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夏至)

 

달은 삼십일 동안에 / 月於三十日
겨우 하루만 둥그렇고 / 得圓纔一日
해는 일년 동안에 / 日於一歲中
제일 긴 날이 하루뿐이야 / 長至亦纔一
성쇠란 서로 꼬리를 무는 것이로되 / 衰盛雖相乘
언제나 성할 때는 잠깐이지 / 盛際常慓疾

다산시문집 제9권

책문(策問)

 

 

동서남북(東西南北)에 대하여 물음

 

묻는다. 아득히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을 향해서 외곽으로 나아가면 이것이 이른바 동서남북이 아닌가. 동(東) 자는 태양(太陽)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떴고 서(西) 자는 새가 깃드는 것을 본떴고, 남(南) 자는 오(午)자를 따라 만들었고 북(北) 자는 배(背)자를 본뜬 것이다. 그런데 글자의 모양을 상형(象形)으로도 하고 회의(會意)로도 한 예(例)가 어찌 이처럼 산만하고 질서가 없을까. 북극(北極)과 남극(南極)은 만고(萬古)에 옮겨지지 않는 것이니 이는 일정한 자리가 있는 것이고, 동해(東海)와 서해(西海)는 위치에 따라 명칭이 바뀌니 이는 일정한 명칭이 없는 것이다. 일정함이 없는 위치로 일정함이 있는 위치에 배열시켜 사방(四方)에 넣었으니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를 사방에 배열하였다. 그러나 남극도 북극처럼 추우니 화열(火熱)을 취한 근거가 어디 있는가. 진(震)ㆍ태(兌)ㆍ이(离)ㆍ감(坎)을 사방에 배열하였다. 그러나 남극도 북극처럼 어두우니 이명(离明)을 취한 근거가 어디 있는가. 중국(中國)은 적도(赤道)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북극을 북극이라 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반대로 북호국(北戶國 중국 남부에 있었던 나라)은 적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극을 북극이라 할 수는 없단 말인가. 중국도 밝은 곳을 향하여 집을 짓고 북호국도 밝은 곳을 향하여 집을 짓는데, 중국은 북이 되고 북호국은 남이 된다면 어찌 공론(公論)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대하(大夏)에서는 촉(蜀)을 동쪽이라 하고 촉 사람들은 제(齊)를 동쪽이라 하니, 동쪽을 확고하게 정할 수 있겠는가. 일본(日本)은 우리나라를 서쪽이라 하고 우리나라는 중국을 서쪽이라 하니, 서쪽을 임의로 확고하게 정할 수 있겠는가.
동지선(冬至線)은 태양 궤도의 최남단(最南端)이요 하지선(夏至線)은 태양 궤도의 최북단이다. 이 두 선의 거리가 과연 몇 도나 되는가. 태양이 뜨는 곳에는 오전이 짧고 태양이 지는 곳에는 오후가 짧아야 하는데, 동방과 서방 사람들이 모두 오정(午正)을 하루의 중앙으로 삼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을 사방에 배열하였다. 그러나 북극과 남극은 1년이 반은 낮이고 반은 밤이니, 이곳에는 사시(四時)도 사방도 없을 것이 아닌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를 사방에 배열하였다. 그러나 동선(冬線)과 하선(夏線)의 아래는 사시가 상반(相反)되니, 이곳에서는 육십갑자(六十甲子)로 사방을 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황제(黃帝)는 동쪽으로 환산(丸山)에, 서쪽으로 계두산(鷄頭山)에, 북쪽으로 부산(釜山)에 이르렀다. 전욱(顓頊)은 동쪽으로 반목(蟠木)에, 서쪽으로 유사(流沙)에, 남쪽으로 교지(交阯)에, 북쪽으로 유릉(幽陵)에 이르렀다. 우순(虞舜)은 동쪽으로 장이(長夷)와 조이(鳥夷)에, 서쪽으로 거수(渠廋)에, 남쪽으로 교지(交阯)에, 북쪽으로 발(發)과 식신(息愼)에 이르렀다. 옛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각각 다른데, 현재의 지명으로 각각 옛날의 어느 곳이었는가를 지적할 수 있겠는가. 요전(堯典)에서 동은 우이(嵎夷), 남은 남교(南交)라 하여 그곳을 분명히 가리켰으나 서쪽과 북쪽에 대해서는 지명을 말하지 않았다. 우공(禹貢)에서는 동은 바다, 서는 유사(流沙)라 하여 분명히 한계점을 가리켰으나 남쪽과 북쪽은 지명을 말하지 않았으니,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소략(疏略)이 어찌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곳과 지는 해를 전송하는 곳은 의당 한 곳에 있어야 할 터인데,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의 후일법(候日法)은 극동(極東)과 극서(極西)로 나누어 살폈으니, 해가 뜨고 지는 시각(時刻)에 혹 틀린 점이 있지 않겠는가. 아침과 저녁의 해 그림자는 의당 하나의 막대기를 준칙(準則)으로 삼아야 할 터인데, 《주례(周禮)》의 측일법(測日法)은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나누어 관측하였으니, 길고 짧은 도수(度數)에 혹 틀린 점이 있지 않겠는가.
남북으로 말하면 적도(赤道)가 천하의 중심이고 동서로 말하면 곤륜산(崑崙山)이 천하의 중심이 될 터인데, 주공(周公)이 낙양(洛陽)을 천하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성탕(成湯)은 동쪽을 정벌하면 서쪽 사람이 원망하고 남쪽을 정벌하면 북쪽 사람이 원망하여 모두 성탕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무왕(武王)은 동서남북이 모두 복종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 두 시대(時代)의 사방(四方) 지명을 모두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태원(泰遠)ㆍ빈국(邠國)ㆍ복연(濮鉛)ㆍ축률(祝栗)을 사극(四極)이라 하고, 고죽(觚竹)ㆍ북호(北戶)ㆍ왕모(王母)ㆍ일하(日下)를 사황(四荒)이라 하는데,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비추어보건대 각각 어느 지방에 해당될까. 동방에는 태평(太平), 서방에는 대몽(大蒙), 남방에는 단혈(丹穴), 북방에는 공동(空桐)이 있는데, 오늘날 확실히 어느 나라에 해당될까. 동방에는 비목(比目), 서방에는 공허(邛虛), 남방에는 비익(比翼), 북쪽에는 비견(比肩)이 있는데, 《본초(本草)》에 따로 무슨 이름이 있는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이미 사방에 배열하였으니, 중국 사람은 단지 신덕(信德)만 있는 것일까. 청(靑)ㆍ백(白)ㆍ적(赤)ㆍ흑(黑)을 이미 사방에 배열하였는데, 중국 땅을 어찌하여 적현(赤縣)이라 부르는가. 저풍(諸馮)ㆍ명조(鳴條)ㆍ기주(岐周)ㆍ필영(畢郢)에 대하여 시비(是非)가 분분하고, 목릉(穆陵)ㆍ무체(無棣)ㆍ동해(東海)ㆍ서하(西河)는 그 땅이 너무나 넓다. 이런데 지금 낱낱이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겠는가.
큰 자라의 네 발을 잘라 사극(四極)을 받쳤다는 말을 지어낸 사람은 누구이며, 태장(太章)과 수해(豎亥)가 사방을 걸어서 잰 걸음수는 얼마인가. 이(夷)ㆍ적(狄)ㆍ융(戎)ㆍ만(蠻)을 사예(四裔)라 하는데, 사유(四維)에 사는 인종(人種)은 또 몇 종류나 되는가. 기(奇)ㆍ제(鞮)ㆍ상(象)ㆍ역(譯)으로 사방의 백성들과 통화(通話)를 하는데 만방(萬邦)에 흩어져 사는 인종들에게 있는 언어가 이 네 가지뿐인가. 동방은 창룡(蒼龍), 서방은 백호(白虎), 남방은 주조(朱鳥), 북방은 현무(玄武)라 한다. 이 별자리는 이리저리 옮겨 항상 그 자리에 붙박혀 있지 않는데, 이것을 사방에 배열한 것은 억지가 아닐까. 동풍을 곡풍(谷風), 서풍을 양풍(涼風), 남풍을 개풍(凱風), 북풍을 태풍(泰風)이라 한다. 이 바람은 이리저리 산란하여 반드시 정방(正方)으로만 불지는 않는데, 팔풍(八風)에 대해 상세히 말할 수가 있을까.
남극(南極)은 땅 밑에 있고 북극(北極)은 땅 위에 있는데 《천문록(天文錄)》에 ‘남극은 높고 북극은 낮다.’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은 서북이 기울어졌고 지구는 동남쪽이 이지러졌는데도 역법가(曆法家)들은 하늘과 땅은 모두 둥글다 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후천도(後天圖)의 진(震)ㆍ태(兌)ㆍ이(離)ㆍ감(坎)의 배열이 선천도(先天圖)에서는 이(離)ㆍ감(坎)ㆍ건(乾)ㆍ곤(坤)으로 배열되었다. 하도(河圖)의 8ㆍ9ㆍ6ㆍ7의 배열이 낙서(洛書)에서는 3ㆍ7ㆍ1ㆍ9로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동ㆍ서ㆍ남ㆍ북의 위치가 모두 틀려서 맞지 않으니, 이것을 천지의 바른 위치라 할 수 있겠는가. 종묘(宗廟)의 제도를 옛적에는 남북으로 소목(昭穆)을 삼았었는데 지금은 동서로 소목을 삼으며, 천맥(阡陌)의 제도는 혹 동서로 밭두둑을 만들기도 하고 혹 남북으로 밭두둑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법의 득실(得失)과 이 설의 시비(是非)에 대해서 모두 분석하여 설명할 수 있겠는가.
동쪽엔 장인국(長人國), 남쪽엔 조제국(雕題國), 서쪽엔 뇌연(雷淵), 북쪽엔 증빙(增氷)이 있는데 지금의 어느 나라가 이에 해당되는가. 동쪽엔 의려(醫閭), 남쪽엔 양산(梁山), 서쪽엔 곽산(霍山), 북쪽엔 유도(幽都)가 있는데 여기에서 무슨 보물이 생산되었는가. 추연(鄒衍)은 사해(四海)에 대한 설(說)이 있고 회남자(淮南子)는 팔인(八寅 팔역(八域))에 대한 설이 있지만 이들이 과연 몸소 가서 눈으로 보고 말한 것인가. 불교(佛敎)에는 사주(四洲)의 명칭이 있고 외기(外紀)에는 오주(五洲)의 명목이 있지만, 이것이 모두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말을 들은 것은 아닌가.
공자(孔子)는 ‘나는 동서남북으로 주거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몸소 갔었던 끝 지점을 모두 지적하여 말할 수 있을까. 황제(皇帝)의 도읍(都邑)은 동경(東京)ㆍ서경(西京)ㆍ남경(南京)ㆍ북경(北京)이 있는데, 그 웅거한 형세가 어느 곳이 가장 나은가.

대저 자연(自然)이 만든 것은 모두 둥글고 사람이 만든 것은 모두 모가 났다. 따라서 모난 물건은 저절로 사방이 있게 마련이니, 동ㆍ서ㆍ남ㆍ북의 명칭이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몸에는 한몸의 사방이 있어서 왼쪽과 오른쪽을 정하게 되고, 방에는 한방의 사방이 있어서 밝은 남쪽과 어두운 북쪽을 분별하게 된다. 각국(各國)에는 각기 본국(本國)의 사방이 있어서 사방의 문(門)을 통하게 되고, 중국(中國)에는 중국의 사방이 있어서 사방 국경을 통하게 된다. 위아래를 아울러 말하자면 육합(六合)이라 하고, 모퉁이까지 모두 들어 말하자면 팔굉(八紘)이라 한다. 하늘과 땅은 이것으로 위치가 바르게 되고 만물은 이것으로 차례를 이루게 된다. 이것에 의하여 음(陰)을 등지고 양(陽)을 향하며, 이것에 의하여 왼쪽은 성(聖), 오른쪽은 인(仁)이 된다.
그러므로 왕자(王者)가 나라를 세우게 되면 방위(方位)를 분간하여 관위(官位)를 설치함으로써 육관(六官)의 대의(大義)로 삼고, 명당(明堂)에서 조회(朝會)할 적엔 병풍(屛風)을 등지고 남면(南面)하여 신하들에게 답례한다. 이것이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좋은 법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대(世代)가 내려갈수록 풍속이 퇴폐되어 이설(異說)이 분분하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역법(曆法)을 연구하고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자들이 북극(北極)ㆍ남극(南極) 이외에 따로 연신(年神)의 방위(方位)를 세웠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하는 제도에 있어서도 왼쪽에는 종묘(宗廟),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이외에 별도로 풍수설(風水說)의 이해(利害)에 구애받게 되었다.
봄에 씨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절후(節候)가 밝지 않게 되자, 방위(方位)에 따른 타당성과 꺼리는 점을 살피게 되었고, 남쪽엔 창을 내고 북쪽엔 담장 쌓는 법이 허물어지자, 용호(龍虎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를 말함)에 의한 길흉(吉凶)을 묻게 되었다.
집을 동향으로 짓는 법제는 없는데, 마을터는 북향이 많다. 빈계(賓階)와 조계(阼階)는 때에 따라 그 동서의 위치가 바뀌기도 하고, 내당(內堂)과 외당(外堂)은 때에 따라 남북을 반대로 하기도 한다. 자연적인 음양(陰陽)의 형세를 괴리(乖離)시키고 바꿀 수 없는 건곤(乾坤)의 이치를 어기면서, 옛 선왕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맞도록 만들어 놓은 예의(禮儀)를 상고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제 사방의 본래 뜻을 분변하고 사방의 실제 이치를 연구하여, 만물(萬物)의 차례를 순(順)하게 하고 삼대(三代) 때의 의제(儀制)를 회복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겠는가. 여러 선비들은 사방에서 왔으니 반드시 이에 대하여 본디부터 강구(講究)한 바가 있을 것이다. 각자 그것을 마음껏 기술하라.

큰 자라의 …… 받쳤다 : 옛날 공공(共工)이 축융(祝融)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으므로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끊어졌다. 그리하여 여와씨(女媧氏)가 오색(五色)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깁고, 자라의 발을 잘라 사방을 받쳤다 한다. 《淮南子 覽冥訓》
태장(太章)과 …… 걸어서 : 태장과 수해(豎亥)는 모두 우(禹)의 신하로서 걸음을 잘 걷는 사람. 《회남자(淮南子)》추영훈(墜形訓)에, “우가 태장을 시켜 동극(東極)에서 서극(西極)까지를 재게 하였더니 2억 3만 3천 5백 리 75보(步)였고, 수해를 시켜 북극(北極)에서 남극(南極)까지 재게 하였더니 2억 3만 3천 5백 리 75보(步)였다.” 하였다.
사유(四維) : 동ㆍ서ㆍ남ㆍ북의 사잇방위인 동남ㆍ동북ㆍ서남ㆍ서북을 말한다. 《小學紺珠 地理類 四維》
기(奇)ㆍ제(鞮)ㆍ상(象)ㆍ역(譯) : 사방의 외국(外國)과 통역(通譯)하는 통역관을 말한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동방을 기, 남방을 상, 서방을 적제(狄鞮), 북방을 역이라 하는데 이는 사방 외국의 통역을 맡은 관원이다.” 하였다.
소목(昭穆) : 옛날의 묘제(廟制)로 위패(位牌)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는 시조(始祖)를 가운데 모시고 2세(世)ㆍ4세ㆍ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ㆍ5세ㆍ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7묘(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5묘이고 대부(大夫)는 3묘이다.
명당(明堂) : 임금이 정치와 교화(敎化)를 펴는 곳. 임금은 남향(南向)으로 앉기 때문에 밝은 곳을 향하여 지었다.
연신(年神)의 방위(方位) : 동남ㆍ동북ㆍ서남ㆍ서북의 네 간방(間方)을 강(綱)으로 하여 24방위를 벌여놓고, 해당 방위에 각각 해당하는 신(神)을 안배하여 그해의 건축(建築) 및 보수(補修) 등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
빈계(賓階)와 …… 바뀌기도 하고 : 빈계는 손님이 오르내리는 서쪽 층계이고 조계는 주인이 오르내리면서 손님을 맞고 전송하는 동쪽 층계. 옛날에는 대체로 남향(南向) 집을 짓기 때문에 빈계와 조계의 위치가 변할 수 없었으나, 후세(後世)에는 풍수지리설의 길흉에 현혹되어 위치를 바꾸기도 하였다.

 

 

다산시문집 제8권

대책(對策)

 

 

십삼경책(十三經策) 경술년(1790) 겨울에 임금이 내각(內閣)에서 직접 시험을 보였다.

 

 

왕은 묻는다.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目錄)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이 십삼경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 있는 탁약(槖籥)이요, 문예(文藝)도 실려 있는 연해(淵海)이다. 그 전수(傳授)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은 대답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써,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써,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써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써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 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능히 천백 년 이상의 것을 초연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주자(朱子)가 《대학(大學)》에 대하여 바로 단정하기를 ‘경일장(經一章)은 공자(孔子)의 말이요, 전십장(傳十章)은 증자(曾子)의 뜻이다.’ 하였으니, 이는 절대로 전하여 듣거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에 의뢰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자기의 의사로써 단정지은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시대의 예나 지금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여 듣거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에 있어서는 예와 가까운 것으로써, 주장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요(歌謠)나 풍속이 옛것과 서로 비슷한 것은 비록 시골의 비루한 데서 얻어진 것이라도 그런대로 상고할 만한 점이 있는 때문이며, 스승이 직접 전하여 주고 강론하여 준 것은 비록 스승의 보통 이야기나 언소(言笑) 따위를 기록한 것이라도 그런대로 증거가 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저 한(漢) 나라의 선비들이 위(魏)ㆍ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ㆍ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隋)ㆍ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원근(遠近 시대가 멀고 가까운 것)과 친소(親疎 스승에게서 직접 배우고 못 배운 것)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 《시경》ㆍ《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ㆍ《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지 자신의 의사로 초연히 증거하여 주소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이로 본다면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무리하게 우겨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삼례(三禮《의례(儀禮)》ㆍ《주례(周禮)》ㆍ《예기(禮記)》) 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 글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교(世敎)에 시급한 문제입니다. 지금 다행히도 전하의 청문(淸問 허심(虛心)으로 묻는 것)이 이 문제에 언급되셨는데, 신이 어찌 감히 보고 들은 것을 전부 말씀드려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십삼경은 모든 서책 중에 으뜸입니다. 대저 건상(乾象)을 관찰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길흉(吉凶)의 진리를 파헤치며, 《시경(詩經)》을 외고 《서경(書經)》을 읽어 치란(治亂)의 자취를 증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삼경(三經)이 도(道)를 실은 실적이요, 절문(節文)과 의측(儀則)으로써 하늘이나 사람의 활용을 발명하며, 국가를 건립하고 작위(爵位)를 설치하여 한 제왕(帝王)의 제도를 성립한 것은 삼례(三禮)가 가르침을 설립한 실적이요, 포폄(褒貶)의 대의(大義)를 발휘하여 난신(亂臣)ㆍ적자(賊子)들이 두려움을 갖도록 한 것은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 등이 《춘추(春秋)》를 우익(羽翼)한 실적이요, 궁장(宮墻)을 보여주고 의리(義理)를 분석하여 준 것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로 사문(斯文)의 별이나 태양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또한 《효경(孝經)》에 요도(要道)를 연역(演繹)한 것이나 《이아(爾雅)》에 형명(形名)들을 널리 기록한 것까지도 다 성현이 남긴 교훈이요 학문의 종지(宗旨)입니다. 그러므로 도통(道統)을 전수하여 수사(洙泗)의 참 근원을 접속시킨 이도 반드시 이 십삼경에 귀의(歸依)하였고, 전석(箋釋)을 좌우에 두고서 학문의 방향을 이룩한 이도 반드시 이 십삼경에 노력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십삼경은 참으로 덕성(德性)을 수련시키는 노배(爐韛 풀무)이며, 예술(藝術)을 간직한 부고(府庫)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윽이 개탄스러운 바는, 사람의 심정은 새로운 것은 좋아하나 옛것은 싫어하고, 세상의 도덕(道德)은 더렵혀지기는 쉬워도 융성하여지기는 어려우므로, 문호(門戶)가 분열되어 스승의 학설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고,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끼리는 한 당(黨)이 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마구 배격하여 폐혹(蔽惑)됨이 많다는 점입니다. 십삼경의 글이 겨우 실오라기처럼 보존되었고, 십삼경의 가르침도 깃발의 술처럼 위험스럽게 간들거리고 있으니, 세상의 교화를 맡은 이가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학문을 넓힌 다음에 예(禮)로써 집약하고, 모든 것을 통달하여 극치에 도달하였으면 하는 것이, 참으로 오늘날의 소망입니다.

《주역》은 백성들을 낳는 봄의 부고(府庫)에, 《서경》은 백성들을 키우는 여름의 부고에, 《시경》은 백성들을 성숙시키는 가을의 부고에, 《춘추》는 백성들을 간직하는 겨울의 부고에 해당하는데, 이처럼 분속시킨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의례(儀禮)》는 예(禮)의 근본이, 《예기(禮記)》는 예의 지엽(枝葉)이, 《이아(爾雅)》는 《시경》ㆍ《서경》의 금대(襟帶)가, 《논어(論語)》는 육경(六經《시경》ㆍ《서경》ㆍ《예기》ㆍ《주례(周禮)》ㆍ《주역》ㆍ《춘추》)의 정화(精華)가 되는데, 이처럼 비유한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진(秦) 나라가 서적들을 불태워 버린 화염 속에 《주역》만 유일하게 남았는데, 《연산(連山)》이나 《귀장(歸藏)》은 끝내 실전(失傳)되었고,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 간직된 서적들 중에 《시경》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국풍(國風)과 아(雅)ㆍ송(頌)이 제 모습을 잃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순전(舜典 《서경》의 편명)이 대항(大航)에서 뒤늦게 출현되었으니, 순전이 공안국(孔安國)의 구본(舊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고공기(考工記 《주례(周禮)》의 편명)도 하간(河間)에서 뒤늦게 구입하였으니, 고공기가 과연 주관(周官)의 유제(遺制)에 틀림없는 것인가.


