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도원류(太極圖源流) 수수(授受)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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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太極)이란 명칭이, 《주역》 계사(繫辭)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도(圖)는 있지 않았고, 또 별도로 도를 만들어 전수했다는 설도 듣지 못했는데, 죽타(竹坨) 주이준(朱彝尊)의 비로소 태극도수수고(太極圖授受攷)가 있으니 그 설은 다음과 같다. “한(漢) 나라 이래 여러 선비들이 《역(易)》에는 언급하였으나 태극에 대해서는 미치지 않았고, 오직 도가(道家)의 《상방대통진원묘경(上方大洞眞元妙經)》에 태극과 삼오(三五)에 대한 설이 있었고, 당(唐) 나라 개원(開元 721~741) 시대에 명황(明皇)이 그 서(序)를 지었다. 동촉(東蜀 동천 東川) 위기(衛琪)의 주(注)에, ‘《옥청무극동선경(玉淸无極洞仙經)》에는, 무극(无極)과 태극에 대한 여러 도(圖)들이 부가되어 있다.’ 하였다.
진자앙(陳子昂) 감우(感遇 도(道)를 깨달았다는 뜻) 시를 보면,
삼원이 폐와 흥을 가름한다 / 三元更廢興
지정이 진실로 여기에 있는데 / 至精諒斯在
삼오를 뉘 능히 징험하겠는가 / 三五誰能徵
라 하였는데, 삼오란 율력지(律曆志 달력에 관한 법칙)의 음ㆍ양(陰陽)을 근본하였고, 지정이란 위백양(魏佰陽)의 《참동계(參同契)》에 근본한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도에 대한 설은 당 나라의 군신(君臣)이 이미 먼저 알았던 것이다.
진단(陳摶)이 화산(華山)에 은거(隱居)할 때, 일찍이 무극도(无極圖)를 여러 바위에 새겨 네 자리의 환(圜)을 만들었는데, 오행(五行)은 가운데에 위치하였고, 차례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도록 되어 있다. 그 중에 첫째는 현빈의 문[玄牝之門]이고, 둘째는 정(精)을 수련하여 기(氣)에 화(化)하고 기를 수련하여 신(神 도가에서는 정ㆍ기ㆍ신을 3보(寶)라 이름)에 화하며, 셋째는 오행(五行)이 자리를 정함이니 오기(五氣)가 원(元)에 모이는 것이고, 넷째는 음양이 배합함이니 감(坎)에 취해다가 이(離)에 메우는 것이고, 맨 위에는 신을 수련하여 허(虛)에 돌아 갔다가 다시 무극에 돌아가기 때문에, 무극도라 이른다는 것인데, 이는 방사(方士 신선의 술(術)을 닦는 사람.)들의 수련하는 술(術)로서, 서로 전수해 온 바다.
이를, 진단은 여암(呂嵒)에게, 여암은 종리권(鍾離權)에게 받았고, 종리권은 그 설을 위백양에게 얻었고, 위백양은 그 본지(本旨)를 하상공(河上公)에게 들었는데, 도가에서는 자못 천성(千聖)이 좀처럼 전하지 않는 비법으로 과시해 왔다.
그 후에 원공(元公)이 이를 취택하여, 그 자리를 바꿔 네 자리의 환(圜)을 만들었는데, 오행이 그 가운데에 위치하였고, 차례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 보도록 되어 있다. 맨 위는 무극이며 태극이고, 둘째는 음과 양의 배합으로서, 양은 동(動)하고 음은 정(靜)한 것이며, 셋째는 오행(五行)의 정해진 자리로서, 오행이 제각기 하나의 성(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넷째는 건(乾)의 도(道)는 남(男)을, 곤(坤)의 도는 여(女)를 이루는 것이고, 맨 밑에는 만물(萬物)을 화생(化生)하므로 이름을 태극도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극의 본지가 끝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그 설을 미루고 넓혀 온 것이다.
남헌 장씨(南軒張氏)는, ‘이는 원공(元公) 스스로 터득한 묘리(妙理)로서, 두 정 선생(程先生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이름.)에게 직접 전수하였으므로, 맹씨(孟氏 맹자(孟子)) 이후에 처음 있었던 바이다.”라 하였고, 회암 주자(晦庵朱子)는 “선생(先生 주돈이(周敦頤)를 이름)의 학(學)은, 그 묘리가 태극도 하나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 산양(山陽) 사람 도정(度正)이 지은 원공 연표(元公年表)에는, ‘경력(慶曆 송 인종의 연호) 6년(1046)에 선생이 건주(虔州) 흥국현(興國縣) 지사(知事)로 있을 때 정공 향(程公珦 정 호와 정이의 아버지)이 잠시 남안(南安) 원[倅]으로 있으면서 선생과 친구가 되었고 또 두 아들로 하여금 선생을 사사(師事)케 하였는데, 그때 명도(明道)는 15세이고 이천(伊川)은 14세였다. 그 후에 선생이 태극도를 만들어 명도와 이천에게 주었고, 다른 사람은 태극도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6년에는 선생이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의 천거에 의하여 빈현(彬縣) 지사로 이임되었는데, 그 후부터 두 정자(程子)가 원공과 서로 만났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디서 도(道)를 수수(授受)했단 말인가.”
이천이 지은 명도의 행장(行狀)에, “선생의 학(學)은, 15~16세 때부터 하남(河南) 주무숙(周茂叔)이 논도(論道)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과거 공부가 싫어졌다. 개연(慨然)히 구도(求道)의 뜻이 있었으나 그 요점을 얻지 못하여 백가서(百家書)를 두루 열람하고 석ㆍ노(釋老 석씨(釋氏)와 노자(老子))의 문에 출입하기를 몇십 년 만에 마음을 육경(六經)에 돌려 탐구하여 비로소 도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 글을 추려 보면, 두 정자는 원공에게 수업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구도(求道)하는 데에 그 요점을 얻지 못하고 다시 석ㆍ노의 문에 출입했다.’고 하였겠는가.
