와서 천지를 편안하게 하고 만물을 길러 옛 성인을 잇고 후학을 열어주는 것은 사람이고, 재목을 제공하고 쓰임을 이루어 때에 따라 이용하게 하는 것은 물건이니, 이는 곧 하늘과 땅, 사람과 물건의 사업이다. 그 누가 이것을 보지 못하겠는가.
하늘에 상(象)을 이룬 것은 해와 달과 별이요, 땅에 법(法)을 나타낸 것은 산악과 천독(川瀆 강하(江河)를 가리킴)이며, 기틀이 정체함이 없는 것은 음(陰)·양(陽)의 두 기운이요, 차례가 순히 펴지는 것은 오행(五行)이다. 철에는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있어 절후(節候)를 잃지 않으며, 날에는 새벽과 저녁, 낮과 밤이 있어 1각(刻) 1푼[分]이 틀리지 않으며, 비가 오고 해가 뜨며 서리와 이슬이 제때 행해지고 바람과 비와 천둥과 벼락이 제때 일어나니, 이것은 모두 천지의 조화이다.
우리 인간은 머리와 눈, 등과 배의 체질(體質)이 있고 오장(五臟)·육부(六腑)와 기맥(氣脈)이 관통하며,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 성(性)이 되고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이 정(情)이 되는데 이것은 그 누구나 똑같다.
물건에는 소리와 색, 기운과 맛이 있는데 우리 인간은 귀와 눈, 입과 코가 있어 이것을 받아들이며, 기운은 따뜻함과 시원함, 더움과 추움이 있는데 우리 인간은 관(冠)과 상의(上衣)와 치마와 신이 있어 이것에 대비한다. 물건 중에 식물은 반드시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있고, 동물은 반드시 가죽과 털, 살과 고기, 뼈와 뿔이 있어 공사간(公私間)에 쓰이지 않는 것이 없다.
선(善)·악(惡)과 사(邪)·정(正)은 마음과 몸에 있고 시(是)·비(非)와 득(得)·실(失)은 사물에 있고 치(治)·난(亂)과 성(成)·패(敗)는 집안과 나라에 있는바, 이는 모두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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