신은 생각하건대, 사경(四經 《주역》ㆍ《서경》ㆍ《시경》ㆍ《춘추》)을 사부(四府 춘ㆍ하ㆍ추ㆍ동)에 분속시킨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상고하건대, 소 강절(邵康節 강절은 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시호)의 관물편(觀物篇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편명)에서, 황(皇)ㆍ제(帝)ㆍ왕(王)ㆍ패(覇)를 춘ㆍ하ㆍ추ㆍ동에 분배시켜 놓고는, 《주역》은 삼황(三皇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皇帝))에게서, 《서경》은 이제(二帝 요(堯)ㆍ순(舜))에게서, 《시경》은 삼왕(三王 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문왕(文王))에게서, 《춘추》는 오패(五覇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ㆍ진 목공(秦穆公)ㆍ송 양공(宋襄公)ㆍ초 장왕(楚莊王))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니, 사부(四府)의 의의는 사시(四時)에서 취상(取象)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자(邵子)의 학문은 상수(象數)에 치우쳐 억지로 끌어댄 점이 없지 않으나, 신이 망령되이 의론드릴 수 없습니다. 《의례(儀禮)》ㆍ《예기》ㆍ《이아(爾雅)》ㆍ《논어》 등에 각각 비유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의례》는 당시에 사용하였던 한 제왕(帝王)의 의문(儀文)으로서 이를테면 오늘날의 의주(儀注)나 홀기(笏記) 같은 것이요, 《예기》는 의문(儀文)의 본 뜻과 심오한 의의를 부연(敷衍)한 것으로서, 이를테면 오늘날의 전주(箋注)나 연의(衍義) 같은 것이며, 《의례》의 빙례(聘禮)나 연례(燕禮)는 《예기》의 빙의(聘義)나 연의(燕義)의 근본이 되고, 《예기》의 사의(射義)나 혼의(昏義)는 《의례》의 사례(射禮)나 혼례의 지엽이 되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모두 다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황직경(黃直卿 직경은 송(宋) 나라 황간(黃榦)의 자)에게 답한 편지에서 《의례》와 《예기》를 경(經)과 전(傳)으로 분립시킨 것이 근본과 가지가 정연하고, 연자편(練子篇)에서 경서(經書)들을 물건에 비유한 것도 참으로 정밀 친절하였으며, 금대(襟帶)이니, 정화(精華)이니 한 비유에 있어서는 광채를 윤식(潤飾)한 뜻에 불과하므로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연산》이나 《귀장》이 끝내 실전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두자춘(杜子春)의 《주례(周禮)》 주(注)에, 《연산》은 복희(伏羲)의 역(易)이요, 《귀장》은 황제(黃帝)의 역이라고 했고, 또 《세보(世譜)》 등 책에는, 신농(神農)의 일명(一名)을 연산씨(連山氏), 황제의 일명을 귀장씨(歸藏氏)라 한다 하였으니, 《연산》과 《귀장》은 진정 복희ㆍ신농ㆍ황제의 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이는 또,

“하(夏)의 역은 첫머리가 간괘(艮卦)이기 때문에 《연산》이라 하고, 상(商)의 역은 첫머리가 곤괘(坤卦)이기 때문에 《귀장》이라 하는데, 간(艮)은 산(山)에 해당하고 곤(坤)은 장(藏 간 직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좌전(左傳)》에 ‘목강(穆姜)이 점을 쳐 간괘(艮卦)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는 《연산》을 말하고, 예운(禮運 《예기(禮記)》의 편명)에 공자(孔子)가 ‘송(宋) 나라에서 곤괘(坤卦)와 건괘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는 《귀장》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하면 춘추(春秋) 말엽까지도 《연산》과 《귀장》이 그대로 보존되다가, 함양(咸陽 진(秦) 나라의 수도)이 불탈 때 항우(項羽)가 지른 불더미 속에 들어가 버렸을 것이므로, 총서(叢書)에 실린 《연산》이나 《귀장》은 다만 위작(僞作)일 뿐입니다.
국풍(國風)과 아(雅)ㆍ송(頌)이 제 모습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상서(尙書)》가 단순히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전해졌다기보다는 복생(伏生) 한 사람의 구전(口傳)에 의해 끊이지 않은 것처럼, 《시경》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당시에 《시경》을 연구한 이로는 한(漢) 나라 제(齊) 땅 사람 후창(后蒼)과 노(魯) 땅 사람 신공 배(申公培)와 연(燕) 땅 사람 한영(韓嬰) 등 세 사람이 모두 스승의 전수를 받아 학통이 그런대로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시경》을 풍송(諷誦)한 것이 관악(管樂)이나 현악(絃樂)에까지 올려져 있어, 서적에만 의존되지 않았으므로 《시경》이 유실될 염려가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순전(舜典)이 꼭 공안국(孔安國)의 진본(眞本)이라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매색(梅賾)이 《상서(尙書)》를 올릴 때에 순전 1편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공안국의 순전전(舜典傳)이 따로 없었다고 말한 것이지, 순전의 경문(經文)조차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색이 올린 순전은 다만 요전(堯典) 중에서 그 절반을 잘라낸 것으로서, 서경(西京 서한(西漢)의 대명사) 이후로 요전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순전도 그대로 보존되었을 터인데, 어찌 꼭 공안국의 구본(舊本) 순전이라야만 고경(古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요방흥(姚方興)이 올린 순전 첫머리의 왈약계고(曰若稽古) 등 28자에 대해서는, 바로 요방흥의 위작(僞作)입니다. 그 뒤에 선비들이 아무리 왕연수(王延壽)와 왕찬(王粲) 등의 문자를 인용하여 요방흥의 순전 28자가 진본(眞本)이라고 입증하였지만, 신은 이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정현(鄭玄)이 주석한 《두림칠서상서(杜林漆書尙書)》가 진작 없어져 버렸으니, 《상서》 58편이 모두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진본이 아닌 것이지, 순전(舜典)만이 공안국의 진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고공기(考工記)가 간혹 주관(周官)과 틀리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주례(周禮)》5편이 비록 주공(周公)이 손수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유흠(劉歆)의 위조(僞造)는 절대로 아닙니다. 동관(冬官 《주례》의 편명) 1편은 한 경제(漢景帝) 시대에 천금(千金)을 상(賞)으로 걸어 놓고 구입하여도 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고공기로써 동관편(冬官篇)의 유실 부분을 보완하였기 때문에 장씨(匠氏)에 관한 일에만 특별히 상세하고, 다른 것은 다 구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공기가 선진(先秦)의 고문(古文)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송(宋) 나라 선비들처럼 헐뜯고 배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주(周) 나라의 법도는 《주례(周禮)》속에 갖추어져 있다 하였고, 또 《주례》의 규모는 모두 주공(周公)이 만든 것이라고 하였으니, 《주례》 6편의 문자를 부질없이 의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노론(魯論 노(魯) 나라 사람들이 전한 현행 《논어》)》과 《제론(齊論 제(齊) 나라 사람들이 전한 《논어》)》이 다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전해 온 것인데, 문왕편(問王篇 《제론》에 있는 편명)이《장후론(張侯論 한(漢) 나라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전한 《논어》)》에는 삭제되었고,《맹자내서(孟子內書 현재의 《맹자》7편을 가리킴)》와 《맹자외서(孟子外書《맹자》7편 이외에 4편으로 된 책)》도 모두 맹자(孟子)에게서 나온 것인데, 성선편(性善篇《맹자》 외서에 있는 편명)이 유독 조기(趙岐)가 주(注)를 낸 《맹자》에 누락되었으니, 경전(經傳)이 후세에 전하여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데에는 그 기수(氣數)가 있는 것인가.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 서경(西京) 시대에 성행하다가, 진(晉)ㆍ위(魏)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학설이 차츰 미약하여졌고, 《좌씨전(左氏傳)》은 장창(張蒼)에게서 처음 출현되었지만, 당(唐)ㆍ송(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학관(學官)을 설립하여 주석을 내었으니, 한번 성행하기도 하고 한번 침체되기도 하는 데에는 정말 시운(時運)이 있는 것인가.


문왕편(問王篇)이 《장후론(張候論)》에 삭제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논어》는 모두 세 종류로서 문왕편과 지도편(知道篇)은 《제론》에만 있습니다. 경적지(經籍志)를 살펴보건대 ‘장우(張禹)가 《제론》과 《노론》두 가지 책을 하나로 합쳐, 그 중에 번거롭고 의심스럽거나 넘치거나 거짓스러운 것을 삭제해 버렸는데, 고문(古文) 《논어》가 출현되자 과연 《노론》과 서로 합치되었다.’ 하였으니, 문왕편 등이 《장후론》에 삭제당한 것은 필시 당시에 적실한 근거가 있었을 터이므로, 문왕편이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성선편(性善篇)이 유독 조기가 주를 낸 《맹자》에 누락된 데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맹자외서》는 바로 성선변(性善辨)ㆍ문설(文說)ㆍ효경(孝經)ㆍ위정(爲正) 등 4편입니다. 조 대경(趙臺卿 대경은 조기(趙岐)의 자)이, 《맹자외서》의 글은 깊이도 없을 뿐더러 말도 모방한 점이 많다고 하였으니, 당시에 《맹자외서》를 방치해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筍子)》에 실린, 사심(邪心)부터 먼저 퇴치시켜야 한다느니 나쁜 마음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말이나, 《양자(楊子)》에 실린, 뜻은 있으나 도(道)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있다는 말들은 모두 《맹자》의 7편 중에 있는 글은 아니지만, 역시 후인들을 충분히 깨우쳐 분발시킬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혹 《맹자외서》가 방치당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ㆍ《좌씨전(左氏傳)》이 한번 성행하기도 하고 한번 침체되기도 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경전(經傳)이 성행하거나 쇠퇴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당시 임금의 좋아하고 싫어함과 주석을 낸 학자들의 잘하고 서투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경제(漢景帝)가 《공양전》을 좋아하자 호모생(胡母生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공양전》에 밝았음)과 동중서(董仲舒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공양전》에 밝았음) 등의 《공양전》학설이 수립되었고, 한 선제(漢宣帝)가 《곡량전》을 좋아하자 채천추(蔡千秋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와 유향(劉向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 등의 《곡량전》학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중서는 재변(才辯)이 능한 반면에 강옹(江翁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은 천성이 어눌하였기 때문에 《공양전》은 성행하고 《곡량전》은 침체되었던 것이며, 영광(榮廣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은 박학(博學)한 반면에 휴맹(畦孟 맹은 한(漢) 나라 휴홍(畦弘)의 자로 《공양전》에 밝았음)은 말이 궁색한 때문에, 《곡량전》은 성행하고 《공양전》은 침체되었던 것입니다. 《좌씨전》에 있어서는 장창(張蒼)에게서 처음으로 출현되어 본래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없다가, 한 문제(漢文帝)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의(賈誼)가 《좌씨전훈고(左氏傳訓詁)》를 저술하여 관공(貫公)에게 전수하였고, 그 뒤에는 유흠(劉歆)이 《좌씨전훈고》를 고찰 시정하여 학교의 과목으로 선정하려 하였으나 여러 선비들이 호응하여 주지 않았으며, 건무(建武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연호) 이후에 이르러서 한흠(韓歆)ㆍ진원(陳元)ㆍ이봉(李封) 등이 모두 《좌씨전》을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가규(賈逵)ㆍ복건(服虔)ㆍ두예(杜預) 등이 서로 전해 가면서 《좌씨전》을 해석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위(魏)ㆍ진(晉) 시대에 성행할 수 있게 되었고 수(隋)ㆍ당(唐) 이후부터는 마침내 《공양전》이나 《곡량전》 등의 권위를 앗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춘추》의 경지(經旨)를 발명함에 있어서는 《공양전》이나 《곡량전》 등이 《좌씨전》보다 나으므로, 지금은 한쪽만을 폐기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상서(尙書)》의 금문(今文 복생(伏生)이 외어서 전한 《서경(書經)》 문자)과 고문(古文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서경》 문자) 중에 어떤 것이 진본(眞本)이고 어떤 것이 위본(僞本)인지 증거가 없고, 《모시(毛詩)》의 대서(大序)소서(小序)에 대해서도 누구의 말을 따르고 누구의 말을 버릴 것인지 해결할 수 없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은 사시절(四時節)도, 달도 개정한 것이라[改時改月]고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공안(公案)이요, 속임(屬衽)과 구변(鈳邊)을 합쳐서 꿰매느니, 덮어서 꿰매느니 하는 문제도 예부터 여러 변론이 있다. 이상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과연 널리 인증하고 자세히 고증하여 천고(千古)의 의문점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겠는가.


《상서》의 고문과 금문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이에 대한 말들이 매우 번거로우므로 죄다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훼지고(仲虺之誥 《서경》 상서(商書)의 편명)의, 미약한 제후(諸侯)는 병합하고, 우매한 제후는 공략해야 한다[兼弱攻昧]는 말은 도리어 《좌전(左傳)》의 글귀를 표절하였고, 대우모(大禹謨 《서경》 우서(虞書)의 편명)의, 고요(臯陶)를 버린다 해도 그 생각이 고요에게만 있다[釋玆在玆]는 말은 《좌전》의, 참으로 자기부터 전일하여야 한다[信壹]는 뜻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혹[疣] 같은 존재임을 엄폐할 수 없고, 또 조각조각 깨뜨려진 흔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나는 일찍이 공안국(孔安國)의 《서전(書傳)》이 위서(僞書)인 것으로 의심하였다.’ 하였으니 신도 감히 여기에 이의(異議)가 없습니다. 《모시(毛詩)》의 대서(大序)와 소서(小序)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이에 대한 말들이 역시 장황하므로 어느 겨를에 죄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서에 박잡(駁雜)한 점이 없지 않는 것은 참으로 주자(朱子)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소서가 꼭 위굉(衛宏)의 손에서 나왔느냐는 것에는 분명한 증거가 없으나, 대모공(大毛公 모형(毛亨)을 가리킴)과 소모공(小毛公 모장(毛萇)을 가리킴) 사이에는 분명히 전수하여 준 맥락이 있으므로, 소서를 모공(毛公)이 저술하였다고 한 말은 전혀 배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의 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신이 감히 주착없이 단정할 수는 없으나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 하(夏) 나라의 역법(曆法) 사시절(四時節)을 주(周) 나라의 달 앞에 올려 놓았다[以夏時冠周月]고 한 말은,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사시절이나 달을 개정하지 않았다는 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빈풍(豳風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 칠월장(七月章)과 이훈(伊訓 《서경》 상서(尙書)의 편명)의 ‘십이월(十二月)’이란 문구와 《사기(史記)》 본기(本紀)의 ‘동시월(冬十月)’이란 문구로써 구실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시(毛詩)》나 《주례(周禮)》에는 하정(夏正 하(夏) 나라의 역서법(曆書法)으로 지금의 태음력(太陰曆))을 많이 사용하였고, 《상서(尙書)》나 《춘추》에는 주정(周正 주(周) 나라의 역서법(曆書法)으로 하정(夏正)의 자월(子月)인 11월을 정월로 삼았음)을 아울러 사용하였던 증거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에 대한 말이 비록 왕양명(王陽明 양명은 명(明) 나라 왕수인(王守仁)의 호)에게서 나왔지만 소홀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춘추》 장공(莊公) 7년에, 가을에 홍수(洪水)로 맥묘(麥苗)가 없어졌다고 한 것이나, 환공(桓公) 8년에, 겨울에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한 것이나, 은공(隱公) 9년에, 3월에 천둥과 번개가 있었다고 한 것이나, 환공(桓公) 14년에, 봄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고 한 것이나, 정공(定公) 원년에, 10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 따위들은 모두 재이(災異)를 기록한 것인데 이를 하(夏) 나라의 역법(曆法) 사시절(四時節)로 따져 보면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서, 재이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춘추》에, 여름 4월에 정(鄭) 나라가 온(溫) 땅의 보리를 탈취해 갔다는 것이나, 가을에 또 주(周) 나라의 벼를 탈취해 갔다는 것만은, 위 요옹(魏了翁 요옹은 송(宋) 나라 진관(陳瓘)의 호)의 《정삭고(正朔考)》에서, 이는 하정(夏正)을 사용한 분명한 증거라고 하였으니, 신은 이에 대해 가부를 논란할 수 없습니다. 속임(屬衽)과 구변(鉤邊)에 대한 변론이 여러 가지인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속(屬)’은 잇댄다는 뜻으로서 심의(深衣)는 몸을 깊숙이 가리려는 것이므로 의신(衣身) 곁에 또 1폭(幅)을 잇대어, 이것을 ‘속임’이라 합니다. ‘구(鉤)’는 ‘구(袧)’의 뜻으로서 주름잡는 것입니다. 심의의 치마[裳] 앞쪽이 비록 6폭이지만 옷섶을 여미고 나면 앞쪽은 3폭으로 되고, 뒤쪽도 비록 6폭이지만 양쪽 갓폭[邊幅]을 제하고 나면 뒤쪽은 4폭으로 됩니다. 양쪽 가의 2폭은 좌우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는데, 이 2폭만이 특별히 주름을 잡아서, 마치 오늘날의 직령(直領)과 같기 때문에 이것을 구변(鉤邊)이라 합니다. 그런데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자)의 말에 구변은 지금의 곡거(曲裾)와 같은 것으로, 까마귀부리처럼 만든다고 한 제도와 양신재(楊信齋 신재는 송(宋) 나라 양복(楊復)의 호)의 말에, 속임은 합쳐서 꿰매고 구변은 덮어서 꿰맨다고 한 법에 대해서는, 신은 무슨 말들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주례》에 보이는 관직 제도를 주관(周官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과 비교해 보면 엇갈린 것이 많고, 추성(鄒聖 맹자(孟子)를 가리킴)의 분전(分田 토지를 분할하여 백성에게 나눠줌)에 대한 의론을 왕제(王制 《예기》의 편명)에 상고해 보면 합치하지 않는다. 이 모두 경전(經傳)에서 나온 것인데도 이처럼 엇갈림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벽옹(辟雍 주(周) 나라 태학교의 이름)이 태학교(太學校)의 이름으로 잘못 불렸다는 것은 진작부터 양승암(楊升菴 승암은 명(明) 나라 양신(楊愼)의 호)의 분명한 증거가 있고, 교제(郊祭)체제(禘祭)가 백금(伯禽 주공(周公)의 아들)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도 방합산(方合山)의 적실한 증거가 있으니, 벽옹과 교제ㆍ체제 등이 비록 경전에 나타난 것이지만 역시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인가. 왕개보(王介甫 개보는 송(宋) 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자)가 좌씨(左氏)에 대하여 변론한 것이 11가지의 분명한 증거가 있고, 임효존(林孝存)이 《주례》에 대하여 논박한 것도 십론(十論)ㆍ칠난(七難) 등이 있는데, 이 모두 낱낱이 들어서 되풀이하여 토론할 수 있겠는가.