또한, 반흥(潘興)이 지은 원공 묘표(墓表)에도, 두 정자의 사사(師事)한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고, 명도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제자와 친구인 범순부(范淳夫)ㆍ주공염(朱公掞)ㆍ형화숙(邢和叔)ㆍ유정부(游定夫) 등이 서술한 그의 행장에도 모두 원공을 사사했다는 말이 없는데, 다만 유사립(劉斯立)만이, ‘주무숙을 좇아 학(學)을 물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공자(孔子)가 예(禮)를 노자(老子)에게, 악(樂)을 장홍(萇弘)에게, 관(官)을 염자(郯子)에게 물었다는 말과 같을 뿐, 수업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여여숙(呂與叔 이름은 대림(大臨)) 《동견록(東見錄)》에는, ‘주무숙에게도 함께 수업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제자로서 스승을 칭할 때, 그 자(字)는 바로 글에까지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사마군실(司馬君實)ㆍ장자후(張子厚)ㆍ소요부(邵堯夫)에게는 모두 선생이라 칭하고, 원공에게는 바로 그 자를 부르는가 하면, 궁선객(窮禪客 참선(參禪)하는 사람)으로 지목까지 하였으니, 더욱 제자로서는 그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원공의 처음 이름은 돈실(惇實)인데, 그 후에 영종(英宗)의 번저(藩邸 송 영종이 복왕(濮王) 윤양(允讓)의 아들로 있을 때) 때 이름을 피하여 돈이(惇頤)로 고쳤다. 원공이 과연 학(學)을 이천(伊川)에게 전수했다면 이천도 아래 이름자를 원공의 이름과 같이 하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이천이 피하지 않았다.
또한, 주자(朱子)가 지은 정정사(程正思) 묘표(墓表)에, “이천의 아래 이름자가 원공과 같으므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청한 바가 있었다.”고 했는데, 두 정자가 어찌 정정사만 못하여 그 이름자를 그냥 두었겠는가. 아무튼, 모두 의심쩍은 일들이다.
모서하 기령(毛西河奇齡)의 《경문(經問)》 가운데 이공(李塨)이 물은 글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유의(遺議) 중에, ‘《상방대통진원묘경품(上方大洞眞元妙經品)》이 있다.’고 하였고, 당(唐) 나라 현종(玄宗 즉 명황(明皇))이 지은 서(序)에, ‘진원성주상방개화무극태상영보천존(眞元聖主上方開化无極太上靈寶天尊)의 전한 바라고 칭했다.’ 하였는데, 제가 도장(道藏 도가서(道家書)를 갈무리한 곳)을 뒤져 보아도 《진원묘경품》이란 책이 없으므로 감히 묻는 바이니, 선생께서 왕초당(王草堂 왕복례(王復禮)의 호)을 만나 물어 보겠습니까?”라고 했다.
살피건대, 그 책은 항주(杭州) 오산(吳山) 화덕묘(火德廟) 도장(道藏) 안에 비장된 각본(刻本)으로, 왕초당이 찾아내어 가져갔는데, 그 책 이름과 도(圖)와 현종의 서(序)가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 도는 내한(內翰 즉 한림학사) 주진(朱震)이 소흥(紹興 남송 고종(南宋高宗)의 연호. 1131~1161) 연간에 임금에게 올린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와 똑같았다.
《진원묘경품》에 있는 태극삼원도(太極三元圖)는 이러하다.
음의 정(靜) ○과 양의 동(動) ○은 바로 《참동계》정기가(鼎器歌)에 이른, “음은 위로 정(靜)하고 양은 아래로 달린다.”라는 것이고, 또 주자(朱子) 주에, “선천도(先天圖) 진단(陳摶)의 선천도도 여기에 근본하였음. 는 건곤남북(乾坤南北)ㆍ감리동서(坎離東西)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은 바로 《참동계》에 이른, ‘감리 광곽도(坎離匡郭圖)’란 것이다. 《참동계》 첫장에, ‘감리 광곽’이란 말이 있는데, 도(圖) 가운데 조그만 ○은 감리((坎離)의 태(胎)이며, 좌측 은 이(離) 가운데의 흑(黑)이고 우측
은 감(坎) 가운데의 백(白)이기 때문이다.
은 바로 《참동계》에 이른, ‘지정도(至精圖)’란 것이다. 《참동계》 오행역극장(五行逆克章)에, ‘삼오여일 천지지정(三五與一天地至精)’ 이란 말이 있는데, 도 가운데 삼오란, 하늘과 땅의 생수(生數)가 다만 3ㆍ5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하늘이 5로 토(土)를 생(生)하므로 하나의 5가 되고, 하늘이 3으로 목(木)을 생하는 것이 땅이 2로 화(火)를 생하는 것과 합하므로 또 하나의 5가 되고, 땅이 4로 금(金)을 생하는 것이 하늘이 1로 수(水)를 생하는 것과 합하므로 또 하나의 5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정(至精)이란 것이다.
○○○은 《진원묘경품》 중에서 아주 적합한 것인데, 《참동계》 두 가지 도(圖)와 이 삼원(三元)을 합해서 총칭 태극삼원도라 한 것이다.
삼원이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태극의 원기(元氣)가 3을 포함하여 1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태극이 자(子)ㆍ축(丑)ㆍ인(寅) 삼원을 포함하여 일원(一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니, 즉 천(天)ㆍ지(地)ㆍ인(人) 삼재(三才)이다. 그리고 진원(眞元)이란, 남(男)을 이루고 여(女)를 이루는 것과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것을 합하여 태극삼원도를 만들었으므로, 이른바 진원이다.
