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선생의 묘소는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고정리(高井里) 산7-4에 위치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1번 국도를 갈아타고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도로가에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마을 끝 고정산 자락의 광산김씨 선영에 사계 선생묘가 자리하고 있다.
김장생 선생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인 광산김씨(光山金氏)다. 광산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달성서씨(達成徐氏),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한다. 이들 문중 중에서도 광김은 사계 김장생, 달성서씨는 약봉(藥峰) 서성(徐省), 연안 이씨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가문을 가장 명문으로 꼽는다. 이들 가문을 명문으로 꼽는 것은 정승판서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광김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안았다. 더구나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출한 은진송씨(恩津宋氏)와 광김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김장생, 김집이 유일하다.
김장생 가문이 조선의 3대 명문을 이루기까지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녀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한림원의 벼슬을 하던 김문(金問)과 혼인을 하였지만 그가 일찍 사망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改嫁)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유복자인 아들 철산(鐵山)을 데리고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金若采)가 광김으로는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연산(논산) 고정리의 시가(媤家)까지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산길을 걸으면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는데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며 아들 철산을 사헌부 감찰로 훌륭히 키웠고, 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 겸광(謙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다. 철산의 아들 중 국광은 좌의정 시절 8개월간 혼자 의정부(議政府)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맏아들 이름을 극히 부끄럽다는 뜻으로 극뉴(克杻)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조선8대 명당이라 불리는 곳에 묻힌 주인공으로 이 명당의 발복으로 인해 사계와 같은 훌륭한 후손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뉴는 종윤(宗胤)을, 종윤은 호(鎬)를, 호는 계휘(繼輝)를, 계휘의 아들이 바로 사계 김장생이다. 그러므로 광김이 명문을 이룬 것은 양천허씨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사계로 인해 명문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김장생의 묘역에는 김장생의 묘가 가장 윗자리에 있고, 그 아래는 광김의 중흥을 이룬 양천허씨묘, 선생묘의 바로 오른편 능선에는 김선생(金善生), 그 아래는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그 아래는 김겸광(金謙光), 그 아래는 김공휘(金公輝) 등의 묘소가 있다. 또한 김겸광과 김장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양천허씨 부인의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 김국광(金國光)의 종가 및 김장생 사당(祠堂)과 재실인 염수재(念修齋)가 있다.
사계선생 족인들의 묘 앞 전경
사계 선생 백호에서 청룡쪽
사계선생 도두쪽에서 바라본 안산 / 바로 앞에는 양천허씨 묘
이곳 묘역의 사계선생 묘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동남쪽인 손방위(巽方位)에는 대둔산(大屯山), 북쪽인 임방위(壬方位)에는 계룡산(鷄龍山), 북서쪽인 건방위(乾方位)에는 칠갑산(七甲山)이 장엄하게 시립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선생의 묘와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이곳 주산(主山)은 지도상 고정산(145m)이라 표기된 산이지만, 본래의 이름은 우수산(牛首山)이며 그 뜻이 소머리인 점을 감안한다면 선생의 묘소는 소와 관련된 형국(形局)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정산은 백두대간의 영취산(1076m)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맥하여 진안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에서 다시 남으로는 호남정맥을 뻗고, 북으로는 금남정맥을 뻗는데, 금남정맥은 운장산(1126m), 왕사봉(634m)을 거쳐 이곳의 태조산인 대둔산(878m)을 기봉한다. 대둔산에서 낙맥한 주룡은 월성봉(650m), 바랑산(555.4m), 곰치재, 깃대봉(393m), 국사봉(333m)을 거쳐 왕대골과 동성골 들판에서 천전과협(穿田過峽)후 고정산을 기봉한다.
이곳 선생묘의 내룡은 고정산에서 우선(右旋)하여 계백장군 묘의 주산인 충장산으로 넘어가기 전 중간에서 이곳의 현무봉인 작은 봉우리를 기봉하며. 정미곤(丁未坤)방으로 내려와 미(未)방에서 입수한다. 내룡은 지현굴곡(之玄屈曲)이 수려한 살아있는 생룡(生龍)이다. 용진처에 다다른 내룡은 입수도두를 만들어 기를 응축시킨 다음 곧 용진(龍盡)하는데, 그 직전 우출맥 한 분지(分枝)가 용과 분지사이에 의혈(依穴)을 맺게 해 조선예학의 거두를 영면케 한다. 의혈(依穴)이란 기댄 혈이란 뜻으로 유혈(乳穴)과는 다르다.
선생의 묘소를 둘러싼 전체적인 형세(국세)는 청룡과 백호, 안산(案山)과 조산(朝山) 등의 모든 사(砂)들이 유정(有情)하게 감싸고 있어 명당의 좋은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물 흐름을 보면 내당수는 좌선수(左旋水)로 우선룡(右旋龍)과 음양화합이 되고, 향 앞을 지나 외백호(外白虎)자락에서 우선수인 외당수와 만나 내외수역세(內外水逆勢)를 이루니 길격(吉格)이다. 특히 혈의 좌우에 있는 청룡과 백호의 용맥(龍脈)이 잘 흘러와 용(龍)이 물을 만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나성(羅城)을 이루어 여러 번 교쇄(交鎖)하고 있다. 교쇄란 양쪽에서 물이 흘러와 함께 만나고 물길이 곧게 나가지 않고 횡(橫)으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청룡과 백호를 살펴보면 선생의 묘소에서 왼쪽으로 내려온 산줄기인 청룡(靑龍) 중 내청룡은 아주 짧게 뻗었으나 외청룡이 명당(明堂)주위를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감싸고, 나지막한 안산(案山)으로서의 역할까지 하며 명당의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내려온 산줄기인 백호(白虎) 중 혈(穴)에 인접한 내백호(內白虎)는 선생묘소의 오른편에 위치한 묘소들이 있는 능선으로 혈에 가까이에 붙어 있어 우측 명당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묘역을 보호하여 준다. 내백호가 없었다면 바람으로 인해 선생의 묘역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선생의 묘소는 혈장 주변이 내백호는 있으나 내청룡이 없는 것 즉 오른쪽 다리만 있는 형상으로 비유하는 우단고(右單股)로 혈을 맺었지만 이를 외용호가 보완하며 묘역부근의 좌우공간이 같아 균형을 이루고 있다.
묘의 좌향(坐向)은 미좌축향(未坐丑向)에 간인파(艮寅破)로서 이기론(理氣論) 풍수상으로 정묘향이다. 좌선수(左旋水)가 청룡안대(靑龍案對)를 따라 흐르다가 우선(右旋) 외수(外水)와 합쳐 수법(水法)이 합법(合法)하다. 신평(申坪)의 『지리오결(地理五訣)』에는 이 향을 계귀간위발문장<癸歸艮位發文章: 계방수(癸方水)가 간방(艮方)으로 나가면 문장가가 난다>고 했고 발부발귀하고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고 하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묘의 좌향을 곤좌간향(坤坐艮向)에 당문파로 보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사진 : 현지 간산하여 촬영한 것임)
'고전포럼 > 김장생.김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金黃岡 김계휘(金繼輝))의 옛집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愼獨 김집(金集) (0) | 2014.03.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