《주례》가 주관과 많이 엇갈린다는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사공(司空 벼슬이름)이 주관에서는 국가의 토지만을 관장하였는데 《주례》에서는 모든 공장(工匠)들을 관장하였고, 삼공(三公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과 삼고(三孤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도 주관에서는 관직 책임이 있는데 《주례》에서는 육관(六官)에 들어 있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주관과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관(冬官 주(周) 나라 육관(六官)의 하나로 토목(土木) 공작(工作)을 관장하였음)은 본시 빠진 것을 보완한 것이므로 굳이 주관과 서로 합치시킬 필요가 없고, 삼공이나 삼고는 이미 유사(有司)가 아니니, 어찌 육관에 배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례》를 공박하는 사람들이 꼭 주관까지 아울러 비난하니, 《주례》와 주관이 합치하지 않는 데 대해 번거로이 변론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맹자(孟子)》가 왕제(王制)와 합치하지 아니한다는 데 대해서는 신이 상고하건대, 맹자가 북궁의(北宮錡)의, 주(周) 나라 관작(官爵)과 봉록(俸祿) 제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제후(諸侯)들이 자기들에게 방해되는 것을 싫어하여 관작이나 봉록에 대한 전적(典籍)들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일찍이 그 대략은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말도 미비한 점이 없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노식(盧植)의 말에 의하면 ‘한 문제(漢文帝)가 박사 제생(博士諸生)에게 명하여 왕제(王制)를 저작하도록 했다.’고 하였는데, 왕제의 말이 본시 틀린 점이 많은 것은 그들이 스승에게 배우거나 전해 들은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니, 맹자의 말이 혹시 왕제와 다른 점을 이상하게 여길 나위가 없습니다. 벽옹(辟雍)이 태학교(太學校)의 이름으로 잘못 불렸다는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벽옹을 영대(靈臺)라고 한 것은 《좌씨전(左氏傳)》에서 나온 것으로, 영대는 태묘(太廟)의 부지(敷地) 안에 있고, 그 사방에는 영소(靈沼)가 빙 둘러 있기 때문에 벽옹이라 한다 하였으며, 그 뒤 한(漢) 나라에 이르러서는 영대와 벽옹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시설(韓詩說)에, 옹(雍)을 화(和)라 하였으니, 영대는 본래 분침(氛祲 요사스러운 기운) 등을 관찰하는 곳이요, 벽옹은 본래 태학교의 이름입니다. 채옹(蔡邕)의 《명당월령론(明堂月令論)》에도, 태묘와 학궁(學宮)이 통합된 제도를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벽옹은 그대로 태학교의 이름입니다. 장자(莊子)가 벽옹을 음악 이름으로 일컬은 데 대해서는, 음악 이름을 태학교인 벽옹으로 간주한 것에 불과하니, 이는 굳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양신(楊愼)의, 벽옹이 태학교의 이름으로 잘못 불려졌다고 한 말은 저절로 틀린 셈입니다. 교제(郊祭)와 체제(禘祭)가 백금(伯禽)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노(魯) 나라에서 지낸 교제는, 다만 하늘[上帝]에 풍년을 기원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가어(家語)》에, 공자(孔子)가 노 정공(魯定公)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노 나라에는 동지(冬至)에 지내는 대교(大郊)가 없다.’ 하였습니다. 또 《춘추(春秋)》에 교제에 대해 기록된 것이 통틀어 9건이 있지만, 모두 여름 4월에 있었고 봄 정월에는 있지 않으니, 자월(子月 음력 11월을 말함)의 장지(長至 동지(冬至))에 지내는 교제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또 성공(成公) 17년에는 교제가 가을 9월에 있었으니, 이는 바로 주송(周頌 《시경》 삼송(三頌)의 하나로 주(周) 나라 종묘(宗廟) 음악)의 가을에 보답하는 제사로, 모두 천자(天子)의 예(禮)를 참람되이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노(魯) 나라에서 지낸 체제(禘祭) 역시 길체(吉禘)와 시체(時禘) 등입니다. 이를테면 《춘추》에, 민공(閔公) 2년에 장공(莊公)에게 길체를 지냈다는 것과 왕제(王制 《예기》의 편명)에, 봄에는 약제(礿祭)를 지내고 여름에는 체제(禘祭)를 지낸다는 것과 제의(祭義 《예기(禮記)》의 편명)에, 봄에는 체제를 지내고 가을에는 상제(嘗祭)를 지낸다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공(周公)에게만 교제(郊祭)와 체제가 있었으므로 제통(祭統 《예기(禮記)》의 편명)과 명당위(明堂位 《예기》의 편명)에 모두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주공은 천하에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중대한 제사를 하사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시조(始祖)에게 제사지내고, 시조왕(始祖王)의 사당을 건립하였다는 말이 《좌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노 나라의 다른 공(公)들에게까지 교제와 체제를 무분별하게 지낸 것만은 비례(非禮)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예운(禮運 《예기》의 편명)에 공자(孔子)가, 노 나라의 교제와 체제는 예(禮)가 아니니, 주공(周公)의 도(道)가 쇠퇴해진 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제와 체제가 일찍이 백금(伯禽)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여러 공들의 사당에까지 무분별하게 지낸 것은 희공(僖公)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방합산(方合山)의 교제와 체제가 백금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은 참으로 미비한 점이 있는 셈입니다. 왕개보(王介甫)가 좌씨(左氏)를 변론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좌씨해(左氏解)》에 좌씨를 육국(六國 전국시대 제(齊)ㆍ초(楚)ㆍ연(燕)ㆍ한(韓)ㆍ위(魏)ㆍ조(趙)를 말함) 시대 사람이라고 전적으로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진씨(陳氏)가 이미, 《좌씨해》는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소작이 아니라고 변론하였습니다. 《좌씨해》에 이른 11가지 분명한 증거가 있다는 말을 비록 낱낱이 상고해보지는 못하였지만, 한(韓)ㆍ위(魏)와 지백(智伯 진(晉) 나라 대부(大夫))의 사건과, 조 양자(趙襄子)의 시호(諡號)진(秦) 나라의 서장(庶長)이라는 관작과, 우(虞) 나라가 납제(臘祭)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자들이 모두 《좌씨전》에 실려 있기 때문에 좌씨를 육국 시대 사람이라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유향(劉向)ㆍ유흠(劉歆)ㆍ두예(杜預) 등이,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와 함께 노(魯) 나라의 사기(史記)를 보고서 《춘추》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었다는 말은 수다스럽게 변론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임효존(林孝存)이 《주례》를 논박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임석(林碩)의 자(字)는 효존으로, 한(漢) 나라 시대에 이름이 나지 못하고 있다가 특히 《주례》를 공박한 것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주례》를 말세(末世)에 어지럽혀져 고증(考證)에 맞지 않는 책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이른, 십론(十論)ᆉ칠난(七難) 등은 모두 전하여진 것이 없고, 오직 가공언(賈公彦)의 석의(釋義)에 두어 대목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거칠고 증거가 없으므로 서술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언(文言)ㆍ단(彖)ㆍ상(象)을 괘(卦) 아래에 차례로 모은 것은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춘추(春秋)》의 경(經)과 전(傳)을 연도별로 나눠 붙인 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엄중(淹中)에서 나온 일례(逸禮)로서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대기(戴記)》중에서 어느 편(篇)이며 벽(壁)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으로서 금문(今文)에 비하여 불어난 것은 《효경(孝經)》중에서 어느 장(章)인가. 구려(駒驪 고구려를 말함)의 건국이 한 원제(漢元帝)의 뒤였는데 공안국(孔安國)의 주(注)에는 그 이름이 미리 열거되었으며 서장(庶長)의 벼슬을 둔 것이 진 효공(秦孝公) 때에 시작되었었는데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에 이 관명(官名)이 앞서 언급된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문언ㆍ단ㆍ상을 괘 아래에 차례로 모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주역(周易)》은 상구(商瞿)가 공자(孔子)에게 배운 뒤로부터 여섯 번을 전수하여 전하(田何)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초공(焦贛)ㆍ비직(費直)이 있었습니다. 한(漢) 나라 말엽에 이르러서는 전하와 초공의 학통이 미약해져 끊어지고 비씨만이 홀로 남았으니, 동경(東京 후한(後漢)을 가리킴)의 순상(荀爽)ㆍ유표(劉表)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은 모두 비직의 학통을 전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언ㆍ단ㆍ상이 괘 아래에 든 것은 비록 왕필(王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왕필 또한 비직의 학통이었으니, 그 근본은 비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춘추》의 경과 전을 연도별로 나눠 붙인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본시 전주(箋注) 체제여서 당시에 이미 《춘추》의 정경(正經)에 삽입되었고 일찍이 별도로 나오지 않았으며, 《좌씨전》만은 경은 경대로 전은 전대로였던 것을 원개(元凱 진(晉) 나라 두예(杜預)의 자(字))에 이르러 비로소 《좌전》을 나눠서 경문 각 연도의 뒤에 붙였습니다. 즉 원개 자신이 쓴 서문에 ‘경문을 연도로 나눠서 전(傳)의 연도와 서로 부합되게 했다.’ 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엄중에서 나온 일례로서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신이 상고하건대 노(魯) 나라의 엄중에서 나온 고경(古經)의 예(禮)가 본래 56편이었는데, 그 중에 17편은 한(漢) 나라 초기 고당생(高堂生)이 전한 17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선제(漢宣帝) 때에 이르러 후창(后蒼)이 이 17편에 가장 밝았고 이에 《곡대기(曲臺記)》를 지어 양(梁) 나라 사람 대덕(戴德 《대대례(大戴禮)》의 편자)ㆍ대성(戴聖 《소대례(小戴禮)》의 편자)과 패(沛) 땅 사람 경보(慶普)에게 전수하였습니다. 한 나라 말기 정현(鄭玄)은 소대(小戴 대성을 말함)의 학통을 이어 고경(古經)을 교감하고 주석을 냈으니, 바로 지금의 《의례(儀禮)》17편이며 그 중 상복(喪服) 1편은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 복상(卜商)의 자)가 이전에 전수한 것으로 여러 선비들이 많이 주석하여 본래 별도로 유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엄중에서 나온 일례로서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바로 《의례》17편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소대례(小戴禮)》인데, 세상에서 다만 《예기(禮記)》를 소대의 기록으로 알고 있으니, 이는 오류를 그대로 인습한 것입니다. 또 《논형(論衡)》에서 말한 ‘하내(河內)의 여자(女子)가 오래된 집을 헐다가 일례(逸禮) 한 편을 얻었다.’ 하는데, 이는 이것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고문 《효경(孝經)》이 금문에 비하여 불어난 것은, 신이 상고하건대 《효경》은 본래 《상서(尙書 《서경(書經)》을 말함)》와 함께 공벽(孔壁)에서 나온 것을 공안국(孔安國)이 전(傳)을 지은 것입니다. 또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하간(河間) 사람 안지(顔芝)가 소장한 것을 한 나라 초기에 안지의 아들 정(貞)이 내놓았는데, 유향(劉向)이 안지의 본(本)을 고문(古文)에 비해서 번잡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삭제되었다고 했으며, 공안국의 본은 양(梁) 나라 때 없어졌다가 수(隋) 나라 때에 이르러 하간의 유현(劉炫)이 민간에서 구입하여 조정에 올려졌으나 선비들은 모두 유현의 위조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고문본입니다. 그러나 그 불어났다는 것도 많아보았자 규문(閨門) 1장의 24자와 한(閑) 자ㆍ좌(坐) 자ㆍ삼(參) 자ㆍ자왈(子曰)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유향이 삭제했다고 한 것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유현의 위조로 직단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금문본과 고문본을 함께 대조 연구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공안국이 구려의 호칭을 미리 열거한 것은, 신이 회숙신지명(賄肅愼之命 《서경(書經)》의 일편(逸篇) 이름)을 상고하건대 공안국 주(注)에 ‘동해(東海)의 고구려ㆍ부여(扶餘)ㆍ간(馯)ㆍ맥(貊)의 족속을 주 무왕(周武王)이 모두 통했다.’ 했는데, 후세의 선비들이 ‘구려의 임금인 주몽(朱蒙)은 한 원제(漢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년)에 비로소 국호를 세웠다. 공안국이 조칙을 받아 《서경》의 전(傳)을 지을 때도 중국과의 왕래가 통하지 않았거든, 하물며 무왕 때이겠는가.’ 했으므로 신은 이것을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국호는 본시 지명(地名)을 따랐으므로 주몽의 건국이 비록 원제 때에 있었다 하더라도 구려란 땅 이름은 당연히 공안국 이전에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미리 열거한 것이 되겠습니까.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보면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高句麗)를 현(縣)으로 만들었다.’ 했으며 《한서(漢書)》에도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무제 때에 설치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리지(地理志)의 현도군 속현(屬縣)에 구려가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구려라는 이름은 사실 무제 이전에 있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고문이 허위란 확증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좌구명(左丘明)이 서장(庶長)을 앞서 언급한 것은, 신이 살피건대 《좌전》에 불경(不更 관명)인 여보(女父)와 진(秦) 나라 서장 포(鮑)와 서장 무(武)가 보이는데, 후세의 선비들이 ‘진(秦) 나라가 효공(孝公) 때에 이르러 적의 수급(首級)을 벤 데 대한 관작을 정하면서 불경과 서장의 칭호가 있었으니, 좌씨는 당연히 진 효공 이후의 사람이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 또한 잘못이라 여깁니다. 진 나라가 주 효왕(周孝王) 때부터 비자(非子)가 나라를 받았으니, 춘추 시대 이전에도 그 나라가 없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가 있었으면 관청을 두었을 것이고 관청을 두었으면 벼슬 이름이 있었을 것이므로, 다만 불경과 서장에 대한 기록이 우연히 효공 때에 보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왕계(王稽) 이전에는 진 나라에 알자(謁者)란 벼슬이 없었고 조고(趙高) 이전에는 진 나라에 중거부령(中車府令)이란 벼슬이 없었단 말입니까. 이는 두 사람의 좌씨(左氏)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아(爾雅)》가 과연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라면 바람과 비에 대한 해석에서 어찌 《초사(楚辭 한(漢) 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책 이름)》의 글귀를 인용했으며, 《효경》이 진실로 중니(仲尼 공자의 자)가 지은 것이라면 첫장의 글에서 무슨 까닭에 증자(曾子)라 호칭하여 말하였겠는가. 《공양전(公羊傳)》의 소(疏)는 지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혹 서언(徐彦)이라고 자칭한 것은 어느 것에 의거한 것이며, 《추전(鄒傳 《맹자(孟子)》)》은 처음에는 유가류(儒家類)에 끼었었는데, 경류(經類)의 서열에 올린 것은 누가 한 것인가.


《이아》에 《초사》를 인용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육씨(陸氏 육덕명(陸德明)을 말함)의 《경전석문(經傳釋文)》에 ‘《이아》를 주공이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석고(釋詁 전체 19편 중의 수편(首編) 이름) 한 편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대체로 위(魏)의 장읍(張揖)이 올린 광아표(廣雅表)에 기인된 것입니다. 그 나머지 편들은 어떤 이는 ‘중니와 자하(子夏 복 상(卜商)의 자)가 덧붙인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숙손통(叔孫通)이 증보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패군(沛郡)의 양문(梁文)이 고증한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곽박(郭璞)의 서문에도 단지 ‘중고(中古) 때 시작되어 한(漢) 나라 때에 융성했다.’ 하였을 뿐, 지은 사람은 밝히지 않고 있으니 석천편(釋天篇)은 주공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암무지개는 혈이(挈貳)라 하고 폭우가 먼지를 쓸어간다.[蜺爲挈貳 涷雨灑塵]’는 본래 곽박(郭璞) 주소에 있는 문구이니, 이것을 가지고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효경》에서 증자라 호칭한 것은, 신이 살피건대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효경》은 공자가 증자를 위해서 효(孝)의 도리를 말한 것이다.’ 하였으나 이것을 가지고 공자가 지은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휴(何休)의 말에 ‘공자가, 나의 뜻은 《춘추》에 있고 행동은 《효경》에 있다고 했다.’ 하였으니, 이 말을 믿는다면 《효경》은 공자가 직접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는 본래 노(魯) 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이었는데 공자가 따다가 책 이름으로 삼았으니, 《효경》도 예부터 전해오는 책을 증자의 문도(門徒)가 따다가 책 이름으로 삼은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첫 장에서 증자라 호칭한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양전》의 소에 대해 어떤 이가 서언(徐彦)의 것으로 지칭하는 것은, 신이 살피건대 《숭문총목(崇文總目)》에도 지은 사람의 성명이 나타나지 않았고 하휴(何休) 이후의 역대 유림전(儒林傳)에도 모두 서언이라는 두 글자가 없습니다. 다만 《광천장서지(廣川藏書志)》에 ‘세상에 서언이란 사람이 전해오고 있으나 어느 시대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는데 진씨(陳氏)가 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ㆍ장경(長慶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의 후대로 짐작된다고 한 것도 억측의 말입니다. 《맹자》가 경류의 서열에 오른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맹자》가 진시황(秦始皇) 때 불에 소각되지 않은 것은 본래 제자류(諸子類)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 문제(漢文帝) 때에 이르러 《논어(論語)》와 함께 아울러 박사(博士)를 두었었으나 그대로 제자류였으므로 전기박사(傳記博士)라 칭하였으며,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조기(趙岐)가 처음으로 주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양한(兩漢) 이래의 예문지에는 모두 《논어》는 경류에 삽입되고 《맹자》는 유가류(儒家類)에 삽입되었다가 양(梁)ㆍ수(隋) 무렵에 비로소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과 아울러 ‘소경(小經)’으로 칭하여졌습니다. 이 때문에 직재 진씨(直齋陳氏 송(宋) 나라 진진손(陳振孫)을 말함)의 《서록해제(書錄解題)》에는 이를 따라서 《논어》ㆍ《맹자》를 함께 경류에 삽입시켰고 송(宋) 나라에 이르러서는 맹자를 점점 더 높이고 숭상하여 안자(顔子)ㆍ증자(曾子)와 나란히 태학(太學)에 배향(配享)하였습니다. 이것이 《맹자》의 드러나고 묻힌 데 대한 전말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구사(九師)가 오면서 《주역》의 도(道)가 숨겨지고 오전(五傳)이 생기면서 《춘추》의 뜻이 흩어졌으며, 《대대기(大戴記)》와 《소대기(小戴記)》가 나오면서 예(禮)가 쇠잔해지고 《제시(齊詩)》ㆍ《노시(魯詩)》와 《한시(韓詩)》ㆍ《모시(毛詩)》가 생기면서 시(詩)가 미약해졌다.’ 하였다. 그렇다면 전(傳)이나 주(注)가 도움은 없고 도리어 해만 있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관학(館學)에서 상대할 이가 없고 전중(殿中)에서 쌍벽할 이가 없었으며, 정대춘(井大春 대춘은 정단(井丹)의 자)의 종합 박식과 주선광(周宣光 선광은 주거(周擧)의 자)의 종횡무진이 당세에는 훌륭히 칭찬되었으나 후세에는 전해지지 않았으며, 왕필(王弼)은 노장학(老莊學)에 침음(浸淫)하였고 범영(范寗)은 혹 참위설(讖緯說)에 관계되었으며,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의 주는 간혹 서로 모순되고 공영달(孔潁達)의 소(疏)는 오류와 번잡이 없지 않은데도, 지금까지 오래도록 침체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선유들의 설에 대하여 신이 생각하건대, 진 나라가 경적(經籍)을 불사른 뒤로 육경(六經)이 잿더미로 화하여 타다 남은 간편(簡編)들이 뒤섞여 민간에서 나왔으나 제(齊)ㆍ노(魯)의 여러 선비들이 제각기 들은 바를 적어 주석을 달지 않았던들, 천년 뒤에 어떻게 그 조금이나마 알아냈겠습니까. 왕발(王勃)이 지은 익주묘비(益州廟碑 공자의 비)에 ‘구사(九師)는 《주역》의 학파만 분리하였고 오전(五傳)은 《춘추》의 원폭(員幅)만 찢어 놓았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회피할 수 없는 비판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한 말로 결정지어 ‘숨겨졌다’ ‘흩어졌다’ ‘쇠잔해졌다’ ‘미약해졌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모두 마음과 기질이 거칠고 호방한 사람들이 함부로 선철(先哲)을 헐뜯는 말입니다.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유신[四儒臣]이 후세에 전하여지지 않는 것은, 신이 살피건대 《북사(北史)》에 ‘육애(陸乂)가 오경(五經)에 가장 정통하여 당시 관학에서는 상대할 이가 없었다.’ 하였고, 후한(後漢) 때 정홍(丁鴻)은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을 강론하였는데 당시 관중에서는 쌍벽할 이가 없었으며, 정단(井丹)과 주거(周擧)는 경전에 널리 통하고 담론을 잘하여 경사(京師)에서 노래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때 재주와 말솜씨만을 과시하였고, 후세에 전한 저술 공로가 없었으므로 지금 일컬어지지 않고 말았습니다.
네 주가[四注家]가 오래도록 침체되지 않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왕씨와 범씨는 혹 이단(異端)과 관계되었으나, 대성(戴聖)의 부정(不正)으로도 《예기》를 주석하는 데 해롭지 않았고 경방(京房)의 술수(術數)로도 《주역》을 주석하는 데 해롭지 않았으니, 그들이 이단에 관계되었다 하여 굳이 배척할 것은 못 됩니다. 정현과 공안국이 거칠고 잡스러움을 면치 못하였으나, 수많은 말 가운데서 혹 서로 모순되거나 호분누석(毫分縷析)하는 데 번잡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은 형편상 불가피한 일이니, 이것을 가지고 선유(先儒)를 경솔하게 배척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저 하늘을 날[經]로 하고 땅을 씨[緯]로 하는 것을 경(經)이라 이르고, 성인이 창작하고 이것을 현인이 서술한 것을 경이라 이르고, 고금을 통하고 우주를 미륜(彌綸)하는 것을 경이라 이르는데, 경이라는 것은 항구불변(恒久不變)의 지극한 도(道)요 없어지지 않는 큰 가르침이다. 깊고 넓은 것은 경의 문(文)이고, 간략하면서도 심오한 것은 경의 의(義)이고, 광대정명(光大貞明)한 것은 경의 가르침이다. 통명 지화(通明知化)하여 정미한 온오(蘊奧)를 다하고, 개물 성무(開物成務)하여 수많은 깊은 이치의 기틀을 다하였으니 아, 한량없이 크다. 저 구구히 형명 도수(刑名度數)에만 매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자는 경을 앎이 어찌 얕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秦) 나라에서 불타고 한(漢) 나라에서 유실(遺失)되어 단간궐문(斷簡闕文)을 상고하려 해도 증거할 데가 없는데, 오직 추(鄒)ㆍ노(魯)ㆍ제(齊)ㆍ양(梁) 사이에 시(詩)ㆍ예(禮)ㆍ《춘추(春秋)》에 밝은 이들이 유실된 것을 주워모으고 결루(缺漏)된 것을 보충하여 보물이나 보첩(譜牒)처럼 보유하였고, 진(晉)ㆍ당(唐)에 이르러서야 십삼경(十三經)의 전소(傳疏)와 전해(箋解)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므로, 구양수(歐陽脩)가 ‘여러 선비들의 장구(章句)의 학문이 돌아가면서 서로 강론하고 서술하여 성도(聖道)가 대략 밝혀졌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그 말들이 모두 순수하지는 못하나 그 공로는 민멸할 수 없다. 송(宋) 나라 군자들이 나오면서부터 전해지지 않은 수사(洙泗 공자를 말함)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漢)ㆍ당(唐)의 천착한 누습(陋習)을 쓸어버렸으며,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예기》에서 발췌해 내고 《맹자》를 격상시켜 《논어》와 짝하게 하여 한 세상을 심성 도기(心性道器)의 학설로써 고동시켰다. 이에 유림(儒林)과 도학(道學)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양한(兩漢) 이래 훈고 명물(訓詁名物)의 학문이 차츰 사라져갔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십삼경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은 깊고 빛나서 천지에 참여하고 우주에 뻗쳤으며, 그 문체는 별처럼 반짝거리고 태양처럼 찬란하며, 그 부유(富裕)함은 땅처럼 두텁고 바다처럼 넓어 정미한 뜻이 신(神)의 경지에 들고 신묘한 묵계가 도(道)에 부합되었으니, 참으로 기송(記誦 훈고학(訓詁學)을 말함)하는 선비로서는 그 한쪽도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진 나라에서 불타고 한 나라에서 유실되었으나 남은 간편(簡編)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제(齊) 나라에서 영가(詠歌)되고 노(魯) 나라에서 송독(誦讀)되어, 남은 향기가 지금까지 전하여졌으니, 실로 도(道)를 안고 경(經)을 궁구하는 사람이 시대마다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간혹 순금 속에 철(鐵)이, 쌀 속에 쭉정이가 있기도 하였으나 그 공로가 허물을 덮을 수 있으니, 이는 군자들이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송 나라의 군자들이 나오면서부터 또 한번 그 도를 발전시켰고,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회통(會通)시키고 대일통(大一統)하여 거듭 창건해서 천고(千古)를 능가하고 우주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연대가 멀고 사실을 증거할 수 없어 비록 주 부자(朱夫子)의 해박한 지식으로도 오히려 자신이 있는 것은 남겨 놓고 의심스러운 것은 빼놓았으며, 처음에는 갑(甲)이라 하였고 나중에는 을(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주자가 한(漢) 나라 초기 책을 구해들이던 때에 출생하지 못해, 공안국ㆍ정현ㆍ유향(劉向)ㆍ동중서(董仲舒)의 무리들이 그 학술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합니다.