그렇다면, 송(宋) 나라 사람들의 태극도는 본시 《진원묘경품》의 것과 부합된 것인데, 진단은 《진원묘경품》에서, 《진원묘경품》은 《참동계》에서 근본했음이 분명하다.
그 증거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唐) 나라 진자앙(陳子昻)의 18장(章) 감우시(感遇詩) 중 첫장에,
는 등 네 구가 있는데, 《참동계》에서는 일찍이 한(漢) 나라 이후로 나온 세 가지 도(圖)가 없이 태극이라 이름한 것이고, 진단의 태극도는 진자앙이 보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당 나라 중[僧] 규봉(圭峯)의 《선원전집(禪源詮集)》에 열 겹의 도(圖)가 그려졌는데, 그 중에 은 아리야식(阿犁耶識)이란 것으로 바로 태극이며, 좌측
은 각(覺)이 되고 우측
은 불각(不覺)이란 것으로 바로 감리(坎離)이기 때문이다.
중 중주(中洲) 문집에는, “이것이 바로 《태극진원도》이다. 건괘(乾卦) 중에 구오 효(九五爻)는 태극이고 용구 무수(用九無首)는 무극이다. 감(坎) 가운데는 바로 인심지위(人心之危 《중용》 서문의 한 대목)이니 그 가운데는 흑업(黑業 흑점(黑點)을 이름)이 있기 때문이고, 이(離) 가운데는 바로 도심지미(道心之微 역시 《중용》 서문의 한 대목)이니 그 가운데는 백업(白業 즉, 백점(白點)을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중 자운(慈雲)의 《관정기(灌頂記)》에도, “부처[佛]는 흑백업(黑白業)이 있다. 진(眞)과 백(白)으로 각(覺)을 삼고 망(妄)과 불각(不覺)으로 흑(黑)을 삼는다.” 하였고, 달마(達磨) 역시, “삼가 백업을 닦아야 한다.” 하였으니, 도가(道家)와 석가(釋家)에서도 태극을 가지고 원론(圓論)한 것이다.
청(淸) 나라 완연경(阮揅經)도 태극과 북극(北極)의 논이 있다.
그 설에, “태극이란 건곤(乾坤)과 천지(天地)가 모두 함께 하는 극(極)이므로, 북극을 제외하면 따로 극이라 이를 게 없다.”고 했는데, 《이아(爾雅)》에, “북극은 북신(北辰)을 이른 것이다.” 했으며, 《주역》 계사에, “역(易)이 태극이 있다.”라는 우번(虞翻)의 주에는, ‘태극은 바로 태일(太一)이다.’ 했고,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자) 《건착도(乾鑿度)》 주에는, “태일이란 북신(北辰)의 신명(神名)이다.”고 했다.
정씨(鄭氏)는 비록 태일이 구궁(九宮 태을수법(太乙數法)을 이름)을 윤행(輪行)하는 법을 들어 말한 것이지만, 태극이 바로 태일이고 태일이 바로 북신이고 북신이 바로 북극인즉 이게 진실로 고설(古說 예로부터 확정되어 온 말)인 것이며, 《주역》 계사에, “역(易)이 태극이 있어 양의(兩儀 음양(陰陽))를 생하고 양의가 사상(四象 태양(太陽)ㆍ태음(太陰)ㆍ소양(少陽)ㆍ소음(少陰))을 생하고 사상이 팔괘(八卦 건(乾)ㆍ감(坎)ㆍ간(艮)ㆍ손(巽)ㆍ진(震)ㆍ이(离)ㆍ곤(坤)ㆍ태(兌))를 생한다.” 했은즉, 팔괘는 사시(四時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에 근본하고 사시는 천지(天地)에 근본하고 천지는 태극에 근본한 것이다. 공자(孔子)의 말이 구절마다 뚜렷한데, 후세의 선비들이 그 실(實)을 버리고 허(虛)를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이 천지의 실상(實象)인 것이다.
우서(虞書 《서경》의 한 편명)에, “선(璿)으로 만든 기(璣)와 옥(玉)으로 만든 형(衡)을 살펴 칠정(七政)을 다스린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혼천의(渾天儀 옛적 천체(天體) 관측에 쓰던 기계)이다.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천지를 측정하는 법이 주비(周髀)와 서로 통한다.
“천체도 둥글고 지체(地體)도 둥글다.”는 말이 《대대기》(大戴記) 증자천원(曾子天圓) 편에 나타났으니, 역시 공자의 말이다. 하늘과 땅이 모두 북극으로 추(樞)를 삼는바, 하늘의 빙빙 도는 이치가 바로 땅의 매어 있는 이치이므로, 북극을 중심으로 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태극이 아니면 양의를 생할 수 없는바, 양의란 또 하늘과 땅을 이름이다. 땅은 원(圓)하게 위치하여 추락되지 않고 하늘은 돌면서 땅을 포괄(包括)하여 떳떳함이 있다.
“양의가 사상을 생한다.”는 것은 사시(四時)를 이름인데, 하늘의 황도(黃道)와 적도(赤道)가 땅의 원(圓)과 서로 유행(流行)하여 사시를 이루므로 춘ㆍ하ㆍ추ㆍ동은 바로 동ㆍ서ㆍ남ㆍ북이다. 사상이 팔괘를 생하는 것인즉, 사방(四方)으로써 팔괘의 위치를 정하므로, 설괘전(說卦傳 《주역》 계사 중의 한 전(傳))에, “제(帝 하늘의 주재(主宰)를 이름)가 진(震)에서 나왔다.” 는 대문 이하가 모두 그 위치를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건ㆍ곤은 천ㆍ지로서 정남(正南)과 정북(正北)에 위치해야 당연한데, 어찌 건은 서북(西北)으로, 곤은 서남(西南)으로 되어 있는 것인가. 이것이 즉, “태극이 바로 북극이다.” 는 실상이다.