황명(皇明) 영락(永樂 성조(成祖)의 연호) 연간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학궁(學宮)에 반사(頒賜)한 뒤로부터 농사짓는 선비나 책 속에 사는 생도들이 어려서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학습하여도 끝내 호광(胡廣 명 나라 사람)과 해진(解縉 명 나라 사람)이 만든 대전(大全)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만약 공안국ㆍ정현 이후에 전해오는 학설과 마융(馬融)ㆍ왕숙(王肅) 등 제가(諸家)들의 동이점(同異點)을 물으면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린 채 대답을 못한다. 이러고서도 교학(敎學)의 공로를 빛내고 천고 유림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면 어찌 서로 모순되어 어렵지 않겠는가. 오늘날 경전의 근원을 소급(溯及)하고 속학(俗學)의 잘못을 바로잡아, 큰 것만을 힘쓰고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지금것만을 본받고 옛것을 그르다 하지 않으며, 뜻을 공손히 가져 널리 배우고 먼저 나온 학설을 기본으로, 뒤에 나온 학설을 뒤로 하여, 십삼경의 뜻이 조목마다 해석되어 해와 별처럼 환하게 하려면 그 방법이 어떻게 되는가. 그대들은 경전을 궁구하고 옛것을 배운 데다가 평소에 강구한 것이 있을 것이니, 각기 규정된 법식은 타파하고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내가 지금 임헌(臨軒)하여 기다리고 있노라.


대명(大明)이 천하를 다스려 문명이 크게 밝아지면서 주자(朱子)를 존신(尊信)하고 다른 학설을 금지하였으며, 사서ㆍ삼경을 학궁에 반포하고 호광ㆍ해진 등을 시켜 대전(大全)을 편찬케 하여 천하 학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지혜와 의사를 무시하고 모두 여기에 추향(趨向)하도록 함으로써 양한(兩漢) 이래의 여러 학설이 유통되지 못하고 폐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제자(諸子)들의 학통을 바르게 하고 한 세대의 잘못을 구제하는 데는 참으로 도움이 되었으나, 그 폐단은 교왕(矯枉)의 과도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뒤에 몽매한 선비들이 용렬하고 거칠어서 애당초 학문의 이동설(異同說)과 경적의 신구본(新舊本)이 있는 줄을 모른 채, 굳어진 학설만을 따르고 세속의 학문만을 숭상하여 마치 하늘이 만들어 낸 것으로 알 뿐 자기의 총명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옛것을 소급하여 근본을 찾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고 지적하고, 경(經)을 인용하여 전(傳)을 증거하는 사람에게는 기묘한 것을 숭상한다고 꾸짖어 《의례(儀禮)》가 폐물로 되고 《주례(周禮)》가 벽서(僻書)로 되었으며,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 이단으로 돌아가 《이아(爾雅)》와 《효경(孝經)》이 부적이나 비기(袐記)처럼 여겨졌는가 하면, 마융과 정현은 그 성명마저 희미해지고 공영달(孔潁達)의 소(疏)나 가공언(賈公彦 공언은 가규(賈逵)의 자)의 석(釋)은 그 면목조차 볼 수 없는 채, 소략하고 멸렬하여 다시는 옛것을 계승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문(斯文)의 침체됨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습니다. 아, 천하의 일이 처음에는 한 이치로 시작되었다가 중간에는 온갖 다른 것으로 분류되고 끝에는 다시 한 이치에 합치됩니다. 그러므로 박문(博文)한 뒤에 약례(約禮)하는 것이 성문(聖門)의 전해오는 법입니다.
지금 경전(經典)의 설(說)들이 어지럽고 뒤섞여서 그 강기(綱紀)가 없으니, 진실로 정밀히 선택하고 널리 채취하여 그 표준을 알고 그 표준에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경(經)의 도(道)가 거의 꺼져갈 것입니다. 아가위[楯]ㆍ배[梨]ㆍ등자[橙]ㆍ귤(橘) 등 맛이 다른 과일을 소반에 함께 늘어 놓으면 자리에 앉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것이고, 금(金)ㆍ패(貝)ㆍ주(珠)ㆍ옥(玉) 등 질이 다른 보배를 저자에 같이 늘어 놓으면 구하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박한 선비로 하여금 서적을 널리 구해들이고 아울러 감식(鑑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의대로 선택하게 하여, 경문(經文) 아래에 그 세대를 참고하고 그 전주(箋注)를 싣되, 그 중에 번잡한 것은 산삭하고 중복된 것은 도태하여, 위로 진(秦)ㆍ한(漢)에서 아래 황명(皇明)에 이르기까지 새로 발명된 학설로서 한 가지 뜻이라도 갖춰진 것이면 모두 그 정미한 뜻만을 취하고, 무릇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쓸모없는 말은 모두 산삭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글읽는 선비들로 하여금 책을 펴보면 어떤 학설은 어떤 사람한테서, 어떤 뜻은 어떤 책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환히 알게 하는 한편, 취하고 버리고 좇고 좇지 않는 권한은 배우는 이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할 것이요 억지로 따르게 하지 않는다면, 박아(博雅)한 선비가 차츰 그 사이에서 배출하여 성조(聖朝)의 교화를 빛내고 성문(聖門)의 은미한 뜻을 밝힐 것이니, 어찌 아릅답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나라에는 십삼경(十三經)이 아직까지 발간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웃 나라에 알게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곡무 파사(谷霧波沙 핵심이 아닌 곁가지를 말함)까지는 모두 간행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 만일 이전에 빼버렸던 1부(部)의 책을 별도로 인쇄 반포한다면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젖어 오랫동안 스스로 익히게 되어서 경학(經學)에 반드시 시우(時雨)와 같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경과(明經科 경(經)을 강론하게 하여 뽑는 과거의 일종)가 설치되면서 경서의 뜻이 밝지 못하여지고 학구(學究 서당 훈장의 비칭)란 기롱이 나오면서 선비들의 자질이 날로 낮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땅히 그 제도를 차츰 고쳐서 경술(經術)을 배운 선비로 하여금 자음(字音)ㆍ구두(句讀)와 빨리 읽고 느리게 읽는 데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한다면 거의 경학을 높이는 조그만 도움이 될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힘쓰소서. 신은 삼가 대책(對策)합니다.

 

대서(大序) : 《모시(毛詩)》의 관저편(關雎篇) 머리에 있는 서문(序文)으로, 왕숙(王肅)과 심중(沈重)은 "자하(子夏)의 저작이다.” 하였고, 정자(程子)는 "공자(孔子)의 저작이다.” 하였다.
소서(小序) : 《모시(毛詩)》의 각 편(篇) 머리마다 있는 서문(序文)으로, 왕숙과 심중은 "자하와 모공(毛公)의 합작(合作)이다.” 하였고, 정초(鄭樵)는 "위굉(衛宏)의 저작이다.” 하였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은 …… 것이라[改時改月] : 춘왕정월은 《춘추》 첫머리에 나온 경문(經文). 《좌씨전(左氏傳)》 공소(孔疏)에 보면, 왕도 주왕(周王), 정월도 주왕의 정월을 가리킨 것으로 말하였다. 이를테면, 봄 주왕의 정월이라는 뜻으로, 이에 대하여 《공양전》에는, “일통(一統)을 중대하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대저 주(周) 나라는 자월(子月 하정(夏正)의 11월)을 세수(歲首)인 정월로 개정한바, 달력이 하(夏) 나라보다 2개월 앞서가므로 사시절도 따라서 2개월씩 앞당겨진다. 그러니, 사실 사시절도 개정하고 달도 개정한[改時改月]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주례(周禮)》에 정세(正歲)와 정월(正月)이 있는 것을 보면 주 나라는 사실 원래부터 춘정월(春正月)을 개정한 것이다. 공자의 ‘하 나라의 역법(曆法)을 사용하겠다.’ 는 말은, 다만 주 나라의 역법이 절서(節序)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인월(寅月 태음력(太陰曆)의 정월)로써 세수(歲首)를 삼은 하 나라의 역법을 따르려 한 것뿐이다.” 하였고, 또 “《춘추》는 노(魯) 나라의 역사이므로, 당연히 시왕(時王 주왕(周王))의 역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였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 하 나라의 사시절을 주 나라의 달 앞에 올려 놓았다[夏時冠周月]고 하였으므로, 달만 개정하고 사시절은 개정하지 않은 것[改月不改時]으로 보는 이도 있다.
교제(郊祭) : 본래는, 천자(天子)가 동지(冬至)에 남쪽 교외(郊外)로 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지(夏至)에 북쪽 교외로 나가 땅에 제사지내는 걱을 가리킴. 이 밖에 제후(諸侯)가 봄에 지내는 풍년 기원제(豐年祈願祭)와 가을에 지내는 추수 감사제(秋收感謝祭)도 교제라고 한다.
체제(禘祭) : 본래는, 천자가 시조왕(始祖王)을 낳은 조상을 왕으로 추존하여 시조왕의 사당에 모시고 시조왕을 거기에 배향(配享)시키는 제사인데, 이 밖에 제후(諸侯)가 지내는 길체(吉禘)와 시체(時禘)도 체제라 한다.
육관(六官) : 주(周) 나라 시대에 중앙의 행정기관으로, 천관(天官) 총재(冢宰)ㆍ지관(地官) 사도(司徒)ㆍ춘관(春官) 종백(宗伯)ㆍ하관(夏官) 사마(司馬)ㆍ추관(秋官) 사구(司寇)ㆍ동관(冬官) 사공(司空)을 말한다.
영대(靈臺) : 주 문왕(周文王)이 만든 것으로, 요사스런 기운이나 길한 조짐을 관찰하기도 하고, 때때로 여기에 노닐면서 피로도 푸는 곳인데, 백성들이 문왕의 덕을 사모하여 ‘영대’라 불렀다고 한다.
영소(靈沼) : 주 문왕이 만든 것으로, 동물을 기르는 영유(靈囿) 안에 있는 연못을 말한다.
한(韓) …… 사건 : 《춘추좌전(春秋左傳)》애공(哀公) 27년 조에, “지백(智伯)이 탐욕스럽고 성격이 괴퍅하기 때문에 한ㆍ위가 배반하여 지백을 살해했다.”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註)에, “이 사건은 공자(孔子)가 《춘추》 집필을 그만둔 지 27년 후에 있었다.”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左氏)가 육국(六國) 시대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조 양자(趙襄子)의 시호(諡號) : 양자는 진(晉) 나라 조무휼(趙無恤)의 시호. 그는 공자가 《춘추》를 쓴 지 80년 후에 죽어 양자라는 시호가 나왔는데, 《춘추좌전》 애공(哀公) 27년에 조 양자로 적혀 있기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진(秦) 나라의 서장(庶長)이라 : 《춘추좌전(春秋左傳)》양공(襄公) 11년 조에, “진 나라의 두 서장 포(鮑)와 무(武)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晉) 나라를 정벌하여 정(鄭) 나라를 구원했다.” 하였는데, 서장은 진 나라 작명(爵名)으로, 공자가 《춘추》를 절필한 뒤에 육국 시대의 진 나라 작명이 기록된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우(虞) 나라가 …… 되었다는 : 춘추좌전 희공(僖公) 5년 조 에, “우 나라가 납제(臘祭 섣달에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는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혜왕(惠王) 12년에 처음으로 납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엄중(淹中) : 흔히 공벽본(孔壁本), 또는 고본(古本)이라 불리는 책들이 나온 땅 이름. 《한서(漢書)》 권53에, “노 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집치레를 좋아하여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벽 속에서 전서(篆書)로 씌어진 《상서(尙書)》ㆍ《예기(禮記)》ㆍ《논어(論語)》ㆍ《효경(孝經)》 등 수십 편을 얻었다.” 하였다.
일례(逸禮) : 지금 전하는 《의례(儀禮)》 17편 이외의 것을 말한다. 유흠(劉歆)의 39편설과 정현(鄭玄)의 56편 설이 전하는데, 다산(茶山)은 정현의 설을 따른 것 같다. 《漢書 藝文志》
《곡대기(曲臺記)》 : 한(漢) 나라 천자가 활쏘기할 때의 의식을 적은 책. 활쏘기하던 궁(宮) 이름이 곡대(曲臺)였던 까닭에 그 이름을 따라 이렇게 이름하였는데, 모두 9편이다.
두 사람의 좌씨(左氏)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칭찬한 좌구명(左丘明)과 《좌전》을 지은 좌구명이 서로 다르다는 설. 흔히들 《좌전》은 좌구명이 공자에게 경을 전수받아 전을 지은 것으로 전해 왔었는데, 당(唐) 나라 담조(啖助)와 조광(趙匡)이 이것을 부정하였고 정초(鄭樵)의, 좌씨는 구명(丘明)이 아니라는 변(辯)에는 8가지의 증거를 들어 좌씨가 공자 때 사람이 아니고 육국(六國) 시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숭문총목(崇文總目)》 : 송(宋) 나라 인종(仁宗) 연간에 장관(張觀)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도서목록. 당시 국가의 도서를 장서하였던 소문(昭文)ㆍ사관(史館)ㆍ집현(集賢)ㆍ비각(祕閣)의 사고도서(四庫圖書) 3만 6백 69권을 집대성한 것이다. 《宋史 藝文志》
구사(九師) : 한(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주역(周易)》에 밝은 9명의 스승을 초빙하여 도덕에 관한 계훈(誡訓) 20편을 짓게 하고 그것을 《구사역(九師易)》이라 불렀다. 《文中子 中說 註》
오전(五傳) : 《춘추》의 전(傳)을 지은 오가(五家)로 《추씨전(鄒氏傳)》ㆍ《협씨전(夾氏傳)》ㆍ《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말한다. 그러나 《협씨전》은 한(漢) 나라 때 이미 이름만 있을 뿐, 전해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漢書 藝文志》
정단(井丹)과 …… 노래까지 : 정단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오경(五經)에 능통하고 담론에 뛰어나 당시 경사(京師)에서 ‘오경에 해박한 이는 정대춘이다.[五經彌綸井大春]’라는 노래가 퍼졌고, 주거(周擧)는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사람으로 경사에서 "오경을 종횡한 이는 주선광이다.[五經縱橫周宣光]"라는 노래가 불려졌다. 대춘은 정단의 자, 선광은 주거의 자다.
마융(馬融) …… 동이점(同異點) :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예기(禮記)》 2백 14편을 대덕(戴德)이 85편으로 줄여서 《대대기(大戴記)》를 만들었고 대성(戴聖)이 또 이를 46편으로 줄여서 《소대기(小戴記)》를 만들었는데, 한말(漢末)에 마융이 월령(月令)ㆍ악기(樂記)ㆍ명당위(明堂位) 3편을 보태어 49편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후한서(後漢書)》교현전(橋玄傳)에는, “이 49편은 마융 이전에 이미 49편으로 되어 있었다.” 하여 이설이 분분하다. 그리고 왕숙(王肅)은 고문(古文) 《서경(書經)》의 주(註)를 내면서 순전(舜典)을 요전(堯典)에서 분리시키고 순전 첫머리의 28자를 고증하여 실었으니, 이는 금문(今文)ㆍ고문과의 편수 출입(出入)을 말한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8권

대책(對策)

 

 

지리책(地理策) 건륭(乾隆) 기유년(1789) 윤(閏) 5월에 임금이 내각(內閣)에서 직접 시험을 보인바, 어비(御批)에 수위를 차지하였다.

 

 

왕은 묻는다.
곤도(坤道)가 땅의 모양을 형성함에 높고 낮은 것이 자연의 이치가 있으므로, 광륜(廣輪 땅의 넓이)을 알고 오물(五物)을 분간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지리학(地理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신(臣)은 대답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천하에서 다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지리인 반면에, 천하에서 구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지리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이 일찍이 관찰하건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대하여 선기(璿璣)주비(周髀) 이후로 무려 수백 학자들이 해ㆍ달과 오위(五緯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오성(五星))의 여러 별들이 운행하는 전차(躔次)와 도수(度數)를 논한 것이 매우 자세합니다. 그 중에 서로 모순되고 틀린 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두(北斗)가 운행하는 묘리와 일식(日食)ㆍ월식(月食)이 번갈아 나타나는 차례에 대해서는, 대체로 정연(整然)한 바가 있습니다. 아,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것은 하늘입니다. 그 범위가 넓고 형체가 묘연하여, 다만 지혜로써 헤아릴 바가 아니지만, 한 번 눈을 들 적마다 우주의 절반 가량이 시야에 들어와 모든 별들의 부착(附着)과 전차(躔次)의 위치들을 환히 관찰할 수 있으므로 역법가(曆法家)들이 이것을 바탕으로 천문(天文)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한 걸음 밖에는 발로써 나아갈 수 없고 큰 바다 너머는 시력으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즉 그 사이에 어찌 국경의 한계와 풍랑의 험란한 애로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여 치밀하게 알아보고 싶어도 형편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자장(子長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자)처럼 천하를 유람하고 장건(張騫 한(漢) 나라 성고(成固) 사람)처럼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알 수 있는 것은 산천ㆍ이수(里數)의 구분과 궁실ㆍ의복의 제도 따위에 불과할 것이요, 그 민요(民謠)나 풍속의 다른 점과 관방(關防 국경(國境)의 수비)이나 보화의 구별에 대해서는 끝내 두루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천하에서 다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지리(地理)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漢) 나라는 천하를 평정할 적에 제일 먼저 지도와 호적을 입수하였고, 당(唐) 나라도 천하를 통일할 적에 지도를 고찰하였다고 하였으며, 역대의 사가(史家)들도 각각 지리를 기록하여 그 지방의 경계를 구분하고 토산물을 고찰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 마치 한 가정을 다스리는 것처럼, 마루ㆍ아랫목ㆍ윗목 따위를 불가불 구분하여야 하고 마구간ㆍ창고ㆍ부엌 따위도 불가불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규모를 확정하고 명령을 내려 한 제왕(帝王)의 정치를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천하에서 구명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도 지리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그 지리에 대해 불가불 구명하여야 하겠지만 그 이치를 끝내 다 연구할 수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고원(高遠)한 것에만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된 병폐입니다만, 그 중에도 유독 우리나라가 더합니다. 비록 성명(聲明)문물(文物) 등은 중국에서 모방하여 왔을지언정 도서(圖書)의 기록에 있어서는 마땅히 우리나라 것에 밝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경 밖에 있는 신기한 것을 탐색하여 연구할 수 없는 것을 연구하려 하는 것보다는 우리나라의 국토 안에 있는 가까운 것을 조사하여 밝혀야 할 것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현명한 질문을 내리시어 천하의 산천을 낱낱이 드는 한편, 우리나라의 위치에 대해서까지 수많은 말씀을 하문하시므로, 신은 과문(科文)의 격식을 생략하고 사실만을 모조리 털어 조목조목 의논드리겠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땅은 만물을 싣고 있는 큰 수레와 같습니다. 《주역(周易)》에 ‘땅의 모양이 순하다.’고 일컬은 것은, 특히 땅의 높고 낮은 모양을 논하였을 뿐입니다. 땅이 높은 것은 산악(山嶽)이나 구릉(丘陵)이 되고 낮은 것은 분연(墳衍 물가와 평지)이나 원습(原濕 마른 땅과 젖은 땅)이 되므로, 지리를 분별하는 학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만 동쪽과 서쪽은 가는 데마다 지형이 바뀌어 그 분포가 넓은 반면에 남쪽과 북쪽은 원래 고정된 극(極)이 있어 그 회전하는 것이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그리고 산택(山澤)에는 짐승과 어류(魚類) 등이 적성에 알맞고 구분(丘墳)에는 과일나무와 콩ㆍ팥 등이 알맞으니, 동물들의 번식 여부와 식물들의 성장 여하가 다 지리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주례(周禮)》직방씨(職方氏)에 이를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관자(管子)》지원편(地員篇)에도 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였습니다. 고인(古人)은 지리학에도 이처럼 힘을 기울였는데, 더욱이 임금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분이야 어찌 이를 계승하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증자(曾子)는 땅이 둥글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 뒤에 제가(諸家)들이, 땅이 네모지다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말인가. 주자(朱子)는 땅이 만두(饅頭)처럼 생겼다는 비유도 남겼는데, 사유(四維) 중에 땅의 동쪽과 하늘의 서쪽이 부족하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공주(邛州)ㆍ융주(戎州)ㆍ감주(弇州)ㆍ기주(冀州)ㆍ주주(柱州)ㆍ현주(玄州)ㆍ함양(咸陽) 등이 신주(神州)와 아울러 구주(九州)가 된다고 하였지만, 황제(黃帝) 이후의 구주는 결국 신주 이내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지역의 넓고 좁은 것이 이처럼 동떨어졌단 말인가. 태원(泰遠 동쪽 끝에 있는 나라 이름)ㆍ빈국(邠國 서쪽 끝에 있는 나라 이름)ㆍ복연(濮鉛 남쪽 끝에 있는 땅 이름)ㆍ축률(祝栗 북쪽 끝에 있는 땅 이름) 등이 분계되어 사극(四極 사방의 끝)이 되는데, 28수(宿)의 도수(度數) 외에 또다시 사표(四表)가 있으니, 천하의 땅덩어리가 이처럼 무한하게 넓단 말인가.
오악(五嶽 태산(泰山)ㆍ화산(華山)ㆍ형산(衡山)ㆍ항산(恒山)ㆍ숭산(崇山))이 오방(五方)의 진(鎭)이 되는데, 광승(廣乘 산 이름)ㆍ장리(長離 산 이름)의 등속 역시 오악이라는 말이 《도경(道經)》에 나타나 있고, 사해(四海 동해ㆍ남해ㆍ서해ㆍ북해)가 사방의 기강(紀綱)이 되는데, 바다와 사막 밖에 또 대영(大瀛 큰 바다)이 있다는 말이 십주기(十洲記)에 나타나 있으니, 그 방위와 이름들을 지금 낱낱이 말할 수 있겠는가. 중국의 산하(山河)를 남북 양계(南北兩界 남계(南界)와 북계(北界))로 나눈 설(說)은 당(唐) 나라 일행(一行 중 이름)에게서 비롯되었고, 중국의 산맥(山脈)을 음양사열(陰陽四列 음렬(陰列)ㆍ차음렬(次陰列)ㆍ차양렬(次陽列)ㆍ정양렬(正陽列))로 배열한 논(論)은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동한(東漢) 정현(鄭玄)의 자)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그것들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를 모두 확정지을 수 있겠는가. 오경(五經)에 실린 으뜸 산들은 남쪽에 초요산(招搖山), 서쪽에 전래산(錢來山), 북쪽에 단호산(單狐山), 동쪽에 속주산(樕山), 중앙에 감조산(甘棗山)으로 되어 있으니, 태산(泰山)ㆍ화산(華山)ㆍ형산(衡山)ㆍ항산(恒山) 등은 오방(五方)의 으뜸 산이 될 만하지 못하단 말인가. 사독(四瀆 강(江)ㆍ하(河)ㆍ회(淮)ㆍ제(濟)의 4수(水))의 원류를 따져 보면, 강수(江水)는 민산(岷山)에서, 회수(淮水)는 동백산(桐栢山)에서, 제수(濟水)는 왕옥산(王屋山)에서, 하수(河水)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발원된다고 하였는데, 어찌 소계산(昭稽山)과 찬황산(贊皇山) 등을 제수와 회수의 발원된 곳이라고도 지칭하였는가. 황하(黃河)의 구곡(九曲)은 산 이름인지 별 이름인지를 어떤 서적에서 상고할 수 있으며, 청초(靑草 호수(湖水) 이름) 등 오호(五湖)는 한 가지 물인지 다섯 가지 물인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인가. 무열(無熱)이나 천손(天孫) 등은 어떤 산의 이명(異名)으로 어떤 서적에 나와 있으며, 귀허(歸墟 바닷물이 모이는 곳)나 천지(天池 바다의 별칭) 등도 어떤 물의 별칭으로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가. 거령신(巨靈神)이 화산(華山)을 손으로 쪼개 버렸다고 한 것이나 공공씨(共工氏)가 화를 내어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고 한 따위는 그 일들이 매우 괴이스러우며, 하백(河伯)이 우(禹) 임금에게 하도(河圖)를 주었다고 한 것이나 경진(庚辰)이 무지기(無支祈)를 구금시켰다는 따위도 그 말들이 너무 황당스러운데, 지금까지 기록에 전하여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복(五服)구복(九服)의 제도도 우(虞) 나라와 주(周) 나라가 다른 것은 무슨 의의이며, 수해(豎亥)와 태장(太章)의 측량 또한 동극(東極)과 서극(西極)의 거리가 각각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편명) 1편은 참으로 먼 옛날부터 지리(地理)의 조종(祖宗)인데, 양(梁 산 이름)과 기(岐 산 이름)가 두 주(州)에 있다 하였고 타(沱 물 이름)와 잠(潛 물 이름)도 해석이 한 가지가 아니며, 좌갈석(左碣石 산 이름)ㆍ우갈석(右碣石 산 이름)도 지금까지 의심스러운 문제이고 대적석(大積石 산 이름)과 소적석(小積石 산 이름)도 시비(是非)가 어수선하다. 그리고 삼강(三江)구강(九江)이 저기서 분류된 것인지 여기서 합류된 것인지, 구천(九川)구택(九澤)도 실제를 지칭한 것인지 가상(假象)을 논한 것인지, 아직껏 의문점(疑問點)을 깨뜨릴 만한 명증(明證)이 없으니, 그렇다면 천하의 지리를 끝내 연구할 수 없단 말인가.


신은 생각하건대, 증자(曾子)가, 땅이 둥글다고 한 말은 선거리(單居離 증자(曾子)의 제자)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만약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지다면 하늘이 땅의 네 귀퉁이를 가리지 못할 것이라는 설이 있게 되었고, 제가(諸家)에서 땅이 네모지다고 한 말은 실지 《주비경(周髀經)》끝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비경》은 하늘과 땅을 측량하는 것으로, 땅을 측량하는 법은 네모진 것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네모진 것으로 비유한 것이지, 땅의 본래 모양은 참으로 둥근 것입니다. 주자(朱子)는 땅이 만두(饅頭)처럼 생겼다는 비유에서 곤륜산(崑崙山)의 등성이를 만두의 뾰족한 부분에 비유하였으니, 이는 아마 땅이 울퉁불퉁하고 하나로 뭉쳐진 가운데 곤륜산이 더욱 튀어나온 것을 말한 것입니다. 땅의 동쪽과 하늘의 서쪽이 부족하다는 말은, 우물 속의 개구리가 하늘을 이야기하는 격일 뿐인데, 어찌 여기에까지 참론(參論)할 수 있겠습니까.
구주(九州)에 대한 말은 추연(鄒衍 전국시대 제(齊) 나라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공주(邛州)ㆍ감주(弇州)ㆍ융주(戎州)ㆍ기주(冀州) 등은 실제 고증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구주의 경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사극(四極 사방의 끝)에 대한 말은 《이아(爾雅)》에 나타난 것으로, 동쪽의 태원(泰遠)과 서쪽의 빈국(邠國)도 어디까지나 중국의 폭원(幅員 지면의 면적과 둘레) 안에 있을 뿐이므로 사표(四表)가 넓고 아득하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지만, 28수(宿)마다 각각 분야(分野 천문가(天文家)가 중국 전역의 이름을 28수로 구분 명명한 것을 말함)가 있다는 말은, 온 하늘의 별자리와 도수를 중국에서만 독차지할 수 없는 것이므로 본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광승(廣乘)과 장리(長離)는 《운급칠첨(雲笈七籤)》에 나타난 것으로, 오악(五嶽)만이 진(鎭)이 된다는 것은 본래 일정한 이치가 없는 말입니다. 무슨 산인들 어찌 오악이 될 수 없겠습니까. 추연(鄒衍)이 말한 대영(大瀛)도 《십주기(十洲記)》에 기입되었지만, 사해(四海)는 본시 일체로서 이 지구(地球) 안에 감싸여 있는데 어디에 그처럼 큰 바다가 더 있겠습니까. 이 따위 말들은 모두 황당하여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방위나 이름들을 탐구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북계(北界 중국의 북쪽 경계)는 삼위(三危)에서 동쪽으로 예맥(濊貊)까지이고, 남계(南界 중국의 남쪽 경계)는 민산(岷山)과 파총산(嶓冢山)에서 동쪽으로 동구(東甌)와 민중(閩中)까지이니, 이는 천상(天象)을 가져 남ㆍ북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이며, 그리고 음렬(陰列)은 견산(岍山)과 기산(岐山)에서 서경(西傾 산 이름)까지이고, 양렬(陽列)은 민산에서 파총산까지이니, 이는 지면(地面)을 가져 네 조각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론이 지역에 국한되었으므로 자세히 따질 나위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오경(五經)에 실린 으뜸되는 산들에 대하여 《산해경(山海經)》을 상고하건대, 계수나무[桂]와 궤나무[杌]는 초요산(招搖山)이나 단호산(單狐山)에서 생산된다고도 하였고, 산쥐[獸 쥐 모양에 얼룩무늬가 있는데, 이를 먹으면 목의 혹이 치료된다고 함]와 용어[鱅 얼룩소 모양에 호랑이무늬가 있는데 돼지처럼 운다고 함]는 감조산(甘棗山)이나 속주산(樕山)에서 산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해경》이 본래 괴이하고 황당한 것들이 수두룩하므로, 오악(五嶽)의 자리를 《산해경》에서 말한 초요산ㆍ감조산 따위에 양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독(四瀆)의 원류에 대해서도 《풍속통(風俗通)》을 상고하건대, 제수(濟水)는 찬황산(贊皇山)에서 나온다 하였고, 또 《지지(地志)》를 상고하건대, 소계산(昭稽山)은 평씨현(平氏縣)에 있는데 회수(淮水)가 거기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제수와 회수의 원류는 이 찬황산과 소계산인 듯합니다.
황하(黃河)의 구곡(九曲)에 대해서는 그 말이 《하도강상(河圖絳象)》에서 나왔는데, 곤륜산과 권세성(權勢星)은 지수 일곡(地首一曲)에 해당하고, 용문산(龍門山)과 영석성(營石星)은 지근 사곡(地根四曲)에 해당합니다. 청초(靑草) 등 오호(五湖)에 대해서는 그 말이 장발(張勃)의 《오록(五錄)》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능고(菱皐)에서 서유(胥游)까지를 통틀어 진택(震澤)이라 부르고, 사양(射陽)에서 조만(洮滿)까지를 통틀어 태호(太湖)라 불렀습니다. 한 가지 물이 오호가 된 것이 어찌 황하가 구곡이 있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무열(無熱)은 바로 아뇩달(阿耨達)의 별명이고, 천손(天孫)은 바로 노(魯) 나라 태산(泰山)의 별칭으로, 이 두 가지 설이 혹은 패엽경(貝葉經 불서(佛書)의 별칭)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박물지(博物志)》에 기록되기도 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귀허(歸墟)와 미려(尾閭 바닷물이 새는 곳)는 정포(鄭圃 열자(列子)가 살았던 땅 이름으로 열자를 가리킴)의 미언(微言)에서 나왔고, 천지(天池)와 남명(南溟 남쪽에 있는 큰 바다)은 장원(莊園 장주(莊周)가 칠원리(漆園吏)로 있었으므로 그의 별칭이 되었음)의 우언(寓言)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령신(巨靈神)이 화산(華山)을 쪼개 버렸다는 말은 《수경(水經)》주에 나타났고, 공공씨(共工氏)가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는 말은 《회남자(淮南子)》에 실려 있습니다. 하신(河神)이 우(禹)임금에게 녹자(綠字 부서(符瑞))를 주었다는 말은 《진서(晉書)》지리지(地理志)에서 나왔고, 경진(庚辰)이 무지기(無支祈)를 구금시켜 버렸다는 말은 《악독경(嶽瀆經)》에서 나왔으며, 태장(太章)과 수해(豎亥)가 측정한 거리가 다르다는 말은 《회남자(淮南子)》에서 나온 것입니다. 《회남자》에, “동극(東極)에서 서극(西極)까지와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가 각각 2억 3만 3천 5백리 75보(步)이다.” 하였다. 이따위 황당한 이야기는 거의가 다 경도(經道)에 위배되고 정당한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신은 감히 자세히 논하지 않겠습니다.
오복(五服)과 구복(九服)의 제도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전복(甸服)과 후복(侯服)의 이름들은 우(虞) 나라나 주(周) 나라가 고치지 않았지만, 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 등은 주 나라에 이르러 구복으로 변경되었으니, 이는 폭원(幅員)이 더욱 넓어짐에 따라 제도가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이 기주(冀州)와 옹주(雍州)에 들락날락한 것은 아마 양쪽 고을에 걸쳐 있었기 때문일 터이고, 타수(沱水)와 잠수(潛水)가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에서 분파(分派)되었다는 것은, 아마 물길이 변천되었기 때문일 터인데, 공안국(孔安國)ㆍ정현(鄭玄)ㆍ반고(班固)ㆍ응소(應劭) 등이 다르게 해석하여, 양주(梁州)ㆍ형주(荊州)ㆍ파군(巴郡)ㆍ촉군(蜀郡) 등지에서 발원된다고들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므로, 신은 감히 주착없이 논하지 않겠습니다. 갈석(碣石 산 이름)이 좌우(左右)로 있다는 것은, 왕응린(王應麟)의 《지리통석(地理通釋)》을 상고하건대, 수성현(遂城縣)에 있는 산을 좌갈석(左碣石), 평주부(平州府)에 있는 산을 우갈석(右碣石)이라 하였고, 적석(積石 산 이름)이 대소(大小)로 있다는 것은, 《십도산천고(十道山川考)》를 상고하건대, 용지현(龍支縣)에 있는 산을 대적석(大積石), 부한현(枹罕縣)에 있는 산을 소적석(小積石)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갈석산(碣石山) 오른쪽을 끼고 간다는 주석(注釋)이나, 적석산(積石山)이 일명(一名) 당술산(唐述山)이라는 말들을 어찌 번거로이 변론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강(三江)을 어떤 이는 누강(婁江)ㆍ동강(東江)ㆍ송강(松江)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민산강(岷山江)ㆍ파총강(嶓冢江)ㆍ예장강(豫章江)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한 원류로서 강 이름만 다를 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구강(九江)을 어떤 이는 원수(沅水)ㆍ점수(漸水)ㆍ진수(辰水)ㆍ유수(酉水) 등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오백강(烏白江)ㆍ오강(烏江)ㆍ방강(蜯江)ㆍ균강(箘江) 등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한 원류로서 물구비만 다를 뿐이라고도 하였으며, 구천(九川)과 구택(九澤)은 혹 구주(九州)의 천택(川澤)들을 통틀어 논한 것 같기도 하고, 혹 천택들의 일정한 수를 실지로 지칭한 것 같기도 하니, 이는 모두 우공(禹貢)에 보이는 산천(山川)들을 다르게 해석한 것들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삼강과 구강 등은 아마 원류가 하나라는 말이 근리한 듯싶고, 구천과 구택 등은 아마 통틀어 논하였다는 말이 맞는 듯싶습니다. 그러나 대지(大地)가 아득하고 산천들이 빙 둘러 있어서 그 지리(地理)를 진정 다 연구할 수 없습니다. 주자(朱子)는 대현(大賢)이요, 소식(蘇軾)ㆍ귀유광(歸有光)ㆍ왕세정(王世貞) 등은 모두 대유(大儒)인데다가 중국에 태어났어도 오히려 일치된 의론이 있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나라 선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감히 개인의 억측으로써 밝으신 질문에 누를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사지(史志)들에 의하면, 역대의 연혁(沿革)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춘추(春秋) 시대 이후로 진(秦) 나라에서는 40군현(郡縣)을, 한(漢) 나라에서는 13주부(州部)를 설치하였고, 당(唐) 나라에서는 15도(道)를, 송(宋) 나라에서는 18로(路)를 두었고, 원(元) 나라에서는 11성(省)을, 명(明) 나라에서는 13사(司)를 설립하였는데, 이들 국토를 구획한 제도 중에 어떤 것이 편리하며, 국토를 개척한 판도(版圖) 중에 어느 시대가 융성하였는가. 낙양(洛陽 동주(東周)ㆍ후한(後漢)ㆍ당(唐)의 수도)은 사면으로 적의 위협을 받았고, 금릉(金陵 진(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의 수도)은 한쪽 구석에 위치해 있고, 변경(汴京 수(隋)ㆍ북송(北宋) 등의 수도)은 황하(黃河) 연안에 위치하여 언제나 황하가 터지는 걱정이 있고 연경(燕京 금(金)ㆍ원(元)ㆍ명(明)ㆍ청(淸)의 수도)은 오랑캐와 접근해 있어 언제나 오랑캐가 침범하는 염려가 많았다. 지리(地利)의 조건들이 이러한데도 천하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 나라가 돈황(燉煌 한(漢) 나라에서 북방에 설치한 고을 이름)과 장액(張掖 한(漢) 나라에서 북방에 설치한 고을 이름) 등을 판도 안으로 떼어들이므로 흉노(匈奴)가 비로소 쇠약해졌고 당 나라가 복여(福餘 땅 이름)와 태령(泰寧 땅 이름) 등에서 변방 방어를 철수하므로 몽고(蒙古)가 다시 번성해졌으며, 남국(南國)을 넘보았던 진(晉) 나라는 꼭 촉(蜀) 땅의 전부를 차지하였고, 강좌(江左 강동(江東)지방)를 보전하였던 송(宋) 나라는 꼭 긴 회수(淮水)를 지켰다. 이상 사대(四代 한(漢)ㆍ당(唐)ㆍ진(晉)ㆍ송(宋))의 잘잘못을 낱낱이 분석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은 생각하건대, 주(州)나 현(縣)을 연혁(沿革)하였던 제도는 역대마다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秦) 나라는 봉건(封建)을 폐지하여 중앙 권력을 튼튼히 하고 지방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호걸(豪傑)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었고, 한(漢) 나라는 관리들이 법을 준수하여 선량하였으나, 통치가 잘못되어 옛날의 연수(連帥) 제도만 못하였으니 진 나라나 한 나라의 정치도 진정 잘된 것이 아니며, 당(唐) 나라는 번진(藩鎭)들이 우뚝 강성하여 끝내는 치위(淄魏)의 환란(患亂)을 불러들였고, 송(宋) 나라는 조치가 유약하여 정강(靖康 북송 흠종(北宋欽宗)의 연호)의 화란(禍亂)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당 나라나 송 나라의 제도도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별이나 바둑알처럼 나열되어 상국을 호위하도록 한 열토(裂土) 제도로는 명(明) 나라가 잘하였고, 남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천하를 통일한 국토 확장으로는 원(元) 나라가 제일입니다. 그러나 그 중의 잘하고 못한 등급에 있어서는 신이 감히 주착없이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낙양(洛陽)은 적의 위협을 받았고, 금릉(金陵)은 궁벽한 곳에 위치했고, 변경(汴京)은 황하(黃河)가 터지는 걱정이 있고, 연경(燕京)은 오랑캐가 침범하기도 하였는데, 오히려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신의 생각으로는, 대사마(大司馬)가 구기(九畿 구복(九服)과 같음)의 부세(賦稅)를 맡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는 대개 구복(九服)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빙 둘러서 천자의 수도를 호위하도록 한 것으로, 그 엄밀한 호위와 몇 겹의 방어가 진(秦) 나라의 함곡관(函谷關)에 비교할 바 아니었으며, 반맹견(班孟堅 맹견은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자)의 이도부(二都賦 동도부(東都賦)와 서도부(西都賦)를 말함)에, 지리의 좋고 못한 점으로 시작하여 덕화(德化)가 깊고 얕은 것으로 끝맺었으니, 동경(東京 낙양(洛陽)의 별칭)이 장구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산하의 힘만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제(齊) 나라와 양(梁) 나라는 금릉(金陵)에 수도를 정하여 그 열토가 강북(江北 양자강(揚子江) 북쪽)을 넘지 못했고, 수 나라와 송 나라는 변경(汴京)에 수도를 정하여 그 호령이 하삭(河朔 황하(黃河) 북쪽)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하를 제어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금 나라와 원 나라 이후로 언제나 연경에 수도를 정하여 오랑캐들을 위압시켰으니, 이는 이른바 요해지를 지키고 두뇌부(頭腦部)를 점거한 셈입니다. 그들이 사방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을 어찌 다시 의심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돈황(燉煌)과 장액(張掖)은 참으로 흉노(匈奴)의 오른팔에 해당하고, 복여(福餘)와 태령(泰寧)은 충분히 몽고를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인데, 그 지방을 영토 안으로 떼어들이거나 방어선을 철수함에 따라, 흉노가 쇠약해지기도 하고 몽고가 번성해지기도 하였던 것은 정말 자연의 형세입니다. 서촉(西蜀)을 점거하고서 남방을 넘보았기에 진(晉) 나라가 기각(掎角)의 형세를 얻었고, 회(淮)를 지키고서 강(江)을 보전하였기에 유송(劉宋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 별칭)이 천하를 제압할 수 있는 계책을 보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손호(孫皓 오주(吳主) 손권(孫權)의 손자)가 포착하지 않았다면 진(晉) 나라가 장강(長江)을 날아서 건널 수 없었을 것이요, 송 나라는 내부에서 변란이 있는 이상 한쪽 구석에서 끝내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 덕(德)에 있지, 지리의 험악한 데 있지 않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형적으로 유리한 것이 인심(人心)의 화합된 것만 못하다.”

하였으므로 신이 감히 이 두 마디 말을 전하(殿下)에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한쪽만 대륙과 연결되고 삼면(三面)은 바다로 막혀 있다. 조선이란 국호는 멀리 단군 시대부터 사용되었고, 숙신(肅愼)이란 국명은 주(周) 나라 역사에 실려 있으며, 한 무제(漢武帝)는 사군(四郡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진번(眞番)ㆍ현도(玄菟))을 나누어 설치하고, 당 고종(唐高宗)은 구부(九府)를 옛날대로 설치하였는데, 그 지방이나 유적들에 대해 모두 옛것을 고증하여 현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삼한(三韓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의 분속(分屬) 문제는 마땅히 어느 말을 따라야 하고, 삼국(三國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국경은 분명히 어느 지역이며, 점제(黏蟬 낙랑군의 속현(屬縣))는 지금 어느 도(道)에 예속되었고, 개마(蓋馬)는 과연 무슨 산인가. 마한(馬韓)ㆍ예맥(濊貊)ㆍ고구려가 각각 2개, 옥저(沃沮)ㆍ안시(安市)ㆍ패수(浿水)가 각각 3개, 부여(夫餘)가 4개, 대방(帶方)이 5개, 가야(伽倻)가 6개씩이나 되니, 국호와 지명이 어찌 이처럼 뒤섞여 구별이 없는가. 모조리 그 소재들을 열거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오악(五嶽)과 구주(九州) 등을 봉하였고, 고구려는 사경(四京)과 십도(十道) 등을 설치하였으며 진흥왕(眞興王)은 북쪽 국경을 순수(巡狩)한 것은 그 공적이 국토를 개척하는 데 현저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을 이름들을 개칭한 것은 그 뜻이 오랑캐의 풍습을 변혁시키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이것 역시 그 소재를 지적하여 사실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발해(渤海)의 옛 강토가 절반쯤은 거란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고려 태조가 통일은 하였으나 어찌 여한이 없겠으며, 탐라(耽羅)는 외딴섬으로서 애초부터 성주(星主)가 있었으니, 구한(九韓) 중에 넷째번에 해당한 셈이라 어찌 참람되지 아니한가.