지체(地體)는 반듯하고 둥근 것이다. 중국(中國)은 적도(赤道) 북쪽에 위치하였고 북극은 그 남쪽에 비뚤어지게 위치했는데 북극이 지중(地中)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혼원체(渾元體)로 논한다면, 다만 적도 위선(緯線)의 안팎에서 북극의 높고 낮음을 분별할 수 있고, 양극(兩極 남극과 북극)의 경선(經線)은 마치 참외[瓜]의 곧은 금[直㾗]과 같으므로, 본시 곳곳마다 극(極)의 중심부에 해당하여 비뚤어짐이 없다.
그러나 홍황(洪荒)이 열려 중국에 이르렀은즉, 중국의 지세(地勢)는 가로 뻗쳐 있는 황하(黃河)로 기지점(起止點)을 삼아야 한다.
만일 낙양(洛陽)을 중국의 중심지로 삼아, 북쪽 하늘이 북극에 바로 닿아 있다고 본다면, 낙양 남북 지대에 해당하는 경선(經線)이 가장 높은 지척(地脊 땅의 등마루로서 원줄기)으로 되어, 동에서 나오는 물은 동으로 흐르고 서에서 나오는 물은 서로 흘러야 할 것인데, 어찌 하수(河水)와 낙수(洛水)가 모두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것인가. 하수와 낙수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것만 보아도 중국의 지세는 동쪽으로 바다와 가까워, 옛날 성인(聖人)이, “그 지세가 동으로 비뚤어졌다.” 하였다.
그러므로 하수의 근원이 서에서 시작하여 동과 서로 나눠 흐르는 곳을 북극의 경선(經線)이라 하며 가장 높은 지척(地脊)으로 보아야 한다. 옛날에 성인이 중국에 처하여, 그 의상(儀象)을 측정했으므로, 건을 서북에, 곤을 서남에 배치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곤괘(坤卦)의 곤(字)자도 고문(古文)에는 巛으로 되었다. 巛은 순(順)의 뜻인데, 대지(大地)의 유형(流形)이 서에서 동으로 된 것을 상징한 것으로, 순(順)함의 지극함이다. 그렇지 않고 낙양을 북극의 경선에 해당시킨다면 낙양 이서(以西)는 모두 순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극과 건곤의 실상인 것이다.
또한 낙양이 비록 중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고 하지만, 사시(四時)의 대중(大中)이 서남에 있으므로 곤을 반드시 서남에 배치한 것이다. 또한 건은 높고 곤은 낮으므로, 건이 서북에 있은즉 곤은 반드시 서남에 있어 서로 응해야 한다.
설괘전(說卦傳)에, 팔괘의 방위를 정서ㆍ서북ㆍ정북ㆍ동북ㆍ정동ㆍ동남ㆍ정남 등으로 분정하면서, 건과 태(兌)에 대해서는 서남이니 정남이니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지세가 과연 동쪽으로 비뚤어졌다면 하수와 낙수 이서로는 그 지세가 제대로 되지 못했을 것이므로, 만일 건을, 서북에 비뚤어지게 위치한 북극이 서남에 위치한 곤에 하림(下臨)한 방위에 배치하여 지척(地脊)을 삼고, 감(坎)ㆍ간(艮)ㆍ진(震)ㆍ손(巽)ㆍ이(離) 다섯 괘를 동쪽 방면에 위치하지 않으면 태극의 실상이 나타나지 못할 것을 성인이 염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북극이 바로 태극이란 것이다.
《설문(說文)》 왕육(王育)의 설에, “하늘은 서북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무(无)라 한다. 옛날에 성인이 북극을 건태(乾兌)의 서북에 위치해 놓은 것은, 모두 용심(用心)의 정밀한 곳이므로, 이와 같은 기이한 글자를 만들어 오로지 《주역》에 사용한 바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 무(无)는 하늘의 서북을 이른 것이고, 태극을 무로 간주한 말은 아닌데, 왕필(王弼)은 이 무를 태극으로 주장하여 부실(不實)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노ㆍ장(老莊 노자와 장자(莊子))의 허무(虛無)한 학(學)을 숭상한 때문이다.
이업흥(李業興)은 태극을 유(有)라 하고 무극을 곡학(曲學)이라 배척했다. 이는 《위서(魏書)》 유림전(儒林傳)과 유아(游雅)에 나타났다.
또 진희전(陳喜傳)을 보면 “유아(游雅)에, ‘역(易) 송괘(訟卦)에, 「천(天)과 수(水)가 위(違)하여, 행(行)한다.」했으므로 총령(蔥嶺) 이서(以西)에는 물이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 했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역(易)의 파급(波及)된 바는 총령 이동(以東)이라 하겠다. 유아의 이 설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본지(本旨)와 은근히 부합되므로, 충분히 천(天)과 수(水)의 뜻이 발명되었다.” 라고 했으나, 진기의 이 말은 억지에 불과하다.
소자(邵子 소옹(邵雍)을 이름.)는 “마음이 태극이다.” 하였고, 청 나라 남회(南滙) 사람 오성흠(吳省欽 자는 충지(充之))의 《백화초고(白華初稿)》에도, “마음이 태극이다.”라는 논(論)이 있다.