신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산을 짊어지고 바다에 둘러싸였으므로 지리(地利)는 험고(險固)한 면이 있고, 중국 제도를 이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변혁시켰으니, 문물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므로 소중화(小中華)라는 칭호가 진정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조선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벌써 기자(箕子) 이전부터였고, 숙신(肅愼)으로 명명된 것은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상서(尙書)》에 실려 있으니, 이로 본다면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불려지게 된 것은 매우 오랩니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나누어 설치한 것에 대하여 신은 생각하건대, 사군 중에 진번(眞番) 1군(郡)만이 지금 우리나라 국경 밖에 있고, 그 이외 3군은 그 지방들을 뚜렷이 지적하여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낙랑은 지금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이요, 현도(玄菟)는 지금 함경남도의 1천 리쯤 되는 지방이요, 임둔(臨屯)은 지금 저수(瀦水) 이남 열수(洌水) 이북으로서 경기(京畿)의 북쪽 교외 지방입니다. 그런데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에 이르러서는 사군을 도로 혁파하고 2부(府)로 만들어, 현도 옛 지방을 낙랑 동부로, 임둔 옛 지방을 낙랑 남부로 한 다음, 이내 현도군은 진번 옛 지방으로 소속시켜 고구려 등 3현(縣)을 통솔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반고(班固)의 지리지(地理志)에, 현도와 낙랑 등 2군(郡)만이 실려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진번은 압록강 이북에서 흥경(興京) 이남까지가 모두 그 지역입니다.
신이 삼가 반고의 지리지를 살펴보건대, 이른바 누방(鏤方)은 지금의 덕천군(德川郡)에, 증지(增地)는 지금의 증산현(甑山縣)에 해당하고, 해명(海溟)은 해주(海州), 점제(黏蟬)는 연안(延安), 대방(帶方)은 장단(長湍), 열구(列口)는 강화(江華)이며, 화려(華麗)나 불이(不而)는 영흥(永興)과 함흥(咸興)의 경계 안에 있었던 지역들입니다. 한지(漢志)나 위사(魏史) 등을 고찰하고 《수경(水經)》이나 《통전(通典)》 등을 고증하여 보면 모두들 확실한 증거가 있지만, 책문(策文)의 체제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신이 감히 번거로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당 고종(唐高宗)이 구부(九府)를 옛날대로 설치한 것에 대해 신이 생각하건대,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그 지역을 분할하여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 등 오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에 유인궤(劉仁軌)가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남원을 대방주(帶方州)로 만들었고, 또 그 뒤에 이세적(李世勣)이 평양(平壤)을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로 만드는 한편, 유인궤와 상의하여 고구려의 여러 성(城) 중에 도독부(都督府) 및 주(州)ㆍ군(郡) 등을 설치할 만한 곳을 편리한 대로 분할하여 모두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으니, 이른바 구부라는 이름은 이세적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당(唐) 나라에서 설치하였던 주(州)ㆍ부(府) 등은 모두 신라에게 병합되어 버렸고, 한사군(漢四郡)처럼 오래도록 유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삼한(三韓)의 분속(分屬) 시비(是非)에 대하여는 신이 《두씨통전(杜氏通典)》을 살펴보건대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북쪽은 낙랑과 인접해 있다.’ 하였고, 또 ‘진한은 동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인접해 있다.’ 하였고, 또 ‘변진(弁辰 변한(弁韓))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남쪽은 왜국(倭國)과 인접해 있다.’ 하였고, 또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살았다.’ 하였고, 끝으로 ‘삼한은 백제와 신라에게 병탄(幷呑)되었다.’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마한은 지금 호서와 호남 지방이요, 진한과 변한은 지금 영남 지방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린, 최치원(崔致遠)이 태사(太師)에게 올린 서장(書狀)에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고 하였습니다. 최치원이 마한을 고구려라고 한 것은 기준(箕準)이 본래 평양에서 금마(金馬)로 천도(遷都)함으로써 평양이 결국 고구려의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인가 봅니다. 그러나 변한이 백제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모든 역사를 고찰하여 보아도 분명한 증거가 없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이 진한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가 어찌 신라의 남쪽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호조 참의(戶曹參議) 신(臣) 한백겸(韓百謙)은, 수로왕(首露王)이 세웠던 금관가락(金官駕洛)을 변진(弁辰)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고칠 수 없는 정론인가 합니다. 삼국(三國)의 국경 구분에 대하여는 신이 생각하건대, 신라의 강토는 바로 지금 영남의 관할 지역인 반면에, 봉화(奉化)에서 해안 이북으로 강릉(江陵)까지도 신라의 옛 강토였습니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금 청주(淸州)ㆍ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청산(靑山)ㆍ보은(報恩) 등 여섯 고을도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습니다. 이는 아마 추풍령(秋風嶺) 일로(一路)의 산맥이 나지막하기 때문에, 신라의 강토가 점차 이처럼 확장되었던 것인가 봅니다. 백제의 국경은 본래 한강 이북까지를 점거하였다가, 뒤에 고구려의 괴롭힘을 받아 결국에는 한강 이남에서 남쪽으로 전라도 지방까지를 전부 차지하였을 뿐입니다.
고구려의 국경에 대해서는 주몽(朱蒙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이 국가를 건립한 처음에는 지금의 소자하(蘇子河) 이북까지뿐이었는데, 그의 아들 유리왕(瑠璃王)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 이북까지를 차지하였고, 동천왕(東川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패수(浿水) 이북까지를 차지하였으며, 광개토왕(廣開土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저수(瀦水) 이북까지를 차지하였고,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강 이북까지를 차지하여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를 점차 먹어들어와, 마침내는 그 절반 가량을 차지하였습니다. 옥저(沃沮)는 본래 스스로 고구려에 항복하였고, 명주(溟州) 동쪽과 한강 이남은 잠깐 차지하였다가 도로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역사에 실려 있으므로 신이 자세히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점제(黏蟬)가 지금 어느 도(道)에 소속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점제는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있다.’ 하였고, 탄열(呑列 현명(縣名)) 주(注)에, ‘열수(洌水)가 8백 20리를 흘러서 서쪽 점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열수는 지금의 한강이며 점제의 옛터는 당연히 강화(江華) 근방에 있을 터인바, 지금 연안(延安)ㆍ배천(白川) 등을 옛적에 점제로 불렀던 것이 읍지(邑志)에 실려 있으니, 점제는 지금의 황해도에 소속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개마(蓋馬)가 과연 어느 산(山)인가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의 《한서》지리지를 살펴보건대 ‘서개마(西蓋馬)가 현도군(玄菟郡)에 소속되어 있다.’ 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개마국(蓋馬國)을 직접 정복하고 나서, 그 땅을 군(郡) ㆍ현(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서개마는 지금 말하는 분수령(分水嶺)인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한서(漢書)》에 이미 ‘서개마가 있다.’ 하였으니, 당연히 동개마(東蓋馬)도 있어야 할 터인바, 아마 백두산이 동개마가 아니겠습니까. 《통전(通典)》에 ‘동옥저(東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하였으니, 개마는 곧 백두산입니다.
마한이 두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마한의 멸망이 왕망(王莽) 원년(9)에 있었던 일로 백제사(百濟史)에 분명히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백여 년 뒤 한 안제(漢安帝)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 태조(太祖)가 마한 ㆍ예맥(濊貊) 등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玄菟城)을 포위하였고, 《통전》에 또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연간에 마한왕(馬韓王)이 와서 조회(朝會)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마한이 전후에 걸쳐 두 나라가 있었는가 봅니다. 예맥이 두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예맥은 북부여(北夫餘)의 본래 이름인데, 강릉(江陵)을 예(濊), 춘천(春川)을 맥(貊)이라고 한 것은 중세에 모칭(冒稱)한 것입니다. 아마 옛날에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가 동쪽 강릉으로 도읍을 옮긴 까닭에 마침내 강릉이 예로 모칭되었는가 봅니다. 《한사(漢史)》나 《위지(魏志)》 등이 이미 없애버릴 수 없는 전적(典籍)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 춘천을 맥이라고 한 것은 분명한 증거가 없고, 오직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에, 명주(溟州)를 예, 삭주(朔州)를 맥으로 보았는데, 명주는 강릉이고 삭주는 춘천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모든 사기들을 고찰하여 보면 예맥이 본래 두 종류가 아닌데, 어찌 꼭 강릉ㆍ춘천 두 고을에다 분속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춘천에 맥국(貊國) 옛터가 있다는 것은, 춘천이 본래 낙랑의 옛나라였으므로 맥국으로 모칭된 것입니다. 고구려가 두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고구려는 본래 현도현(玄菟縣)의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고구려가 현도현을 차지하기 전부터 벌써 고구려로 불렀기 때문에, 고구려가 두 개나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옥저(沃沮)가 세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첫째 북옥저(北沃沮)는 한 성제(漢成帝) 시대에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城邑)으로 만들었으며, 위 명제(魏明帝) 시대에는 고구려왕이 왕기(王頎)에게 축출당하여 북옥저로 망명하였던 것이 그곳입니다. 그 둘째 동옥저(東沃沮)는 《후한서(後漢書)》에 이른, 불내예(不耐濊)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 셋째 남옥저(南沃沮)는 김부식(金富軾)이 말한, 남옥저 사람들이 서쪽으로 부양(斧壤)에 이르러 백제한테 항복하였다는 곳입니다. 지금으로 고찰하여 본다면 북옥저는 지금의 육진(六鎭) 지방이 그곳이고, 동옥저는 철관(鐵關) 이북 지방이며, 남옥저는 철령(鐵嶺) 이북 지방입니다. 그런데 《일통지(一統志)》에는 전혀 고찰하지도 않고서 경솔하게 지금 해성현(海城縣)을 옥저의 옛땅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본래 《요사(遼史)》의 잘못된 점입니다. 《요사》에서, 발해 오경(渤海五京)을 잘못 요동(遼東) 지방에다 배열시켰기 때문에 옥저도 요동 지방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주착없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옥저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안시(安市)가 세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안시현(安市縣)은 본래 요동군(遼東郡)에 예속되었다.’ 하였고, 또 ‘요수(遼水)는 서쪽으로 안시현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요사》지리지에는 ‘철주(鐵州)의 건무군(建武軍)은 본래 한(漢) 나라 안시현이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첫째입니다. 또 《성경속지(盛京續志)》를 살펴보건대, ‘요양(遼陽)의 동북쪽 사이에 안시의 옛성이 있었다.’ 하였으니, 이 문자가 비록 신빙성이 없는 것 같지만, 약간은 믿을 만한 점도 있습니다. 지금 《당서(唐書)》에 의하면, 이적(李勣)이 요수(遼水)를 건너 맨 먼저 개모성(蓋牟城)을 위시하여 동쪽으로 사비성(沙卑城)을, 또 동쪽으로 요동성을, 다시 동쪽으로 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안시성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안시성이 과연 개모성 70리 근방에 있었다면, 그가 백암성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벌써 2백 리 밖이 됩니다. 그가 꼭 건안(建安)을 공격하지 않고서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려 한 것은 안시성이 그들의 뒤를 차단시켜버릴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가령 안시성이 본래 백암성 서쪽에 있었다면, 비록 건안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안시성이 진작 그들의 뒤를 차단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시성이 백암성 동쪽에 있다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당(唐) 나라 시대의 안시성과 한(漢) 나라 시대의 안시성이 똑같지 않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둘째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 ‘안시성은 일명(一名)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환도는 지금 강계부(江界府) 북쪽 강 건너 지역에 있었습니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시대에 일찍이 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셋째입니다. 신이 또 여지서(輿地書)를 살펴보건대, 용강현(龍岡縣)에도 안시 옛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말한다면 안시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패수(浿水)가 세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는 ‘위만(衛滿)은 패수를 건너 왕험성(王險城 지금 평양의 옛 이름)에 도읍하였고, 섭하(涉河)는 패수를 건너 한(漢) 나라 요새지(要塞地)로 들어왔고, 순체(荀彘)는 패수를 건너 우거(右渠)를 공격했다.’ 하였으니, 이는 압록강을 패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한서(漢書)》에는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압록강을 마자수(馬訾水)로 보았으며,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에 임해 있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일통지(一統志)》에는 요동의 헌우락(蓒芋濼)을 옛날 패수로 지칭한 것이 있고, 《고려사》에는 평주(平州)의 저탄수(猪灘水)를 패수로 모칭(冒稱)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패수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황화집(皇華集)》에는 압록강만을 패수로 보았고, 김부식은 대동강만을 패수로 보았으니, 신의 얕은 식견으로는 분석 판결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수경(水經)》에 실려 있는 패수만은 분명히 지금의 대동강입니다.
부여(扶餘)가 4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첫째 북부여(北扶餘)는 바로 고구려와 백제의 종주(宗主)입니다. 《후한서(後漢書)》및 《위지(魏志)》에 모두 ‘부여국(扶餘國)은 고구려 북쪽에 있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부여국은 장성(長城) 북쪽에 있는바, 현도(玄菟)까지의 거리가 1천 리이다.’ 하였는데, 지금 《성경지(盛京志)》에 실려 있는 개원현(開原縣)이 바로 그 북부여의 옛땅입니다. 둘째 동부여(東扶餘)는 한(漢) 나라 초기에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동해(東海)의 해변으로 천도(遷都), 그 땅은 가섭원(迦葉原)인데, 가섭은 본시 하서(河西)의 전음(轉音)으로서 지금의 강릉(江陵)이 바로 그곳입니다. 셋째 졸본부여(卒本扶餘)는 고구려 시조가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에서 졸본(卒本)으로 도망쳐 와서 지어진 명칭입니다. 넷째 사비부여(泗沘扶餘)는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 공주(公州)의 옛 이름)으로 천도(遷都), 사비수(泗沘水 백마강(白馬江)의 옛 이름) 상류에 거주하면서 지어진 명칭입니다. 대방(帶方)이 다섯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한서》지리지를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의 속현(屬縣) 중에 대방이 있다.’ 하였고, 또 ‘대수(帶水)는 서쪽으로 대방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대수는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첫째입니다. 한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나눠 주둔하여 유염(有鹽)을 차지하고 대방군(帶方郡)을 설립하였는데, 유염은 지금의 연안(延安)이며, 그 뒤에 그 지방의 추장(酋長)이 대방을 점거하여 대방왕(帶方王)이 되었는데, 백제 책계왕(責稽王)이 대방왕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둘째입니다. 한 질제(漢質帝) 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을 기습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살해하였고, 그 뒤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내린 조서(詔書)에, ‘12군(軍)은 점제(黏蟬)와 대방 등처로 출동하여 압록강 서쪽에서 회합하라.’ 하였으니, 아마 요동 지방에도 대방이 있었던가 봅니다. 이것이 대방 문제의 셋째입니다. 이세적(李世勣)이 주(州)ㆍ부(府) 등을 배치할 때에 올린 주문(奏文)에 ‘대방주(帶方州)는 본래 죽군성(竹軍城)이다.’ 하였는데, 죽군성은 지금 나주(羅州)에 소속된 회진(會津)의 옛 현명(縣名)이므로, 대방이란 이름이 회진으로 옮아갔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넷째입니다. 백제가 평정된 뒤에 신라는 차츰 백제의 땅을 차지하였고, 당 나라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로 임명하여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동쪽에서의 침범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므로, 대방이란 이름이 남원으로도 옮아갔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다섯째입니다. 그러나 요동 지방에는 본래 대방이 없습니다. 《한서》에 실린 대방은 여백으로 거론한 말이요, 수 양제(隋煬帝)의 조서(詔書)에 말한 대방은 그저 과장한 것에 불과하니, 거론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신이 또 《고려사》를 살펴보건대 ‘남원부(南原府)는 후한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연간에 대방군이 되었다.’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면 김부식의 백제사에 어찌 이런 말이 없겠습니까.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중국의 발자취가 한번도 열수(洌水)의 남쪽까지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남원을 갑자기 한(漢) 나라의 군(郡)으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 가야(伽倻)가 여섯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육가야(六伽倻)는 다 김해(金海)를 종주(宗主)로 삼았는데, 김해는 금관가야(金官伽倻), 고령(高靈)은 대가야(大伽倻), 고성(固城)은 소가야(小伽倻), 성주(星州)는 벽진가야(碧津伽倻), 함안(咸安)은 아나가야(阿那伽倻), 함창(咸昌)은 고령가야(古寧伽倻)로 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가야는 변진(弁辰)입니다. 《위서(魏書)》지리지(地理志)에, 변진이 본래 12국(國)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사(新羅史)에는, 포상 팔국(浦上八國)이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지금의 칠원(漆原)ㆍ웅천(熊川)ㆍ함안(咸安)ㆍ고성(固城) 등입니다. 만약 가야 6군(郡)에다가 포상 8국을 합하여 그 중에서 중복된 것을 빼버리면, 변진 12국이 그 숫자에 꼭 맞습니다.
신라에서 오악(五嶽)과 구주(九州)를 봉한 것에 대해서는, 북쪽 태백산, 남쪽 지리산, 동쪽 토함산, 서쪽 계룡산이 중악(中嶽)과 아울러 오악이 되고, 사벌(沙伐)인 상주(尙州), 삽량(歃良)인 양주(良州), 두병(豆倂)인 전주(全州), 하슬(何瑟)인 명주(溟州) 등 오주(五州)와 아울러 구주가 됩니다. 고려가 사경(四京)과 십도(十道)를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통고(通考)》를 살펴보건대, 고려왕이 촉막군(蜀莫郡)에 거주하면서 이를 상경(上京)으로 삼는 한편, 신라의 옛 도읍 경주, 백제의 옛 도읍 금마(金馬), 기자(箕子)의 옛 도읍 평양을 동경(東京)ㆍ남경(南京)ㆍ서경(西京)의 삼경(三京)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경이요, 그 뒤 성종(成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십도를 정하였으니, 관내도(關內道)ㆍ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ㆍ영남도(嶺南道)ㆍ영동도(嶺東道)ㆍ산남도(山南道)ㆍ강남도(江南道)ㆍ해양도(海陽道)ㆍ삭방도(朔方道) 등을 개성부(開城府)와 아울러 십도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흥왕(眞興王)이 북쪽 국경을 순수(巡狩)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진흥왕 16년에 북도(北道)를 순수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정하였는데, 그 순수비(巡狩碑)가 함흥부(咸興府) 북쪽 황초령(黃艸嶺) 기슭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요, 경덕왕(景德王)이 고을 이름들을 개칭한 것에 대해서는 앞서 이른, 사벌(沙伐)이 상주(尙州)로, 삽량(歃良)이 양주(良州)로 된 것 따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저 땅을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에 잃어버린 것은 국토를 개척한 공적을 훌륭하게 말할 수 없고, 속된 명칭을 버리고 우아한 것을 취한 것은, 지명(地名)을 변경한 아름다움을 소홀하게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발해(渤海)가 절반 가량은 거란에게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발해가 뒤를 이어 일어났는데, 당 현종(唐玄宗) 시대에 이르러서는 발해왕 대조영(大祚榮)이 부여(夫餘)ㆍ옥저(沃沮)ㆍ조선 땅들을 모조리 차지하여 국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나 되었습니다.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에 ‘발해의 땅이 동쪽 천정(泉井 덕원(德原)의 옛 이름)에서 서쪽 책성(柵城)까지 통틀어 39역(驛)으로서, 압록강(鴨綠江) 이북까지 강토를 멀리 개척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遼) 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로는 압록강 이북 지방은 모조리 요 나라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오직 압록강 이남에 있는 보주(保州)와 정주(定州)만이 그런대로 신라에 예속되었으며, 그 뒤에 고려 태조도 발해의 옛 강토를 수복 개척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입니다.
탐라(耽羅)가 9한(韓) 중 넷째 번에 해당한 것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건대,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기록된 9한 중에 그 첫째가 일본(日本), 셋째가 오월(吳越), 다섯째가 응유(鷹游), 일곱째가 단국(丹國), 아홉째가 예맥(濊貊)이고, 중화(中華)가 둘째 번, 탐라가 넷째 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 의례(義例)가 거칠고 번잡하므로, 수다스럽게 변론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대체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어 본래 문헌적인 증거가 없고, 소위 전해 오는 사적(史籍)은 거의가 황당 저속한 아야기들로서, 혹은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고도 일컫고, 혹은 난태(卵胎)가 표류한 박[壺] 속에 간직되었다고도 일컬어, 사람과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뒤섞여 사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신은 우리나라 풍속이 현원(玄遠)한 데만 치달리는 것을 깊이 개탄한 나머지, 성조(聖朝)에서 가까운 것을 관찰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아 대동(大東)을 전부 차지한 이후 8도(道)로 구분하여 주(州)와 군(郡)이 별처럼 벌여 있고, 사방으로 방어하는 진(鎭)과 보(堡)가 바둑알처럼 널려 있어, 소유한 국토는 수천 리가 더 되고 양성한 민력(民力)은 수백 년이 넘었다. 기름진 들과 땅에는 상마(桑麻)가 자급 자족되고, 깊은 산림(山林)과 큰 못에는 재화(財貨)가 날로 흥성하여, 남쪽 지방에는 균로(筠簵 화살대)와 칠사(漆絲) 등의 풍요함이 있고, 북쪽 지방에는 인삼(人蔘)과 녹용(鹿茸)ㆍ피혁(皮革) 등의 생산이 있으며, 산에는 크나큰 재목들이 있고 물에서는 수많은 어류(魚類)들이 살아, 풍족한 재물과 문명(文明)한 풍속이 아마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제일일 것이다.


신은 생각하건대, 천지가 개벽하여 인류가 처음 생겨났을 적에는 문물이 갖춰지지 못하고 예의가 밝지 못하여 모두가 미개(未開)된 때문에 새나 짐승들과 함께 떼지어 살아오다가 다행히도 그 중에 성인(聖人)이 나서야 하늘의 밝은 명(命)을 받아 인류의 윤기(倫紀)를 세움으로써 문질(文質)이 함께 숭상되고 예악(禮樂)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입니다. 우리나라는 신라와 고려 이후로 날로 문명(文明)을 이룩하여 오다가 아름답게도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문명이 한창 융성한 시기를 만났습니다. 광대한 국토와 배치된 주(州)ㆍ군(郡)은 모두 조종(祖宗)의 큰 계책이요, 풍요한 물산(物産)과 문명스러운 풍속은 참으로 중국 이외의 나라가 숭앙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옛 제도에만 인습한 지 이미 오래되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졌으니, 신이 성책(聖策) 중에 지리(地利)를 찬미하신 것에 대하여 과문(科文)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낱낱이 들어 논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신은 주ㆍ군을 배치한 제도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팔도(八道)를 구분함에 있어 경기(京畿)만 피폐(疲弊)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앙을 튼튼히 하고 지방을 약화시키는 의의와, 강한 데 처하여 약한 것을 통치하는 법에 모두 부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이 우공(禹貢)을 살펴보건대, 기주(冀州)에는 유독 공물(貢物) 바치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 천자(天子)의 봉내(封內)에 공물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천자의 수도를 호위하고 있기 때문인가봅니다. 한(漢) 나라의 경조(京兆)가 풍익(馮翊)과 부풍(扶風)으로 좌우의 보좌를 삼았으니, 이 또한 천자의 수도를 호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서였고, 당(唐) 나라의 장안(長安)과 명(明) 나라의 순천(順天)도 그 관할(管轄)의 웅장함이나 반거(盤據)의 넓은 것이 모두 제로(諸路)나 제성(諸省) 따위에 감히 비교할 수 없었으니, 역대의 수도와 주(州)ㆍ군(郡)에 대해 배치한 것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잔약한 현(縣)이나 조그마한 읍(邑)들은 국명(國命)을 받드는 데 지쳐 있고, 산중의 화전민(火田民)이나 해변의 어부(漁夫)들은 세금을 바치는 데 시달려 있는가 하면, 여주(驪州)와 양주(楊州) 등처의 기름진 논밭은 모조리 호족(豪族)들의 소유가 되어 버렸으며, 흉악하고 약삭빠른 자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나라의 덕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병(府兵 궁성(宮城)이나 조정을 수위하는 병사)의 제도와 숙위(宿衛 숙직하여 왕궁(王宮)을 지킴)하는 법이 모두 경기(京畿) 내에 있는 둔전(屯田)에 의뢰하는 실정인데, 지금 경영(京營)의 둔전으로서 경기 내에 있는 것들을 개인 소유의 논밭에 비교하면 1백분의 1도 못 되어, 가까운 지방을 버리고 먼 지방에서 가져오고 있으니, 불편한 점이 매우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충청도 첫 경계선에서 저탄(猪灘) 이남까지 10여 군(郡)ㆍ현(縣)을 떼어서 경기 내로 편입시키는 한편, 여러 도(道)에 흩어져 있는 오영(五營) 소속의 둔전들을 모두 시가(時價)에 따라 교환해서 경기 내로 이전시켜, 경기의 사방 1백 리 되는 지방에서 병사(兵士)와 농부가 한 덩어리로 되어 왕궁(王宮)을 호위하도록 한다면, 국세(國勢)가 더욱 튼튼하게 되고 병력(兵力)도 더욱 강성하게 될 것입니다. 진(鎭)이나 보(堡)의 제도에 대해서도, 처음 배치하였을 적에는 반드시 믿을 만한 점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조그마한 진이나 잔약한 보에는 영솔하고 있는 민병(民兵)이 1백 호(戶)도 못 되는 곳이 있습니다. 이렇게 잔약한 병력을 가지고는 좀도둑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할 터인데, 더구나 몽고(蒙古)나 여진(女眞) 등의 철기(鐵騎)를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또 그 진이나 보의 명칭들이 어떤 것은 3~4글자가 겹쳐서 비속하고 해괴스럽습니다. 무신(武臣)으로서 그곳에 부임한 자가 그런 명칭을 관함(官銜)에다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절대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변방의 보루(堡壘)들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거나 통합해서 영(領)을 설치하거나 하여 그 세력을 강화시키며, 그 관직 명칭도 경덕왕(景德王)이 고을 이름들을 고치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복잡한 것은 삭제하고 간소하게 만들어 모두 두 글자로 된 명칭을 쓰도록 한다면, 변방이 더욱 튼튼하여지고 비속한 풍속도 더욱 깨끗이 씻어질 것입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상마(桑麻)에 대한 정사(政事)는 성왕(聖王)들이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주 문왕(周文王)의 제도와 맹자(孟子)의 학문이 맨 먼저 힘쓴 바는, 오묘(五畝)의 주택 담장 밑에 뽕나무를 심은 것에 불과합니다. 엎드려 보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도 수령(守令)들의 정치 실적을 평가할 적에 흔히 뽕나무를 심은 실적으로써 정하였으니, 이는 한(漢) 나라의 유법(遺法)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일찍이 안주(安州)를 다스릴 적에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뽕나무를 심도록 하여 1만 그루가 훨씬 넘은바, 서쪽 백성들이 그 뽕나무를 힘입었고, 지금까지도 그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 역시 옛날 순리(循吏 법에 따라 성실하게 근무하는 관리)가 남긴 뜻입니다. 지금 마땅히 이 법을 밝혀 수령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뽕나무를 심어서 그 실효를 거두도록 하는 것도 근본을 튼튼히 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화(寶貨)의 생산은 반드시 깊은 산이나 큰 골짜기에 있는 법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악(山嶽)들이 웅장하고 거대하여 값진 산물(産物)들이 풍족한데, 금(金)ㆍ사(砂)ㆍ은(銀)ㆍ횡(卝 동(銅)이나 철(鐵)이 들어있는 광물(礦物) 덩어리) 등을 캐는 데에 모두 금령(禁令)이 정해져 있고, 구리[銅]를 다루는 대장간이나 철물(鐵物)을 취급하는 점포에도 모두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기 때문에 부유한 백성은 삭탈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경영하지 않고, 가난한 백성은 자산(貲産)을 실패하고서 딴 데로 이사하는 실정이니, 지금이라도 밝은 교지(敎旨)를 특별히 내려서 여러 도(道)에 구리가 생산되는 광산(鑛山)에는 백성들이 대장간을 차리도록 허가해 주고, 모든 산의 철물을 다루는 점포에는 세법(稅法)을 완화해 주시면 산택(山澤)에서 나온 이득이 날로 흥성하여 백성이나 국가가 모두 부유해질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균로(筠簵 화살대)가 생산되는 것도 국가의 귀중한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의 화식전(貨殖傳)에서, 균로를 누차 말하였습니다. 예부터 전쟁하는 시대에 화살이 다되어 성(城)이 함락된 것은, 대체적으로 죽전(竹箭)이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쪽 고을에서 생산되는 균로가 매우 풍요하지만, 우리나라 풍속은 일마다 허위를 좋아하여 살촉[鏃]이 없는 살대들만 집집마다 전통[箙]에 가득 차 있으니, 이 역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옛적에는 화살을 사용함에 있어 살촉이 없는 화살은 있지 않았으므로 삼련(參連)이나 백시(白矢) 따위도 모두 과녁을 꿰뚫었습니다. 예사(禮射 대사(大射)ㆍ빈사(賓射)ㆍ연사(燕射))에서도 그처럼 과녁을 꿰뚫었는데, 더구나 무예(武藝)에서야 어찌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살촉이 없는 화살에 대한 말은, 다만 안지추(顔之推)의 《가훈(家訓)》에 나타나 있을 뿐으로 강남(江南) 사람들이 이를 ‘박사(博射 돈을 걸고 도박으로 하는 활쏘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화살은 무슨 법을 따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활쏘기를 시험보이는 살대까지도 다 불로 쪄서 껍질을 벗겨 버리기 때문에 쉽사리 부러지고, 비로 인한 습기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직 곧은 화살만을 상품으로 여기고, 변란(變亂) 따위에는 마음도 두지 않으니,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화살 문제를 무신(武臣)들에게 물어서 그 이해(利害)를 자세히 파악하여, 국가에서나 개인들이 소장한 화살을 물론하고, 살촉이 없거나 껍질을 벗겨 버린 살대 따위를 엄금시킨다면 아마 변란을 만났을 때 믿고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삼(人蔘)과 녹용(鹿茸)에 관한 폐단에도 조정에서의 토론이 벌써 오래되었고 여러 고을에서의 호소가 끊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개혁할 가망이 없어 시달리는 고생을 구제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신은 일찍이 듣건대, 강계(江界)의 호구(戶口)가 늘거나 감소되는 것이 언제나 인삼에 대한 행정이 관대하거나 잔학함에 비례된다고 하니, 이는 아마 강계에서 생산되는 이익이 충분히 생활을 튼튼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여겼다가, 착취해 가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더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일정한 거주지가 없어서인가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 문제에 특별한 배려를 더하여 멀리까지 굽어 살피시어, 가혹한 세금 징수를 중지시키고 백성들을 불러들여 편안히 모여 살도록 해주신다면 인삼과 녹용의 행정이 차츰 관대 공평해질 뿐 아니라, 국경의 요새지(要塞地)에 백성들이 날로 번성하여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옛날 선왕의 제도는 도끼를 제때에 산림(山林)에 들어가도록 하고,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들여넣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주례(周禮)》에, 임형(林衡 관직 이름으로 산림(山林)을 관장하였음)과 택우(澤虞 관직 이름으로 천택(川澤)을 관장하였음)는 나무를 심고 물고기나 자라를 양식시켰고, 《시경(詩經)》에는 ‘무성한 갈대밭에서 한 번 쏘아 다섯 수퇘지 잡았는데 아, 저 추우(騶虞 흰 바탕에 얼룩무늬가 있는 인수(仁獸)로 성인(聖人)의 덕화에 감응하여 나타난다고 함)여[彼茁者葭 一發五豝 吁嗟乎騶虞]’ 하였는데, 선유(先儒) 중에 어떤 이는, 추우는 관직의 이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시인(詩人)이 초목이나 짐승들의 번성함을 탄미한 데는 그 근거가 없지 않을뿐더러, 산림이나 천택에 대한 행정이 국가에 소중한 것임도 알 수 있습니다. 우(虞) 나라에서는 사공(司空 수리(水利)와 토지를 관장하는 벼슬)을 설치하고, 주(周) 나라에서는 택우와 임형을 설치하였던 것이 모두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황장(黃腸 소나무의 누른 심(心)으로 만든 관(棺))의 재목을 키우기 위하여 지정된 산이나 침원(寢園 임금의 능묘(陵墓)) 이외에는, 일찍이 나무를 심어 기르는 행정이 있지 않았으므로, 모든 산들이 벌거숭이가 되어 재목이 매우 드무니, 지금부터서라도 옛날 제도를 밝히는 한편, 월령(月令 《예기(禮記)》의 편명으로 12개월 동안 시행할 정사(政事)가 기록되었음)의 문자도 곁들여 상고하여, 산림(山林)을 맡길 관원을 특선하여 전임시킨다면, 궁실(宮室)이나 관곽(棺槨)에 쓰일 재목들에 어느 정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해안에 사는 주민들의 말을 듣건대 ‘균역법(均役法)이 설치된 뒤부터는 고기잡는 통발을 절반 가량 철거하였을 뿐 아니라, 어획량도 전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신은 앞으로 어민(漁民)들의 세금만 무거워지고 임금의 혜택이 결여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만약 세금을 조금 완화시켜서 남는 이익이 있도록 해준다면, 진주(眞珠)가 다시 합포(合浦)로 되돌아왔던 기적이 아마 옛날의 미담으로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인지 근대(近代) 이래로는 사람들이 지리(地理)가 정치의 근본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여, 관방(關防)에는 허술한 탄식이 많고, 성지(城池)에는 수축한 실적이 없으며, 경기(京畿)의 병곤(兵閫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별칭) 문제는 조정 의론이 갈팡질팡하고, 강도(江都)의 통어사(統禦使) 문제도 여러 의론이 통일되지 못하며, 울릉도(鬱陵島)와 손죽도(損竹島) 등은 오랫동안 비어 있는 섬이 되었고, 여연군(閭延郡)과 무창군(茂昌郡) 등은 멀어서 옛 군(郡)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조정에서 재리(財利)를 독점하는 행정이 없는데도 어물(魚物)이나 소금 따위가 갈수록 귀해지고, 각도에는 광물(鑛物)을 캐라는 사명(使命)이 없는데도 금이나 은 따위가 차츰 바닥나게 되었으니, 인재가 점차 저하되고 풍속이 야박하여진 것을 아마 말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이러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편의 하도록 바로잡는 계책을 그대들에게 묻지 않고 어디에 묻겠는가.


신은 생각하건대, 성책(聖策 임금의 책문)에서 처음에는 산해(山海) 따위에 대한 지리(地理)를 서론하고 다음에는 땅에서 생산되는 지리(地利)로써 결론하면서, 염려되는 조건들을 낱낱이 열거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설명을 굽어 요구하시니, 이는 성인(聖人)이 나무꾼에게도 자문(諮問)하는 의의입니다. 신이 아무리 무식한 존재이지만, 평소 들었던 것이야 어찌 감히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관방(關防)이 허술한 점은 참으로 주상께서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신은 듣건대, 병사(兵士)란 1백년 동안 써먹지 않을지언정 하루라도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고, 《주역(周易)》에는 ‘조심스럽게 호령하여 방비하였기 때문에 밤중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걱정이 없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빨이란 단단한 것도 씹을 수 있지만 모래나 조약돌이 밥 속에 섞여 있으면 이빨이 혹 이지러질 수도 있는 것이며, 발이란 구덩이도 뛰어넘을 수 있지만 컴컴한 밤에 잘못 웅덩이에 빠지면 발이 혹 부러질 수도 있는 것이니, 이는 뜻밖에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적(敵)과 인접하고 있어, 서해에 걱정스러운 것은 해적들입니다. 옛날에 이점(李坫)ㆍ전임(田霖)ㆍ조원기(趙元紀) 등이 서해로 나아가 해적들을 정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들이 정토록(征討錄)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그 전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아마 조그마한 섬이었나 봅니다. 또한 왜적(倭賊)에 대한 걱정거리는, 원(元) 나라 군사들이 대마도(對馬島)를 침공한 후부터 원한을 맺었다가 국조(國朝) 중엽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였습니다. 남쪽의 변방뿐만 아니라 혹은 동쪽 변방, 혹은 서쪽 변방 곳곳마다 걱정거리가 되어 오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난일들은 이미 끝났으니, 정말 왜적을 방어하는 데 좋은 대책만 세운다면 아마 앞으로는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염려하여야 할 곳은 서쪽과 북쪽 2도(道) 지방입니다. 우리나라 병력(兵力)이 중고(中古)에는 그런대로 강성하여 과거에 건주위(建州衛)와 이마거(尼麻車)도 정벌(征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태평을 누린 지 오래되고 인심들이 안일(安逸)에 빠져서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놀라 머리를 싸고 쥐처럼 숨어버리곤 합니다. 만약 이러한 군사를 가지고 변란에 대처하면, 우선 관방(關防)을 굳게 하고 성지(城池)를 튼튼히 하는 것이 참으로 오늘날 서둘러야 할 일들입니다. 동선(銅仙)이나 청석(靑石) 등은 서로(西路)의 큰 방어선이라 부르고, 조령(鳥嶺)이나 죽령(竹嶺) 등은 남도의 험한 관문이라 칭하여, 조그마한 성을 쌓거나 성문을 고수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신의 천견(淺見)으로는, 이에 대해 그윽이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속언(俗言)에, 염소를 잃고서 우리를 고친다는 것과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격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병들이 청석령(靑石嶺)으로 해서 쳐들어왔으므로 마침내 청석령을 관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다음에 신출귀몰하는 적병(敵兵)이 다른 도로를 이용하여 곧장 쳐들어올지도 알 수 없으니, 청석령 한 군데쯤은 잃어버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왜적들이 조령으로 해서 쳐들어왔으므로 마침내 조령을 관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다음에 허술한 점을 이용하여 무방비한 곳을 기습하는 적병들이 다른 도로를 이용하여 돌격해 들어올지도 알 수 없으니, 조령의 관방 하나쯤은 방치해 버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서로(西路)에서는 청석령보다 백치(白峙)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고, 남로(南路)에서는 조령(鳥嶺)보다 추풍령(秋風嶺)을 염려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마땅히 그 형편을 관찰하고 이해를 조사하여, 백치에 있는 성(城)이나 보루(堡壘)들을 더욱더 보수하는 한편, 추풍령 위에도 성이나 보루들을 빨리 쌓아 조령에 방비한 것과 똑같이 한다면, 아마 목탁을 쳐서 도적을 대비하는 의의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지(城池)의 제도에 있어서는 더욱 논할 것이 있습니다. 신라와 고려 이전에는 우리나라 병력의 강성함이 천하에 제일이었습니다. 무릇 수(隋)ㆍ당(唐)처럼 전쟁을 자주하는 나라로서도 우리나라를 칼로 대나무 쪼개듯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신이 과거에 여러 도(道)를 다닐 적에 도로 옆의 높은 산에 성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적마다 질문해 보면, 왜적들의 성터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지는 왜적들의 성터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三國)이 나누어 점거하고 있을 당시에 쌓았던 산성(山城)들이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건대, 이 책은 왜적들이 쳐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간행(刊行)된 것으로서, 모든 군(郡)의 고적(古蹟)에 실린 산성(山城)들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삼국시대에 전쟁이 상호 잇달았기 때문에 모두들 산성을 쌓아서 전쟁이 없을 적에는 산성에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전쟁이 나게 되면 곡식들을 거두어 산성 안으로 들어가버린 듯합니다. 이는 이른바, 들을 깨끗이하고 보루를 견고히 하는 계책인 것입니다. 저 산성을 공격해온 적들은 시일을 오래 끌면 군량(軍糧)을 지탱할 수 없고, 급작스럽게 핍박할 경우 산성에서 내려와 공격할까 두려워하게 마련이므로 아군이 칼날을 겨루기도 전에 적들이 반드시 스스로 퇴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한 고을과 큰 도시들이 성(城)이나 관문(關門)도 없이 큰 들판에 흩어져 있는데다가 곡식과 쌀들이 날로 불어나고 창고가 해마다 가득 채워지는 형편이니, 혹시 변란(變亂)이 나게 된다면 자연 손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서 곡식들을 적에게 바치고 말 터이니 아, 민망스러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여러 도(道)의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옛 성들의 형편을 조사 보고하게 한 다음 그 중에 높고 평평하면서 돌이 많고 물이나 샘이 고갈되지 않는 곳을 선택하여 성첩(城堞)들을 수축하여야 합니다. 또한 관방(關防)에 관계되는 지방은, 혹은 그곳으로 읍(邑)을 옮기기도 하고 혹은 창고의 곡식과 군기(軍器)를 옮기기도 하며, 또는 읍내(邑內)의 부호가(富豪家) 10여 집들을 이사시켜 성안에서 살도록 한다면, 변란이 났을 때 피난할 데가 있게 되는 한편, 적병들에게 무기(武器)나 식량(食糧)을 보태주는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경기(京畿) 내의 병곤(兵閫) 제도는, 지금의 제도를 고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신은 가만히 관찰하건대, 당(唐)ㆍ송(宋) 시대에는 재상들이 흔히 절도사(節度使)의 직책을 겸임하여, 혹은 육부 상서(六部尙書)로서 제로(諸路)의 사상(使相 당ㆍ송 시대에 절도사의 별칭)을 겸임하기도 하고, 혹은 내한 학사(內翰學士)로서 제주(諸州)의 수신(守臣)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수어사(守禦使)나 총융사(摠戎使)가 어찌 당ㆍ송 시대의 사상이나 수신과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논하는 이들이, 병곤이 왕성(王城) 안에 있는 것도 부당하고, 재상이 외번(外藩)의 직책을 겸임하는 것도 부당하다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총융사는 마땅히 강도(江都)에 소속되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수어사는 마땅히 광주(廣州)로 나가야 한다고도 하여, 발언(發言)들은 조정에 분분하지만 결국 이익된 것도 손해된 것도 없으므로 신은 감히 그 사이에 나서서 거들 수 없습니다. 신은 듣건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저축된 곡식이 1만 섬에 불과하여 5일의 군량도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에 섬 수를 늘려서 15만 섬까지 되었다 하는데, 지금은 다시 해마다 감축되고 달마다 축소되어 4~5만 섬에 불과한가 하면, 그 중 절반 가량은 언제나 민간(民間)에 나누어 방출되어 있기 때문에 성안에 저축된 실제 수량은 2만 섬에 불과합니다. 군량 저축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다시 섬 수를 증가시킨다면, 광주(廣州)의 오랜 폐단 중에 그 곡식 담당이 가장 큰 문제이니, 여기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괴롭힐 수는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관찰하건대, 남한산성 동문(東門)의 수구(水口) 밖에는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물이 30리쯤 흘러서야 비로소 큰 시내로 들어가고, 그 시냇물은 10여 리쯤 흘러서야 큰 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군량을 강 연안 여러 고을에다 분담시키는 한편, 수구(水口)의 물이 시내로 들어가는 곳에다 별도로 창고 하나를 설치해 놓고 군량을 배로 운반하여 출납(出納)하도록 한다면, 광주의 백성들만 일방적으로 고생하는 염려가 없을 것이요, 군량도 빨리 떨어지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수구는 비할 데 없이 험하고 좁으므로 두어 성가퀴로써 가로막아버리면 한 사람이 그곳을 지켜낼 수 있고, 험난한 산길이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으므로 군량을 운반하는 데도 적(敵)이 겁탈해 가거나 뒤를 차단해 버리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강도(江都)를 관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동(喬桐)의 지원에 힘입고 있기 때문인데, 언젠가는 교동을 강도에 통합하기도 하였고, 언젠가는 교동을 따로 두기도 하여 의론들이 여러 갈래였고 배치를 누차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교동을 다시 두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무튼 신이 듣건대, 강화도(江華島)가 험고(險固)한 것은 전적으로 삼면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우뚝 서 있고 한쪽은 진창으로 되어 있어, 아무리 배가 있어도 육지에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진창에 죄다 전석(磚石)을 깔아 놓아서 아무리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마음대로 한꺼번에 치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진정 이와 같이 한다면 해중(海中)의 다른 외딴섬들도 죄다 보장(保障)의 땅이 될 만한 터인데, 무엇 때문에 강화도를 취택하였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전석을 빨리 철거해 버리고 언제나 파자(笆子 대나무로 발처럼 엮은 물건)를 깔고서 통행하여야만 혹시 뜻하지 아니한 변란을 당하더라도 천연의 험지(險地)를 비로소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울릉도(鬱陵島)와 손죽도(損竹島) 등을 빈 섬으로 방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울릉도는 옛날 우산국(于山國)으로 신라 지증왕(智證王)이 정복하였던 곳입니다. 화살대나 담비가죽과 기이한 나무나 진귀한 식품 등의 생산이 제주도보다 많고 또 수로(水路)가 일본과 가까이 인접해 있으므로, 만일 교활한 왜인들이 몰래 와서 울릉도를 먼저 점거해 버린다면 이는 국가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백성들을 모집하여 울릉도로 들어가서 살도록 하는 한편, 진보(鎭堡)의 설치도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에 울릉도를 빈 채로 방치해 둔 것은 일본과 약속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약속을 위반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말은 너무나 고지식할 뿐, 국가를 위하는 계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손죽도는 조그마한 섬인데다가 우려할 만한 문제거리도 없으니, 비록 방치해두더라도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두는 것에 있어서는,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의 대계(大計)가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압록강이 서쪽으로, 국토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라고 부르는데, 이 폐사군 중간에는 압록강이 띠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압록강 연안에 살고 있던 여러 오랑캐 종족들이 손쉽게 건너와서, 어떤 자는 나무 위에 집을 얽고 거주하여 해를 경과하기도 하고, 어떤 자는 땅에 굴을 파고 거처하여 계절을 넘기기도 하면서, 산삼(山蔘)을 캐어 나물로 만들기도 하고 사슴을 잡아 안주로 만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활과 창을 메고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접전(接戰)을 벌이므로, 조그마한 진(鎭)이나 잔약한 보(堡)로서는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도, 수신(守臣)이나 도신(道臣) 등은 그런 사실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니, 앞으로 닥쳐올 걱정거리가 지금보다 더 클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빨리 조정에 하문하여 지금이라도 폐사군을 다시 두어서 조종(祖宗)이 물려준 강토를 공고히 하는 한편, 정장(亭障 국경 요새지에 있는 방어 초소)에 감도는 나쁜 기운을 쓸어버리는 일도 지연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어(魚)ㆍ염(鹽)에서 나오는 이익들을 하민(下民)들에게 전속시키고 있는데, 이른바 균역법(均役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도 중국의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 등 해안 지방에 비교하면, 지극히 가볍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생업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물건이 식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현령(縣令)들이 징수하는 세금이 국가의 공공 세금보다 갑절이나 되고, 아전(衙前)이나 장교(將校)들의 위엄이 관청의 공문첩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안렴사(按廉使)의 절목(節目) 중에 이 조목을 거듭 강조하여, 어장(漁庄)이나 염분(鹽盆)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들의 침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한다면, 어염업(魚鹽業)에 종사할 사람들이 많아져 국중에 어물(魚物)이나 소금 따위가 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금(金)이나 은(銀) 등의 행정에 있어서는, 신이 신라의 옛 역사를 읽어본바, 해마다 바치는 황금의 수량이 적지 않았으니, 금을 캐는 광산(鑛山)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강계(江界)의 은파동(銀坡洞)에서만 은을 제련하도록 허가해 주고, 각 도(道)의 모든 산에는 일체 대장간을 금지시키고 있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법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이나 은 따위를 사용할 때에 이르러서는, 한번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이 수만 냥의 은을 가져가고, 상서(象胥 통역관(通譯官)의 옛이름)가 몰래 가져가는 것도 몇천 냥이 되는 줄 모르는데, 연경에서 무역해 온 것은 능단(綾緞)ㆍ금수(錦繡) 등 쉽사리 낡아버릴 물품에 불과합니다. 대저 금이나 은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녹슬지 않지만, 능단 따위는 세월이 지나면 티끌처럼 낡아버리므로, 결국 우리나라의 은화(銀貨)는 전부 수출되어 버리는 반면에 중국의 능단 따위는 한없이 생산될 터이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연경 시장에서는 은 가격을 모두 육해법(六解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지금부터는 국내에서도 모두 이 육해법을 사용하여 시행한다면, 통역관(通譯官)들이 우리나라에서 은(銀)을 사서 중국으로 수출한들 본전도 건지지 못할 터이므로, 자연 과외(科外)의 은은 반드시 가져가지 아니하여, 국내의 은화(銀貨)가 어느 정도 넉넉해질 것입니다.