그 논에, “태극이란 이름이 《주역》 계사에서 비롯되었으나, 도가의 《상방대통진원묘경》에 태극 삼오의 설이 있은 후부터 당 명황이 서(序)를 지어 세상에 유행되었고, 진자앙은 감우(感遇)시에서,
태극이 하늘과 땅을 생하고,/太極生天地
삼오를 뉘 능히 징험할까./三五誰能徵
라고 했는데, 삼오의 설은 모두들, 위백양 《참동계》에서 근본했다고 한다. 진단이 새겨 놓은 무극도도 서로 전해 오기를, 위백양의 것을 조종으로 삼았다고 하다가, 주자(周子)의 태극도설에 이르러 그 이치가 소연(昭然)히 다시 밝아졌다. 아무튼 태극이란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신명(神明)한 것이 만유(萬有)를 통할하는 것이므로, ‘신(神)을 수련하고 허(虛)에 돌아간다.’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소자(邵子)가 이른, ‘마음이 태극이다.’라는 것이다. 성(性)과 지각(知覺)이 합하여 마음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바, 그 본체(本體)는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영(靈)하여 담연(湛然)히 가운데에 있는데, 만물이 모두 다 갖춰졌다. 그러므로 마음을 떼어 놓고 이치만 말한다면 이치가 분산되어 돌아갈 곳이 없게 되고, 이치를 떼어 놓고 마음만 말한다면 마음이 방탕하여 의거할 곳을 잃게 된다. 극이란 집의 척량(脊樑)과 같은 것이다. 또한 하늘에는 남극과 북극이 있는데, 지상(地上)의 숭산(嵩山)이 꼭 하늘의 중극(中極)에 해당된다. 무엇이든 중앙을 심(心)이라고 하는바, 마음이 사람의 몸에 있는 것은 마치 척량이 집에 있는 것과 북신(北辰)이 성(星)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범위내를 벗어나 범위외에서 구할 수 없다. 진실로 나의 마음의 소재(所在)만 구한다면 태극도 곧 거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형(形)의 군(君)이며 신명(神明)의 주(主)이다. 혹자는 ‘마음은 체(體)도 방향도 없고 태극은 형(形)도 상(象)도 없으므로, 마음을 위주하면 공허(空虛)한 데 빠지기가 쉽다.’고 하는가 하면, 도가(道家)의 무리들은 무극과 태극을 제멋대로 이리저리 부회(附會)한다 하지만, 천하에 마음을 떠나서 이치를 말할 수 없고 이치를 떠나서 마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마음이고 바로 이치이다.’ 하는 경지(境地)는 성(聖)과 신(神 《맹자》진심 하(盡心下) 제25장 참조)의 태극이고, ‘마음을 말미암아 이치를 본다.’[見理]는 것은, 대현(大賢) 이하의 태극이란 것이다. 배우는 이는 만물이 각기 태극을 가졌다는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 물건마다 각기 태극을 가졌다는 이치에 대하여, 큰 차이[逕庭]가 있다고 보거나, 혹은 막연한 말[河漢]로 간주한다면 나의 마음을 볼[見心] 수 없고, 태극도 거의 쉬어버리게 된다. 《서경》에, ‘백성에게 중(中)을 건(建)한다.’ 하였고, 또, ‘임금이 그 극(極)을 건했다.’ 하였으니, 건은 입(立)의 뜻이고, 중과 극은 모두 이치의 극진한 것이다. 하늘과 땅이 나눠지기 이전에는 태극이 하늘과 땅에 있고 나의 마음에 있지 않지만, 하늘과 땅이 사람을 낸 이후에는 태극이 나의 마음에 있어,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찰[塞于天地之間]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하늘과 땅의 마음이고, 마음이란 하늘과 땅의 극(極)이며, 수(數)와 이치가 갖춰져 만사(萬事)가 응함에 이르러서는 호연(浩然)히 확충되지 않음이 없고 이연(釐然)히 관통되지 않음이 없어, 할 일을 다하게 되지 않겠는가. 배우는 이는 괜히 그 마음을 좁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태극에 대한 정론(正論)이다.
청 나라 여릉(廬陵) 사람 왕세업(王世業) 자는 검삼(儉三) 호는 항재(恒齋)의 《주역상의(周易象意)》에, “태극이란 아직 나눠지지 않은 음양이고, 음양이란 이미 판별된 태극이다.” 하여, 그 의론이 매우 자세하고 그 뜻이 매우 분명하다.
그 설에, “태극이란 아직 나눠지지 않은 음양이고 음양이란 이미 판별된 태극이다. 이미 판별되었다는 것은 남(男)은 양, 여(女)는 음으로서 각기 태극의 반절 체[半體]를 가진 것이고, 남과 여의 반절 체가 합하여 서로 교감(交感)해야만 태극의 형(形)이 완전하게 되므로, 태극도의 중간에 하나의 백점(白點)이 바로 그 교감된 자리이다. 사람이 태어날 적에는 두 개의 신(腎)에 의하게 되므로, 두 개의 신이 교합되어야만 태극도 완전하게 된다. 선경(仙經)에, ‘두 개의 신 중간에 두 가지 양상(樣相)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중간에 의탁해 있는 한 점[一點]은 바로 양정(陽精)뿐인 것이다. 양정이란 명문(命門)의 한 양(陽)으로서 두 음(陰)의 사이를 주재(主宰)하여 사람의 명맥(命脈)을 조종한다.’라 하였고, 소자(邵子)는, ‘무극 이전에는 음이 양을 포함하고 상(象)이 있은 이후에는 양이 음을 포함했다.’고 했으니, 알[卵]의 흰자위가 노란자위를 싸고 과일의 살[肉]이 씨를 가리운 것은 모두 음이 양을 포함한 상(象)이고 알이 품어져 새끼가 되고 씨가 심어져 싹이 나는 것은 양이 음으로 갈라졌음을 알 수 있다. 사람도 맨 처음 태(胎)를 가졌을 적에는 양기(陽氣)가 들어감에 따라 음혈(陰血)이 그 외부를 둘러싸고, 이미 태어났을 적에는 양(陽)이 발달됨에 따라 살[肉]이 온몸에 돌므로, 그 이치를 얼마든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치의 은미(隱微)한 것을 일의 현저(顯著)한 것에 대증(對證)하면 천하에 궁구하지 못할 이치가 없고, 도(道)의 큰 것을 사물(事物)의 작은 것에 비교하면 역시 깨닫지 못할 도가 없는 것이다. 건(乾)은 정(靜)할 적에는 전일(專一)하고 동(動)할 적에는 꼿꼿하며, 곤(坤)은 정할 적에는 오므려지고 동할 적에는 벌어지므로, 남녀의 남녀가 된 까닭을 천지ㆍ음양의 상(象)으로 징험해 본다면 어찌 마음과 눈앞에 요연(瞭然)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천지의 사이가 태허(太虛)라는 것만 알고, 태허의 그 즈음은 전혀 공기(空氣)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흙을 공기 속에 달아[懸] 놓고 씨앗을 그 속에 심는다면 무슨 식물이든지 싹이 트고 줄기가 성장할 것이다. 추워야 할 때에 공기가 없으면 춥지 못하고 더워야 할 때에 공기가 없으면 덥지 못하므로 허(虛)의 즈음에는 모두 실(實)한 것인데, 석씨(釋氏)들은 실한 것까지 허한 것으로 간주하니, 그 도를 알지 못한 지가 오래이다. 땅만큼 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기(氣)가 이르면 땅이 받아들이고, 오직 허한 것이기 때문에 만물이 거기에 뿌리를 박게 되는 것인데, 그 뿌리가 깊어질수록 땅은 여전히 실 그대로이다. 여(女)는 음의 체이며 지(地)의 질(質)이다. 남녀의 교합이 끝난 뒤에는 여자의 배[腹]가 어찌 갑자기 실해지지 않겠는가. 자궁의 태가 날로 불어나고 달로 자라나 마치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처럼 거추장스러워지지만 끝내 배가 터지지 않고 더욱 커지다가 달[月]이 차 해산(解産)하고 나면 배가 다시 본래의 실로 돌아가므로, 그 자취[迹]는 허한 듯하면서도 그 기(氣)는 매우 실한 것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그 자취가 허한 듯하므로 3백 84효(爻)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그 기가 매우 실하므로 3백 84효 안에는 무엇이든지 포함되어 있다. 항상 서로 기(氣)의 변화 가운데에 융합되어 있으면서, 일체를 자연의 운행에 맡기므로, 기에는 수(數)도 의탁해 있다. 수는 1에서 시작되고[始] 2에서 갈라지고[分] 4에서 열려가[開] 8에서 분산되므로[散] 16ㆍ32ㆍ64도 되고 또 4천 96까지도 되어 다함이 없는데, 1은 태극이고 2는 음양이고 4는 사상(四象)이다. 선천(先天)은 기(氣)의 상(象)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니, 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4에서 그쳐, 하늘에는 일(日)ㆍ월(月)ㆍ성(星)ㆍ신(辰)이 되고 땅에는 수(水)ㆍ화(火)ㆍ토(土)ㆍ석(石)이 되므로,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고 땅에 사방(四方)이 있고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이 모두 여기에 근본한다. 4가 그 가운데 들어 있으므로, 수가 다시 5를 이루어 후천(後天)이 열렸는데, 후천은 기의 상이 이미 나타난 것이다. 기가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또 6을 이룬 것이니, 양명(陽明 6기(氣) 중의 하나)은 태양(太陽)과 소양(少陽) 가운데 끼어 있어, 양이 극히 성한 것이므로 명(明)이라 하고, 궐음(厥陰 6기 중의 하나)은 태음(太陰)과 소음(少陰)의 마지막으로, 음이 변하여 역(逆)이 된 것이므로 궐(厥)이라 한다.”고 했다.
대개, 후천이 이미 열린 뒤에는 온갖 복잡 미묘한 일들을 6기(氣)가 아니고는 그 변화를 다할 수 없는 것인즉, 6도 5에서 변화한 것이다.
한(漢) 나라 장하(張遐) 자는 자원(子遠)으로 여간(餘干) 사람. 동한(東漢) 때 진번(陳蕃)과의 문답이 있음. 의 태극론이 있었는데, 그 설이 특이하다.
장하가 스승 서치(徐穉)와 함께 진번(陳蕃)을 찾아갔는데, 마침 곽태(郭泰)와 오병(吳炳)도 자리에 있었다. 서치가, “이는 장하인데, 역리(易理)를 안다.”고 소개했다. 진번이 역리를 묻자, 장하가, “역(易)은 정해진 체(體)가 없으므로 그저 태극이라 이름한 것인바, 태는 지극히 큼을 이르고 극은 지요(至要)함을 이른다.”고 대답했다.
대개, 지극히 크고 지극히 주요한 것이 혼돈(混沌 홍황(洪荒)과 같은 뜻) 가운데서 제1차로 동하여 음양을 생한 것을 말함이다. 음양이란 기(氣)이므로, “이치는 기를 생하고 기는 이치에 의탁해 있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한 나라 때에는 태극을, 지극히 크고 지극히 주요한 것으로 본 것이다.
청 나라 조길사(趙吉士)의 무극과 태극론도 매우 순수하고 분명하다.
대충 살펴보면, “태극이란 바로 이치를 이름이다. 그 체(體)가 혼돈(混沌)하여 이름할 수 없으므로 또 무극이라 일렀을 뿐, 태극의 위에 다시 하나의 무극이 있다는 것이 아니며, 태극 이외에 별도로 무극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복희(伏羲)는 맨 처음 효(爻)만 그어 놓았고, 문왕(文王)은 건원(乾元 즉 건괘(乾卦)의 단사(彖辭)를 이름)을 붙여 태극의 이치를 암시했을 뿐, 분명히 설명되지 않았다가, 공자(孔子)에게 이르러 태극이라 이름하였고, 염계(濂溪) 주자(周子)에게 이르러 무극과 태극의 뜻이 자세하게 되었다. 복희와 문왕의 극(極)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음양이 생긴 이후를 좇아 논해야 하고, 공자가 태극을 말한 것과 주자가 무극을 말한 것은 음양이 생기기 이전을 좇아 추구해야 한다.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이 한 가지 것으로 되어 능히 만화(萬化)의 체가 될 수 없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이 공적(空寂)에 빠져 만물(萬物)의 용(用)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치만은 한 가지이므로, 음양이 본디 태극이고 태극이 본디 무극인 것이다. 나는 홍범(洪範 《서경》의 한 편명)에서 말한 황극(皇極)을 태극으로 본 상산(象山 송(宋) 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호)을 가장 이상하게 여긴다. 황극은 전혀 사람만을 들어 말한 것이므로 후천이고, 태극은 천지와 만물을 통합해서 말한 것이므로 선천인 것이다. 극이란 이름은 같지만, 극이 된 바는 같지 않은데, 상산이 모두 하나로 보았으니, 무극에 대한 췌언(贅言)이라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으니, 상산의 병통에 적중한 말이라 하겠다.