또한 내가 들으니, 성야(星野 별의 분야)가 점유하고 곤여(坤輿 땅의 별칭)가 싣고 있는 명산(名山)ㆍ지산(支山)의 분맥(分脈)과 출수(出水 물의 원류를 말함)ㆍ수수(受水 물의 하류를 말함)의 위치 등을, 눈썹처럼 벌여 놓고 손바닥처럼 표시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으로 나타낸 뒤에야 그 토질을 구별하고 이해(利害)를 알아서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있고 교화를 닦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리(地理)에 뜻이 있는 이들이 역대마다 지리서를 남겨, 제(齊)ㆍ양(梁) 시대에 와서는 지리학을 전공한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육징(陸澄)과 임방(任昉)은 전후에 걸쳐 책 1부를 편집하여 《지리서(地理書)》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수(隋)ㆍ당(唐) 시대에 와서는 도서(圖書)나 사서(史書) 등이 유실되어 육징과 임방이 편집하였던 《지리서》는 이미 물어볼 데도 없게 되어버렸지만, 별도로 편집하여 스스로 간행(刊行)한 사람들이 그런대로 50명이나 되므로, 그 뒤에 나온 것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 선비들만이 명물(名物)의 학문에 제일 소홀하여 전해오는 지리서라고는 《여지승람(輿地勝覽)》과 《문헌비고(文獻備考)》 등 1~2종류에 불과할 뿐이니, 이런 것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고 문견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혹 초야(草野) 한인(閒人)들의 베개 속에 매우 값진 지리서가 있는데도, 특별히 비장된 까닭에 그것을 입수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역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지리를 설명해주고 아울러 책으로 기술해 주기 바란다. 내가 앞으로 그것을 직접 열람할 생각이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리학은 선비가 반드시 힘써야 하고 왕자(王者)가 반드시 이용하여야 할 것으로서, 성야가 점유하고 곤여가 싣고 있는 것에 대하여, 빠짐없이 그 강역(疆域)을 구별하고 풍속을 기록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명산ㆍ지산의 분맥에 대해서는 곽박(郭璞)이 《산해경주(山海經注)》를 저술하였고, 출수ㆍ수수의 수로(水路)에 대비해서는 관자(管子 제(齊)의 관중(管仲)을 말함)가 지수편(地數篇 《관자(管子)》의 편명)을 기록하였습니다. 《관자》에 "동ㆍ서ㆍ남ㆍ북은 각각 2만 6천 리이고, 출수와 수수는 각각 8천 리이다.” 하였다. 제(齊)ㆍ양(梁)에서 수(隋)ㆍ당(唐)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날의 지리서는 비록 없어졌지만, 그 뒤의 지리서가 계속 나와서 마치 안개가 일고 까치가 날아오르듯 성행하고,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대들보까지 꽉 차게 많았으므로 이것으로써 백성을 다스려 모든 이해(利害)를 알려주고, 또 이것으로써 교화(敎化)를 선양(宣揚)하여 항간의 가요(歌謠)를 살폈습니다. 이 때문에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이 사방의 종주국(宗主國)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만은 지리서를 상고하고 조사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지리에 소홀하고 어두운 점이 많으므로, 광막한 천하는 고사하고 우리나라 안의 것도 멀거니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김 태사(金太師 고려 김부식(金富軾)을 가리킴)의 《삼국사기》지리지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을 모두 미상(未詳)으로 말하였고,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지리지에도 잘못된 데를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여지승람》에는 연혁(沿革)에 대한 사실들을 싣지 않았고, 《문헌비고》에는 빠뜨린 명론(名論)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지리서를 편찬할 때마다 자기를 두둔한 견해만을 잡기(雜記)하여 은연히 취택하고 빼버리는 사심이 작용되었기 때문에 지금껏 세상에 유명한 지리서가 1부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만나기 어려운 것도 시기이고 놓치기 쉬운 것도 기회라 합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신 뒤로 문치(文治)가 훌륭하므로 지극한 교화가 인재를 양성시키고 군신 사이가 서로 감응되어, 진신대부(縉紳大夫)로서 문리(文理)에 밝은 이들이 조정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는 천년 만에 가끔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마땅히 밝은 유지(諭旨)를 특별히 내리시어, 학식이 넓고 기질이 민첩하여 대중들의 추앙을 받는 인사로 하여금 지리서를 편찬하게 하는 한편, 두어 사람을 별도로 뽑아 그의 보조원으로 임명하시고,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범례(凡例)를 모방하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서 지리서 1부를 편성하여야 합니다. 지리서를 편찬함에 있어, 피차간의 강역 한계는 아주 세밀하게 밝히고 고금의 연혁된 제도는 그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산은 그 산맥들을 기록하고 물은 원류(源流)와 분파(分派) 등을 구별하며, 옛 사적 중에 정벌(征伐)이나 공수(攻守)에 관한 사실들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효자나 열녀 등 인물은 행적이 탁월하고 순정하여 온 세상이 모두 아는 바가 아니면 대체적으로 산삭해 버리고 간략하게 다루며, 제영시(題詠詩)에 대해서도 1백 수 중에 한 수씩만을 보존하여 그 규례를 엄하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사물을 널리 아는 선비들을 재차 뽑아서, 상흠(桑欽)의 《수경(水經)》과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를 모방하여, 동국수경(東國水經) 1부를 편찬, 지리서와 함께 출간하여 비부(袐府)에 올려 놓고 명산(名山)에 간직하고 팔도(八道)에 반포한다면, 우리나라 강역이 본래 작기 때문에 빠짐없이 수록되어, 천년 동안의 비루한 점을 시원스럽게 씻어버리고 일대의 저작을 쇄신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 역시 전하의 문치에 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산천ㆍ풍속과 관방(關防)ㆍ토산물 등의 다른 점이나, 성조(聖朝)의 계책ㆍ공렬(功烈)과 조치(措置)ㆍ제작(制作) 등의 훌륭한 점을 한번 보아서 모두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옛말에, 만들었기 때문에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신은 이상과 같이 삼가 대답합니다.

오물(五物) :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구릉(丘陵)ㆍ분연(墳衍)ㆍ원습(原濕)의 다섯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말한다.
선기(璿璣) : 옛날에 천문(天文)을 관측하는 기계임. 혼천의(渾天儀).
주비(周髀) : 옛날 산법(算法)의 하나. 구고(句股)의 법칙으로서 하늘ㆍ땅의 높이와 두께 및 해ㆍ달의 운행(運行)하는 것을 추탁(推度)하여 그 도수(度數)를 알아내는 산법을 말한다.
성명(聲明) : 성은 석(錫)ㆍ난(鸞)ㆍ화(和)ㆍ영(鈴) 등의 방울소리를 가리키고, 명은 해[日]ㆍ달[月]ㆍ별[星辰] 등을 깃발에 그려 하늘의 밝은 것을 상징한 것으로, 거식(車飾)ㆍ의장(儀仗) 등의 제도를 뜻한다. 《左傳 桓公 2年》
문물(文物) : 문은 의상(衣裳)에 불[火]ㆍ용(龍)ㆍ보불(黼黻) 따위를 그린 문채를 가리키고, 물은 오색(五色)으로 수레ㆍ기계 등을 꾸며서 천지 사방을 상징한 것으로, 의상ㆍ수레ㆍ기계 등의 제도를 뜻한다. 《左傳 桓公2年》
사유(四維) : 건(乾 서북)ㆍ곤(坤 서남)ㆍ간(艮 동북)ㆍ손(巽 동남) 등 사방의 간방(間方)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방(四方)의 뜻으로 쓰였다.
땅의 …… 부족하다고 :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에, “옛적에 공공(共工)이 전욱(顓頊)과 서로 제(帝)가 되려고 다투다가 공공이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천주(天柱 하늘을 받치고 있다는 기둥)가 부러지고 지유(地維 지구를 얽어서 유지하고 있다는 밧줄)도 끊어져서, 하늘은 서ㆍ북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해ㆍ달ㆍ별들은 그쪽으로 운행(運行)하고, 지구는 동ㆍ남쪽이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물이나 티끌 따위는 그쪽으로 모인다.” 하였다.
사표(四表) : 28수(宿)의 밖에 상ㆍ하ㆍ동ㆍ서가 각각 1만 5천리로서 사유(四維)의 끝이 되는 곳을 말한다.
오경(五經) : 《산해경(山海經)》에 보이는 남산경(南山經)ㆍ서산경(西山經)ㆍ북산경(北山經)ㆍ동산경(東山經)ㆍ중산경(中山經)을 통칭한 말.
오호(五湖) : 《후한서(後漢書)》풍연전(馮衍傳) 주(註)에, “태호(太湖) 부근에 있는 5개의 호수로 격호(滆湖)ㆍ조호(洮湖)ㆍ사호(射湖)ㆍ귀호(貴湖) 및 태호 등이다.” 하였고 《서언고사(書言故事)》지명류(地盟類)에는, “파양(鄱陽)ㆍ청초(靑草)ㆍ동정(洞庭)ㆍ단양(丹陽)ㆍ태호 등이다.” 하였다.
거령신(巨靈神)이 …… 쪼개 버렸다고 : 거령은 하수(河水)의 신령(神靈) 이름. 《수경주(水經注)》에, “화산(華山)은 본래 하수 연안에 위치하였는데, 하수가 통과하면서 굽이쳐 흘러가므로 하수의 거령신이 화산을 손으로 떼밀고 발로 차서 돌로 쪼개 버렸는데, 거령신의 발자국이 지금도 바윗돌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 들이받았다고 : 공공씨는 《좌전(左傳)》 두예(杜預)의 주(註)에, 소호씨(少皞氏)의 불초(不肖)한 아들로 되어 있다. 앞의 주 7) 참조.
하백(河伯)이 …… 주었다고 : 하백은 하신(河神). 하도는 《서경(書經)》 고명(顧命) 채전(蔡傳)에, “복희(伏羲)가 천하를 다스릴 적에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나오자, 그 용마의 등에 있는 문형(文形)을 본받아 팔괘(八卦)를 그어 하도를 만들었다.” 하였는데, 《진서(晉書)》지명지(地盟志)에는, “옛적에 대우(大禹)가 탁하(濁河 황하(黃河))를 관찰하다가 녹자(綠字 부서(符瑞))를 받았다.” 하였고 《송서(宋書)》부서지(符瑞志)에는, “우 임금이 하수를 관찰할 적에 키 큰 인어(人魚)가 나와서 ‘나는 하수의 신령이다.’고 하면서, 하도를 주고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법도를 일러준 다음 이내 하수로 들어가 버렸다.” 하였다.
경진(庚辰)이 …… 구금시켰다는 : 경진은 우 임금을 도와 홍수(洪水)를 다스린 귀신 이름. 《고악도경(古岳瀆經)》에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적에 동백산(桐柏山)에서 회와(淮渦)의 물귀신 무지기(無支祈)를 얻었는데, 묻는 대로 응답을 잘할 뿐더러 물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르기도 하여 오랫동안 쳐다볼 수가 없으므로 우 임금이 그를 경진에게 맡기나, 경진이 마침내 구족산(龜足山) 기슭에 구금시켜 버렸다.” 하였다.
오복(五服) : 옛날 천자(天子)의 왕기(王畿) 밖을 5백 리마다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 지역을 말하는데, 요(堯) 임금 시대에는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 등이고, 주(周) 나라 시대에는 후복ㆍ전복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 등이었다.
구복(九服) : 주(周) 나라 시대에 왕기(王畿) 밖을 5백 리마다 9등급으로 구분한 지역을 말하는데,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ㆍ만복(蠻服)ㆍ이복(夷服)ㆍ진복(鎭服)ㆍ번복(藩服) 등이다.
수해(豎亥)와 …… 다른 것은 : 수해와 태장(太章)은 모두 우 임금의 신하들로서 걸음을 잘 걸었다.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海外東經)에, “우 임금이 수해에게 명하여 동극(東極)에서 서극(西極)까지 걸어보도록 한바, 그 거리가 5억 10만 9천 8백 보(步)였다.”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는, “우 임금이 태장(太章)을 시켜 동극에서 서극까지 걸어보도록 한바, 그 거리가 2억 3만 3천 5백 75보였다.” 하여 그 거리가 각각 다르게 기록되었다.
삼강(三江) : 《서경(書經)》 우공 채전(禹貢蔡傳)에는 누강(婁江)ㆍ동강(東江)ㆍ송강(松江)을 삼강으로 보았고, 송(宋)의 소식(蘇軾)은 민산강(岷山江)ㆍ파총강(嶓冢江)ㆍ예장강(豫章江)을 삼강으로 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구강(九江) : 《서경》 우공 채전에는, 동정호(洞庭湖)에 합류되는 원수(沅水)ㆍ점수(漸水)ㆍ원수(元水)ㆍ진수(辰水)ㆍ서수(敘水)ㆍ유수(酉水)ㆍ예수(澧水)ㆍ자수(資水)ㆍ상수(湘水)를 구강으로 보았는데, 《심양지기(尋陽地記)》에는, 오강(烏江)ㆍ봉강(蜂江)ㆍ오백강(烏白江)ㆍ가미강(嘉靡江)ㆍ견강(畎江)ㆍ원강(原江)ㆍ늠강(廩江)ㆍ제강(提江)ㆍ균강(箘江)을 구강으로 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구천(九川) : 《서경》 익직(益稷) 채전에, 중국 구주의 시내를 통틀어 말한 것으로 보았는데, 왕선겸(王先謙)은 약수(弱水)ㆍ흑수(黑水)ㆍ양수(漾水)ㆍ강수(江水)ㆍ연수(沇水)ㆍ회수(淮水)ㆍ위수(渭水)ㆍ낙수(雒水) 등을 구천으로 보기도 하였다.
구택(九澤) : 《서경》 우공 채전에, 중국 구주(九州)의 연못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보았는데, 《병아(騈雅)》석지(釋地)에는, 구구(具區)ㆍ운몽(雲夢)ㆍ포전(圃田)ㆍ망저(望諸)ㆍ대야(大野)ㆍ현포(弦蒲)ㆍ혜양(貕養)ㆍ창우(暢紆)ㆍ소여기(昭餘祈)를 구택으로 보기도 하였다.
무열(無熱)은 …… 별명이고 : 아뇩달(阿耨達)은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설산의 북,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는 연못[池]을 가리키는데, 무열은 아뇩달의 별명인 무열뇌(無熱腦)의 준말로, 곧 청량(淸涼)이라는 뜻이다.
연수(連帥) : 주(周) 나라 시대에 제후(諸侯)들의 위에 있어 한쪽 지방을 지배하던 우두머리인데, 10개 제후국의 우두머리를 수(帥)라고 한다.
치위(淄魏)의 환란(患亂) : 당 덕종(唐德宗) 2년에 번진(藩鎭)에서 절도사(節度使) 이정기(李正己)가 치주(淄州)와 청주(靑州) 등지를 차지하고서, 위주 절도사(魏州節度使) 전열(田悅)과 반란을 꾀한 변을 말한다.
정강(靖康)의 화란(禍亂) : 북송 흠종(北宋欽宗) 정강 2년에 금(金) 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쳐들어와서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을 사로잡아간 난리를 말한다.
성주(星主) : 본래 탐라(耽羅 제주도(濟州島))의 우두머리에게 주던 칭호인데, 후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발해 오경(渤海五京) : 상경 용천부(上京龍天府)ㆍ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ㆍ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ㆍ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ㆍ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를 말한다.
삼련(參連) : 오사(五射)의 하나로, 화살 한 개를 먼저 쏜 다음 이어서 화살 세 개를 연속해서 쏘는 것을 말한다. 《周禮 地官 註》
백시(白矢) : 오사(五射)의 하나로, 살대는 과녁[侯]에 걸려 있으면서 살촉만 과녁을 꿰뚫고 지나서, 그 살촉이 하얗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周禮 地官 註》
균역법(均役法) : 조선 영조 26년에 설치된 법. 종래에 양민(良民)이 신역(身役)의 대가(代價)로 바치는 군포(軍布)가 1인당 2필이었던 것을 반감하여 1필로 하고, 이에 따른 결손액(缺損額)은 어세(漁稅)ㆍ염세(鹽稅)ㆍ선박세(船舶稅)와 은결(隱結)의 결전(結錢) 등으로 보충하였다.
진주(眞珠)가 …… 기적이 : 잃어버렸던 것을 도로 찾는 데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순리(循吏) 매상전(孟嘗傳)에, “합포군(合浦郡)에서는 곡식 대신 바다에서 진주(眞珠)만 생산되므로 그것을 교지(交趾)와 통상하여 식량을 수입하였다. 그런데 앞서 합포군에 부임한 태수들이 탐욕을 부려 진주를 마구 채취하는 바람에, 진주가 마침내 교지로 차츰 옮아가버려 가난한 사람들이 길가에서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마침 합포군에 부임해온 맹상(孟嘗)이 전날의 폐단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영위하도록 하자, 1년도 채 못되어 교지로 옮아갔던 진주들이 다시 합포군으로 되돌아왔다.” 하였다.
목탁을 …… 대비하는 : 《주역(周易)》계사(繫辭) 하(下)에, “문을 겹으로 설치하고 목탁을 쳐서 도적을 대비한다.” 하였는데, 모든 일에 미리 경계하고 방비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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