양용수(楊用脩)의 무극론에는, “《급총주서》에, ‘정인(正人)에게는 유극(有極)만한 것이 없고 도(道)에는 무극만한 것이 없다.’고 했으니, 정당한 말이다. 정인에 대한 유극이란, ‘그 극에 회(會)하여 그 극에 돌아가리라.’는 뜻이고, 도에 대한 무극이란, ‘그 물(物)을 생함이 헤아릴 수 없고, 또 유구(悠久)는 다함이 없다.’라는 뜻이다.”고 하였다. 이 말이 매우 현오(玄奧)하므로, 마땅히 뽑아내어 밝혀야 하겠다.
그렇다면, 무극이란 명칭은 주자(周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제가(諸家)의 태극을 논한 것으로 본다면, 태극을 분열하여 대역(大易)의 태극으로도 만들고 도가(道家)의 태극으로도 만들고 석가(釋家)의 태극으로도 만들고 하늘의 태극으로도 만들고 사람의 태극으로도 만들었다.
그 설들이 너무도 분분하여 전수해 온 연원(淵源)에 대한 근거가 정확하지 못하므로, 천고(千古)의 의심거리가 되겠지만, 태극이란 일본만수(一本萬殊)의 이치이므로, 마침내는 만수일본(萬殊一本)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제가의 설들이 다르지만, 마침내는 태극의 한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무극이란 바로 태극의 이치로서 계속 순환되어 끝이 없음을 이름이다. 만일 무극을 유극(有極)으로 본다면 천지와 태극의 이치가 없어지게 되는데, 어찌 다시 태극이 있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율곡 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의 《태극문답(太極問答)》과 정한강(鄭寒岡 구(逑))의 《태극문변(太極問辨)》 두 권과 한남당(韓南塘 원진(元震))의 태극도해설(太極圖解說)이 있는데, 《경의기문록(經義紀聞錄)》 가운데 나타났다.
태극도원류(太極圖源流) …… 변증설 : 태극도(太極圖)란 말이 생긴 원인부터 시작하여 그 전수(傳受)에 대한 내용과 그 증빙 문헌까지 열거하였다. 처음에는 진단(陳摶)의 무극도(无極圖)가 방사(方士)들의 술서(術書)로 되어 여암(呂嵒)ㆍ종리권(鍾離權)ㆍ하상공(河上公) 등에 의해 전해왔는데, 그 후 원공(元公)에 이르러 그 위차를 변동함으로 인해 태극도가 되었다는 설을 들었으며, 그 방증에 대한 것으로는 동촉(東蜀) 위기(衛琪)의 주석과 진자앙(陳子昂)의 감우시(感遇詩) 등을 들었다. 그리고 태극도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해설하는가 하면 도형(圖形)까지 삽입되어 태극으로부터 시작된 천지 도수와 음양 이치의 논법이 정연히 나타나 있다.
주이준(朱彝尊) : 자는 석창(錫鬯). 청(淸) 나라 사람으로 고증학(考證學)에 능하였고, 《폭서정전서(曝書亭全書)》ㆍ《경의고(經義考)》ㆍ《일하구문(日下舊聞)》 등 저서가 있다.
진자앙(陳子昂) : 자는 백옥(伯玉), 당 무후(唐武后) 때 사람. 문장이 정아(正雅)하여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이하가 모두 추종(推宗)하였고, 《진습유집(陳拾遺集)》이 있다.
위백양(魏伯陽) : 한(漢) 나라 사람으로, 도술(道術)을 좋아하였고, 《참동계(參同契)》와 《오행상류(五行相類)》 등 저서가 있는데, 그 논설이 《주역》과 비슷하지만 《주역》의 효상(爻象)만 빌려 선술(仙術)을 수련하는 법을 다루었다.
진단(陳摶) : 자는 도남(圖南). 무당산(武當山) 구실암(九室巖)에 은거하다가 화산(華山)으로 옮겼는데, 백여 일씩이나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고, 송 태종(宋太宗)이 매우 존경하여 희이선생(希夷先生)이란 호를 주었으며, 《지현편(指玄篇)》 81장을 지어 수양ㆍ도인(修養導引)과 선단(仙丹)을 채취하는 법을 말하였다.
현빈의 문[玄牝之門] : 《노자》에, “현(玄)은 그 작용이 미묘하고 심오(深奧)한 것이고, 빈(牝)은 암컷이 새끼를 낳듯이 도(道)가 만물을 내는 것이다.”고 하였다.
여암(呂嵒) : 당 나라 사람, 자는 동빈(洞賓), 별호(別號)는 순양자(純陽子). 세칭 8선(仙)의 하나라고 불리우는데, 종남산(終南山)에서 선도를 얻었고 검술에도 신통하였다.
종리권(鍾離權) : 당 나라 사람. 호는 화곡자(和谷子), 또는 진양자(眞陽子), 또는 운방선생(雲房先生). 기골이 기이하고 신장이 8척(尺)이 넘었으며, 노인(老人)을 만나 선결(仙訣)을 받았고, 또 화양진인(華陽眞人)과 상선(上仙) 왕현보(王玄甫)를 만나 도를 얻은 다음 공동산(崆峒山)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하상공(河上公) : 한(漢) 나라 때 선인(仙人)으로 그 성(姓)은 전해지지 않았고, 문제(文帝) 때 하수(河水) 가에 초옥(草屋)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원공(元公) :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시호.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여산(廬山) 연화봉(蓮華峯) 밑에 거주하였으며, 마음이 쇄락(灑落)하여 광풍 제월(光風霽月)과 같았다고 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지어 송 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조종이 되었다.
이천 : 이천(伊川) 이하 ‘의심쩍은 일이다’까지 29행은 《폭서정집(曝書亭集)》 태극도수수고(太極圖授受考)에는 위의 글과 동일한 자체로 되어 있으나, 오주는 소자쌍행(小子雙行)으로 처리하였으므로 본 역에서도 오주의 의사대로 따랐다.
이공(李塨) : 청 나라 사람, 호는 서곡(恕谷). 모기령(毛奇齡)을 좇아 악률(樂律)을 강론하였고 그 학(學)은 실용(實用)을 주로 하였으며, 경의(經義)를 해석하는 데 송 나라 선비와 그 의견이 달랐고 저서로는 《역》ㆍ《시》ㆍ《춘추》ㆍ사서의 《전주(傳注)》등 다수가 있다.
달마(達摩) : 양 무제(梁武帝) 때 고승(高僧). 본시 남천축(南天竺)의 왕자로 성은 찰제리(刹帝利)인데, 갈대[蘆]를 밟고 강을 건너 위(魏) 나라에 들어와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 주석(住錫)하면서 9년 동안 벽(壁)을 향하여 도를 얻고 선종(禪宗)의 제 1조(祖)가 되었으며,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초기에 입적(入寂)하였다.
완연경(阮揅經) : 완원(阮元)을 이름. 자는 백원(伯元), 호는 운대(芸臺). 항상 학술(學術)을 제창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고, 저서로 《연경실집(揅經室集)》 등이 있다.
우번(虞翻) :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 학문을 좋아하고 기개(氣槪)가 있었으며, 《주역》에 정통하고 《역주(易注)》와 《노자》ㆍ《논어》ㆍ《국어(國語)》의 《훈주(訓注)》를 서술하였다.
《건착도(乾鑿度)》 : 당(唐) 이전의 경문(經文)을 수록하여 설명한 2권의 책자로, 역위(易緯)의 하나이며 정현(鄭玄)이 주석하였다.
칠정(七政) : 일(日)ㆍ월(月)ㆍ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성(土星) 이 일곱 가지가 하늘에 운행할 때 지(遲)가 있고 속(速)이 있고 순(順)이 있고 역(逆)이 있는 것이, 마치 임금이 해야 하는 정사(政事)가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주비(周髀) : 고대(古代) 산술(算術)의 하나. 고대 천문가(天文家)에 주비ㆍ선야(宣夜)ㆍ혼천(渾天)의 3가(家)가 있었다.
대대기(大戴記) : 전한(前漢) 대덕(戴德) 지음. 고례(古禮) 2백 4편을 85편으로 깎았다.
황도(黃道) : 지구에서 보면 이 대원(大圓)의 위를 태양이 1년 동안에 한 바퀴 도는 것. 적도(赤道)와 만나는 점(點)을 춘분점(春分點)과 추분점(秋分點)이라고 함. 《한서(漢書)》에, “日有中道 月有九行 中道者 黃道也”라고 보인다.
적도(赤道) : 지구의 적도와 천구(天球)가 맞닿는 가상선(假想線). 《한서》에, “赤道二 出黃道南”이라고 보인다.
북극이 …… 않는다 : 왕번(王番) 혼천설(渾天說)에, “北極 出地三十六度 南極 入地三十六度 而崇高 正當天之中極”이라고 보인다.
위선(緯線) : 지구상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가정(假定)한 선(線). 적도와 평행으로 지표(地表)를 일주(一周)한다.
경선(經線) : 남극과 북극을 연결한 지구 표면에 그은 가정(假定)의 직선(直線).
홍황(洪荒) : 개벽 초에 천지가 아직 갈라지지 않은 모양. 《운급칠첨(雲笈七籤)》에, “昔儀未分之時 號曰二源 溟滓鴻濛 如鷄子狀 名曰混沌”이라고 보인다.
총령(蔥嶺) : 파미르 고원(高原). 중국ㆍ인도ㆍ아프가니스탄ㆍ소련의 접촉 지대.
백성에게 …… 한다 : 《서경》중훼지고(仲虺之誥)의 한 대문.
임금이 …… 건했다 : 《서경》홍범(洪範)의 한 대문.
하늘과 …… 했다 :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 제2장의 한 대문을 인용한 것으로, “其爲氣也 至大至剛 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이라고 보인다.
기성(箕星)과 …… 거추장스러워지지만 : 《시경》대동(大東) 제7장의 말. 실상이 없다는 뜻으로 인용한다.
6기(氣) : 태양 한수(太陽寒水)ㆍ소음 군화(少陰君火)ㆍ소양 상화(少陽相火)ㆍ궐음 풍목(厥陰風木)ㆍ양명 조금(陽明燥金)ㆍ태음 습토(太陰濕土).
《급총주서(汲冢周書)》 : 10권으로 되었음. 진대(晉代) 총부(冢部) 사람 부준(不準)이 위 양왕(魏襄王)의 무덤에서 얻었다는 고서(古書).
그 …… 돌아가리라 : 《서경》홍범의 한 대문.
그 …… 없다 : 《중용》제26장의 두 대문으로, 성인은 천지와 같다는 것과, 천지의 도(道)는 쉼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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